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꿈에서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꿈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의 지각을 전제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지각하는 ‘나’가 사라진다면 세계는 더는 존속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꿈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꾸고 싶지 않은, 그래서 끝내고 싶은 꿈속에 갇혀버렸다면, 높은 곳을 찾아가 뛰어내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세하는 최근 매일 밤 꿈을 꾼다.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 그가 매일 아침 컬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이야기를. 꿈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발현된 위상력을 저주하던 시절, 이세하는 그러한 꿈을 셀 수도 없을 만큼 꾸곤 했다.

 

하지만 그가 최근 꾸는 꿈은 과거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같은 꿈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점이 그랬다. 매일 밤,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면 그는 꿈속의 이세하가 되어 꿈속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그리고 꿈속의 평범한 이세하가 일과를 마치고 잠에 빠지면 그는 다시 클로저 이세하가 되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세하는 그 꿈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고 하는 쪽이 옳았다. 꿈속에서 그는 친구가 많은 편이었고, 점심시간이면 그들과 함께 축구공을 차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완벽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꿈속의 이세하는 과거의 그가 늘 동경해왔던 모습이었다. 두 사람분의 인생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피로해질 만도 했건만, 이세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이세하는 자기 전의 게임 플레이를 조금 줄이고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오늘의 꿈은 어떨까, 하고 기대하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꿈속에서 검은 머리의 이슬비를 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이세하, 듣고 있어?”

 

눈을 감은 채 상념에 빠져있던 이세하를 익숙한 목소리가 현실로 건져 올렸다. 눈을 뜬 이세하는 낯선 곳에서 잠을 청했던 여행자처럼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떠올려야만 했다. 이곳은 검은양 사무실. 시간은 아침. 서유리와 미스틸테인은 경계근무 중. 그와 제이는 이슬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일과 시작 전에 그녀를 따라 이곳에 왔다. 머리에 금세 떠오른 정보들과 달리 현실감은 조금 늦게 부상했다. 부유하는 현실감에 기대어 정신을 차리자,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한창 오늘의 일정에 관해 설명하던 이슬비가 그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딴생각을 좀 하느라.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의 반응을 본 이슬비는 여보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동생, 밤샘게임은 좀 줄이라고 했잖아.”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이가 볼펜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이슬비가 제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보다 제이 씨, 앞에 놓인 신문의 십자말풀이가 점점 완성되어가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이겠죠?”

 

아닌 게 아니라, 제이의 앞에 펼쳐진 신문의 십자말풀이는 어느새 완성까지 세 문제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30분쯤 전, 그를 처음 볼 때만 해도 그것이 새 신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세하는 그가 어느 틈에 그 칸을 다 채운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이는 비뚤어진 선글라스를 바로잡으며 그녀에게 변명했다.

 

“윽, 아니, 대장. 그게, 빈칸이 어서 나를 채워달라고 유혹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제이 씨. 저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슬비와 제이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자 이세하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둘의 대화가 이세하의 귀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반대편 귀로 흘러나갔다. 제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슬비의 분홍빛 머리에 꿈속 그녀의 검은 머리가 겹쳐 보였다. 이세하는 괜스레 손을 들어 잠을 깨우는 양 얼굴을 비볐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었다. 이슬비가 속사포처럼 내뱉는 지적사항에 난타당하던 제이가 테이블 아래로 이세하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시야를 가리는 손을 내리고 제이 쪽을 보려던 이세하는 어느 틈엔가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제이를 향해 서 있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그간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이는 이슬비의 눈에 띄지 않게 손을 움직여 사무실의 출입문을 가리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와.’

 

그녀가 늘어놓는 잔소리에 점점 매몰되어가는 제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세하는 그에게 손을 들어 감사를 표하고는 검은양 사무실을 슬쩍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

 

그늘진 비상계단에서 받는 바람은 시원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멍하니 난간에 기대어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이세하의 귀로 이런저런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운행 중인 버스 소리, 공사장에서 울려 퍼지는 중장비의 소리, 등교 중인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꺅꺅거리는 소리. 여느 때였다면 자신의 손으로 지켜낸 강남이 다시금 생기를 찾아가는 모습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세하는 그로부터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과연 이것이 현실일까. 스스로 질문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세하야.”

