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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졌다. 인적 드문 버스 정류장을 겨우 찾아내 앉은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기묘하게 달라붙는 분위기에 이세하는 감히 휴대폰을 꺼내보지 못했다. 톡, 톡. 앞머리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 자꾸만 신경이 곤두선다. 대충 머리를 털어내니 물방울이라도 튀었는지 옆자리의 이슬비가 어깨를 움추린다. 평소라면 미안하다고 가볍게 말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늘은 감히 입을 떼기가 어렵다. 이 침묵을 깨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이세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이슬비를 훔쳐본다.

 

평소에는 꽤나 답답해보이는 재킷이었지만 이런 날에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단단히 채워진 지퍼 너머로 슬쩍 엿보이는 흰 셔츠 자락은 조금의 물기도 없이 온전했다. 그다지 춥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안심. 살짝 시선을 올리면 매끄러운 턱선을 지나 평소엔 꽤나 보기 힘든 그녀의 동그란 귀가 살짝 드러나보인다. 모양 좋은 귓바퀴 위로 빗방울이 하나. 또르륵, 굴러떨어진다. 그저 얼굴의 일부일 뿐이건만, 이렇게 보니 제법 배덕감이 든다. 이세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시선 한 구석으로 스쳐간 그녀의 치마는 머릿속에 제법 오래 남아있을 것 같다. 빗물에 젖어, 미묘하게 그녀의 허벅지가, 아니, 살결이, 생기가 비쳐보이던, 새하얀 요원복. 이세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아침까지도 맑았던 날씨 치고는 비가 제법 푸지게 내린다. 이슬비는 옆자리에 앉아 머리를 털어내는 이세하에게 괜찮냐고 묻지 못했다.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머리칼을 괜히 쓸어넘긴다. 귓가에 달라붙는 머리칼이 오늘따라 거추장스럽다. 한 마디라도 해볼걸 그랬나. 조금 후회해보지만 아무래도 때가 늦은 것 같다. 괜히 어색해진 이슬비는 이세하의 옷을 살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덕에 그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다행이다. 지금 이 시선을 들키면 당장이라도 빗속으로 뛰쳐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대강 풀어헤치고 다니는 재킷 탓에 셔츠까지 담방 젖어버린 상체가 꽤 추워보인다. 핀으로 겨우 제 위치에 고정되어 덜렁거리는 넥타이. 뚝, 뚝. 물을 흘리며 늘어진 그 노란 천조각 너머로 쇄골이 빼꼼히 도드라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람. 이슬비는 시선을 돌린다. 빗물을 머금어 풀죽은 머리칼. 수북하게 늘어진 평소보다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손을 들어 한번 만져보고픈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이러고 있으면 앞으로 무슨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이슬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언제 그칠지 모르겠네.”

 

겹치는 목소리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어이없다는 표정 한 구석으로 웃음이 스민다. 멋쩍은 웃음소리가 한데 섞인다. 비가 그치기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그들이 함께 돌아가기 까지도,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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