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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잠이 오지 않는 이세하 - 2016.05.02
  8. 신강고의 밤 - 2016.04.30
  9. 새로운 대기실 - 2016.04.14
  10. 그녀의 이야기 - 2016.03.23

달각. 글라스 안의 얼음이 무너져내린다. 그러고 보면 잔이 빈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뜨끈하게 올라오는 취기에 이세하는 갈증을 느꼈다. 손을 슬쩍 움직여 물잔을 잡아본다. 비어있다. 가서 물이라도 받아올까 싶지만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눈앞에서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있는 이슬비 때문이다. 그가 물을 확인하는 것도 그렇게 불만이었을까. 도끼눈 위로 이마에 심술이 소복이 올라 앉아있다.


“그러니까,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딴 생각만 하고 말이야.”


발음 새는 것 좀 봐라. 이세하는 내심 한숨을 푹 쉬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배리어를 바라본다. 흥이 오른 바텐더가 플레어라도 시작한 것일까. 처음 들어올 때보다 조금 시끄러워졌다. 간간이 작게 터지는 탄성, 휘파람 소리. 아무래도 직원이 금방 올 것 같지는 않다. 다음엔 꼭 그만 마신다 말하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져본다.


“다들 사람 말이라곤 하나도 안 듣고 말이지…. 꼭 너처럼.”

“…지금은 아니잖아.”

“예전엔 그랬어.”


또 이 이야기다. 술이 들어가면 그녀는 늘 검은양 팀 이야기를 한다. 하긴, 온갖 일을 겪긴 했다. 어쩌면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둔 곳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검은양 팀을 나와 여기저기로 흩어진 지도 제법 지났을 텐데. 그는 이슬비가 지금의 팀에 좀 더 애정을 가졌으면 싶다.


“그래, 그래. 예전엔 그랬지.”


대충 맞장구를 쳐준다. 지금까지 몇 잔을 마셨더라. 네 잔, 아니면 다섯 잔. 오늘은 진탕 마실 거라고 성화를 부릴 때 알아봤어야 했다. 술이 별로 세지도 않으면서. 지금의 팀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걱정이다. 같이 있었더라면 괜찮았을까. 이렇게 몇 주 걸러 한 번씩 볼 때보다, 더 잘 대해줄 수 있었을까.


“아무튼 말이야, 답답해 죽겠어.”

“그래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답답하다는 듯 덜컥 잔을 집어 든다. 불씨를 꺼버리듯 입에 술을 때려 넣는다. 치익, 불이 사그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녀의 얼굴에 술기운이 매캐하게 치민다. 이세하는 혀를 찼다. 뭐야, 바라보는 눈길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너, 내일 당직 아냐?”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냐. 아까 말해놓곤.”

“몰라. 안 나갈 거야.”


잔을 비우는 그녀를 보고 다가오던 종업원을 이세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기까지만 할게요. 이세하의 손짓을 그는 다행히 이해한 것 같다. 씩씩거리는 이슬비를 애써 달래본다.


“자, 물 마셔, 물.”

“싫어―. 술 더 시켜, 술.”

“됐거든요.”


금세 볼이 부풀어 오른다. 저 볼을, 손가락으로 집어 바람을 빼 보면 어떨까. 아마 싫어하겠지. 어렵다.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데. 남들처럼 그렇게, 힘들 땐 내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거나 하고 싶은데.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술 상대뿐이다. 스스로가 무력해진다. 딱, 한 잔만이야. 이세하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픽 웃는 모습에 안도감이 드는 자신이 싫다. 여기요, 마시던 거 한 잔 더 주세요. 얕다. 너무나도 얕다.


*


볼을 헤집는 찬바람을 보니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다. 택시를 부를까 싶었지만 역시 그만두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먼 길도 아니다. 직접 데려다주면 그만이겠지. 그만큼이라도 좀 더 같이 있는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비틀거리는 이슬비를 붙잡아 세워 목도리를 여민다.


“몸 조심해야지.”

“조심하고 있거든.”


그런 것 치고는 어설프다고, 이세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야무진 아이니까, 그가 간혹 보살피는 것보단 훨씬 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그저 자기 위로 삼아 그녀를 귀찮게 굴고 있는 것일지도. 나름 조절하면서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는 자꾸만 바닥으로 치닫는 감정을 애써 끌어올린다.


“간지러워.”


앞섶에서 꾸물대는 손길에 그녀가 목을 움츠렸다. 미안하다며 손을 빼자니, 어느새 붙잡아 도로 끌어내린다. 잠시 고정. 후우―. 차게 식은 손에 따뜻한 입김이 붉게 자국을 남긴다. 그녀의 눈길이 깃털처럼 간지럽다. 손 끝에 피가 몰린다.


“손, 되게 차다.”

“글쎄….”


시선이 팔을 타고 올라와 이세하를 향한다. “장갑 같은 건 없어?” 고개를 저으니 한숨을 폭 쉰다. 


“아무튼간에, 맨날 챙겨준다, 챙겨준다 하면서 자긴 이렇다니까.”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늘 그래왔다. 그녀가 편안하게, 즐겁게, 어쩌면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발그레 화장기 어린 입에서 입김이 피어올라 그의 얼굴을 스친다. 달큰한 술 냄새.


“우리 세하, 걱정이네.”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게. 베스스 웃는 얼굴을 보며 잠시 추위를 잊는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 그 마음을 좀 더 풀어주고 싶다. 그로 인해 그녀가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면. 연連하여 끝없는 길, 조금이나마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춥지?”


괜히 다른 말을 꺼내며 그녀를 폭 안아본다. 숨 막혀. 짐짓 밀어내는 손길에는 힘이 없다. 가슴께에 와닿는 따스한 숨결. 코트 안으로 손이 파고든다. 추우니까. 핑계처럼 말이 덧붙는다. 등을 감싸는 손가락 마디가 하나, 둘, 엮여 들었다. 이대로 하나가 된다면 어떨까. 그녀에게 그저 짐이 되지는 않을까.


“이세하.”


오똑한 코가 가슴팍에 비벼진다. 이세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안하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도움도 못 되고, 의지도 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괜찮은 걸까.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제지하지 못한다. 늘상 피하기만 하던 사람이라, 천성이 비겁하여 그랬다.


“사랑해.”


이슬비, 너를 사랑한다고, 이세하는 그렇게 말을 돌려주지 못했다. 나도야, 하고 독백처럼 읊조릴 뿐이었다. 대답은 없다. 내일이 되면, 그녀는 그만 잊어버리겠지. 아침을 반기는 두통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이야기. 그거면 됐다고 이세하는 생각했다. 언젠가, 고맙다고, 네 덕분이라고, 그런 말을 부끄럼 없이 들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가 되면 다시 말하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잠에 빠진 그녀를 업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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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락이 돌아가고 문이 열리자 온기가 훅 비어져나온다. 차게 식어있던 몸이 풀리는 느낌에 이세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뭐 해, 들어와. 이슬비의 재촉에 이세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한번 더 털어낸다. 우산은 복도에 펴둬. 벌써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는지 목소리가 제법 멀다. 어쩌면 멍하니 있었던 시간이 제법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슬비의 집에 오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몇 번이고 봤던 모습.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봐도 적응할 수 없는 풍경이다.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인형들. 한켠에 작게 자리한 화장대와 거울. 그의 방에선 결코 볼 수 없을 기물들이 그가 여성의 방에 들어왔음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그 한가운데엔 자연스레 풍경에 녹아든 이슬비가 있다. 집에 있는 날이면, 아마 늘 그 자리에 있었겠지. 그 모습조차도 이세하는 조금 거북하다. 그녀만의 공간에 침범한 외부인이 된것만 같다.

