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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 클로저스/조각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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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무제 4 - 2017.05.23
  10. 무제 3 - 2017.05.22

때로는 그저 게으르게 보내고 싶은 하루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흘러가는 일상들을 마냥 바라보고만 싶은 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다. 트레이닝도, 팀원들의 자료도, 쌓여있을 보고서도, 오늘만은 내려놓으리라. TV 너머에서 재롱을 떠는 강아지에 정신을 집중하며 이슬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 잊자. 강아지 귀여워. 너무 귀여워.


문득 어깨가 시려 이불을 끌어올리려니 가슴께에서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랬지, 미안해. 머리를 쓰다듬으면 강아지처럼 배에 얼굴을 비빈다. 콧날이 배꼽에 스쳐 간지럽다. 조금 푸석한, 검은, 뿌리가 희끗한 머리. 조만간 염색을 다시 해야하지 않을까. 그녀는 그가 염색을 그만뒀으면 싶다. 건조한 머리칼은 단지 그가 자주 밤을 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물기없이 가끔 벌겋게 충혈되는 눈동자도 그렇다. 새하얀 머리도, 황금빛 눈동자도, 좀 더 자주 보고싶다. 지금 말해봐야 싫다고만 하겠지. 괜히 약이 오른다. 나는 이렇게 네가 걱정되는데.


“왜 그래?”


실컷 부비적거린 듯 느긋한 목소리. 사람 속도 모르고. 손가락을 세워 머리를 헝크러뜨린다. 뻣뻣한 머리칼이 제멋대로 뻗친다. 길게 자란 옆머리에 숨겨져있던 귓바퀴가 드러난다. 굴곡을 따라 손가락을 굴리니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움추린다. 손톱을 세워 귓등을 긁어본다. 간지럽거나 따갑다고, 불평하고 고개를 빼볼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 그저 얼굴만 파묻고 있다.


“그냥, 아무것도 아냐.”
“그렇구나.”


시선을 다시 TV로 향한다. TV 속 강아지는 주인의 무릎 위에 앉아 세상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래를 보면 엉망이 된 검은 머리가 또 강아지처럼 가슴에 기대 누워있다. 쓰담, 쓰담. 손을 잠시 멈추니 어리광부리듯 무게를 싣어온다. 여유롭다.


“무거워.”
“…조금만 더.”

“팔 아파.”


이세하는 요즘 부쩍 어리광이 늘었다. 어쩌면 이것이, 한 꺼풀만 벗겨나면 드러나는 그의 본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무관심을 연然하여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었을지도. 그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가 가엽다고, 이슬비는 또다시 그리 생각한다. 마침내는 그녀에게 가면 뒤의 모습을 보여준 그가 고맙다. 여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더라. 또 앞으로 그는 어떻게 바뀔까. 더 많은 모습을 알고싶다고 생각하며 이슬비는 한동안 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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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는거 맞아?”

 

이세하는 몇 번이고 반복했던 질문을 이슬비에게 건네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아이는 잠이 얕은 편이었다. 틀림없이 잠이 들었다고 생각해서 잠시 눈을 붙이려면 금새 깨어나 울곤 했다. 행여나 다시 깨버릴까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이슬비의 눈 아래에도 다크서클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꼭 팬더같네.”
“…너도 똑같거든?”

 

아닌게아니라, 요 며칠 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은 이세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기가 갑작스레 열이 오르거나 울음을 우는 것이 흔한 일이라곤 하지만, 첫 아이를 키우는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이세하도, 이슬비도, 어린 아기를 돌볼 기회라곤 평생에 없었던 터였기에 그랬다. 아이가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마침내 소파위에 널브러졌다. 한동안 청소를 제대로 못 한 탓에 소파 구석에는 먼지가 약간 보였다.

 

“죽겠다.”

 

이슬비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는다. 잠깐 눈 좀 붙여.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이세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가, 하고 물으니 설거지를 하러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할테니, 누워서 좀 쉬어.”
“싫어.”

