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앞으로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이세하는 미안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사안을 전달하던 김유정의 말을 떠올렸다. 눈앞의 칙칙한 방을 홀로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전에 대기실로 사용하던 검은양 팀의 사무실이 그다지 좋은 환경이었던 것은 아니다. 좁은 공간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채워 넣다 보니 청소라도 한번 할라치면 억지로 쑤셔 박혀있는 물건을 모조리 꺼내는 대공사를 해야만 했던 데다가, 팀원들이 모두 대기 중인 비좁은 방에 끼어 앉아 게임을 하다 보면 옆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이슬비의 불만스러운 눈초리가 뒤통수에 날아와 박히기 일쑤였으니.

 

그렇다곤 해도, 이 방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도 일단은 지명수배자인 늑대개 팀원들을 검은양 사무실에 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지 곰팡내가 진동하는 방과 임시방편으로 대충 구해온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엉망진창인 청소상태의 조화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이세하의 신경줄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김유정과 함께 방을 먼저 확인하고 돌아온 이슬비가 그를 향해서 보낸 묘한 시선 역시도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그가 측은하다고 말하는 듯한 기묘한 표정. 지금까지 그녀가 그에게 그런 얼굴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세하는 이슬비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뭐,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 중요한 일이었으면 말을 했을 테고.’

 

이세하는 나쁜 방향으로 질주하던 생각을 억지로 정리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그는 스마트폰 배터리의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안주머니에서 충전기를 꺼내 들었다. 문득 휴대용 게임기의 배터리 역시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두 전자기기의 충전을 위해 방을 훑으며 콘센트를 찾기 시작했다.

 

*

 

“오, 찾았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엉망진창인 방에서 어렵사리 콘센트를 발견한 그는 기분 좋게 충전기를 연결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스마트폰이 충전 중임을 알리는 표시등이 점등되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콘센트에 몇 번이나 충전기를 다시 연결해보던 이세하는 엄습하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투덜거렸다. 구석에서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는 커다란 TV가 연결된 콘센트를 확인해보려던 그는 창밖으로 이어진 TV의 전력선에 당혹했다. 창문을 열고 몸을 내민 이세하는 특경대 차량에 설치된 발전기에 연결되어있는 전력선을 발견했다.

 

“뭐하는 거야?”

 

뒤를 돌아보자 어느 틈엔가 방에 들어온 이슬비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 방 콘센트 고장 난 것 같은데? 핸드폰 충전을 할 수가 없잖아.”

 

이슬비가 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떠오른 예의 그 표정을 본 이세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내가 말 안 했었나? 여기, 전기 안 들어와.”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이슬비의 대답이 이세하에게는 사형선고처럼 들려왔다. 잠깐의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온 그가 그러면 충전은 어떻게 하냐는 식의 질문을 절박하게 던져봤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를 다시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창밖에서 발전기를 봤지? 급한 대로 특경대가 지원해준 그 발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공용 장비가 우선순위니까 개인적인 용도의 전기 사용은 최대한 자제해줬으면 해.”
“여기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몰라.”

 

이세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다. 이곳은 위험하다, 너무 개방되어있다. 유사시에 탈출하기도 어렵다. 적들도 이곳의 존재를 금방 알아챌 것이니 어서 위치를 옮겨야 한다. 전기를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는 처사냐. 내 게임기는 어쩌란 것이냐, 등등. 뒤로 갈수록 항변보다는 그저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되어가는 느낌이었지만 그에게는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챙겨가는 그로서는 휴대용 게임 콘솔과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이슬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전기가 없으면 심심해서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네?”

 

그녀의 말에 다른 핑곗거리를 준비하던 이세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슬비의 모습에 흠칫했다. 거의 밀착하다시피 그와의 거리를 좁힌 이슬비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의 어깨를 살짝 붙잡아 내렸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에서 달콤한 향기가 확 풍겨왔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검은 리본에 최면에 걸린 듯 이세하의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신장 차를 줄인 이슬비는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그녀의 귓속말에 방금 가까스로 찾아낸 핑계가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할 말을 잃어버린 그는 멍청한 얼굴로 이슬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본 이슬비가 쿡, 하고 웃음 지었다.

 

“그럼,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방 체크는 적당히 마무리하고 나오도록 해.”

 

이슬비의 손이 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려갔다.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숨결이 그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이슬비가 방을 나간 뒤에도, 이세하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가버린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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