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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과 이렇게 되는 걸 줄곧 기다렸어요.”


그녀는 여배우가 내는 흘러내리는 실크처럼 여린 목소리에 무심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펭귄인형을 끌어안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TV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여배우와 같이 누운 남자 배우가 품안의 여배우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한밤중이란 걸 알려주는 은은한 청색의 조명과, 두 사람을 뒤덮은 희미한 어둠은 외설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연인들의 달콤한 밀회에 초점을 맞춰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배우들의 행동과 대사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여배우는 따사로운 품에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했다. TV밖에서 그들의 밀회를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여배우가 남자의 심장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 배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배우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라마에선 흔히 자주 쓰이는 연출이었다. 보는 사람이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보는 이들마저 미혹해 마음을 안정케 한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빛나는 TV를 묵묵히 응시했다. 나도 언젠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 시민들의 안전을 수호하는 클로저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순수하게 요구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점점 더 드라마에 몰입해갔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좋아요.”

“왜?”

“나는 가끔씩 내가 나인지도 모를 때가 있거든요. 일에 집중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업무 때문에 전화를 받을 때조차…가끔씩 그래요. 남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생소한 기분이 들 때가 너무나 많아요. 어쩌면 현실에 적응하는 대가로 조금씩 나를 잃어가는 걸지도 모르죠.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게……이따금씩 정말 두려워요. 남들이 나를 조각조각내서 갈취해가는 것 같아.”


여배우의 목소리는 대사를 읊을수록 울음기에 흠뻑 적셔들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치밀어오를 때라면 그녀 역시 겪었다. 처음으로 차원종과 대치했을 때가 그랬다. 그녀는 점점 극에 몰입했다. TV 속 남자의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설정인 건지 남자는 갈등에 처하면 표정을 내보이기 전에 입술을 오므렸다. 남자는 여자를 품 안에 당겼다. 카메라 앵글이 그들이 누운 침대를 훑었다. 이불 위로 여자를 껴안은 강인한 어깨가 드러나자,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넌 너무 감성적이야.”

“감성적이면 안 되나요?”

“그럼, 안되지. 감성적이란 건 남들과 똑같이 상처받아도 더 아파하고, 더 힘들어한단 거니까. 정말 안 좋은 거야.”


여자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알 바깥을 무서워하는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렸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남자는 여자의 말을 다 듣자마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씌웠다. 가슴을 간질이는 밀회는 계속 이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그녀는 때때로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짓기도 하고, 남자 배우처럼 입술을 달싹거리기도 하고, 얼굴을 귓바퀴까지 붉히면서 극에 집중했다. 이건…요즘에 본 드라마들 중에선 제일 표현이 노골적이야. 그녀는 TV에서 시선을 떼고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11시 24분.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시간이기도 한만큼 방송국도 그걸 모르고 이런 드라마를 틀어줄 리가 없었다. 방영시간이 한 시간도 넘는 프로그램이라면 품 안의 펭귄인형을 떼놓을 만도 하건만, 그녀는 한 시도 인형을 품안에서 떼질 않았다. 


그녀의 품으로부터 펭귄인형이 자유로워진 시간은 드라마가 끝나고 협찬 스폰서가 나올 때였다. 그녀는 펭귄인형을 소파에 가지런히 세워놓고, 베란다를 가린 커튼을 살짝 걷혔다. 막이 시작되기 전 관객의 수를 가늠하려는 여배우처럼. 여느 여배우처럼 화려한 치장은 아니었지만 연분홍빛의 머리만큼은 화사한 색깔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은 객석이 아니라 하늘로 향했다.


오늘은 달이 안보이네.


달빛이 닿지 않는 밤하늘은 새까맸다. 도시인 신서울에 살다보면 별 하나 없이 밤하늘이 까맣단 것쯤이야 대수로울 거 없는 일이지만, 달조차 보이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내일은 비가 온다는 걸 떠올리곤 커튼을 다시 닫았다.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새초롬해보였다. 


그녀는 몸을 깨끗이 씻고 따끈해진 몸으로 침대에 파고들었다. 슬비는 얇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기다 번뜩 후회가 들었다. 인형. 가지고 올걸. 동고동락한 펭귄을 거실에 두고 오니 품이 허전했다. 그녀는 언제까지 인형이 없으면 잠을 못자는 밤을 보낼 순 없단 생각이 들었다. 해서 슬비는 인형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내일 할 일. 아카데미에서 배운 격투술. 작전을 수행할 때 알아둬야 할 매뉴얼. 고전했던 차원종. 그리고 아는 이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좋아요. 


한순간, 가녀린 몸이 들썩거리고 이불은 슬비의 머리끝까지 뒤집어졌다. 왜 그게 지금 생각나는 거지! 한숨처럼 낮고 달콤하게 깔렸던 여배우의 음성은, 열여덟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기엔 무리였다. 그게 아니면 비가 오기 전날 밤이라 기분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드라마 속 연인들이 침대에서 나눴던 달콤한 말들이 망막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을 기울여서―베개로 귀를 막아보기도 하고 이불을 둘둘 말아서 잊고 잠에 들려고 했다― 잊어보려 노력을 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별수 없이 위상력을 사용해서 펭귄인형을 침대로 호출했다. 


한밤중 펭귄인형이 둥실둥실 떠올라서 다가오자, 그녀는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비록 피가 흐르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펭귄인형의 귀여운 외모와 푹신한 감촉은 그녀에게 안정을 가져다줬다. 이렇게만 보면 그녀는 흉악한 차원종과 대치하는 클로저나 팀을 짊어지는 리더로 보기엔 너무나도 여려보였다. 슬비는 인형을 품에 안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 잠 못 이루는 기나긴 사투가 비로소 끝난 셈이다. 


나는 당신과 이렇게 되는 걸 줄곧 기다렸어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잠이 들 때까지 몇 번이고 대사를 웅얼거렸다. 비가 오기 전날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