 

또, 또, 고집. 이세하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이럴 때면 싸우기 쉽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억지로 쉬게 하기는 곤란하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양팔을 벌렸다.

 

“우리 슬비 안아본지 너무 오래됐어.”
“대충 넘기려 하지말고.”

 

말은 그렇게 해도 제법 순순히 다가온다. 그의 말마따나, 둘 만의 시간이 요즘 드물긴 했다. 체구가 작은 이슬비기에 그가 안으니 품에 폭 잠겼다. 턱을 간질이는 머리칼에 코를 묻으며 이세하는 그녀를 구슬릴 말을 생각했다. 그때까지의 타협. 둘은 앞으로 10분만, 우선은 이렇게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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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하. 세상에 유령같은건 없어.”

 

알고 있다. 평소라면 그까짓 담력훈련,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평소에 매번 차원종과 마주하는 사람이 유령이 무섭겠나? 그저 어제 했던 공포게임에 좀 과하게 심취했던 여운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하필 학교가 배경이었을 뿐이고.

 

“…괜찮아. 가자.”

 

의심에 가득찬 표정을 보니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나는 행동으로 나의 결의를 보여주기로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하니 의외로 발걸음이 가볍다. 봐라, 이슬비. 뭐가 그렇게 문제란 말이야? 이렇게 그저 앞을 보고 걷다보면 금방 끝날텐데. 그리고 나는 정확히 5분만에 후회했다.

 

“…….”
“…이세하, 그렇게 잡으면 못 움직여.”

 

정신을 차리고보면 이슬비에게 꼭 붙어있게 된다. 코너를 돌 때마다 게임 속의 기믹들이 슬금슬금 머릿속을 잠식한다. 계단을 오를 때면 발 밑을 자꾸만 살피게 되고, 교실에 들어설 때면 창문 밖부터 확인하게 된다. 불가항력이다.

 

“…현실엔 왜 세이브가 없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지금 엄청 진지하거든.”

 

정말이다. 이런 잡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딴생각이 들어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한동안 공포게임은 삼가는 편이 좋겠다. 정말로. 이쯤 되니 도대체 누가 이런 멍청한 계획을 세운건지조차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이 한심한 꼴에 이슬비는 여보란 듯 한숨을 쉬어보였다.

 

“…어쩔 수 없지. 오늘만이야.”

 

툭, 하고 머리에 자그마한 무게감이 실린다. 눈앞에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는 슬비의 얼굴. 나도 그만 고개를 숙여버린다. 쓰다듬, 쓰다듬. 부드러운 손길에 정신이 쏠린다.

 

“괜찮아, 괜찮아.”

 

머리에 열이 오른다. 아마 지금 거울을 보면 귀까지 새빨간 얼굴이 보이겠지. 슬비 쪽도, 아마 비슷할 것 같다.

 

"괜찮아, 세하야."

 

태엽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 뻣뻣한 손길이지만 따뜻하다. 이런 감각은 얼마만일까? 아무래도, 우리가 담력시험을 마무리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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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부는 테러 경계 단계를 격상하겠… 내가 왜 깼더라. 이세하가 눈을 뜨자마자 한 생각이었다. …왜 본인이 내지 않고, OOO가 냈느냐… 오늘은 늦잠을 자려고 했을텐데. 답은 금새 나왔다. TV에서 아침 뉴스가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다. 등 쪽에 커다란 쿠션을 벤 이슬비가 앉은 채 잠을 자고 있다. 그럼 그렇지. 그녀는 밤샘에 익숙치 않았다. 아무리 일이 밀려도 새벽이 되기 전에는 잠을 청하는 그녀였다. 그런 주제에 모처럼의 휴가라며 연속방영하는 드라마에 달려들다니. 이세하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며 한숨을 푹 쉬었다.

