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때로는 그저 게으르게 보내고 싶은 하루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흘러가는 일상들을 마냥 바라보고만 싶은 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다. 트레이닝도, 팀원들의 자료도, 쌓여있을 보고서도, 오늘만은 내려놓으리라. TV 너머에서 재롱을 떠는 강아지에 정신을 집중하며 이슬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 잊자. 강아지 귀여워. 너무 귀여워.


문득 어깨가 시려 이불을 끌어올리려니 가슴께에서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랬지, 미안해. 머리를 쓰다듬으면 강아지처럼 배에 얼굴을 비빈다. 콧날이 배꼽에 스쳐 간지럽다. 조금 푸석한, 검은, 뿌리가 희끗한 머리. 조만간 염색을 다시 해야하지 않을까. 그녀는 그가 염색을 그만뒀으면 싶다. 건조한 머리칼은 단지 그가 자주 밤을 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물기없이 가끔 벌겋게 충혈되는 눈동자도 그렇다. 새하얀 머리도, 황금빛 눈동자도, 좀 더 자주 보고싶다. 지금 말해봐야 싫다고만 하겠지. 괜히 약이 오른다. 나는 이렇게 네가 걱정되는데.


“왜 그래?”


실컷 부비적거린 듯 느긋한 목소리. 사람 속도 모르고. 손가락을 세워 머리를 헝크러뜨린다. 뻣뻣한 머리칼이 제멋대로 뻗친다. 길게 자란 옆머리에 숨겨져있던 귓바퀴가 드러난다. 굴곡을 따라 손가락을 굴리니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움추린다. 손톱을 세워 귓등을 긁어본다. 간지럽거나 따갑다고, 불평하고 고개를 빼볼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 그저 얼굴만 파묻고 있다.


“그냥, 아무것도 아냐.”
“그렇구나.”


시선을 다시 TV로 향한다. TV 속 강아지는 주인의 무릎 위에 앉아 세상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래를 보면 엉망이 된 검은 머리가 또 강아지처럼 가슴에 기대 누워있다. 쓰담, 쓰담. 손을 잠시 멈추니 어리광부리듯 무게를 싣어온다. 여유롭다.


“무거워.”
“…조금만 더.”

“팔 아파.”


이세하는 요즘 부쩍 어리광이 늘었다. 어쩌면 이것이, 한 꺼풀만 벗겨나면 드러나는 그의 본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무관심을 연然하여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었을지도. 그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가 가엽다고, 이슬비는 또다시 그리 생각한다. 마침내는 그녀에게 가면 뒤의 모습을 보여준 그가 고맙다. 여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더라. 또 앞으로 그는 어떻게 바뀔까. 더 많은 모습을 알고싶다고 생각하며 이슬비는 한동안 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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