 

“뭐 해. 멍하니 서서는.”

 

털썩, 하고 그의 머리 위로 수건이 떨어져내렸다. 이슬비가 어느틈엔가 띄워보낸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그의 머리칼은 빗물로 덤벙 젖어있었다. 하긴 비가 꽤 오긴 했다. 잠자코 머리를 털어내는 이세하를 보며 그녀는 베스스 웃는다.

 

“아무튼 강아지 같다니까.”

“뭐가.”

 

수건 사이로 흘러나오는 볼멘소리. 그는 알까, 그런 모습이 그녀를 더욱 즐겁게 한다는 것을. 지금 그 모습 말이야. 웃음 사이로 작게 덧붙여본다. 아마 들리진 않았겠지.

 

“아무것도 아냐. 웃옷은 거기다 벗어놔.”

“어?”

“그거 그대로 입고 있으려고? 감기 걸려.”

 

잠시 정적.

 

“야, 그럼 뭐 입으라고?”

“그러게.”

 

얼빠진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이슬비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런 부분에서 쓸데없이 민감하다. 상반신 정도는 평소에 붕대를 감아줄 때라던가, 할 때 이미 다 본 참인데.

 

―우리 사이인데.

 

―따지고 보면, 무슨 사이인걸까. 알 수 없다.

 

“이불이라도 덮고 있던가.”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이세하는 항의의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보았다. 소용 없는 노릇이다. 빤히 마주보는 푸른 시선에 그는 그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데 보고 있어.”

 

그의 마지막 저항에 이슬비는 또다시 미소지었다. 그래, 그 정도야 뭐. 몸을 돌려 창가를 향한다. 아직도 비가 꽤 거세다. 잘도 저 비를 뚫고 집에 갈 셈이었네. 우산을 들이미는 그녀를 한사코 거절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정말 감기 걸리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들어 리모컨으로 보일러 온도를 슬쩍 올렸다. 이세하는 그런 면이 있다. 저는 곧잘 참견해오면서도, 한사코 남의 도움은 거절하려 드는. 손해보기 좋은 성격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화장실 좀 쓸게.”

 

어느새 옷을 다 벗어낸 모양이다. 시야 한 켠으로 그의 맨 등이 스쳐갔다. 옷의 물기라도 짜낼 모양이다. 그래, 많이 젖긴 했지.

 

“따뜻한 물 나오니까, 샤워라도 할래?”

“…됐거든.”

“그래도 머리는 감아야 된다?”

“네가 우리 엄마냐.”

“엄마가 머리 감겨줄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이 뒷통수에서도 보인다. 놀리는 것은 이쯤으로 하자. 적당히 손짓을 하자 또 한숨을 푹 내쉰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이슬비는 침대 위의 이불을 끌어내렸다. 잠시 조용하더니만 이내 샤워기 소리가 들려온다. 했었던지도 몰랐던 긴장이 풀린다.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여유롭고 노곤하다. 째깍, 째깍. 시계침 소리.

 

*

 

문득 정신이 들면 조용하다. 또 혼자일까 싶다.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이세하는 집으로 갔을까. 눈을 떠보니 불은 꺼져있다. 한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낮은 숨소리가 도로 내려앉힌다. 커튼으로 스며드는 빛에 의지해 곁을 바라보자 잠꼬대라도 하는지 검은 실루엣이 들썩인다. 돌아간게 아니었구나. 괜히 고맙다.

 

도대체 어느 틈에 잠이 들어버린 것일까. 아마 그가 씻는 것을 기다리던 중 같다. 이상하다. 평소엔 억지로 청해도 잘 오지 않는 잠인데. 어깨까지 끌어올려져 덮인 이불을 걷어낸다. 이세하를 기다릴 적엔 분명 이렇지 않았다. 그가 덮어준 것이겠지.

 

눈을 가늘게 뜨니 그는 여전히 웃통을 벗은 채다. 잔뜩 꼬부라져 새우잠을 자는 꼴이 퍽 바보같다. 더 추운 것은 그 쪽일텐데. 굳이 이불을 덮어주고는, 행여나 깰세라 불을 끄고 커튼까지 쳐놓았다. 그렇게 앉아 그녀가 깨기를 그저 기다리다 잠든 것은 언제쯤일까. 이슬비는 서랍장 위에 손을 뻗어 무드등을 작게 켰다.

 

그의 머리엔 아직 물기가 어려있다. 시끄러울까 헤어 드라이기도 차마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수건도 몇 장 쓰지 못하고 적당히 훔쳐내고 말았으리라. 눈치만 보는 강아지. 그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겠지. 그를 괴물보듯 쳐다보는 시선들 사이에서, 자신의 무해함을 애써 강조하며. 이슬비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본다.

 

그가 몸을 다시 움추린다. 머리칼에 달라붙은 물방울이 그 움직임에 하릴없이 굴러떨어진다. 간지러운지 작게 떨리는 속눈썹이 제법 길다. 원래 저렇게 길었던가. 이런 것을 신경쓰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물음표, 물음표. 저러다가 깨면 어쩌지. 이슬비는 어느틈엔가 그가 일어날까 걱정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라도 안심하고 쉴 수 있었으면 싶다. 그것이 그의 리더로서의 생각인지, 아니면 또다른 무언가인지, 그녀는 확정지을 수 없었다. 이마에 달라붙어 멈춰선 물방울을 잠시 바라본다. 이슬비는 그를 향해 조금 더 고개를 숙인다. 그의 매끄럽고 넓은 이마에, 입술을 가져간다.

 

―깨진 않을거야. 아마.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다만, 어쩌면 그녀는, 그가 깨어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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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하는 바닷가가 싫었다. 달라붙는 모래, 끈적이는 바람, 쓸데없이 많은 사람, 그에 걸맞는 시끄러움. 그가 싫어하는 요소를 한데 뭉쳐 버무린 것 같은 장소다. 해변에 가자는 이슬비의 말에 그가 반대한 것도 당연했다. 모처럼의 휴가는 에어컨이 있는 집안에서 편히 보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어째서 굳이 돈까지 써가면서 고생을 찾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의 항의는, 늘 그랬듯 묵살당했다. 


한숨. 벌써부터 소금기로 근질거리는 어깨를 털어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갈매기 소리. 왁자한 소음 사이로 들뜬 아이들의 새된 목소리가 비명처럼 끓어오른다. 돌아가고 싶다. 이세하는 파라솔 아래 의자에 몸을 누이고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준비할 것이 무어가 그리 많은지, 이슬비는 그가 짐을 다 옮긴 뒤에도 나타나지 않던 참이다. 이어폰 속에서 익숙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온다. 이거면 됐다. 이렇게 시간을 떼우다 보면 돌아갈 시간이 오겠지. 보기 싫은 해변 풍경은 가디건의 후드로 가려버린다. 이세하는 북적한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 속 세상으로 침잠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벼운 충격이 콩, 하고 이마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면 수영복 차림의 이슬비가 오일을 들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럴 줄 알았어, 하는 표정은 덤이다. 그녀와 함께하다 보면 제법 자주 볼 수 있는 표정이건만, 오늘의 그에겐 그러려니 하고 넘길 여유가 없다.


“왜?”


제법 퉁명스런 목소리. 이슬비는 애를 하나 데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라 쿡, 웃어버린다. 처음엔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같다고만 생각했을텐데, 지금은 그저 귀엽다. 콩깍지란게 이런 것일까.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듯 그의 머리에서 후드를 쓸어내린다.


