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조용히 울리는 휴대폰 알람에 이슬비의 손이 그녀보다 빨리 일어났다. 침대 머리맡의 탁자 위에 놓여있는 휴대폰의 알람을 종료하고 나서야 그녀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이슬비는 잠시 그대로 누운 채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피곤했다. 5분이라도 더 침대에 있고 싶었다. 평소처럼 바삐 준비할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직장에는 연차를 썼고, 그녀가 오늘 향할 목적지는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팔을 움직여 두꺼운 블라인드를 걷어냈다. 6월 초의 이른 아침이 방을 밝히며 그녀의 한쪽뿐인 눈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이른 아침의 기상은 언제나 괴롭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메트로놈처럼 살아온 이슬비였지만 그녀가 이른 기상을 달게 받아들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곗바늘이 5시 30분을 가리키면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 톱니바퀴라는 물건은 한 번이라도 이가 어긋나면 대번에 망가지고 마는 물건이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간 지켜온 리듬이 깨지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탁자에 다시 한 번 손을 뻗은 그녀는 기계 의안을 집어 들고 수면용 의안과 교체했다. 반쪽짜리 세상이 온전해졌다. 잠시 눈을 돌리며 오른쪽 눈이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한 이슬비는 천근 같은 몸을 억지로 떠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향한 곳은 늘 그렇듯 아이의 방이었다. 행여나 잠을 못 이루고 밤을 새우지는 않았을까, 악몽을 꾸다가 일어나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란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걱정이 현실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미 된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아이는 조용히 자고 있었다. 이슬비는 아이가 행여 깨어날까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당연하게도 거실은 어두웠다. 거실에 걸린 시계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하릴없이 째깍거렸다. 형광등 대신 벽걸이 램프를 켠 이슬비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았다. 할 일이 없었다. 여느 때였으면 바삐 몸을 씻고 화장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평일에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것이 얼마 만인지 그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보통은 커피라도 한 잔 타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법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그녀를 떠밀었다. 그녀가 낭비한 시간이 모여 굶주린 짐승처럼 그녀를 덮쳐들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거실을 표류했다. 뭐라도 할 것이 없을까. 신통찮았다. 애초에 텅 비어있는 시간이 더 긴 집이다. 걸레질을 하고 가끔 가구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새 식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톡, 톡. 시계가 울리는 초침 소리와 식탁을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가 한데 겹쳤다. 나지막하게 통탕거리는 그녀의 심장소리도.

 

이슬비는 자리에서 와락 일어났다. 초조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운동복을 대충 걸쳐 입은 그녀는 집에서 나와 근처의 놀이터로 향했다. 한동안 쉬었던 운동이라도 시험 삼아 해볼 심산이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기껏 해봐야 6시 남짓인 시각.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 잠자리에 있거나 겨우 일어나고 있을 시간대였다. 놀이터 역시도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적막한 놀이터를 잠시 바라보던 이슬비는 놀이터 주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슬비의 뜀박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금세 턱까지 차오른 숨 때문이었다. 예전 같아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동안의 입원 생활,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바쁜 나날들은 그녀의 체력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슬비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다른 운동을 시도해보았다. 역시 신통찮았다. 폐에서 달아오른 석탄이 요동치고, 오랜만에 무리를 한 팔다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떨려왔다. 불쾌하고 피곤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한때 자신이 운동을 끝낸 뒤의 충만한 노곤함에 매료되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이슬이 방울방울 맺힌 벤치에 쓰러지듯 앉아 사지를 늘어뜨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낀 하늘이었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다. 그녀는 챙길 물건의 목록에 우산을 추가했다.