 

좀 늦잠을 자게 두어야할까? 이세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장식장에 얌전히 들어가있는 게임기의 모습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평소엔 게임 그만하고 빨리 좀 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면서, 이게 뭐람. 평소에 굳게 내리눌러놓던 장난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이슬비의 뺨을 슬쩍 찔렀다.

 

“야, 이슬비.”

 

꾸욱, 꾸우욱. 귀찮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귀 뒤로 대충 넘겨놓은 머리가 사락, 하고 흘러내렸다. 매끄러운 머리칼을 손가락에 슬슬 감아본다. 이대로 당기면 많이 놀라겠지. 이세하는 선을 넘으려 드는 장난기를 잠재운다. 다음은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그녀의 귓가로 얼굴을 기울였다.

 

“공주님, 아침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찌푸러든다. 그러나 반응은 그것 뿐. 재미없어. 동그란 귓불이 제법 탐스럽다. 귓가에 도드라진 땀방울. 방이 조금 더웠던 것일까. 이세하는 오늘부터는 에어컨을 켜야겟다고 생각했다. 짠 맛. 귓바퀴라도 한 번 깨물어볼까, 생각하던 찰나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땠으려나, 하는 것이 이세하의 바람이었지만 삶이란 그렇게 좋게만은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만. 일어났어.”
“어어….”
“…뭐가 어어…, 야…? 아침부터 낯뜨겁게…!”

 

잘못했습니다. 이세하는 잽싸게 용서를 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효과는 없었다. 아침을 먹기 전까지 그는 한동안 굽신거리며 죽어있어야만 했다. 아침부터 듣는 잔소리는 꽤나 신선했다. 앞으로 몇 번정도는 더 시도해볼 가치가 있으리란 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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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작게 켜져있던 방의 불이 꺼진다. 달큰한 린스 냄새, 규칙적인 숨소리. 침대에 누운 이세하를 익숙한 감각들이 자극한다. 이불을 끌어올리는 그를 따스한 팔이 껴안는다. 왔어? 살짝 잠에 취한 목소리. 응, 하고 대답하자 베스스 웃는다. 늦었어, 바보야. 겸연쩍게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을 이슬비가 잡아내린다. 조금 아쉽다. 몇 년을 쓰다듬어도 그렇다. 느릿느릿 내려오는 손가락을 그녀는 냉큼 깨문다.

 

“아파.”

 

늦게 온 벌이야. 그녀가 속삭인다. 이세하는 괜히 약이 오른다. 내가 늦고 싶어서 늦었나. 잠시 머리를 굴리니 그럴싸한 반격이 떠오른다.

 

“그래서, 외로웠어?”
“…그랬지.”

 

조금 늦은 대답이 마침내 속삭임에서 평범한 대화가 되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이슬비의 귀에 입을 가까이한다. 우리 슬비, 인형이라도 다시 가져다 놓아야 할까봐. 곧이어 후, 하고 귓가에 입김을 불어본다. 예전에 기억나? 내가 너희 방에 처음 갔던 날. 인형 숨기다가 나한테 들켰잖아. 대번에 그녀의 반응이 돌아온다.

 

“그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왜 안돼? 반응이 재미있다. 그 다음에 갔을 땐… 이세하의 말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가로막힌다. 그를 밀쳐내 침대에 바로눕힌 이슬비는 도끼눈을 하고 그에게 올라탄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짐짓 딱딱하게 이야기하지만 평범한 대화라는 것을 둘 모두 알고 있다. 이세하는 웃으며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러면 입을 막으면 되잖아, 라는 말에 이슬비는 수긍했다. 쪼옥. 그녀의 입술. 꿈 속에서도 주름 하나 남김없이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입을 슬쩍 열자 기다렸다는 듯 혀가 들어온다. 똑똑. 앞니를 두드리는 부드러운 노크. 뒤섞인다. 숨이 거칠어진다. 뜨겁게 올라오는 이것은, 누구의 날숨일까.

 

“너무, 보고싶었어.”