“왜 웃어?” 재차 질문. 수북한 머리에 손가락을 굴린다. 돌아가면, 머리를 짧게 쳐보는 건 어떨까. 여길, 이렇게.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움직여도 본다.


“그냥, 귀여워서.”


어이가 없다는 듯 이세하는 한숨을 푹 내쉰다. 이슬비는 손의 오일통을 그에게 건네었다. 의문이 흘러넘치는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이슬비는 의자에 엎드렸다.


“발라줘.”

“직접 하면 안 돼?”


그럴 줄 알았다. 이슬비는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아있는 그에게 팔을 뻗었다. 체구가 작은 그녀이기에 손이 그의 얼굴에 겨우 닿는다. 약간은 거칠한 뺨에 손가락을 굴린다. 목으로, 어깨로, 팔로. 여전히 게임기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을 살짝 끌어내린다.


“피부, 다 탈텐데.”

“…애초에 안 왔으면 괜찮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손에는 저항이 없다. 어차피 그는 그렇다. 불만이 가득하다가도, 눈앞에 닥친 일은 곧잘 처리해주는 것이다. 쓸데없이 착한 남자. 이슬비는 다시 의자에 엎드렸다.


“자, 자. 햇빛이 많이 따가워.”


또다시 한숨. 어쩔 수 없지, 하는 혼잣말과 함께 삐걱, 의자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영복 매듭을 끌르는 손길이 간지럽다. 이슬비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었다.


*


손에 짜낸 오일은 흔히들 들려오는 이야기와 달리 미지근했다. 날이 제법 더운 탓이리라. 뜨거운 차안에 몇 시간을 보관해놓았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눈앞에는 선물상자처럼 풀어헤쳐진 이슬비의 새하얀 등. 글쎄, 오늘이 지나면 저 뒷모습에 다른 빛깔이 칠해지는 것일까. 그는 조금 아쉬웠다. 이렇게 꼼꼼히 오일을 바르면 좀 낫지 않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등에 잠자코 손을 비볐다. 고운 곡선의 어깨, 귀엽게 비져나온 날개뼈, 오목하게 패인 등골. 잠자리에서 몇 번이고 봤을 모습이건만, 장소가 바뀐 것 만으로도 꽤나 느낌이 새롭다.


“간지러.”

“꼼꼼히 발라야 되니까 참아.”

“…손이 야한데.”


쓸데없는 참견이다. 아마 농담이겠지. 묵묵히 시선을 옮기며 오일을 바르던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녀의 목덜미에 발갛게 자리잡은 작은 언덕. 꼭대기에는 펜으로 찍기라도 한 듯 검붉게 점이 박혀있다.


“모기는 또 언제 물렸대.”

“그러게. 몰랐어.”


몰랐다니, 형편좋은 이야기다. 이세하는 한참을 긁다가 그만 딱지가 올라앉아버린 자신의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런 데서 묘하게 무신경한 부분이 있단 말이야. 쓸데없이 약이 오른다. 허리께에 가있던 손을 올려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른다.


“…간지럽다니까.”

“꼼꼼히 발라야 한대도.”

“일부러 그러는거지?”

“응.”


간질, 간질. 자국이 성이 난다.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꼭 키스마크 같다. 그러고보면 최근엔 꽤나 뜸했다. 슬쩍 상체를 숙여본다. 간지러움이 올라오는지 이슬비가 목을 조금씩 비튼다. 움직임과 함께 씰룩이는 어깻죽지가 야릇하다. 의외로 바닷가도 나쁘지 않을지도. 슬쩍 올라오는 감상을 이세하는 고개를 저으며 떨쳐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저 허리를 숙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꺅!”


덜컥 요동치는 어깨를 잡아누른다. 코를 간질이는 머리칼에서 린스 냄새가 훅 풍겨왔다. 혀 끝에 슬쩍 느껴지는 짠 맛. 쭈욱, 빨아당긴다. 지금부터 잠시동안, 나는 모기다. 쪽, 쪽. 입술에서 비어져나오는 소리마저 간지럽다. 정강이를 걷어차는 다리의 감촉에 모기가 이래서 피를 빠는 것일까, 하는 바보같은 감상이 떠올랐다. 이쯤이면 됐을까. 마지막으로 목덜미를 훑는다. 8월의 햇빛 아래. 그녀의 목선을 따라 작게 구슬진 침방울. 미소짓는다. 어깨를 풀어주면 냉큼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는 이슬비. 갑작스레 힘을 써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상기된 얼굴이 귀엽다.


“이세하, 너…”


양껏 피를 빨고 난 모기는 으레 성난 손길에 붙잡혀 죽고야 마는 것이다. 이세하는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딱히 후회는 없었다. 이 정도면 꽤나 만족스러운 교환이다.


“이러고 어떻게 해변에 있으란거야—!”


이슬비의 비명. 그리고 손과 등이 맞부딪히며 나는 상쾌한 파열음. 그렇게, 소란스러운 해변의 풍경에 두 소리가 더해졌다. 이럭저럭, 생각보단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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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나서야 겨우 있었구나, 하고 깨닫고 마는 것들이 있다. 집에 돌아오면 당연하다는 듯 반겨주는 목소리. 눈을 뜨면 차려져있는 아침밥.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친구. 첨단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가락. 기타등등. 이세하는 그 목록의 끝에 작게 항목을 추가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자각.

—인간성.


“쇼그, 대상: 이슬비. 고통 피드백 활성화. AI 지원 익일 06시까지 비활성화.”

“사용자 이세하. 명령권 확인했습니다. 실행합니다.”


불만이 가시지 않은 반 쪽의 자홍빛 눈길. 이세하는 그녀의 두 눈이 모두 푸르렀던 시절을 기억한다. 글쎄, 그녀를 마지막까지 말렸다면, 그래서 그녀의 머리가 여전히 4월의 벚꽃과 같았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그렇더라도 어딘가에서 그녀는 그만 벽에 부딪히고 말았을까. 그 스스로가 좀 더 열심이었다면, 그녀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면.


“말했잖아. 집에서는 돌려 놓겠다고.”

“…불편하단 말야.”


이슬비의 볼이 부푼다. 이런 부분에선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일과가 끝나면 예외없이 드라마 삼매경에 빠진다던가. 그가 딴 짓이라도 할라 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던가. 그렇게 딱딱하게 굴다가도 묘한 부분에서 귀여운 면이 있다던가. 누군가가 그녀가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세하는 할 말이 없었다.


—여러분께는 필요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말해드리고 싶네요.


“안 돼. 말 들어.”

“…….”


그가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슬비가 도무지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였다. 물론 그녀에게 딱히 식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유지하는 것은 음식이 아닌 충전한 에너지니까. 하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음식을 씹고, 삼키고, 소화하고, 그리고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이어온 의식이자 즐거움을 갑작스레 멈출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하세요. 신체의 몇 퍼센트가 기계인지는 상관없어요.


미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뜨거운 음식을 기계적으로 밀어넣는 모습에 의문을 표하는 그에게 이슬비는 감각 센서를 대부분 꺼놓고 있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편리하니까. 맞는 이야기다. 감각이라는 것은 때로 불편하다. 그녀처럼 왠만해선 다치지 않는 몸을 가진 경우엔 더욱 그랬다. 합리적인 결정. 지극히 그녀답다. 그리고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아이는, 여전히 인간이에요.


그녀라면, 예전의 그녀라면, 정말로 그랬을까.


