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무어가 그리 서운한지 온종일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기어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톡, 톡, 툭, 투둑. 리듬감 있게 창문을 두드리던 빗방울 소리가 이내 굵어졌다. 예비소집이 끝난 뒤, 선생에게 호출을 받고 뒤늦게 하교를 준비하던 이세하는 점점 커지는 빗소리에 창밖을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비 오잖아?”


비를 맞는 것 자체를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몸이 좀 젖는다고 감기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교복이 좀 젖거나 구겨진대도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방에 들어있는 게임기가 젖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한동안 그칠 것 같지 않은 모습에 이세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는 자습서 몇 권과 게임기가 들어있었다. 그가 꺼낸 것은 물론 게임기 쪽이다. 늘 그러하듯, 자연스레 양손으로 게임기를 잡은 이세하는 검지를 올려 전원 버튼을 슬라이드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게임기는 묵묵부답이었다.


“약이 없나?”


분명히 어젯밤 충전을 했을 게임기일 터였다. 짬마다 한석봉과 게임을 하긴 했다지만 벌써 배터리가 다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운수 사납게도 충전기를 깜빡 집에서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오른 이세하는 비를 맞으면서 귀가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날씨가 여의찮았다. 입춘이 지났다곤 하지만 때는 아직 겨울에 가까웠고, 그런 날이었기에 내리는 비는 차갑기가 얼음장 같았다. 잔병치레할 걱정이 없다곤 해도 괜히 사서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투덜거리며 교복 재킷을 벗었다. 이불처럼 덮어 책상에 엎드린 채 한 숨 잘 요량이었다. 텅 빈 교실이 제법 썰렁했지만, 바깥보다는 나았다. 그런 그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빗방울이 투둑투둑 웃었다.


비가 오는 날은 좋다. 시끄럽게 떠드는 동갑내기들의 목소리도, 놀 곳을 찾아 와글와글 돌아다니는 꼬맹이 무리의 외침도 없다. 저마다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 혼자가 되는 시간.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홀로 남아 썩어가고 있는 것이 자신뿐이 아니란 것이 좋았다. 음침하고 꿉꿉한 자기 위안에 몸을 감싼 채 이세하는 잠에 빠졌다.


*


이세하는 희미하게 들리는 숨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기분이 나쁘다. 무방비한 자신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심하다고 생각했을까. 알 수 없다. 잠자코 엎드려 귀를 기울여본다. 숨소리가 제법 규칙적이다. 졸고 있는 것일까. 그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그의 기상을 눈치챈 기색은 없다. 교복이 스치는 소리도, 삐걱이는 의자의 비명도, 아무것도 없다. 인기척의 방향으로 슬쩍 재킷을 열어 시야를 튼다. 


어둑한 시야에 그가 가장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 비쳤다. 붉은 재킷 위로 보이는 분홍빛 머리. 이슬비. 검은양 팀의, 그의 리더. 괜히 움츠러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약이 오른다. 몸을 일으켜 보니 이슬비는 팔장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녀 역시도 미처 우산을 챙겨오지 못한 것일까, 어깨에는 거뭇하게 물기가 앉아있다. 촉촉이 젖은 머리칼이 방금 샤워를 마친 모습을 연상케하여 무심코 고개를 돌리게 된다. 텅 빈 교실, 꼭 닫힌 문, 빗방울이 엉긴 창문, 그리고 그녀 앞의 책상.


이세하는 그녀가 앉아있는 책상 위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누구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일까.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었던 것일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청소다 뭐다 하여 왁자지껄했던 학우들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본인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혹시 불쾌해하진 않을까. 궁금증은 꼬리를 문다. 고민, 고민. 덕분에 이세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파란 눈을 조금 늦게 발견했다.


“─깼어?”


당혹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꺼내보았지만 대화의 시작으로 그다지 적절한 말은 아니었다. 낭패감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이슬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응, 깼어.”


할 말이 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는 말재주꾼도, 좋은 대화상대도 아니었다. 이럴 때 솜씨좋게 농담이라도 하나 던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별 수 없이 그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마주 웃어보였다.


“있지.”


달싹거리는 입술이 붉다. 석양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얘기하니까, 꼭 드라마 같다.”

“드라마?”


바보처럼 그녀의 말을 따라한다. 마법이라도 걸린 것 같다.


“침대에서 마주보고 눈을 뜨면, 꼭 방금처럼 얘기하거든.”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이 아이는. 이세하는 삐걱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회전시켰다.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리듯, 그의 사고는 그녀의 지독히도 매혹적인 입술로 자꾸만 회귀했다.


“응. 이렇게 이불을 다시 덮어줘.”


이슬비의 손이 올라온다. 어깨죽지에 아슬하게 걸쳐있는 재킷을 다시 끌어올리는 그녀의 손길. 저항할 수 없다. 시야가 좁아진다. 마침내는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과 빠져들 것 같은 푸른 눈만 남는다.


“그리고는...”


땅거미가 지는 교실에 핀 때이른 벚꽃. 씁쓸하면서 달다. 부드럽다. 


글쎄, 벚꽃잎이 바로 이런 맛이지 않을까, 하고는


쓸데없는 생각이 괜히 고개를 들었다.


*


“자, 선물이야.”


옷에 진 주름을 바로잡으며 이슬비가 예의 상자를 건넸다.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는 이세하의 모습에 이슬비는 다시금 미소지었다.


“열어봐.”


상자를 받아드는 손길이 어색하다. 손을 처음 써보는 사람처럼 허둥대며 가까스로 열어낸 상자에는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해피 밸런타인.”


아차. 이세하는 또다시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했다.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이제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같은 일을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그의 반응은 똑같을 것이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세하는 결국 평범한 대답을 되돌려주기로 했다. 제대로 된 대답은, 아마 다음 14일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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