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달각. 글라스 안의 얼음이 무너져내린다. 그러고 보면 잔이 빈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뜨끈하게 올라오는 취기에 이세하는 갈증을 느꼈다. 손을 슬쩍 움직여 물잔을 잡아본다. 비어있다. 가서 물이라도 받아올까 싶지만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눈앞에서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있는 이슬비 때문이다. 그가 물을 확인하는 것도 그렇게 불만이었을까. 도끼눈 위로 이마에 심술이 소복이 올라 앉아있다.


“그러니까,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딴 생각만 하고 말이야.”


발음 새는 것 좀 봐라. 이세하는 내심 한숨을 푹 쉬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배리어를 바라본다. 흥이 오른 바텐더가 플레어라도 시작한 것일까. 처음 들어올 때보다 조금 시끄러워졌다. 간간이 작게 터지는 탄성, 휘파람 소리. 아무래도 직원이 금방 올 것 같지는 않다. 다음엔 꼭 그만 마신다 말하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져본다.


“다들 사람 말이라곤 하나도 안 듣고 말이지…. 꼭 너처럼.”

“…지금은 아니잖아.”

“예전엔 그랬어.”


또 이 이야기다. 술이 들어가면 그녀는 늘 검은양 팀 이야기를 한다. 하긴, 온갖 일을 겪긴 했다. 어쩌면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둔 곳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검은양 팀을 나와 여기저기로 흩어진 지도 제법 지났을 텐데. 그는 이슬비가 지금의 팀에 좀 더 애정을 가졌으면 싶다.


“그래, 그래. 예전엔 그랬지.”


대충 맞장구를 쳐준다. 지금까지 몇 잔을 마셨더라. 네 잔, 아니면 다섯 잔. 오늘은 진탕 마실 거라고 성화를 부릴 때 알아봤어야 했다. 술이 별로 세지도 않으면서. 지금의 팀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걱정이다. 같이 있었더라면 괜찮았을까. 이렇게 몇 주 걸러 한 번씩 볼 때보다, 더 잘 대해줄 수 있었을까.


“아무튼 말이야, 답답해 죽겠어.”

“그래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답답하다는 듯 덜컥 잔을 집어 든다. 불씨를 꺼버리듯 입에 술을 때려 넣는다. 치익, 불이 사그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녀의 얼굴에 술기운이 매캐하게 치민다. 이세하는 혀를 찼다. 뭐야, 바라보는 눈길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너, 내일 당직 아냐?”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냐. 아까 말해놓곤.”

“몰라. 안 나갈 거야.”


잔을 비우는 그녀를 보고 다가오던 종업원을 이세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기까지만 할게요. 이세하의 손짓을 그는 다행히 이해한 것 같다. 씩씩거리는 이슬비를 애써 달래본다.


“자, 물 마셔, 물.”

“싫어―. 술 더 시켜, 술.”

“됐거든요.”


금세 볼이 부풀어 오른다. 저 볼을, 손가락으로 집어 바람을 빼 보면 어떨까. 아마 싫어하겠지. 어렵다.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데. 남들처럼 그렇게, 힘들 땐 내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거나 하고 싶은데.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술 상대뿐이다. 스스로가 무력해진다. 딱, 한 잔만이야. 이세하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픽 웃는 모습에 안도감이 드는 자신이 싫다. 여기요, 마시던 거 한 잔 더 주세요. 얕다. 너무나도 얕다.


*


볼을 헤집는 찬바람을 보니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다. 택시를 부를까 싶었지만 역시 그만두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먼 길도 아니다. 직접 데려다주면 그만이겠지. 그만큼이라도 좀 더 같이 있는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비틀거리는 이슬비를 붙잡아 세워 목도리를 여민다.


“몸 조심해야지.”

“조심하고 있거든.”


그런 것 치고는 어설프다고, 이세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야무진 아이니까, 그가 간혹 보살피는 것보단 훨씬 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그저 자기 위로 삼아 그녀를 귀찮게 굴고 있는 것일지도. 나름 조절하면서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는 자꾸만 바닥으로 치닫는 감정을 애써 끌어올린다.


“간지러워.”


앞섶에서 꾸물대는 손길에 그녀가 목을 움츠렸다. 미안하다며 손을 빼자니, 어느새 붙잡아 도로 끌어내린다. 잠시 고정. 후우―. 차게 식은 손에 따뜻한 입김이 붉게 자국을 남긴다. 그녀의 눈길이 깃털처럼 간지럽다. 손 끝에 피가 몰린다.


“손, 되게 차다.”

“글쎄….”


시선이 팔을 타고 올라와 이세하를 향한다. “장갑 같은 건 없어?” 고개를 저으니 한숨을 폭 쉰다. 


“아무튼간에, 맨날 챙겨준다, 챙겨준다 하면서 자긴 이렇다니까.”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늘 그래왔다. 그녀가 편안하게, 즐겁게, 어쩌면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발그레 화장기 어린 입에서 입김이 피어올라 그의 얼굴을 스친다. 달큰한 술 냄새.


“우리 세하, 걱정이네.”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게. 베스스 웃는 얼굴을 보며 잠시 추위를 잊는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 그 마음을 좀 더 풀어주고 싶다. 그로 인해 그녀가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면. 연連하여 끝없는 길, 조금이나마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춥지?”


괜히 다른 말을 꺼내며 그녀를 폭 안아본다. 숨 막혀. 짐짓 밀어내는 손길에는 힘이 없다. 가슴께에 와닿는 따스한 숨결. 코트 안으로 손이 파고든다. 추우니까. 핑계처럼 말이 덧붙는다. 등을 감싸는 손가락 마디가 하나, 둘, 엮여 들었다. 이대로 하나가 된다면 어떨까. 그녀에게 그저 짐이 되지는 않을까.


“이세하.”


오똑한 코가 가슴팍에 비벼진다. 이세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안하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도움도 못 되고, 의지도 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괜찮은 걸까.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제지하지 못한다. 늘상 피하기만 하던 사람이라, 천성이 비겁하여 그랬다.


“사랑해.”


이슬비, 너를 사랑한다고, 이세하는 그렇게 말을 돌려주지 못했다. 나도야, 하고 독백처럼 읊조릴 뿐이었다. 대답은 없다. 내일이 되면, 그녀는 그만 잊어버리겠지. 아침을 반기는 두통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이야기. 그거면 됐다고 이세하는 생각했다. 언젠가, 고맙다고, 네 덕분이라고, 그런 말을 부끄럼 없이 들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가 되면 다시 말하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잠에 빠진 그녀를 업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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