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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다.

이세하는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괜히 몸을 굼실굼실 움직여본다. 지금은 몇 시일까. 다른 팀원들은 자고 있을까. 의미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런 밤이 있다. 사지가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불편한 밤. 눈을 감으면 어둠이 귓가에 천둥처럼 속삭이는 밤이. 너 때문이야. 기대 이하였다. 실망이다. 목소리를 바꿔가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귓속말에 이세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와삭와삭 울리는 이불 소리에 속삭임이 잠시 물러난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일을 겪는다면 누구라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의 불운만을 저주했다. 과거에 가위눌리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겁쟁이. 겁쟁이. 어느 새 이불 속에 스며든 어둠이 그를 매도했다. 그래. 나는 겁쟁이다. 눈앞의 인적 드문 길에 겁먹어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했다. 그 길이 짐승의 길이 아니었음을, 마땅히 사람이 택하는 길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저 길은 막다른 길일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녀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거친 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그 길 끝에서 밝은 빛을 보았을지도. 그리하여 그녀가 밟은 길은 어느새 모두가 목표로 삼을 대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러지 못했어.

이세하는 이불을 걷어찼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하잘것없는 변명이라도 각주삼아 덧붙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 대면 너무도 비열한 존재였기에 그랬다.

잠을 포기하고 머리맡에 손을 뻗어 늘 그 자리에 놓여있는 게임기를 잡았다. 게임기의 전원을 켜자 그가 자주 플레이하는 게임이 실행되었다. 용사가 되어 괴물들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고, 마지막엔 붙잡힌 공주를 구해내는 흔해빠진 게임이다. 게임 속 세상에서는 모두가 그를 환영한다. 그는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한다. 어렵지 않게 공주를 구해내고, 단 한명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너는 아니잖아.

경쾌한 배경음과 함께 타이틀 화면이 출력되었다. 본래 음침했던 타이틀 화면은 그가 엔딩을 봄과 동시에 바뀌었다. 그가 마지막 적을 쓰러뜨린 그 순간, 모두가 행복해졌다. 그는 하나의 세상을 구해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현실의 파도에 휩쓸릴 따름이었다. 알파퀸의 아들, 남다른 위상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나 차원종에 맞설 힘을 가진 존재는 그곳에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이세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진작 최선을 다했더라면. 그 아이처럼, 그렇게 했더라면. 하지만 이제와선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는 시간을 의미없이 써버린 존재가 되었다. 그녀처럼은 살 수 없었다.

부러웠다. 그녀가 너무도 부러웠다. 아픔을 딛고 일어날 힘을 가진 그녀가. 자신을 불태우며 노력할 힘을 가진 그녀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 과정을, 그녀가 겪어야 했을 고통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녀를 부러워하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쓰레기를 뒤적이는 넝마주이, 시체의 배를 파헤치는 까마귀. 그것이 이세하였다. 넝마주이에게는 멀쩡한 사지가 있었다. 까마귀에게는 하늘을 날아 먹이를 잡을 날개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찾은 곳은 결국 쓰레기장과 시체였다. 과정 없이 결과만을 노리는 기회주의자. 자신은 그런 존재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그가 생득권처럼 가지고 태어난 위상력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비겁자.

어느 틈엔가 눈가에 맺힌 물기마저 가증스러웠다. 그에겐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었다. 눈가를 거칠게 닦아낸 이세하는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게임으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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