*


어제와도, 그제와도 같은 저녁이었다. 이슬비는 간단히 세면세족을 마친 뒤—이 역시도 이세하의 주문이었다—거실에 들어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식사의 준비는 늘 이세하의 담당이었다. 순수히 자신의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를 귀중한 시간을 뺏어가며 그녀에게 준비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엔 당번제를 주장하던 그녀였지만 이세하는 완고했다. 그렇게 이슬비가 두 손을 든 것이 한 달쯤 전의 일이다. 이세하는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떠올리며 최대한 가볍게 식사를 준비했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TV에서 울려퍼지는 CM송과 한데 섞였다.


“밥 먹어.”


이세하의 말에 이슬비가 몸을 띄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몸을 일으키면 될 것을. 그가 그녀에게 억지로 식사를 시키게 된 이후로 그녀는 꼭 그런 식이었다. 괜한 일을 시키는 그를 향한 작은 항의일까. 그렇잖으면 저 편이 오히려 몸에 익어버린 것일까. 이세하는 작게 혀를 찼다.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집어올리는 그녀의 매끄러운 손가락. 이세하는 수저를 들기 전에 잠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림을 집어들어 입에 넣는다. 오물오물. 작게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 그 입술은 차가울까. 따뜻할까. 부드러울까. 손가락을 들어 저 볼을 살짝 찔러보고 싶다. 잡다한 생각에 표류하던 이세하는 그를 향하는 이슬비의 시선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왜?”

“밥.”

“…?”

“안 먹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너 보느라 바빠서.”

“장난치지 말고.”


이슬비의 눈가가 살짝 찌푸러들었다. 저 표정은 본디 그녀의 것이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고개를 흔들어 털어낸다. 예전처럼, 늘 이렇게 가벼운 이야기만 할 수 있다면.


“정말인데.”

“됐거든요.”


괜히 웃어보였다. 이슬비는 고개를 젓고는 젓가락을 놀린다. 오물오물. 입이 다시 움직인다. 관찰은 이어진다. 이세하는 입에 들어가는 반찬의 맛을 잊었다. 그의 그릇은 금새 비었다. 식사가 제법 느린 편인 이슬비 역시도 조만간 식사를 마칠 터였다. 이세하는 머릿속의 시계를 다시한번 확인한다. 한동안 잠자코 식사를 하던 이슬비가 그러고보니, 하고 운을 떼었다.


“오늘은 양이 좀 적네.”

“…그래?”


약간의 휴지가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실수였다. 그녀의 눈에 대번 걱정이 어린다. 내 고민은 다 너 때문인데. 이세하는 약간 원망스럽다.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럼 왜 그래. 이슬비가 볼멘스레 묻는다. 글쎄, 왜일까. 지금 냉장고를 열었다간 그녀는 그의 선물을 기계적으로 밥과 함께 입 안으로 밀어넣을 것 같다. 이세하는 대답을 미룬다. 그녀가 케묻는다면, 그럼 그는 어떤 핑계를 대야할까.


“좀 이따가 얘기할게.”

“그러던가.”


의외로 시원스레 납득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맥이 빠졌다. 그녀가 그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다. 예전같았으면 곤란하게도 몇 번이고 그를 닦달했을까. 지금의 이슬비는 이슬비일까. 시끄러워. 이세하는 찬물을 들이켰다. 이슬비는 이슬비야. 이세하는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이슬비는 이슬비야.


*


드라마의 차회예고가 시작되자 이슬비는 TV를 껐다. 그녀는 차회예고를 보는 것보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는 편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세하는 그녀가 처음 수술을 받았을 무렵을 떠올렸다. 실수로 전황예측 시스템을 작동시켜 한창 흥미진진하던 드라마의 전개를 스포일링 당했던 날. 하루종일 시무룩해있던 그녀의 모습을 지금의 그녀와 겹쳐본다. 지금의 그녀는 다음 화를 상상하는 것일까, 그렇잖으면 프로그램이 도출해낸 전개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일까. 


“끝났어?”

“응. 끝났어.”


이슬비가 소파에 몸을 기댄다. 드라마란 건 몸의 긴장을 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재밌는 것일까.


“이제 쉬어야지.”


와서 앉으라는 듯, 그녀의 손이 소파를 통통 두들긴다. 이세하는 그 자리에 서서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궁금증이 어린다.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만.”

“…그래서, 아까는 뭐였어?”

“글쎄, 뭘까.”


조심스레 운을 띄워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맞춰봐.”

“음….”


그녀의 고민이 제법 길다. 이세하는 그 시간 속에 빠져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손에 잡히는 이것은 무엇일까. 냉장고 문이다. 어느새 땀이 배였는지 손아귀에 잡히는 감각이 제법 미끄럽다. 그녀의 손에는 땀이 날까. 그렇지 않을까. 이세하는 그저 손잡이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답을 기다렸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글쎄. 네가 말해줄래?”


시야가 어둡다. 이세하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여전히 어둡다. 그는 맥없이 답을 토해냈다.


“오늘은, 네 생일이야.”


무표정. 돌아오는 반응은 없다. 이세하는 슬펐다. 그가 공포에 질려 장님처럼 더듬거리던 장막이 갑작스레 벗겨진 기분이었다. 장막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끝없는 공허 뿐이었다. 조금 늦게, 이슬비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야.”


참담하다. 이세하는 충동적으로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음식. 초콜릿 케이크. 이세하는 케이크를 꺼내 그녀에게 들어보였다.


“그럼, 이건 누구 케이크야?”


침묵이 제법 길었다. 어깨가 무엇에 짓눌리듯 무겁다.


“……글쎄.”


그녀에게 주었던 첫 번째 선물을 떠올린다. 팀원들과 함께 산 펭귄 인형. 선물을 받아들며 행복한 미소를 띠우던 그녀. 그 모습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이세하는 그 날에 그녀를 막지 못한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웠다. 털썩. 케이크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세하.”

“왜.”


대답하는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눅눅했다. 이세하는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그를 바라보며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우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클로저야.”

“…….”

“차원종을 쓰러뜨리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자야.”


부정의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강남이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당당히 외쳤던 그녀의 다짐. 이세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난, 그거면 충분해.”

“이슬비는, 어딨어?”


반항처럼 되묻는 그의 말에 이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색이 다른 두 눈. 이세하는 거기에 기억 속 푸르른 두 눈을 애써 대입해보았다.


“…이슬비는, 필요없어.”

“나는 필요해.”


치솟는 욕지기에 헛구역질을 내뱉으며 이세하가 말했다. 이 말을 조금 더 빨리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몇 번을 후회하면서도 실체는 희미했던 미련이 구체화된다. 그날, 너를 붙잡고 말할 수 있었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슬비가, 필요해.”

“…….”


대답이 없다. 이세하는 주저앉는다. 그저 울고싶었다. 자존심따윈 내던진 채로 미친 듯 울고 싶었다. 시야 한 켠에 들어온 케이크 상자는 한 켠이 우그러져 있었다. 이세하는 그 망가진 상자가 꼭 자신같다고 생각했다.


“…꼭, 드라마같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몸이 물 먹은 솜 같다.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다. 이슬비가 작게 웃는다. 그녀의 웃음은 허무하다.


“후회같은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가오는 그림자에 이세하는 고개를 들었다. 이슬비는 그녀의 앞에 그와 꼭 닮은 자세로 주저앉았다.


“나빴어.”

“…뭐가.”


정도연은 그녀가 인간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이세하는 과학도, 공학도 잘 몰랐다.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에 얼마만큼의 노력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 아이는, 여전히 인간이에요.


“네가 지금 그렇게 말하면….”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훑어냈다. 따뜻했다. 사람의 눈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바보였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주욱 여기에 있었다.


“그만 후회해버리잖아.”

“…….”


잔뜩 뒤엉키고, 동시에 텅 빈 머리를 억지로 정리한다. 그는 누덕누덕 누벼낸 단어를 애써 꺼내었다.