 

어느새 그를 따라 나온 이슬비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의 그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왜 나왔어. 금방 들어갈 텐데.”

 

이세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녀의 푸른 눈에 암갈색 빛이 겹쳐 보이는 순간, 그의 세상은 발아래부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너, 요즘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이세하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왔다. 평소에도 그녀가 너무 많은 걱정을 안고 산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마저 걱정하려 드는 그녀가 미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겨주고야 만 자신도.

 

“모르겠어.”

 

이슬비가 힘없이 말했다. 이세하는 당장 돌아서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기는 괜찮다고, 그냥 묘한 꿈 때문에 잠시 이상한 기분이 되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세하는 그녀를 마주 보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네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럴지도 몰라.”

 

이세하의 입에서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실수였다. 등 뒤에서 이슬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로 말을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세하는 억지로 입을 움직였다.

 

“슬비야. 혹시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차원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 안 해봤어?”

 

그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이슬비는 뚝뚝 끊어진 답을 내놓았다.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대답에, 그리고 그 대답 사이에 무겁게 걸친 휴지(休止)에 개미처럼 짓눌려 뭉개졌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상황에서도 앞을 보고 계속해서 달려온 그녀는 어떤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음, 해봤지. 아마 바이올린을 계속 배우지 않았을까. 그땐 콩쿠르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 어머니께서 소리가 참 곱다며 칭찬해주시는 게 그렇게 기뻤는데.”

 

그녀의 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와 몸통, 그리고 사지가 모두 멀쩡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녀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말에는 생기가 없었다.

 

바이올린이 특기인 이슬비. 처음 들었을 때는 특기 난에 게임을 적은 자신과의 차이에 놀란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들으니 새삼 무거운 이야기였다. 그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존재인 그로서는, 무엇을 하더라도 그녀의 짐을 덜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세하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

 

수많은 위로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하지만 이세하는 그중 자신이 꺼낼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

 

그날 밤, 이세하는 학교의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검은 머리의 이슬비를 보았다. 전후 관계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그녀가 모 콩쿠르에서 입상한 기념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쪽 세상의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행복한 그녀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니 그 역시도 행복했다.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와 가족과 포옹하는 그녀에게서는 빛이 흘러넘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세하는 어두운 객석에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검은양 팀의 리더인 그녀를 볼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드러난 것 같아 서글퍼졌다.

 

무대가 끝난 뒤 이슬비는 가족들과 함께 학교를 나서는 듯했다. 왁자지껄 떠들며 강당을 나서는 인파 사이에 끼인 채, 이세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이세하는 그것이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를 불러볼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이쪽의 이슬비는 이세하를 알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와 그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인 검은양 팀은 그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세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애초에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그녀가 그를 만나게 된 세상 쪽이,

 

더욱 비정상인 것이 당연했다.

 

이세하는 행복으로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

 

이세하는 며칠간 계속해서 고민했다. 본디 그는 문제에 당당히 마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넘기 어려운 벽이 앞을 가로막으면 그 벽을 넘을 궁리를 하기보다는 우회로를 찾거나 그 길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그의 행동양식이었다. 그렇기에 20년 가까이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한 주제를 이토록 길게 고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세하는 마음을 굳혔다.

 

며칠 뒤, 늦은 저녁, 이세하는 검은양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옥상에서 이슬비를 기다렸다. 빡빡한 팀 리더의 업무량에 더해 관리요원인 김유정의 일까지 돕고 있었으니 그녀가 퇴근이 늦는 것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몸을 혹사하는 그녀에게 걱정 섞인 핀잔을 건네곤 했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늦은 퇴근이 반갑게 느껴졌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보름달이 걸려있었다. 신호등처럼 붉은 기운이 도는 달이었다. 그런 달이 그에게는 세상이 보내는 경고로 보였다. 그곳에서 정지. 건너지 마시오. 이세하는 그 경고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왜 불렀어?”

