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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석양이 죽은 자리에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시계를 검게 물들였다. 그 어둠 속에서 의료 물품과 종이로 어지럽혀진 교실을 정리하던 푸른 머리의 청년, 아니, 소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그러모으다가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종이는 이면지였다. 알아볼 수 없는 그래프나 표가 잔뜩 인쇄된 종이를 뒤집자 ‘신강 고등학교’라는 학교명이 적힌 시험지가 얼굴을 드러냈다. 아마 교무실에서 적당히 집어온 종이일 것이다. 제 소명을 잊고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상자 속에 갇혀있던 종이. 그 뒤 영문 모를 실험에 동원되고 다시 버려진 그것에 푸른 머리의 소년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쓰레기통까지 가기도 귀찮다는 듯 종이를 구겨 내던지려던 그는 마음을 고쳐 한 장을 적당히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차원종을 치료했다는 사실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 맘바를 치료한 흔적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무기질적인 기계. 그리고 그 기계보다 더욱 무기질적인 단어를 나열하는 목소리. 평소에도 늘상 겪던 상황이었건만 이만큼이나 그를 답답하게 만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생각을 곱씹으며 주머니 속의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기계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시야에 흰 장발과 머리에서 솟아난 뿔이 눈에 띄는 소녀가 들어왔다.

“나타 님.”

나타라고 불린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소녀는 목을 움츠리며 그에게 주눅든 눈빛을 향했다.

“뭐야? 금방 끝낸다고 했잖아.”

“아뇨, 그게...”

나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처음 그녀를 만난 뒤로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을 늘이는 데에는 정말이지 신물이 났다. 나타는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감각을 애써 억눌렀다.

“젠장, 빨리 용건만 말해. 바쁘다고.”

“아, 네. 그, 트레이너님이 뒷정리는 다른 쪽에서 맡기로 했으니, 이동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잠깐 휴식을 취하시라고...”

“알았어.”

나타가 한숨을 쉬듯 내뱉자 백발의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갔다.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타는 책상에 걸터앉아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눈으로 훑었다.

그로서는 영원히 겪어보지 못할 세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는 누구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대공원에서 상대했던 자기 또래의 남성 클로저를 떠올린 나타는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과 그가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나타와 그를 나눈 기준에 논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시험지를 바라볼수록 음울한 방향으로 가속하는 의식을 되돌리며 나타는 정리해 두었던 펜을 집어 들었다. 공란으로 가득 메워져 있던 시험지에 두 글자가 적혔다.

‘이름: 나타’

그에게는 분명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흐릿한 기억을 아무리 되새겨도 그에게 주어진 이름 석 자가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지긋지긋한 두 글자가 남아 그를 구속했다.

“빌어먹을.”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다시금 떨쳐낸 나타는 시험지에 펜을 놀렸다. 답 따위는 모른다. 그저 적당히 객관식 문제의 답을 체크할 뿐이었다. 금새 칸을 채운 나타는 시험을 일찍 끝낸 학생들이 으레 그러하듯 공란에 낙서를 끼적였다. 쿠크리를 든 자신, 포장마차, 어묵이라는 이름의 음식, 자신에게 어묵을 건네주던 포장마차의 주인. 여우귀가 장식된 노란 후드를 그린 나타는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를 본 지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았을 텐데. 나타는 후드 아래를 검게 칠했다. 그녀의 기억 속 그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사라져버린 푸른 머리의 소년. 그 외에 그가 그녀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나타는 종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종이를 잡은 손에 위상력을 슬쩍 끌어모았다. 손바닥으로 분출된 위상력에 휘말린 종이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펜을 집어든 나타는 교실 구석으로 향했다.

*

“나타 님, 이동 명령이 내려왔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고있던 눈을 뜬 나타는 교실 밖에서 자신을 부른 소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달이 텅 빈 교실을 비추자 하얀 벽 한켠에 이전에는 없었던 얼룩이 드러났다.

‘나타 왔다 감’

얼마 뒤, 현장 정리를 맡은 인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벽의 얼룩을 확인한 뒤 그 낙서를 깨끗이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 다섯 글자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달빛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담담히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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