 

흐려지는 말 끝. 애처롭다. 매달린 팔을 내버려둔채 이세하는 팔을 그녀의 등 뒤로 돌렸다. 보드라운 둔부를 움켜쥔다. 그대로 밀착시킨다. 더 안아줘. 애원하는 목소리에 순응한다. 혀가 엉길 곳을 찾아 그의 몸을 헤멘다. 턱에서 귀로, 그리고 목선을 타고 어깨로. 매끄러운 등을 따라 손가락을 훑으니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어깨 아래의 이 자국은 그녀가 천사였다는 증거일까. 날개뼈를 쓰다듬으며 품안의 감촉을 즐긴다. 좀 더, 좀 더. 어깨를 넘어 쇄골로, 가슴으로. 더 아래로. 계속. 이어지고, 뒤섞여서, 그저 계속해서 이렇게 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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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누가 커피를 끓였냐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다. 가볍게 기억을 되돌린 이세하는 자신이 이슬비와 함께 모텔방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보통 아침이면 커피를 먼저 끓이는 쪽이었던 이세하는 오랜만에 맞는 여유로운 아침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내 것도.”
“…일어났어?”

 

수긍. 이슬비는 한숨을 쉬며 믹스 커피를 한 봉투 더 집어들었다. 테이블에 팔을 짚고 커피 포트가 울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뒷모습. 잠옷을 대신했던 흰 셔츠, 헐렁한 반바지. 군데군데 주름지고 흐트러진 그 모습이 꽤나 낯설다. 이렇게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을 그 말고 또 누가 알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평상심, 평상심. 어디보자, 퇴실 시간이 12시였던가.

 

“지금 몇 시야?”
“9시 30분.”
“…어?”

 

탁자에 널브러져 있던 간밤의 흔적을 치우던 이세하는 맥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각자 씻고 짐을 챙겨서 나가려면 제법 빠듯하다. 이세하는 머릿속으로 셈을 반복했다. 모자르다. 느긋하게 커피를 끓이는 이슬비의 행동거지는 어디서 나온 여유일까? 돌아온 대답에 이세하는 당황했다.

 

“같이 씻으면 되잖아?”
“뭐?”

 

담담히 이어지는 설명. 뭔가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세하는 적당히 납득했다. 어차피 볼장 다 본 사이, 조금이라도 수면시간을 늘리고자 생각한 결과라. 확실히 어제 잠을 늦게 자긴 했다만.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녀는 가끔 상식을 넘어선 말을 하지 싶다는 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그럼, 들어간다?”
“…잠깐, 잠깐만.”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역시 달랐다. 계획은 제법 그럴싸하게 세워놓은 이슬비였지만, 막상 이세하가 들어갈 때가 되자 한참을 뜸을 들였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겨우 욕실에 들어간 그는 샤워타올을 두른 채 구석에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조금이라도 보이는 면적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까? 욕조에 붙은 샤워기에서는 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사실, 이세하의 입장에서는 역효과였다. 등에 구슬처럼 맺힌 물방울들, 물에 푹 젖어 흘러내리는 타올, 억지로 끌어올리는 손길. 그의 이성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그녀의 뒷모습에 점점이 남은 붉은 자국이었다. 간밤의 기억이 플래시백되며 그의 이성을 착실히 갉아먹어갔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부끄러우니까, 보지 마.”

 

가만, 내가 왜 참고 있었더라? 등의 손톱자국이 욱신거린다. 머릿속에 이슬비의 달콤한 신음소리가 재생된다. 이세하는 머릿속으로 다시한번 셈을 해보았다. 아마, 괜찮을 것 같다. 아무렴 어때.

 

“잠깐, 세하야? 그렇게 당기면... 꺄악?!”