“…후회같은 건, 하지 마.”

“해.”

“…하지 마.”


이슬비가 말없이 그를 노려본다. 이세하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마저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무거운 팔을 들어, 이세하는 이슬비를 껴안았다. 품 안의 그녀는 따뜻했다. 실제로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결국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뭘?”

“넌 여전히 이슬비야.”


대답이 없다. 온기, 온기. 그저 온기 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넌, 이슬비야.”


그녀의 팔이 그를 마주 안았다. 고마워, 하는 속삭임에 이세하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더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슬비를. 클로저가 아닌 이슬비를.


*


“케이크, 맛있네.”


형태가 조금 망가진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이슬비가 말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케이크는 그에게 지나치게 달았다. 어쩌면 직원에게 상담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맛있어.”

“미안하네. 뭉개져서.”


이슬비는 상관없다는 듯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볼을 슬쩍 찔러보았다.


“하지 마.”

“…그간 많이 참았단 말이야.”


이슬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에게 한바탕 쏟아놓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축하드립니다. 이슬비 님, 이세하 님.”

“쇼그?”


이세하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아까 분명히 비활성화 했을 터인데.


“사실, 비상시를 대비해서 비활성화 상태에서도 기본적인 기능은 유지됩니다. 그동안은 재미있어서 말을 안 했을 뿐입니다.”

“…뭐?”


이세하보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슬비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러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세하는 이 다음의 상황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두 분의 대화는 정말 드라마를 뛰어넘는 성질의 것이더군요. 여러분의 협조로 저는 또다시 감정의 완성에 다가섰습니다.”

“…….”


이슬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폭발 직전의 화산이 이런 느낌일까. 이세하는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눈치가 없달까, 그저 평소대로랄까. 쇼그는 그녀에게 또다시 기름을 퍼부었다. 결국, 이슬비는 폭발하고야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이렇게 시술이 후회되는 건 처음이야!”


내일이 되면 당장 정도연에게 따져야겠다는 것이 이세하가 제대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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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파한 지도 제법 지난 시간. 교실보다 운동장에서 더 많은 학생을 찾을 수 있는 시각, 그래서 북적거리던 복도에 오직 말라가는 대걸레 자국만이 남는 때. 그 늦은 시간에 이세하는 벌써 한참이나 교내를 헤매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시간이건만, 이세하는 데룩데룩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등 뒤에 어설피 감추고 있는 선물 가방 때문이었다. 행여나 누가 볼세라 종일 가방 안에 숨겨져 있던 물건. 이세하는 기회가 되는대로 이슬비에게 그것을 전해줄 계획이었다.


문제는 평소에는 곧잘 그를 찾아와 그의 태도나 불성실함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던 그녀를 오늘따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그녀의 교실로 향해보았지만, 이슬비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이후의 쉬는 시간에도, 방과 후의 교문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세하는 그녀가 학교 안의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단서 하나만으로 방과 후의 학교를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의 목소리를 듣고 혹여나 이슬비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일까. 이세하는 제법 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다. 클로저 업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돌아가기 시작한다 해도 자유 시간이 빠듯했다. 초조하게 창 밖으로 눈을 돌리자 반대편의 화단이 눈에 들어온다. 막 망울을 트기 시작한 노란 꽃잎. 벤치에 앉아있는 작은 뒷모습. 단정한 붉은 재킷. 스치는 분홍빛. 이세하는 작게 투덜거렸다. 진작 창밖을 보는 거였는데. 그는 바쁜 걸음으로 계단을 향했다.


*


“왔어?”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말을 거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감으로.”

“감?”


여전히 뒷모습. 이세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녀의 앞으로 돌아가 선물을 보여줘야 할까. 그렇잖으면 용건에 대해 우선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렇지, 감.”

“그렇구나.”


적당한 대답. 뜬구름을 잡는 듯한 이야기다. 상정 외의 상황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냥, 이 자리에 가방을 놓고 가버리는 것은 어떨까.


“일이 없으면, 늘 여기에 있어.”

“응?”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뉘엿한 태양이 채 비추지 못한 이슬비의 얼굴은 제법 어두웠다. 그림자 아래 더욱 짙어지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 괜히 답답해지는 마음에 이세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기숙사에 있을 땐 잘 몰랐는데,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조용해서.”


그는 이슬비의 말에 수긍한다. 홀로 남겨진 집이란 늘 그렇다. 해방감에 즐거운 것도 잠시뿐. 해가 지면서 그림자가 드리우면 더럭 겁이 나고야 만다. 결국에는 어둠이 자라나 그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


외롭다.


“그래서, 너무 어두워지지 않으면 웬만하면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

“…춥지는 않아?”

“글쎄, 어떨까.”


그녀의 입이 미소를 그려낸다. 발갛게 물든 뺨은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 탓일까, 그렇잖으면 햇살에 덧칠된 것일까. 이세하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기억.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의미 없는 짓이었다고 이세하는 생각한다.


그는 그만 이슬비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당장에라도 고여서 흘러내릴 것 같은 선홍빛 핏기. 그 위에 새겨진 가지런한 주름 하나하나가 이세하의 망막에 새겨진다. 각인된 이미지는 기억과 합쳐진다. 이슬비의 입술.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있지.”


도톰한 입술이 다시 열린다. 부드럽게 떨어지며 모양을 바꾸는 이슬비의 입을 보며, 이세하는 괜히 갈증을 느낀다.


“응?”

“앞으로도 가끔, 여기로 와줄래?”


이전에는 그저 당돌하다고, 자신감이 넘친다고만 생각했던 눈이었다. 그 푸른 시선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그럴게.”


그는 자신의 대답에 확신이 담겨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녀가 그 작은 도피처에서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외의 위안거리를 찾을 수 있기를.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확신을 줄 수 있기를.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이 작아진다.


“안 줄 거야? 선물.”

“…줘야지.”


짙어지는 미소. 그녀의 미소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어쩌면 바로 옆의 화단의 향기일지도 모른다고, 이세하의 마음 한구석에서 작게 딴죽을 걸었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이슬비가 평가하듯 그의 선물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새삼 부끄럽다.


“너무 커. 무거울 것 같아.”

“별로 그렇진 않아.”

“들어다 줘.”


술에 취한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 탓에 그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돌아가 집에서 식사를 준비할 시간을 생각해본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아카데미에 다녀온 뒤 그에게 호들갑을 떨던 서지수를 떠올린다. 조금 늦더라도, 그녀와의 일이라면 서지수는 이해해주겠지.


“그럴까.”


이슬비의 대답이 짙어지는 꽃향기로 돌아왔다. 아아, 나는 역시, 이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이세하는 말로는 풀어내지 못할 그 생각을 머릿속에 간직했다. 책가방을 고쳐매는 이세하를 보며 이슬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하야.”

“왜?”


올려다보는 시선에 이세하는 눈을 피했다. 갑자기 불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동물적 감각이라는 것일까.


“짐 들고 가면 힘들 텐데.”


당장 그녀의 말을 멈춰야 할 것 같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조금 늦은 판단이었다.


“라면, 먹고 갈래?”


그는 다시 한번 시간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것이 이세하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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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가 그리 서운한지 온종일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기어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톡, 톡, 툭, 투둑. 리듬감 있게 창문을 두드리던 빗방울 소리가 이내 굵어졌다. 예비소집이 끝난 뒤, 선생에게 호출을 받고 뒤늦게 하교를 준비하던 이세하는 점점 커지는 빗소리에 창밖을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비 오잖아?”


