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도어락이 돌아가고 문이 열리자 온기가 훅 비어져나온다. 차게 식어있던 몸이 풀리는 느낌에 이세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뭐 해, 들어와. 이슬비의 재촉에 이세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한번 더 털어낸다. 우산은 복도에 펴둬. 벌써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는지 목소리가 제법 멀다. 어쩌면 멍하니 있었던 시간이 제법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슬비의 집에 오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몇 번이고 봤던 모습.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봐도 적응할 수 없는 풍경이다.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인형들. 한켠에 작게 자리한 화장대와 거울. 그의 방에선 결코 볼 수 없을 기물들이 그가 여성의 방에 들어왔음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그 한가운데엔 자연스레 풍경에 녹아든 이슬비가 있다. 집에 있는 날이면, 아마 늘 그 자리에 있었겠지. 그 모습조차도 이세하는 조금 거북하다. 그녀만의 공간에 침범한 외부인이 된것만 같다.

 

“뭐 해. 멍하니 서서는.”

 

털썩, 하고 그의 머리 위로 수건이 떨어져내렸다. 이슬비가 어느틈엔가 띄워보낸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그의 머리칼은 빗물로 덤벙 젖어있었다. 하긴 비가 꽤 오긴 했다. 잠자코 머리를 털어내는 이세하를 보며 그녀는 베스스 웃는다.

 

“아무튼 강아지 같다니까.”

“뭐가.”

 

수건 사이로 흘러나오는 볼멘소리. 그는 알까, 그런 모습이 그녀를 더욱 즐겁게 한다는 것을. 지금 그 모습 말이야. 웃음 사이로 작게 덧붙여본다. 아마 들리진 않았겠지.

 

“아무것도 아냐. 웃옷은 거기다 벗어놔.”

“어?”

“그거 그대로 입고 있으려고? 감기 걸려.”

 

잠시 정적.

 

“야, 그럼 뭐 입으라고?”

“그러게.”

 

얼빠진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이슬비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런 부분에서 쓸데없이 민감하다. 상반신 정도는 평소에 붕대를 감아줄 때라던가, 할 때 이미 다 본 참인데.

 

―우리 사이인데.

 

―따지고 보면, 무슨 사이인걸까. 알 수 없다.

 

“이불이라도 덮고 있던가.”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이세하는 항의의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보았다. 소용 없는 노릇이다. 빤히 마주보는 푸른 시선에 그는 그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데 보고 있어.”

 

그의 마지막 저항에 이슬비는 또다시 미소지었다. 그래, 그 정도야 뭐. 몸을 돌려 창가를 향한다. 아직도 비가 꽤 거세다. 잘도 저 비를 뚫고 집에 갈 셈이었네. 우산을 들이미는 그녀를 한사코 거절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정말 감기 걸리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들어 리모컨으로 보일러 온도를 슬쩍 올렸다. 이세하는 그런 면이 있다. 저는 곧잘 참견해오면서도, 한사코 남의 도움은 거절하려 드는. 손해보기 좋은 성격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화장실 좀 쓸게.”

 

어느새 옷을 다 벗어낸 모양이다. 시야 한 켠으로 그의 맨 등이 스쳐갔다. 옷의 물기라도 짜낼 모양이다. 그래, 많이 젖긴 했지.

 

“따뜻한 물 나오니까, 샤워라도 할래?”

“…됐거든.”

“그래도 머리는 감아야 된다?”

“네가 우리 엄마냐.”

“엄마가 머리 감겨줄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이 뒷통수에서도 보인다. 놀리는 것은 이쯤으로 하자. 적당히 손짓을 하자 또 한숨을 푹 내쉰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이슬비는 침대 위의 이불을 끌어내렸다. 잠시 조용하더니만 이내 샤워기 소리가 들려온다. 했었던지도 몰랐던 긴장이 풀린다.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여유롭고 노곤하다. 째깍, 째깍. 시계침 소리.

 

*

 

문득 정신이 들면 조용하다. 또 혼자일까 싶다.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이세하는 집으로 갔을까. 눈을 떠보니 불은 꺼져있다. 한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낮은 숨소리가 도로 내려앉힌다. 커튼으로 스며드는 빛에 의지해 곁을 바라보자 잠꼬대라도 하는지 검은 실루엣이 들썩인다. 돌아간게 아니었구나. 괜히 고맙다.

 

도대체 어느 틈에 잠이 들어버린 것일까. 아마 그가 씻는 것을 기다리던 중 같다. 이상하다. 평소엔 억지로 청해도 잘 오지 않는 잠인데. 어깨까지 끌어올려져 덮인 이불을 걷어낸다. 이세하를 기다릴 적엔 분명 이렇지 않았다. 그가 덮어준 것이겠지.

 

눈을 가늘게 뜨니 그는 여전히 웃통을 벗은 채다. 잔뜩 꼬부라져 새우잠을 자는 꼴이 퍽 바보같다. 더 추운 것은 그 쪽일텐데. 굳이 이불을 덮어주고는, 행여나 깰세라 불을 끄고 커튼까지 쳐놓았다. 그렇게 앉아 그녀가 깨기를 그저 기다리다 잠든 것은 언제쯤일까. 이슬비는 서랍장 위에 손을 뻗어 무드등을 작게 켰다.

 

그의 머리엔 아직 물기가 어려있다. 시끄러울까 헤어 드라이기도 차마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수건도 몇 장 쓰지 못하고 적당히 훔쳐내고 말았으리라. 눈치만 보는 강아지. 그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겠지. 그를 괴물보듯 쳐다보는 시선들 사이에서, 자신의 무해함을 애써 강조하며. 이슬비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본다.

 

그가 몸을 다시 움추린다. 머리칼에 달라붙은 물방울이 그 움직임에 하릴없이 굴러떨어진다. 간지러운지 작게 떨리는 속눈썹이 제법 길다. 원래 저렇게 길었던가. 이런 것을 신경쓰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물음표, 물음표. 저러다가 깨면 어쩌지. 이슬비는 어느틈엔가 그가 일어날까 걱정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라도 안심하고 쉴 수 있었으면 싶다. 그것이 그의 리더로서의 생각인지, 아니면 또다른 무언가인지, 그녀는 확정지을 수 없었다. 이마에 달라붙어 멈춰선 물방울을 잠시 바라본다. 이슬비는 그를 향해 조금 더 고개를 숙인다. 그의 매끄럽고 넓은 이마에, 입술을 가져간다.

 

―깨진 않을거야. 아마.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다만, 어쩌면 그녀는, 그가 깨어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있었다.

'클로저스 > 분류없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백  (0) 2017.12.12
태닝  (2) 2017.08.28
이슬비는 이슬비다  (0) 2017.04.30
3월, 방과 후.  (0) 2017.03.16
비 오는 날  (0) 2017.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