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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가 많이 배치되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인구가 밀집된 수도권이나 지방의 광역시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아무래도 지켜야 할 사람도 많을뿐더러, 구획 자체가 복잡해서 차원종을 조기에 발견, 격퇴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만큼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고만고만한 대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는 반대다. 클로저가 가장 많이 배치되는 곳은 유동인구가 적고 인구밀도도 낮은 지역이다. 위상력 억제기의 존재 때문이다. 무식한 나로서는 그 원리를 짐작할 수도 없다만, 어찌 됐건 이 기계를 설치하기만 하면 그 일대의 차원종 발생 위험도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억제기가 가동 중이라도 하급 차원종이 종종 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 정도는 경력 있는 클로저가 아니라도 처리할 수 있으니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렵다. 이 편리한 장비의 유일한 단점은 비용 문제다. 전력을 무진장 잡아먹는 데다가 한 대만 들이려고 해도 0이 몇 개나 붙었는지 한눈에 알기 어려운 돈이 들어간다. 그렇기에 위상력 억제기는 인구가 일정 규모 이상인 중요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한다. 다른 지역은? 클로저를 잔뜩 보내서 해결한다.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먹기는 해도 위상력 억제기에 비하면 훨씬 싼 값이니까.

우리 L팀이 배치된 곳은 그중에서도 위험한 축에 속하는 강원도 산간지방이다. ‘시골’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그런 곳 말이다. 해가 지면 사방이 컴컴해지고, 기분이 꿀꿀해서 술이라도 마실까 하고 괜찮은 주점을 찾으려니 읍내까지는 한참을 나가야 한다. 사이킥 무브를 쓰면 안 되냐고? 돌아올 땐 어쩌고? 나는 취한 채로 위상력을 사용하다가 착지 실수로 병원에 실려 간 클로저가 되어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기는 싫다.

갑자기 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느냐 하면, 우리 팀원들이 정말 죽도록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이런 험지에 발령된 새 리더가 한동안 온갖 상상과 추측의 대상이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젊고 유능한 리더에게 신경 쓰이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팀원들은 당연하게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점에선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고로, 예의 옛 동료가 방문한 이후 내게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리더의 책상에 있는 달력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보통은 별다른 소득이 없다. 그의 달력에는 대개 잡다한 업무 관련 일정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4월이 되는 순간 그 달력에 특기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 4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4월 30일에 또다시 붉은 원이 그려진 것이다. 저번에 붉은 원이 그려진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번에도 제법 기대해볼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다른 팀원들 역시도 여기에 열렬히 동의했고.

문제는 그 날이 도대체 무슨 날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원 외에는 달력에 따로 적힌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저번에도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누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었다. 게다가 이번 연도의 4월 30일은 주말이었다. 그가 굳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이상 우리로서는 그가 그 날에 무슨 계획을 잡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심심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팀원 중 하나가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우리를 만족시킬만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개인적인 일이라나, 뭐라나. 아니, 누가 그걸 모를까보냐. 훤히 보이는 달력에 눈에 띄는 붉은색으로 떡하니 원을 그려놓은 쪽이 잘못이지.

결국, 그는 그 뒤로 계속해서 질문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팀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에게 그 일정에 대해 질문했다. 직접적으로 물어보거나, 아직 몇 달은 남은 휴가 시즌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뜬금없이 화살을 돌려보거나, 마지막 주 주말에 술이라도 한잔 꺾지 않겠냐고 에둘러 물어보거나, 기타 등등.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4월이 절반 이상 지난 뒤에도 30일의 계획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동안 나는 그런 모습을 즐겁게 구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일정이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팀원들의 바보짓에 그가 곤란해 하는 모습도 내게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

오늘도 어제를 똑같이 붙여넣은 듯한 오전이 지나갔다. 적당히 점심을 해치우고 사무실 건물 앞 쉼터에서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중 내 옆자리에 누군가가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민에 찬 리더의 얼굴이 보였다.

