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언니, 곧 밸런타인데이인데 선물은 준비하셨나요?”

 

퇴근이 가까워진 시간, 달력을 보다가 이슬비의 난데없는 질문을 받자 김유정이 뜨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슬비는 이번에도 틀렸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2월에 들어서면서 이런저런 일이 많았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에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김유정이 망가진 표정을 바로잡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에게 질문을 되돌리자 이슬비의 답답함은 더욱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지. 뭐라도 준비했니, 슬비야?”

“아뇨. 주말에 팀원들에게 줄 걸 직접 만들어볼까 해서요. 설마, 잊고 계셨던 건가요?”

“응?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잖니?”

 

허공을 표류하는 그녀의 눈길에 이슬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곧 결실을 보리라 생각했던 제이와 김유정의 관계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지부진한 채였다. 두 사람이 감정을 앞세우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나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들이 도대체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제이와 김유정이 서로에게 평균 이상의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건만 어째서 매번 이런 식인 것일까. 억지로 붙여놓으려고 해도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를 슬금슬금 밀어내며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둘의 모습을 떠올린 이슬비는 결국 이번에도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저랑 같이 만들지 않으실래요? 제이 씨한테 주실 거잖아요? 초콜릿.”

“아? 어? 내가 왜 제이 씨한테 초콜릿을 준다는 거니?”

“제이 씨도 그래도 나이가 비슷한 사람한테 받아야 기분이 좋을 것 아니에요? 제가 드려봤자 그냥 주전부리나 다를 게 없다구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가슴께에 겨우 닿는 체구의 이슬비에게서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받는 제이의 모습이 김유정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유정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 봐요. 언니가 제이 씨정도는 좀 챙겨주세요. 테인이랑..., 세하는 제가 줄 테니까.”

 

엉뚱한 생각이 스쳐 말에 미묘한 휴지를 두고 만 이슬비는 김유정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김유정 역시도 나름의 생각에 빠져있어 그에 대해서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슬비는 안도하며 김유정과의 약속 시각을 잡았다.

 

*


김유정은 브라우니의 재료를 사기 위해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적당히 매장에서 산 기성품으로 때웠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와 그녀 사이의 일이라면 늘 그렇듯이 김유정은 평소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의 기세에 밀려 기어이 약속을 잡고야 만 김유정은 제작에 드는 재료비를 전액 자신이 부담하는 것으로 마지막 체면을 지켜야만 했다. 한숨을 쉬며 제빵 코너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던 김유정은 발렌타인 특선 코너를 깨작이는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제이 씨?”

“아, 안 사요! 그냥 구경하는 거..., 어라, 유정 씨?”

 

김유정을 본 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아, 뭐, 그냥 저녁 찬거리나 좀 살까 해서요.”

 

왠지 부끄러워진 김유정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그에게 줄 선물임에도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이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밸런타인데이지?”

 

덜컥. 김유정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가 으레 아무 생각 없이 엉뚱한 말을 늘어놓으며 장난을 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허당 같으면서도 종종 이렇게 허를 찌르는 그의 모습은 정신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이 씨는 어차피 팀원들한테 받을 거잖아요?”

“유리가 뭘 좀 산다고 하긴 하던데, 우리 리더도 별다른 말은 없어도 주지 않을까? 성격이 있으니.”

“그럼 됐어요.”

 

김유정이 짐짓 자르듯 말하자 제이의 몸이 축 처졌다. 그가 이런 일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이런 데 일일이 의식적으로 반응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럼 유정 씨는 우정 초콜릿이라던가, 안 주는 거야?”