 

일이 마무리되었는지 옥상으로 올라온 이슬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꺼내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와글와글 아우성쳤다. 혼란스러워진 그는 엉망진창이 된 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슬비야, 만약에...”

 

그의 목이 턱 막혀왔다. 그가 감히 꺼내기엔 너무도 무거운 이야기였다. 답답해진 이세하는 넥타이를 대충 끌러 내던졌다. 이세하는 속으로 되뇌었다. 되돌리기엔 늦었어.

 

“만약에, 돌아가신 부모님이랑 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도한 질문이 이슬비를 후려쳤다.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흐릿한 달빛만이 유일한 광원인 옥상에서도 이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이슬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장난치는 거야?”
“진지하게 들어줘.”

 

말도 안 되는 비교란 것은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연인도 뭣도 아니다. 그냥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의 팀원일 뿐이었다. 그 둘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헛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냥 ‘예.’, ‘아니오.’로 대답만 해줘. 내가 사라지고 대신 너희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너는 그렇게 할 거야?”

 

비겁한 질문이었다. 그 아닌 누구라도, 그리고 몇 번을 묻더라도 그녀는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쭉 그녀를 보아온 이세하는 그 사실을 자기 일인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세하가 들으려고 하던 것은 그녀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고마워.”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대답하기 전의 침묵이었다. 그래서 이세하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 그대로 옥상 아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이슬비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세하는 몸에 둘러쳐진 위상력을 의식적으로 해제했다.

 

그녀에게 남긴 감사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세하는 진심으로 이슬비에게 감사했다. 목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흑백사진 같았던 그의 삶에 색채를 되찾아주었다.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던 과거에서 그를 자유롭게 했다. 새로운 목표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중한 가족과 자신을 저울질해주었다. 이세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잠에 들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이슬비를 멀리서 조용히 지켜볼 것이다. 아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너를 가까이에서 봤으면. 이세하의 머릿속에 아쉬움이 스쳐 갔다. 그것도 잠시, 충격과 함께 이세하는 의식을 잃었다.

 

*

 

눈을 뜬 이세하의 시야에 낯익은 천장이 들어왔다. 그가 일과 뒤에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방이었다. 아침이 되었는지 창밖에서 햇빛이 들어와 시야는 밝았다. 이불 아래로 손발을 움직여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몸을 일으켰다.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이래서는 자신이 지금 어느 쪽 세상에 있는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는 생각에 이세하는 집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고 두 발로 서려던 이세하는 발아래에서 딱딱한 바닥 대신 다른 것이 느껴지자 당황했다.

 

“크헉.”
“아저씨?”
“이, 일어났어, 동생?”

 

예상 밖의 목소리에 시선을 내린 이세하는 그에게 허리를 밟힌 채 몸을 떠는 제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다시 침대에 앉았다. 아무래도 바닥에 누워 있었던듯 했다.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이세하의 목소리가 음침해졌다. 그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일이 그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제법 아프다는 듯 허리를 쿵쿵 때리며 자리에 앉은 제이는 그에게 한숨을 쉬어보였다.

 

“왜겠어? 동생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서 그런 거잖아.”
“제가 왜 살아있는 거죠.”

 

이세하의 질문에 제이는 이세하의 얼굴에 시선을 향했다. 제이는 평소의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채였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이세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듯한 그 눈빛에 이세하는 그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네?”

 

이세하는 그의 질문에 놀라 침대 위에서 몸을 튀겼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 역시도 예상 내였던 것인지, 제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동생은 꿈에 간섭하는 차원종의 영향을 받았어.”