 

*

 

이슬비는 텅 빈 집의 문을 열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뒤였다. 필요한 물건은 전날에 이미 정리해서 종이가방에 담아두었다. 시간 여유가 아직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잠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가가 근질거렸다.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 눈을 툭툭 두드린다. 차가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의안은 눈과 달리 손가락에 반응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놀릴 때마다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상을 바라보며 이슬비는 이세하를 생각했다. 잘 지내고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터이다. 또다시 엉망이 되었을 그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나 스스로는 어떨까. 눈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눈가로 향했다. 거칠해진 피부와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한 눈가의 요철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슬비는 땀으로 끈적이는 몸을 씻기 위해 샤워실에 들어갔다. 헐벗은 몸이 낯설었다. 팀원들과 함께 신서울을 누비던 날이 엊그제처럼 느껴졌건만 거울에 비치는 몸은 그녀에게 현실을 여과 없이 들이밀었다. 푸석하고 윤기 없는 머리칼, 눈 아래를 잠식한 다크서클, 살집 없이 비쩍 마른 몸.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슬비는 거울에 물을 뿌렸다. 거울 속의 이슬비가 흐르는 물과 함께 일그러졌다. 그녀는 거울에 등을 돌린 채로 몸을 씻었다.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예전보다 가늘어진 기분이었다.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말린 이슬비는 간단하게 화장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간단하게 하려고 했다. 평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던 잔주름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컨실러를 몇 번을 고쳐 발라도 주름은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핏기없는 입술도, 그림자가 드리운 뺨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얼굴 전체를 뜯어고치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되레 평소보다 진한 화장을 하게 되었다. 이세하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이슬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옷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적당히 활동성 있는 옷을 차려입었다. 이슬비는 마지막으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눈에 띄는 벚꽃색의 머리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좋은 기억만 있는 곳은 결코 아니었다. 면식이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거울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이슬비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가방을 챙겨 든 그녀는 마지막으로 집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이슬비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집을 나섰다.

 

하늘은 이른 아침에 나왔을 때보다 더욱 흐려져 있었다. 따가운 햇볕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대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짐이 제법 많았던 탓이다. 택시기사는 말없이 그녀가 말한 주소로 향했다. 기사의 눈은 전방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시선이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샅샅이 훑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슬비는 창밖을 바라보는 척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이세하의 집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찌 됐건 그녀의 집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슬비는 눈을 감고도 그의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다만, 거리의 풍경은 그녀의 기억과 사뭇 달랐다. 자주 들르던 가게의 자리에 다른 점포가 들어선 것을 보고 이슬비는 약간의 상실감을 느꼈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간다. 그녀와 이세하만이 그 비가역적인 흐름에서 유리되어 과거에 못박혀있었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던 것일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매번 고기를 사던 정육점은 남아있었다. 점주는 고기를 사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를 새댁이라고 부르며 유난히 잘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이슬비는 평가를 뒤로 미루었다.

 

걸음을 옮기던 이슬비는 아파트 현관 앞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세하를 발견했다. 반바지에 얇은 셔츠만을 입고 있는 모습이 백수나 다름없어 보였다. 나름 정확한 표현이긴 했지만. 웬일로 굳이 집 밖까지 나와서 흡연을 하는 것일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멍하니 선 채 이세하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잠시 망설이던 이세하가 어설프게 웃음을 엮어냈다.

 

“왔어?”

 

그다지 상황에 맞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와 그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엉성한 인사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왔어.”

 

이세하가 하수구에 담배를 던져 넣었다. 그다지 권장할 만한 행동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이슬비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였다. 그녀를 마주보고 허술하게나마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만했다. 그녀에게서 짐을 건네받은 이세하를 따라 이슬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때 그녀의 보금자리였던 곳으로 향했다.

 

*

 

집으로 들어온 이슬비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커피 향의 방향제 냄새였다. 이세하가 방향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슬비는 의아해졌다. 게다가 커피 향이라니. 그녀가 잠을 쫓으려 커피를 탈 때마다 커피 냄새는 싫다며 투덜거리던 그였다. 문제는 그것 뿐 만이 아니었다. 냄새가 너무나도 짙었다. 방향제 캔 하나를 완전히 비우면 이 정도로 진한 향이 날까. 이슬비는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좀 가려볼까 했지.”