비를 맞는 것 자체를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몸이 좀 젖는다고 감기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교복이 좀 젖거나 구겨진대도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방에 들어있는 게임기가 젖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한동안 그칠 것 같지 않은 모습에 이세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는 자습서 몇 권과 게임기가 들어있었다. 그가 꺼낸 것은 물론 게임기 쪽이다. 늘 그러하듯, 자연스레 양손으로 게임기를 잡은 이세하는 검지를 올려 전원 버튼을 슬라이드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게임기는 묵묵부답이었다.


“약이 없나?”


분명히 어젯밤 충전을 했을 게임기일 터였다. 짬마다 한석봉과 게임을 하긴 했다지만 벌써 배터리가 다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운수 사납게도 충전기를 깜빡 집에서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오른 이세하는 비를 맞으면서 귀가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날씨가 여의찮았다. 입춘이 지났다곤 하지만 때는 아직 겨울에 가까웠고, 그런 날이었기에 내리는 비는 차갑기가 얼음장 같았다. 잔병치레할 걱정이 없다곤 해도 괜히 사서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투덜거리며 교복 재킷을 벗었다. 이불처럼 덮어 책상에 엎드린 채 한 숨 잘 요량이었다. 텅 빈 교실이 제법 썰렁했지만, 바깥보다는 나았다. 그런 그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빗방울이 투둑투둑 웃었다.


비가 오는 날은 좋다. 시끄럽게 떠드는 동갑내기들의 목소리도, 놀 곳을 찾아 와글와글 돌아다니는 꼬맹이 무리의 외침도 없다. 저마다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 혼자가 되는 시간.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홀로 남아 썩어가고 있는 것이 자신뿐이 아니란 것이 좋았다. 음침하고 꿉꿉한 자기 위안에 몸을 감싼 채 이세하는 잠에 빠졌다.


*


이세하는 희미하게 들리는 숨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기분이 나쁘다. 무방비한 자신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심하다고 생각했을까. 알 수 없다. 잠자코 엎드려 귀를 기울여본다. 숨소리가 제법 규칙적이다. 졸고 있는 것일까. 그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그의 기상을 눈치챈 기색은 없다. 교복이 스치는 소리도, 삐걱이는 의자의 비명도, 아무것도 없다. 인기척의 방향으로 슬쩍 재킷을 열어 시야를 튼다. 


어둑한 시야에 그가 가장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 비쳤다. 붉은 재킷 위로 보이는 분홍빛 머리. 이슬비. 검은양 팀의, 그의 리더. 괜히 움츠러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약이 오른다. 몸을 일으켜 보니 이슬비는 팔장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녀 역시도 미처 우산을 챙겨오지 못한 것일까, 어깨에는 거뭇하게 물기가 앉아있다. 촉촉이 젖은 머리칼이 방금 샤워를 마친 모습을 연상케하여 무심코 고개를 돌리게 된다. 텅 빈 교실, 꼭 닫힌 문, 빗방울이 엉긴 창문, 그리고 그녀 앞의 책상.


이세하는 그녀가 앉아있는 책상 위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누구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일까.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었던 것일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청소다 뭐다 하여 왁자지껄했던 학우들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본인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혹시 불쾌해하진 않을까. 궁금증은 꼬리를 문다. 고민, 고민. 덕분에 이세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파란 눈을 조금 늦게 발견했다.


“─깼어?”


당혹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꺼내보았지만 대화의 시작으로 그다지 적절한 말은 아니었다. 낭패감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이슬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응, 깼어.”


할 말이 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는 말재주꾼도, 좋은 대화상대도 아니었다. 이럴 때 솜씨좋게 농담이라도 하나 던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별 수 없이 그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마주 웃어보였다.


“있지.”


달싹거리는 입술이 붉다. 석양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얘기하니까, 꼭 드라마 같다.”

“드라마?”


바보처럼 그녀의 말을 따라한다. 마법이라도 걸린 것 같다.


“침대에서 마주보고 눈을 뜨면, 꼭 방금처럼 얘기하거든.”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이 아이는. 이세하는 삐걱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회전시켰다.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리듯, 그의 사고는 그녀의 지독히도 매혹적인 입술로 자꾸만 회귀했다.


“응. 이렇게 이불을 다시 덮어줘.”


이슬비의 손이 올라온다. 어깨죽지에 아슬하게 걸쳐있는 재킷을 다시 끌어올리는 그녀의 손길. 저항할 수 없다. 시야가 좁아진다. 마침내는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과 빠져들 것 같은 푸른 눈만 남는다.


“그리고는...”


땅거미가 지는 교실에 핀 때이른 벚꽃. 씁쓸하면서 달다. 부드럽다. 


글쎄, 벚꽃잎이 바로 이런 맛이지 않을까, 하고는


쓸데없는 생각이 괜히 고개를 들었다.


*


“자, 선물이야.”


옷에 진 주름을 바로잡으며 이슬비가 예의 상자를 건넸다.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는 이세하의 모습에 이슬비는 다시금 미소지었다.


“열어봐.”


상자를 받아드는 손길이 어색하다. 손을 처음 써보는 사람처럼 허둥대며 가까스로 열어낸 상자에는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해피 밸런타인.”


아차. 이세하는 또다시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했다.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이제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같은 일을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그의 반응은 똑같을 것이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세하는 결국 평범한 대답을 되돌려주기로 했다. 제대로 된 대답은, 아마 다음 14일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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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다.

이세하는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괜히 몸을 굼실굼실 움직여본다. 지금은 몇 시일까. 다른 팀원들은 자고 있을까. 의미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런 밤이 있다. 사지가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불편한 밤. 눈을 감으면 어둠이 귓가에 천둥처럼 속삭이는 밤이. 너 때문이야. 기대 이하였다. 실망이다. 목소리를 바꿔가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귓속말에 이세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와삭와삭 울리는 이불 소리에 속삭임이 잠시 물러난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일을 겪는다면 누구라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의 불운만을 저주했다. 과거에 가위눌리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겁쟁이. 겁쟁이. 어느 새 이불 속에 스며든 어둠이 그를 매도했다. 그래. 나는 겁쟁이다. 눈앞의 인적 드문 길에 겁먹어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했다. 그 길이 짐승의 길이 아니었음을, 마땅히 사람이 택하는 길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저 길은 막다른 길일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녀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거친 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그 길 끝에서 밝은 빛을 보았을지도. 그리하여 그녀가 밟은 길은 어느새 모두가 목표로 삼을 대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러지 못했어.

이세하는 이불을 걷어찼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하잘것없는 변명이라도 각주삼아 덧붙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 대면 너무도 비열한 존재였기에 그랬다.

잠을 포기하고 머리맡에 손을 뻗어 늘 그 자리에 놓여있는 게임기를 잡았다. 게임기의 전원을 켜자 그가 자주 플레이하는 게임이 실행되었다. 용사가 되어 괴물들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고, 마지막엔 붙잡힌 공주를 구해내는 흔해빠진 게임이다. 게임 속 세상에서는 모두가 그를 환영한다. 그는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한다. 어렵지 않게 공주를 구해내고, 단 한명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너는 아니잖아.

경쾌한 배경음과 함께 타이틀 화면이 출력되었다. 본래 음침했던 타이틀 화면은 그가 엔딩을 봄과 동시에 바뀌었다. 그가 마지막 적을 쓰러뜨린 그 순간, 모두가 행복해졌다. 그는 하나의 세상을 구해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현실의 파도에 휩쓸릴 따름이었다. 알파퀸의 아들, 남다른 위상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나 차원종에 맞설 힘을 가진 존재는 그곳에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이세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진작 최선을 다했더라면. 그 아이처럼, 그렇게 했더라면. 하지만 이제와선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는 시간을 의미없이 써버린 존재가 되었다. 그녀처럼은 살 수 없었다.