“어라, 이세하 씨. 웬일로 점심시간에 여길 다 나오셨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점심시간에도 끼니를 때우고 나면 사무실에 처박혀 업무와 씨름하기 일쑤였으니까. 이 시간에 쉼터에서 그를 본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별것 아닙니다. 그냥 좀 고민하던 일이 있어서요.”

머릿속에 그의 달력과 4월 30일이 스쳐 갔다. 이 시간이면 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 터인데도 굳이 이곳으로 나온 것을 보건대, 한 번쯤 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단 한 대 피겠습니다. 냄새 싫으실 텐데 잠시 실례 좀...”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여기서 피세요.”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나를 멀뚱히 보고 있는 리더의 모습이 제법 재미있다.

“이세하 씨, 담배 안 피우죠? 이런 거 피지 마요.”
“담배 피우시는 분들은 늘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하, 그런가요.”

다시 한 번 연기를 푹 내뱉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시간도 별로 없는 판에 뭘 이렇게 빼는 건지. 귀찮아진 나는 그냥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그래서, 뭐가 묻고 싶은데요?”

내 질문에 그의 표정이 제법 다채롭게 변한다. 이럴 때는 정말 영락없이 제 나잇대의 청년이다.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는지. 싫다는 건 아니지만 뻣뻣한 자세는 좀 풀어줬으면 한다.

“K 씨한테는 정말이지 당할 수가 없네요.”
“그 얘기 몇 번은 들었어요. 본론으로 넘어가죠. 시간도 별로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른 팀원들이 들었으면 환호성을 내질렀을 대답을 내놓았다.

“생일 선물을 준비 중입니다.”

*

몇 번을 캐물은 결과, 예의 그 동료의 생일이 4월 30일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여성의, 그것도 좋아하는 여성의 생일 선물이라, 과연 청춘이구만. 내 감상을 들은 리더는 극구 부인했다. 그의 귀가 불이라도 붙은 마냥 새빨개졌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선물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에이, 잘 아시는 분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뭐랄까, 생각나는 물건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녀의 취미는 드라마 시청이라고 한다. 방에 가면 ‘명작’ 드라마의 블루레이 디스크가 책장을 점령하고 있다나. 20대 초반의 여성치고는 제법 고전적인 취미라고 할 만하다. 그쪽에는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디스크를 쌓아놓는 것 자체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만, 남의 취미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아무튼, 그런 수집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 새 수집품을 선물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이해는 간다.

“그래도 이세하 씨가 선물해준 물건이니만큼 각별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하하.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니라서 말이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는 소리가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집어넣었다. 평소에도 숫기가 없는 편이라고 생각을 하긴 했다만,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좀 해줬으면 한다. 이쯤 되면 웃기도 힘들다.

“그럼 적당히 비싼 물건 해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될까요?”

될 리가 있나. 속이 답답해져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기로 했다. 말없이 담뱃갑을 꺼내는 내 모습에 리더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에 대해 도통 정보가 없는 나로서는 작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추천을 해줄 수 없다면 아닌 것부터 솎아내면 알아서 하겠지.

“화장품은?”
“뭘 쓰는지를 모릅니다. 애초에 화장품이라고 해봐야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요.”
“옷이나 장식품은요?”
“취향을 모르니 제가 막 사주기는 좀 그렇군요.”
“구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순조로운 편이다. 내가 받는 입장이라도 저런 물건을 말도 없이 갑자기 사 들고 온다면 심란할 테지.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덥석 받아들였다면 곤란할 뻔했다.

“핸드백 어때요, 핸드백! 여자는 일단 백 선물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요?”
“...K씨, 진지하게 말씀드리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 세하 씨, 뭘 모르시네!”
“아뇨, 아무리 생각해도 백은 아닙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연애치는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다. 최소한 저쪽이 뭘 싫어하는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함께 활동한 시간이 몇 년이니 오죽하겠냐만. 머릿속이 아예 빈 건 아닐 테고, 주고 싶은 선물은 정해졌지만 확신이 없는 쪽일 것이다. 아마 내가 더 나설 필요도 없겠지. 필터까지 타들어가기 직전인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는 교통정리를 해주었다.