 

결국, 몇 시간 뒤 그들은 카운터에 카드를 반납하며 연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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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졌다. 인적 드문 버스 정류장을 겨우 찾아내 앉은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기묘하게 달라붙는 분위기에 이세하는 감히 휴대폰을 꺼내보지 못했다. 톡, 톡. 앞머리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 자꾸만 신경이 곤두선다. 대충 머리를 털어내니 물방울이라도 튀었는지 옆자리의 이슬비가 어깨를 움추린다. 평소라면 미안하다고 가볍게 말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늘은 감히 입을 떼기가 어렵다. 이 침묵을 깨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이세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이슬비를 훔쳐본다.

 

평소에는 꽤나 답답해보이는 재킷이었지만 이런 날에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단단히 채워진 지퍼 너머로 슬쩍 엿보이는 흰 셔츠 자락은 조금의 물기도 없이 온전했다. 그다지 춥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안심. 살짝 시선을 올리면 매끄러운 턱선을 지나 평소엔 꽤나 보기 힘든 그녀의 동그란 귀가 살짝 드러나보인다. 모양 좋은 귓바퀴 위로 빗방울이 하나. 또르륵, 굴러떨어진다. 그저 얼굴의 일부일 뿐이건만, 이렇게 보니 제법 배덕감이 든다. 이세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시선 한 구석으로 스쳐간 그녀의 치마는 머릿속에 제법 오래 남아있을 것 같다. 빗물에 젖어, 미묘하게 그녀의 허벅지가, 아니, 살결이, 생기가 비쳐보이던, 새하얀 요원복. 이세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아침까지도 맑았던 날씨 치고는 비가 제법 푸지게 내린다. 이슬비는 옆자리에 앉아 머리를 털어내는 이세하에게 괜찮냐고 묻지 못했다.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머리칼을 괜히 쓸어넘긴다. 귓가에 달라붙는 머리칼이 오늘따라 거추장스럽다. 한 마디라도 해볼걸 그랬나. 조금 후회해보지만 아무래도 때가 늦은 것 같다. 괜히 어색해진 이슬비는 이세하의 옷을 살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덕에 그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다행이다. 지금 이 시선을 들키면 당장이라도 빗속으로 뛰쳐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대강 풀어헤치고 다니는 재킷 탓에 셔츠까지 담방 젖어버린 상체가 꽤 추워보인다. 핀으로 겨우 제 위치에 고정되어 덜렁거리는 넥타이. 뚝, 뚝. 물을 흘리며 늘어진 그 노란 천조각 너머로 쇄골이 빼꼼히 도드라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람. 이슬비는 시선을 돌린다. 빗물을 머금어 풀죽은 머리칼. 수북하게 늘어진 평소보다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손을 들어 한번 만져보고픈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이러고 있으면 앞으로 무슨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이슬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언제 그칠지 모르겠네.”

 

겹치는 목소리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어이없다는 표정 한 구석으로 웃음이 스민다. 멋쩍은 웃음소리가 한데 섞인다. 비가 그치기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그들이 함께 돌아가기 까지도,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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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기는 별로라고?”


이세하는 몇 번이고 반복했던 질문을 다시 건넸다. 이슬비가 여섯 번째 신혼방 후보를 퇴짜놓은 뒤의 일이었다.


“채광이 너무 별로야. 곰팡이가 엄청 슬거란 말야.”


이쯤 하고 돌아가자는 의미로 한 이야기였지만, 이슬비의 반응을 보건대 그럴 일은 없어보였다.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자면, 곰팡이 따위는 집에서도 실컷 청소해본 만큼―서지수가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쓰는 상황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오지 않으리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이슬비는 완고했다.


“봐, 겨우 집에 돌아와서 쉬려고 문을 열었는데 퀴퀴한 냄새가 나면 얼마나 기분나쁘겠어?”


별로, 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집어넣었다. 번갈아가면서 청소한다 치면 별 것도 아닐텐데. 게다가, 이세하는 방금 집의 창고방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참이었다. 그간 방안을 차지하고 있던 구형 게임 콘솔들을 여기에 몰아넣으면 어떨까, 하는 희망에 부풀어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별로니 다음 방을 찾아보자니. 답답했다.