 

이세하가 변명처럼 말했다. 현관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던 그의 행동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알만한 이야기였다. 빈말로도 정상적인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세하가 2년간 홀로 살았던 집이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러놨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종이가방을 들고 멀거니 서있었다.

 

“하아, 일단 그건 부엌에 놔줘.”

“알았어.”

 

엉거주춤 부엌 쪽에 짐을 내려놓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슬비는 현관과 바로 이어지는 거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냥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이슬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집에는 새 가구를 채우겠다며 자를 들고 돌아다니던 이세하.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버린 게임기를 내다 팔면서 아쉬워하던 이세하. 아이를 가졌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날뛰던 이세하. 그리고...

 

그녀의 추억에 잡음이 끼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거실은 그녀의 기억과 똑같았다. 지나칠 정도로. 그녀가 아침밥을 기다리며 종종 껴안고 있던 쿠션이며 서랍장 위에 놓인 시계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이슬비는 어두침침한 거실의 불을 켰다. 파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거실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청소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바닥은 말끔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손조차 거의 대지 않은 듯 물건들에는 먼지가 부옇게 앉아있었다. 자신을 안내한 이세하가 아니었다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이슬비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그녀는 그다지 넓지 않은 거실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슬비는 요동치는 감정을 애써 찍어 눌렀다. 지금의 이세하는 그녀의 감정변화에 몹시 예민하다. 그녀의 동요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세하는 아직도 멍하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령을 기다리며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를 떠올리며 이슬비는 애써 웃어 보였다.

 

“왜 그러고 있어?”
“미안해.”

 

그녀의 질문에 이세하가 황망히 사과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광의적인 의미일 것이다. 이슬비는 평범함을 가장하며 그에게 잔소리했다. 평소처럼, 평소처럼.

 

―예전처럼.

 

“청소 좀 하고 살아. 이게 뭐야, 전부 먼지투성이가 돼선.”

 

이세하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소파는 그나마 먼지가 덜했다. 거실에 와서 앉아 있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손으로 소파의 먼지를 대강 털어낸 이슬비는 그를 붙잡고 데려와 소파에 앉혔다.

 

“앉아있어. 오늘 생일이잖아.”

 

이세하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손을 놀리는 대로 저항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낡은 인형 같았다. 소파에 앉혀진 채 그녀를 바라보며 이세하가 말했다.

 

“도와줄 건 없어?”

“없어. 그냥 앉아있어.”

 

그를 마냥 앉혀두는 것 역시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를 부엌에 들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조리대 역시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다. 찬장 깊숙이 처박혀있는 조리 도구에는 거미줄이 끼어있었다.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조리대에 선 그의 모습을 다시 볼 날이 올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슬비는 마음이 아팠다. 얌전히 앉아서 눈을 굴리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짐에서 음식 재료들을 꺼냈다.

 

*

 

생일에는 미역국이라는 공식은 누가 만든 것일까. 몇 번 정도 인터넷을 찾아봤지만 그럴싸한 답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음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뭔가 의미도 있고 그의 의욕도 북돋워 줄 만한 음식이 없을까. 이슬비는 며칠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최초의 선택지로 회귀해야만 했다. 이세하가 좋아하는 소고기를 선택하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타협점이었다.

 

그녀가 헤맬 이유는 없었다. 물건들은 모두 그녀의 기억 속 그 자리에 바뀐 것 하나 없이 놓여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늘 불평하던 낡아빠진 압력밥솥까지도. 하지만 그것은 이 집 전체가 그녀를 옥죄는 과거 그 자체라는 의미기도 했다.