 

*

 

차원종이 위험한 것은 단순히 힘이 세고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기괴한 생물들 중 적지 않은 종류는 인간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차원종의 정신간섭은 그러한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들을 잔인하게 괴롭혔다. 제이는 그 어떤 공격에도 굳건할 것 같았던 이들이 이러한 공격에 너무도 간단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이세하가 영향을 받은 차원종 역시도 그러한 개체 중 하나였다. 행복한 꿈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목표물을 피폐하게 만드는 존재. 하지만 그뿐이었다.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가벼운 우울증과 비슷한 증세로 일시적으로 몸져눕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희생자를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아예 정신을 파괴하여 폐인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던 다른 차원종에 비하면 무해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제이는 이세하의 상태를 파악했어도 거기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상태에 대해 팀의 리더인 이슬비에게 이야기하기는 했다. 이세하가 정 힘들어한다면 그 건을 핑계로 그간 고생한 보상을 겸해 며칠 정도 휴가를 주기라도 하면 그만이라는 첨언과 함께. 며칠 전, 이세하를 비상계단으로 내보낸 뒤 제이가 이슬비와 단둘이 남았을 때가 그때였다.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세하가 그가 생각한 만큼 정신이 굳건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세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간의 그의 상태를 확인한 결과를 바탕으로 제이를 대기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슬비였다. 제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미안해, 동생. 괜한 고생을 시켜서. 대장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했어.”

 

이야기를 마친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에게 사과했다. 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이세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다시 앉혀놓았다.

 

“제가 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건 맞지. 차원종에게 당했으니까. 그런데, 동생?”
“왜요?”

 

그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빛이 음흉해졌다. 이성 문제로 이세하를 놀릴 때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꿈에 뭐가 나왔어?”
“...그걸 꼭 말해야 돼요?”

 

평소 그에게 여러 번 당해온 전적이 있는 이세하는 절대로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차원종의 영향하에 있었다고는 해도 자신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세하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의 반응을 본 제이는 묘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아냐, 안 해도 돼. 그보다, 슬슬 긴장하는 게 좋지 않겠어?”
“왜요?”
“곧 대장이 네 식사를 들고 들이닥칠 거거든.”

 

제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발칵 열렸다. 이슬비가 그가 곤란할 때를 노리는 데에는 귀신임을 익히 알고 있던 그였지만, 이쯤 되면 뭔가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 동생. 대장도.”

 

이슬비와 교대하듯 방을 나서며 제이가 그를 놀리듯 말했다. 방으로 들어온 이슬비는 쿵쿵 소리가 날 법한 발걸음으로 그의 방을 가로질러 책상 위에 식사를 올린 쟁반을 내려놓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세하, 너...!”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려던 이세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이슬비는 그런 그의 고개를 억지로 숙이게 하고는 그의 어깨를 투닥투닥 때려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세하는 어깨를 두드리는 그녀의 주먹 한 대 한 대가 온 힘을 담은 차원종의 일격보다 아프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시끄러. 넌, 늘, 제멋대로야!”
“내가 잘못했어.”
“구로에서도, 강남에서도, 늘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윽.”

 

그녀가 과거의 일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이세하는 입이 턱 막혀버렸다. 이슬비가 한 마디씩 쏘아 보내는 원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상능력자도 막아낼 수 없는 화살이 되어 그를 꿰뚫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주먹을 얻어맞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제이 씨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어...”

 

그의 어깨를 때리던 손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탁해졌다. 이세하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제에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니,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바보야.”
“정말로, 미안해.”

 

*

 

그 뒤로도 한동안 이슬비는 그를 때리면서 그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았다. 이슬비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자 기운이 쭉 빠져버린 이세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녀가 가져온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분이 금세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아침 식사는 많이 식어있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이세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정말 무슨 꿈을 꾼 거야?”

 

맙소사. 이세하는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방문 앞에서 그와 제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이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 말 안하면 안 될까?”
“응. 안 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피해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세하는 생각을 바꿨다. 그녀는 그 질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답을 들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꿈에 대해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의 말에 이슬비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이 소녀에게 이길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