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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파한 지도 제법 지난 시간. 교실보다 운동장에서 더 많은 학생을 찾을 수 있는 시각, 그래서 북적거리던 복도에 오직 말라가는 대걸레 자국만이 남는 때. 그 늦은 시간에 이세하는 벌써 한참이나 교내를 헤매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시간이건만, 이세하는 데룩데룩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등 뒤에 어설피 감추고 있는 선물 가방 때문이었다. 행여나 누가 볼세라 종일 가방 안에 숨겨져 있던 물건. 이세하는 기회가 되는대로 이슬비에게 그것을 전해줄 계획이었다.


문제는 평소에는 곧잘 그를 찾아와 그의 태도나 불성실함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던 그녀를 오늘따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그녀의 교실로 향해보았지만, 이슬비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이후의 쉬는 시간에도, 방과 후의 교문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세하는 그녀가 학교 안의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단서 하나만으로 방과 후의 학교를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의 목소리를 듣고 혹여나 이슬비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일까. 이세하는 제법 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다. 클로저 업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돌아가기 시작한다 해도 자유 시간이 빠듯했다. 초조하게 창 밖으로 눈을 돌리자 반대편의 화단이 눈에 들어온다. 막 망울을 트기 시작한 노란 꽃잎. 벤치에 앉아있는 작은 뒷모습. 단정한 붉은 재킷. 스치는 분홍빛. 이세하는 작게 투덜거렸다. 진작 창밖을 보는 거였는데. 그는 바쁜 걸음으로 계단을 향했다.


*


“왔어?”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말을 거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감으로.”

“감?”


여전히 뒷모습. 이세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녀의 앞으로 돌아가 선물을 보여줘야 할까. 그렇잖으면 용건에 대해 우선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렇지, 감.”

“그렇구나.”


적당한 대답. 뜬구름을 잡는 듯한 이야기다. 상정 외의 상황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냥, 이 자리에 가방을 놓고 가버리는 것은 어떨까.


“일이 없으면, 늘 여기에 있어.”

“응?”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뉘엿한 태양이 채 비추지 못한 이슬비의 얼굴은 제법 어두웠다. 그림자 아래 더욱 짙어지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 괜히 답답해지는 마음에 이세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기숙사에 있을 땐 잘 몰랐는데,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조용해서.”


그는 이슬비의 말에 수긍한다. 홀로 남겨진 집이란 늘 그렇다. 해방감에 즐거운 것도 잠시뿐. 해가 지면서 그림자가 드리우면 더럭 겁이 나고야 만다. 결국에는 어둠이 자라나 그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


외롭다.


“그래서, 너무 어두워지지 않으면 웬만하면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

“…춥지는 않아?”

“글쎄, 어떨까.”


그녀의 입이 미소를 그려낸다. 발갛게 물든 뺨은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 탓일까, 그렇잖으면 햇살에 덧칠된 것일까. 이세하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기억.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의미 없는 짓이었다고 이세하는 생각한다.


그는 그만 이슬비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당장에라도 고여서 흘러내릴 것 같은 선홍빛 핏기. 그 위에 새겨진 가지런한 주름 하나하나가 이세하의 망막에 새겨진다. 각인된 이미지는 기억과 합쳐진다. 이슬비의 입술.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있지.”


도톰한 입술이 다시 열린다. 부드럽게 떨어지며 모양을 바꾸는 이슬비의 입을 보며, 이세하는 괜히 갈증을 느낀다.


“응?”

“앞으로도 가끔, 여기로 와줄래?”


이전에는 그저 당돌하다고, 자신감이 넘친다고만 생각했던 눈이었다. 그 푸른 시선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그럴게.”


그는 자신의 대답에 확신이 담겨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녀가 그 작은 도피처에서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외의 위안거리를 찾을 수 있기를.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확신을 줄 수 있기를.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이 작아진다.


“안 줄 거야? 선물.”

“…줘야지.”


짙어지는 미소. 그녀의 미소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어쩌면 바로 옆의 화단의 향기일지도 모른다고, 이세하의 마음 한구석에서 작게 딴죽을 걸었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이슬비가 평가하듯 그의 선물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새삼 부끄럽다.


“너무 커. 무거울 것 같아.”

“별로 그렇진 않아.”

“들어다 줘.”


술에 취한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 탓에 그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돌아가 집에서 식사를 준비할 시간을 생각해본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아카데미에 다녀온 뒤 그에게 호들갑을 떨던 서지수를 떠올린다. 조금 늦더라도, 그녀와의 일이라면 서지수는 이해해주겠지.


“그럴까.”


이슬비의 대답이 짙어지는 꽃향기로 돌아왔다. 아아, 나는 역시, 이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이세하는 말로는 풀어내지 못할 그 생각을 머릿속에 간직했다. 책가방을 고쳐매는 이세하를 보며 이슬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하야.”

“왜?”


올려다보는 시선에 이세하는 눈을 피했다. 갑자기 불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동물적 감각이라는 것일까.


“짐 들고 가면 힘들 텐데.”


당장 그녀의 말을 멈춰야 할 것 같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조금 늦은 판단이었다.


“라면, 먹고 갈래?”


그는 다시 한번 시간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것이 이세하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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