 

나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밥솥은 과거 정도연 박사가 이세하에게 선물한 물건이었다. 이세하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그러니까 그가 이슬비에게 처음으로 식사를 만들어 주었을 때에 쓰인 것 역시도 그 밥솥이었다. 싱크대에 놓여있는 식기세트는 검은양 팀원들의 집들이 선물이었다. 벽에 걸린 휴지걸이도, 구석에 놓인 오븐도. 모두 나름의 기억이 남아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행복했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의 통제력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세하는 어떻게 2년을 살았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뇌리에서 지우기 위해 더욱 가열하게 요리에 매달렸다.

 

상을 차린 뒤, 이슬비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세하는 식탁에 앉아 맞은편의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슬비는 그의 시선을 이해했다.

 

“난 됐어. 아침도 먹고 왔고.”

 

거짓말이다. 어제저녁 이후로 그녀는 물 한잔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세하와 마주앉아 음식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요리를 하면서 떠올린 추억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그와 마주보고 식사를 하는 순간 그녀가 애써 쌓아올린 감정의 댐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이세하는 그녀의 답에 군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대뜸 밥그릇을 들어 미역국에 말아 넣었다. 최대한 빠르게 식사를 해치우던 어린 시절의 버릇일까, 식사에 국을 올리면 그는 그렇게 밥을 말아 국과 밥으로만 배를 채우곤 했다.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쓸어 넣는 모습 역시도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발 천천히, 반찬도 섞어가면서 먹으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의 행동은 바뀌지 않았다. 이슬비는 국그릇에 거의 얼굴을 처박다시피 하면서 숟가락을 놀리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맛있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세하가 얼굴을 들어 말했다.

 

“먹기나 해. 식사 좀 잘 챙기라니까.”
“미안.”

 

또다. 5월에 만났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는 사과가 많이 늘었다. 예전 같았으면 머쓱해 하며 적당히 넘어갔을 일에도 그는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매번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일까. 그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세하가 다시 숟가락을 뜨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이슬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을 좀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세하가 어떤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먹고 있어. 집안 좀 둘러볼게.”

 

그녀의 말을 들은 이세하가 와락 몸을 일으켰다. 예상외의 격렬한 반응이었다.

 

“앉아있어.”
“왜? 좀 둘러본다고 문제 될 건 없잖아.”

 

이세하의 시선이 표류했다. 뭔가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듯했다. 이슬비는 자신과 아이의 방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러지 마.”

 

이세하가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더 알아야만 했다. 문손잡이는 생각보다 쉽게 돌아갔다. 이슬비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벌컥 열었다.

 

방은 예상대로 황량했다. 그녀가 집을 떠나며 대부분의 가구를 옮겨간 까닭이었다. 남아있는 것은 텅 빈 책상과 선반, 서랍장 하나 정도였다. 먼지는 여전했다. 그가 이 방에 출입할 일이 많지는 않을 터이니 당연한 일일까. 아이가 벽에 남긴 낙서자국이 눈에 띄었다. 이 집이 품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가능성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슬비는 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슬비가 발을 멈춘 곳은 액자가 세워진 선반 앞이었다. 그녀가 두고 간 과거의 기억들. 함께 벚꽃놀이를 갔던 날.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때. 모두가 그곳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추억들은 완전하지 않았다. 사진마다 이세하의 얼굴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법은 다양했다. 라이터로 지진 자국, 매직으로 덮은 흔적. 개중에는 아예 그의 얼굴이 잘려나간 사진도 있었다. 그녀와 아이의 얼굴만을 담은 액자들은 몇 번을 닦았는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액자가 퍽 이질적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비참함으로 이 모습을 조각해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오만이었다. 그녀는 이세하라는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슬비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한쪽뿐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세하의 목소리에 이슬비는 몸을 돌렸다. 여전히 음침한 얼굴이었다. 이슬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의 상처는 깊었다. 그와 그녀의 관계가 바뀐다고 해도, 그녀가 그를 몇 번을 용서한다고 해도, 그의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온다는 이야기에 이세하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잘 받지도 않는 방향제를 뿌리면서, 집 밖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집 앞까지 나와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그의 노력에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의 영역에 흙발로 걸어 들어와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던가. 이슬비는 그의 앙상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키에 맞춰 몸을 숙이는 이세하의 몸에 밴 듯한 반응에 이슬비는 더욱 슬퍼졌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똑, 똑, 똑. 창문을 빗방울이 노크했다. 이슬비는 빗소리를 무시한 채 이세하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무반응에 화가 난 빗방울은 창문을 두드리는 기세를 더했다. 뚝, 툭, 투둑, 투둑.

