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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누가 커피를 끓였냐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다. 가볍게 기억을 되돌린 이세하는 자신이 이슬비와 함께 모텔방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보통 아침이면 커피를 먼저 끓이는 쪽이었던 이세하는 오랜만에 맞는 여유로운 아침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내 것도.”
“…일어났어?”

 

수긍. 이슬비는 한숨을 쉬며 믹스 커피를 한 봉투 더 집어들었다. 테이블에 팔을 짚고 커피 포트가 울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뒷모습. 잠옷을 대신했던 흰 셔츠, 헐렁한 반바지. 군데군데 주름지고 흐트러진 그 모습이 꽤나 낯설다. 이렇게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을 그 말고 또 누가 알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평상심, 평상심. 어디보자, 퇴실 시간이 12시였던가.

 

“지금 몇 시야?”
“9시 30분.”
“…어?”

 

탁자에 널브러져 있던 간밤의 흔적을 치우던 이세하는 맥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각자 씻고 짐을 챙겨서 나가려면 제법 빠듯하다. 이세하는 머릿속으로 셈을 반복했다. 모자르다. 느긋하게 커피를 끓이는 이슬비의 행동거지는 어디서 나온 여유일까? 돌아온 대답에 이세하는 당황했다.

 

“같이 씻으면 되잖아?”
“뭐?”

 

담담히 이어지는 설명. 뭔가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세하는 적당히 납득했다. 어차피 볼장 다 본 사이, 조금이라도 수면시간을 늘리고자 생각한 결과라. 확실히 어제 잠을 늦게 자긴 했다만.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녀는 가끔 상식을 넘어선 말을 하지 싶다는 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그럼, 들어간다?”
“…잠깐, 잠깐만.”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역시 달랐다. 계획은 제법 그럴싸하게 세워놓은 이슬비였지만, 막상 이세하가 들어갈 때가 되자 한참을 뜸을 들였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겨우 욕실에 들어간 그는 샤워타올을 두른 채 구석에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조금이라도 보이는 면적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까? 욕조에 붙은 샤워기에서는 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사실, 이세하의 입장에서는 역효과였다. 등에 구슬처럼 맺힌 물방울들, 물에 푹 젖어 흘러내리는 타올, 억지로 끌어올리는 손길. 그의 이성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그녀의 뒷모습에 점점이 남은 붉은 자국이었다. 간밤의 기억이 플래시백되며 그의 이성을 착실히 갉아먹어갔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부끄러우니까, 보지 마.”

 

가만, 내가 왜 참고 있었더라? 등의 손톱자국이 욱신거린다. 머릿속에 이슬비의 달콤한 신음소리가 재생된다. 이세하는 머릿속으로 다시한번 셈을 해보았다. 아마, 괜찮을 것 같다. 아무렴 어때.

 

“잠깐, 세하야? 그렇게 당기면... 꺄악?!”

 

결국, 몇 시간 뒤 그들은 카운터에 카드를 반납하며 연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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