 

‘우정 초콜릿’이라는 말에 김유정이 발끈했다. 이럴 때라도 빼지 말고 그냥 초콜릿을 달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감찰부의 최서희 요원이 그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인 만큼 그에게 초콜릿을 줄 사람은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많을지도 모른다. 가끔 헛소리를 해서 그렇지, 입만 다물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미남에 키도 큰 제이니 그를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는 여성 한, 둘쯤은 있을 것이다. 약이 오른 김유정은 그에게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안 줘요. 제이 씨는 다른 사람들한테 잔뜩 받을 거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서 빨리 들어가야 하니까 이만 실례할게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는 김유정의 등 뒤로 제이가 그녀를 부르며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모두 무시했다. 처음에는 ‘그라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생각했건만, 머리에 다시 떠올릴수록 그녀의 머릿속엔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초콜릿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서 술이나 진탕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김유정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구매목록에 맥주를 추가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초콜릿 재료를 사서 돌아갔다. 그만두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슬비가 지을 풀죽은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귀가한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맥주에 취한 채 곯아떨어졌다.

 

*


약속대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김유정의 넋두리를 들은 이슬비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 무슨 청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에피소드란 말인가. 업무 중에 자신의 감정을 능란하게 숨기는 그녀의 모습을 평소부터 곧잘 보아왔던 터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정도로 그녀가 제이에게 가진 감정이 특별하기에 그런 것이려니 하며 이슬비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었다.

 

“하아, 어찌 됐건, 제이 씨가 유정 언니한테 화가 많이 났거나 하진 않았을 거예요. 남은 건 언니가 밸런타인데이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숙취와 자책으로 얼룩져있던 김유정의 얼굴이 그녀의 말에 조금 밝아졌다. 그녀가 넋두리를 늘어놓는 사이 이슬비는 그녀가 가져온 재료들을 모두 꺼내 배치해 둔 뒤였다. 자취를 하면서 이런저런 요리를 많이 해본 김유정이었지만 초콜릿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던 김유정은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시 네가 만들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만들었다간 쓰레기만 늘어날 것 같은데...”

 

레시피를 다시 확인하던 이슬비는 김유정의 말에 힘이 빠진다는 제스쳐를 과장되게 취해 보였다.

 

“언니, 중요한 건 상태가 아니라니까요. 유정 언니가 직접 만들어준 초콜릿이라는 게 중요하지. 남자 마음을 잡는 데는 수제 요리만 한 게 없다구요.”

“...너도 남자친구 없잖니.”

“...드라마에서 봤어요.”

 

덩달아 어두워지는 이슬비의 표정에 김유정은 지뢰를 밟은 느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까지의 관계가 역전된 듯한 모습으로, 김유정은 음울하게 누군가를 중얼중얼 욕하고 있는 이슬비를 끌고 조리대 앞에 섰다.

 

“슬비야,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니?”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게 구는 김유정의 모습에 제정신을 찾은 이슬비가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자신의 행동에 PC의 전원을 켜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이슬비의 모습에 김유정은 자신이 이렇게 구는 것이 그렇게 안 어울리고 이상한 것인가 하고 약간의 우울감을 느꼈다.

 

“일단 이걸 읽어보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는 드리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아셔야 요리하기가 편하니까요.”

 

종이를 펼친 김유정은 인터넷 블로그에서 발췌한 듯한 화사한 프린트에 처음 외국에 갔을 때 느꼈던 이질적인 감정을 다시 느꼈다. 동글동글한 폰트로 여보란 듯 귀엽게 표시된 「남친이 좋아하는 브라우니 만들기」라는 제목을 보고나니 그 감정은 더욱 커졌다.

 

‘아아, 나는 역시 이런 걸 하기엔 늦은 나이가 아닐까...’

 

프린트를 펴든 자세로 굳어있는 자신을 물음표를 띄우고 바라보는 이슬비를 눈치챈 김유정은 서둘러 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괴감을 애써 씹어 삼키며 프린트를 끝까지 읽어내린 김유정은 이슬비와 함께 브라우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초콜릿 200g을 녹여서 중탕하도록 하죠. 판 초콜릿을 사 오셨으면 그걸 부숴야 하겠지만, 다행히 언니가 사 온 초콜릿이라면 부술 필요는 없겠네요.”