“야, 어차피 지금 나와있는 방이란게 뻔하잖아. 왜 자꾸 그러는거야?”


앞서가던 이슬비가 그의 질문에 발을 멈췄다. 평소같으면 수십가지 이유를 대며 그를 대번에 밀어붙일 그녀였건만, 오늘은 어째선지 시작이 조용하다. 그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세하는 의아했다.


“그치만.”


여전히 등을 보인채 이슬비가 입을 열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싫잖아.”

“뭐가?”

“….”


답답해진 이세하는 그녀를 돌려세웠다. 푹 숙인 고개 너머로 발개진 뺨이 보인다. 당황스럽다.


“…처음엔, 따로 신경쓰는 일 없이 그냥 둘이 편히 있고싶단 말이야!”


빈 틈을 찔렸단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 그의 손을 뿌리치고 톡톡 튀어가는 이슬비를 이세하는 우두망찰하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뛰던 이슬비는 기어코 그를 향해 결정타를 날렸다.


“눈치도 없어. 이 멍청아!”


이세하는 결국 그녀를 붙잡으려 덩달아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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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하는 예전에 플레이했던 생존 게임이 문득 생각났다. 추운 지역에 조난당한 사람이 되어, 숲 속에서 아이템을 모아 일정 기간을 버티는 게임이었다. 제법 난이도가 있었다. 음식이 남는다 싶으면 장작이 모자르고. 그게 남는다 싶으면 또 다른 게 모자르고... 그나마 장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아직도 조금씩 몸을 떨고있는 이슬비를 곁으로 끌어당겼다.


“더 붙어.”

“괜찮아. 답답하잖아.”

“…붙어.”


방금 전의 사양이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이슬비는 말없이 그에게 기대어왔다. 이세하는 재킷을 끌러 그녀를 감쌌다.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북구의 바람은 차다. 해도 뉘엿뉘엿 사라져가는 시각. 숲 속을 헤메다 다 쓰러져가는 독가를 발견한 것이 다행이었다. 허허벌판에서 찬바람을 그대로 맞다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몸이 작은 탓일까, 한참 전부터 추위에 떨고있던 이슬비를 집안에 밀어넣은 이세하는 주변의 나무에서 적당히 나뭇가지를 잘라내어 모아왔다. 연료가 있다면 불을 지피는 것 쯤은 간단하다. 위상력으로 타오르던 푸르스름한 불꽃은 금새 나뭇가지를 들이키며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이세하는 발치에 놓인 발신기를 툭툭 두들겼다.


“이거, 작동하는거 맞아?”

“…맞아.”


묘하게 자신없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쇼그가 지상의 상황과 위치를 척척 잡아내는 모습을 여러번 본 뒤였던 터다. 길어봐야 오늘 밤 정도만 넘기면 되겠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세하는 제이에게서 받은 사탕을 발견하고 하나를 이슬비에게 내밀었다.


“먹어. 맛은 보장 못하지만.”

“뭐야, 그게.”

“…아저씨가 준 거라.”


픽, 하고 이슬비가 웃는다. 바스락거리며 사탕을 풀어 입에 넣은 이슬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써.”

“무슨 맛인데?”

“글쎄…, 진흙 맛?”


다채롭게 변하는 이슬비의 표정에 이세하는 문득 장난기가 돌았다. 뺨에 닿는 이세하의 손, 그리고 가까워지는 얼굴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휴지.


“—…”

“—정말이네. 진흙 맛이네.”

“……그렇지.”


맥없이 대답하는 이슬비의 얼굴을 보며 이세하는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좀 더 끌어당겼다.


“이런 걸 먹으니 더 추워지는 건데.”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저항이 없다. 아까보단 체온이 오른 느낌이다. 이유는 아마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몸이 온전해지기까지, 앞으로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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