 

“모르겠어.”

 

얇은 셔츠 너머로 선명히 드러난 그의 뼈마디가 만져졌다. 그녀와 맞닿은 이세하의 몸이 떨렸다. 공포. 혹은 슬픔.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일까. 그의 몸을 뒤흔드는 감정의 뿌리를 이슬비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미안해.”

 

쏴아아아.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야 할 건 나야. 이슬비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녀는 그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이세하의 떨림이 멈춘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그녀도,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

 

먹다가 남은 국은 완전히 식은 채 죽이 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세하가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로 식탁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결과였다. 이슬비는 한숨을 내쉬며 국그릇을 치우고는 냄비에 남은 국을 데우기 시작했다. 그녀에 의해 또다시 식탁머리에 앉혀진 이세하가 변명처럼 말했다.

 

“그냥 그대로 먹어도 괜찮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이슬비가 대꾸했다. “얼마 만에 해주는 밥인데 그런 걸 먹이라고?”
“너무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그래.”

 

그녀를 바라보는 이세하의 눈은 붉었다. 눈물을 잔뜩 참았던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에 이슬비는 괜히 냄비를 다시 확인했다. 당연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약불에 데우기만 하면 그만인 물건이니까. 이슬비는 잠시 고민했다. 이 말을 해야만 할까. 괜히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대로 두는 것 역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사진 말이야.”
“어?”

 

이세하의 목소리에 당혹이 묻어났다. 이슬비는 냄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더 있으니까, 다음번에 줄게.”
“...왜?”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냥 싫다. 그렇게 말해도 이세하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슬비는 억지로 이유를 짜내었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지.”

 

침묵. 이슬비는 고개를 돌려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이세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누군가가 그를 사냥해 박제해놓은 것 같다. 벽난로 위에서 오랜 세월 시간에 그을린 얼굴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슬비는 자신이 적절한 대답을 한 것이기를 바랐다. 미역국이 적당히 데워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이세하에게 다시 상을 차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진은 망치지 마.”

 

이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한 이슬비는 부엌 근처에 다른 짐과 함께 놓인 종이가방을 띄워 자신에게 오게끔 했다. 가방 안에는 TV에서 종종 선전하는 전기면도기가 들어있었다. 제법 시간을 들여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선물이 없었기에 택한 차선책이었다. 선물을 받고 그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빤한 이야기였다. 그녀를 보며 어설프게 웃어 보일 것이다.

 

불안하다. 그 웃음 뒤로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오늘은 모든 것이 물음표투성이다. 이슬비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의 상처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슬비는 굳이 몸을 숙여 상자를 꺼냈다.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이세하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생일선물이야.”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이세하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슬비는 그의 미소를 조금 더 키워보고 싶어졌다.

 

“고마워?”
“그래. 고마워.”

 

미묘한 얼굴. 이슬비는 손을 뻗어 눈썹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그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며칠을 방치했는지 기름기로 꾸덕해진 앞머리는 그녀가 넘긴 모양을 그대로 유지했다. 말을 잘 듣는 것이 제법 주인을 닮은 머리카락이다. 이슬비는 어린 학생에게 시범을 보이는 선생처럼 그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웃어봐.”

 

이세하는 웃었다. 이슬비는 우선은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그 웃음을 지속시키는 것이 될 터였다. 이슬비는 그가 다시 예전처럼 웃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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