“거, 선물은 벌써 정해놓으신 거 아니에요?”
“예?”

그는 내 질문에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자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떠오른 게 있으신 모양인데, 그대로 가요.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생각해준 물건보다, 이세하 씨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선물 쪽을 훨씬 기뻐할 겁니다.”
“그럴, 까요?”
“그래요. 그리고 같이 사진이나 한 장 찍어서 보내요. 이만큼 도와줬으니 나도 구경이나 좀 합시다.”

내 말을 들은 리더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이쯤 되니 재미보다는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부터가 당장 상대가 없어서 곤란한 판인데 남의 연애전선까지 참견을 해줘야 한다니, 어이가 없다. 나는 누가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 없으려나?

마지막으로 한 대만, 한 대만 더 피우고 들어가도록 해야겠다.

*

시간은 지나 5월 첫날이 왔다. 리더와 나는 비번이었고, 나머지 팀원들은 아마 옷도 대충 차려입은 채로 출근해 휴게실에서 뒹굴뒹굴하며 주말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굉장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위치만 내 방으로 바뀌었을 뿐, 나도 똑같이 의미도 뭣도 없는 주말을 보냈다. 젠장, 솔직히 말해, 리더가 부럽다.

쉼터에서의 대화 뒤에도 팀원들의 질문공세는 계속되었다. 물론, 그의 철벽 수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답을 캐내려고 하는 팀원들과, 거기에 노코맨트로 일관하는 하는 리더의 모습은 남은 4월을 즐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4월이 끝난 오늘까지도 리더의 주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팀원 중 하나가 그 사실을 알고는 내게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해도 그다지 할 말은 없었다. 그냥 지금의 상황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미묘한 감각을 표현하기엔 좀 부족한 설명이었다. 결국, 나는 이유도 모른 채로 벙어리가 되어 팀원들을 구경해야만 했다.

지금은 또다시 점심시간이다. 나는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쉼터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인터넷 대신 사진 앨범을 보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 휴대폰 화면에는 분홍빛 머리의 여성, 그러니까 이슬비 양과 리더가 어색한 표정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 레스토랑이라도 예약해뒀던 것인지 사진 한구석으로 식기가 살짝 비쳐 보였다. 좁아터진 시야의 핸드폰 카메라로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니만큼, 둘은 거의 밀착하다시피 한 수준으로 붙어있었다. 사진 이야기를 할 때 이 점을 노리긴 했다만 정말로 찍어서 보낼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이 사진을 찍은 것인지, 원.

정복과 사복의 차이를 제외하면 그녀는 예전에 처음 봤을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그녀의 한쪽 머리를 묶은 검은 리본 정도일까? 이미 사회의 한 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성인 여성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머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에 한해서는 어색한 부분 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진과 함께 온 메시지에는 조언에 대한 감사와 함께 생일선물이 그 리본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예전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나. 왜 굳이 예전에 있었던 리본을 또 선물하는지 나는 모른다. 거기에 대해서는 그 둘이 잘 알 테고, 나는 굳이 참견하지 않을 셈이다.

사진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보니 내가 다른 팀원들에게 그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를 대충 알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이 잘 어울리는 커플을 방해하지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팀원들이 그녀의 생일에 대해 알게 되어 왁자지껄 떠드는 걸 지켜보는 것 보다는 이 둘이 어색하게 마주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편이 즐겁다. 나머지 팀원들에겐 조금 미안하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맙소사, 이런 식의 생각을 할 나이는 아직 되지 않았을 터인데. 이 둘의 조합은 정말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젠장,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려온다. 담배나 한 대 더 피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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