부러웠다. 그녀가 너무도 부러웠다. 아픔을 딛고 일어날 힘을 가진 그녀가. 자신을 불태우며 노력할 힘을 가진 그녀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 과정을, 그녀가 겪어야 했을 고통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녀를 부러워하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쓰레기를 뒤적이는 넝마주이, 시체의 배를 파헤치는 까마귀. 그것이 이세하였다. 넝마주이에게는 멀쩡한 사지가 있었다. 까마귀에게는 하늘을 날아 먹이를 잡을 날개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찾은 곳은 결국 쓰레기장과 시체였다. 과정 없이 결과만을 노리는 기회주의자. 자신은 그런 존재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그가 생득권처럼 가지고 태어난 위상력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비겁자.

어느 틈엔가 눈가에 맺힌 물기마저 가증스러웠다. 그에겐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었다. 눈가를 거칠게 닦아낸 이세하는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게임으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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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석양이 죽은 자리에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시계를 검게 물들였다. 그 어둠 속에서 의료 물품과 종이로 어지럽혀진 교실을 정리하던 푸른 머리의 청년, 아니, 소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그러모으다가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종이는 이면지였다. 알아볼 수 없는 그래프나 표가 잔뜩 인쇄된 종이를 뒤집자 ‘신강 고등학교’라는 학교명이 적힌 시험지가 얼굴을 드러냈다. 아마 교무실에서 적당히 집어온 종이일 것이다. 제 소명을 잊고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상자 속에 갇혀있던 종이. 그 뒤 영문 모를 실험에 동원되고 다시 버려진 그것에 푸른 머리의 소년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쓰레기통까지 가기도 귀찮다는 듯 종이를 구겨 내던지려던 그는 마음을 고쳐 한 장을 적당히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차원종을 치료했다는 사실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 맘바를 치료한 흔적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무기질적인 기계. 그리고 그 기계보다 더욱 무기질적인 단어를 나열하는 목소리. 평소에도 늘상 겪던 상황이었건만 이만큼이나 그를 답답하게 만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생각을 곱씹으며 주머니 속의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기계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시야에 흰 장발과 머리에서 솟아난 뿔이 눈에 띄는 소녀가 들어왔다.

“나타 님.”

나타라고 불린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소녀는 목을 움츠리며 그에게 주눅든 눈빛을 향했다.

“뭐야? 금방 끝낸다고 했잖아.”

“아뇨, 그게...”

나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처음 그녀를 만난 뒤로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을 늘이는 데에는 정말이지 신물이 났다. 나타는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감각을 애써 억눌렀다.

“젠장, 빨리 용건만 말해. 바쁘다고.”

“아, 네. 그, 트레이너님이 뒷정리는 다른 쪽에서 맡기로 했으니, 이동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잠깐 휴식을 취하시라고...”

“알았어.”

나타가 한숨을 쉬듯 내뱉자 백발의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갔다.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타는 책상에 걸터앉아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눈으로 훑었다.

그로서는 영원히 겪어보지 못할 세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는 누구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대공원에서 상대했던 자기 또래의 남성 클로저를 떠올린 나타는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과 그가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나타와 그를 나눈 기준에 논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시험지를 바라볼수록 음울한 방향으로 가속하는 의식을 되돌리며 나타는 정리해 두었던 펜을 집어 들었다. 공란으로 가득 메워져 있던 시험지에 두 글자가 적혔다.

‘이름: 나타’

그에게는 분명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흐릿한 기억을 아무리 되새겨도 그에게 주어진 이름 석 자가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지긋지긋한 두 글자가 남아 그를 구속했다.

“빌어먹을.”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다시금 떨쳐낸 나타는 시험지에 펜을 놀렸다. 답 따위는 모른다. 그저 적당히 객관식 문제의 답을 체크할 뿐이었다. 금새 칸을 채운 나타는 시험을 일찍 끝낸 학생들이 으레 그러하듯 공란에 낙서를 끼적였다. 쿠크리를 든 자신, 포장마차, 어묵이라는 이름의 음식, 자신에게 어묵을 건네주던 포장마차의 주인. 여우귀가 장식된 노란 후드를 그린 나타는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를 본 지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았을 텐데. 나타는 후드 아래를 검게 칠했다. 그녀의 기억 속 그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사라져버린 푸른 머리의 소년. 그 외에 그가 그녀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나타는 종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종이를 잡은 손에 위상력을 슬쩍 끌어모았다. 손바닥으로 분출된 위상력에 휘말린 종이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펜을 집어든 나타는 교실 구석으로 향했다.

*

“나타 님, 이동 명령이 내려왔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고있던 눈을 뜬 나타는 교실 밖에서 자신을 부른 소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달이 텅 빈 교실을 비추자 하얀 벽 한켠에 이전에는 없었던 얼룩이 드러났다.

‘나타 왔다 감’

얼마 뒤, 현장 정리를 맡은 인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벽의 얼룩을 확인한 뒤 그 낙서를 깨끗이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 다섯 글자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달빛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담담히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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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이세하는 미안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사안을 전달하던 김유정의 말을 떠올렸다. 눈앞의 칙칙한 방을 홀로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전에 대기실로 사용하던 검은양 팀의 사무실이 그다지 좋은 환경이었던 것은 아니다. 좁은 공간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채워 넣다 보니 청소라도 한번 할라치면 억지로 쑤셔 박혀있는 물건을 모조리 꺼내는 대공사를 해야만 했던 데다가, 팀원들이 모두 대기 중인 비좁은 방에 끼어 앉아 게임을 하다 보면 옆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이슬비의 불만스러운 눈초리가 뒤통수에 날아와 박히기 일쑤였으니.

 

그렇다곤 해도, 이 방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도 일단은 지명수배자인 늑대개 팀원들을 검은양 사무실에 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지 곰팡내가 진동하는 방과 임시방편으로 대충 구해온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엉망진창인 청소상태의 조화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이세하의 신경줄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김유정과 함께 방을 먼저 확인하고 돌아온 이슬비가 그를 향해서 보낸 묘한 시선 역시도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그가 측은하다고 말하는 듯한 기묘한 표정. 지금까지 그녀가 그에게 그런 얼굴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세하는 이슬비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뭐,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 중요한 일이었으면 말을 했을 테고.’

 

이세하는 나쁜 방향으로 질주하던 생각을 억지로 정리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그는 스마트폰 배터리의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안주머니에서 충전기를 꺼내 들었다. 문득 휴대용 게임기의 배터리 역시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두 전자기기의 충전을 위해 방을 훑으며 콘센트를 찾기 시작했다.

 

*

 

“오, 찾았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엉망진창인 방에서 어렵사리 콘센트를 발견한 그는 기분 좋게 충전기를 연결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스마트폰이 충전 중임을 알리는 표시등이 점등되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콘센트에 몇 번이나 충전기를 다시 연결해보던 이세하는 엄습하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투덜거렸다. 구석에서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는 커다란 TV가 연결된 콘센트를 확인해보려던 그는 창밖으로 이어진 TV의 전력선에 당혹했다. 창문을 열고 몸을 내민 이세하는 특경대 차량에 설치된 발전기에 연결되어있는 전력선을 발견했다.

 

“뭐하는 거야?”

 

뒤를 돌아보자 어느 틈엔가 방에 들어온 이슬비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 방 콘센트 고장 난 것 같은데? 핸드폰 충전을 할 수가 없잖아.”

 

이슬비가 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떠오른 예의 그 표정을 본 이세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내가 말 안 했었나? 여기, 전기 안 들어와.”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이슬비의 대답이 이세하에게는 사형선고처럼 들려왔다. 잠깐의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온 그가 그러면 충전은 어떻게 하냐는 식의 질문을 절박하게 던져봤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를 다시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창밖에서 발전기를 봤지? 급한 대로 특경대가 지원해준 그 발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공용 장비가 우선순위니까 개인적인 용도의 전기 사용은 최대한 자제해줬으면 해.”
“여기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몰라.”

 

이세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다. 이곳은 위험하다, 너무 개방되어있다. 유사시에 탈출하기도 어렵다. 적들도 이곳의 존재를 금방 알아챌 것이니 어서 위치를 옮겨야 한다. 전기를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는 처사냐. 내 게임기는 어쩌란 것이냐, 등등. 뒤로 갈수록 항변보다는 그저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되어가는 느낌이었지만 그에게는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챙겨가는 그로서는 휴대용 게임 콘솔과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이슬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전기가 없으면 심심해서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네?”

 

그녀의 말에 다른 핑곗거리를 준비하던 이세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슬비의 모습에 흠칫했다. 거의 밀착하다시피 그와의 거리를 좁힌 이슬비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의 어깨를 살짝 붙잡아 내렸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에서 달콤한 향기가 확 풍겨왔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검은 리본에 최면에 걸린 듯 이세하의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신장 차를 줄인 이슬비는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그녀의 귓속말에 방금 가까스로 찾아낸 핑계가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할 말을 잃어버린 그는 멍청한 얼굴로 이슬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본 이슬비가 쿡, 하고 웃음 지었다.

 

“그럼,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방 체크는 적당히 마무리하고 나오도록 해.”

 

이슬비의 손이 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려갔다.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숨결이 그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이슬비가 방을 나간 뒤에도, 이세하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가버린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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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 위상력에 각성한 이후로도 그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아카데미에 가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외박 허가를 받아 집에 돌아가면 그녀가 자랑스럽다며 따스하게 안아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끝장날 뻔했던 그때의 무력감을 생각하면, 한 사람의 당당한 클로저로서 선량한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팀원들이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자신을 맞아주는 가족들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그런 사소한 불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딸랑, 하고 펭귄을 본딴 도어벨이 울렸다.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가 어머니를 졸라 산 물건이다. 여간해선 떼를 쓰는 일이 없는 그녀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재미를 느낀 그녀의 아버지가 한동안 이를 가지고 그녀를 놀리곤 했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예상대로 부엌 쪽에서 잘 다녀왔니,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세면세족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앉아 그녀의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한 팀원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오락기를 손에서 떼질 않는다느니, 또 다른 팀원은 자신을 시도때도없이 인형마냥 껴안으려 해서 곤란하다느니 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참다참다 한 마디 했더니만 글쎄 그 애가요...”


그녀의 생각에 노이즈가 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들어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 탓인지 이야기하던 중 무언가를 잊는 일이 잦아진 느낌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어머니가 ○○를 말하는 거니, 라고 그녀에게 그의 이름을 상기시켜주었다.


“아, 네. 맞아요. 그래서 걔가...”


*

 

클로저 요원으로서의 그녀의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훈련된 클로저에게 위협이 될만한 수준의 차원종이 억제장치의 방해를 뚫고 출현할 확률은 매우 낮고, 만에 하나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대개는 대기중이던 상급 클로저가 금새 출동해 처리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와 그녀의 팀원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잔챙이 처리였다. 물론, 잔챙이라고 해도 일반인에게는 치명적인 존재인 만큼 그녀의 일이 시덥잖은 잡일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료화면을 보면서 언젠가 자신도 성장하여 저런 믿음직한 수호자가 되리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곤 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칼을 치켜드는 차원종을 무력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다른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팀원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방진을 빠져나가 도망치려 하는 소형 차원종을 마무리하는 그녀의 손놀림에 망설임은 없었다. 뒤통수에 단검이 꽂혀 간혈적으로 붉은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는 차원종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는 손을 휘두르며 염동력을 행사해 단검을 손으로 불러들였다. 고개를 돌리자 나머지 차원종의 처리를 마친 팀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전 종료. 복귀하겠습니다.”


소형 통신장비로 보고를 마친 그녀는 그 틈을 못 참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팀원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투덜거리며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쉬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그녀가 마무리한 차원종의 시체에 닿았다. 자세히 보니 차원종은 무언가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의문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한번 염동력을 사용해 차원종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갑작스레 치밀어오르는 헛구역질에 그녀는 손을 입에 올렸다. 차원종이 안고 있던 것은 꿈틀거리는 핏덩어리였다. 그녀의 허벅지에 겨우 닿을락말락하는 작고 둥그스름한 무언가. 거기에서 비어져나온 사지로 추정되는 무엇인가가 움찔움찔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차원종의 유체 비슷한 것일까. 어렴풋이 느껴지는 약한 존재감이 평소에 보던 모습과는 달라도 그것이 차원종임을 알리고 있었다. 역겨운 느낌을 참지 못한 그녀는 무심결에 강한 염동력을 행사하여 그것을 짓눌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차원종의 유체가 터져나가자 그녀는 겨우 입을 가린 손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은 남았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가 어머니와 나눌 화재는 이와 관련된 것이 될 것 같았다.


“어머니, 이걸로 오늘도 된거겠죠?”


괜스레 어지러워진 마음을 다잡고자, 그녀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어머니를 불러보았다.


*

 

“갔군.”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른 탓이었다. 아이를 안은 한 생존자가 포위망을 빠져나올 때는 어떻게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교전을 시작했다가는 정찰 임무도 마치지 못한 채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뒷통수에 칼이 박히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지키려고 애썼던 아이가 쓰레기처럼 터져죽는 것도 막아내지 못했다. 등에 짊어진 통신기기를 통해 구역 내의 생존자 전멸을 전한 그는 은신처에서 나와 피로 물들어 언 듯 봐서는 붉게 보이는 분홍빛 머리의 여성을 미행했다.


신서울은, 아무래도 쇠퇴하는 중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듯 했다. 강남 사태 이후 강남 지하에서 발견된 플레인게이트 탐사중에 발생한 이변이 그 시초였다.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풀려난 강력한 차원종은 그 강대한 정신지배 능력으로 탐사대원과 그들의 호위 클로저들을 자신의 손에 넣고는 어떤 수를 썼는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차원종을 신서울에 풀어놓았다.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최초에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 클로저들이었다. 데이터 상으로는 분명 갓 정식요원이 된 풋내기들이었을 터였건만, 차원종이 그들에게 모종의 힘을 부여한 것인지 그들의 전투적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라 할 만했다. 신서울의 대부분이 시체가 널부러진 폐허로 변하는 데에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고, 퇴각을 결정한 상부는 은밀행동에 유리한 그의 팀에게 생존자 수색과 정찰을 명했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그가 알아낸 유일한 사실은, 차원종에게 넘어간 클로저 팀의 전 리더가 저녁 이후로는 강남 구석에 위치한 특정 건물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 뿐이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예의 그 건물에 들어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이제 차원종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들이었고, 그들의 행동원리는 그의 이해범위 밖에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을 기약하며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는 야영지로 향했다.

 

*

 

“다녀왔습니다.”


딸랑, 하고 펭귄을 본딴 도어벨이 울렸다.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가 어머니를 졸라 산 물건이다. 여간해선 떼를 쓰는 일이 없는 그녀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재미를 느낀 그녀의 아버지가 한동안 이를 가지고 그녀를 놀리곤 했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예상대로 부엌 쪽에서 잘 다녀왔니,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세면세족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앉아 그녀의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은 차원종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뻔했다느니, 팀원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고민이라느니 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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