 

김유정은 그녀의 말에 따라 초콜릿의 분량을 쟀다. 평소 습관대로라면 손 감각으로 적당히 분량을 맞춰서 호쾌하게 요리했겠지만, 처음 하는 일인 데다 제이에게 줄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손길은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아니, 되려나? 될까?”

“...언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요리랑 다를 게 없잖아요. 더 쉬웠으면 쉬웠지.”

“그, 그러니?”

“그럼요. 정 부담되시면 계량은 제가 해 드릴게요. 언니는 중탕을 부탁해요.”

 

스스로의 손에 도무지 자신이 없었던 김유정은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뒤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없었다. 이슬비가 건네주는 재료들을 받아서 잘 섞기만 하면 되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세가 붙은 그대로 진행을 하던 김유정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반죽의 분량에 당황했다.

 

“슬비야, 이거 너무 크지 않니...?”

 

그녀가 완성한 반죽을 작은 프라이팬만 한 틀에 옮겨 담는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이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김유정이 상상한 브라우니는 손바닥만 한 작은 선물이었던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슬비가 당연하단 듯이 되물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언니랑 제이 씨 사인데요.”

“슬비야, 매번 말하는 거지만 제이 씨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

“글쎄요, 이걸 주시고 나서도 그럴까요.”

 

담담하지만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결국 김유정은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돌려받은 반죽 위에 그녀가 시키는 대로 슬라이스 된 아몬드와 코코넛을 뿌려 데코레이션까지 완료한 김유정은 언제 켰는지도 모를 사이에 예열이 끝나있는 소형 오븐에 틀을 밀어 넣어 일을 마무리했다.

 

“포장도 준비하셔야죠.”

 

큰일을 끝냈다는 느낌에 몸에서 힘을 쭉 빼던 김유정은 또다시 이슬비에게 끌려갔다. 정말이지, 이런 일에서는 그녀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 김유정의 감상이었다. 결국, 그녀는 제과점에서 파는 케이크나 파이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어마어마한 브라우니를 만들어서 돌아가게 되었다. 역까지 그녀를 바래다주겠다며 그녀를 따라나선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들겠다던 초콜릿은 어디에 있을까? 브라우니를 만드는 동안 그녀가 한 것은 김유정의 도우미역뿐이었다.

 

“슬비야, 너는 초콜릿 안 만드니?”

 

밸런타인데이에 대해 조잘조잘 즐겁게 이야기하던 이슬비의 말이 딱 하고 멈췄다. 의아해진 김유정이 그녀를 돌아보니 이슬비의 얼굴이 불안으로 물들어있었다.

 

“...역시 저는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슬비야.”

 

김유정은 손날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아프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은 작게 웃었다. 결국, 나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슬비나, 그녀 자신이나,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김유정은 오늘 하루의 보답으로 그녀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었다.

 

“팀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리더의 일인 거, 알지? 이것도 업무의 일환이야. 재료는 내가 충분히 사 왔으니까, 부탁할게?”

“...네.”

 

그녀 자신도 이슬비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밸런타인데이를 보냈거나, 간단한 기성품을 주고받으며 인사치레를 반복했을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김유정은 불안해하는 이슬비의 모습에 그녀 자신이 그러했듯 자신을 떠밀어 한 발자국 전진하게 하는 무언가를 건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라면 그 정도 도움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늘 하루 그녀를 도와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녀라면.

 

*


밸런타인데이 당일 아침, 상자를 들고 불안해하며 사무실 계단을 오르던 김유정은 종이가방을 손에 든 채로 검은양 사무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이슬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늘 꼴찌로 사무실에 도착하는 이세하의 게임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사무실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유리가 제이에게 장난을 치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게임의 BGM 사이로 그 둘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자 이슬비가 딱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오셨어요, 유정언니?”

“좋은 아침이야. 들어가야지.”
“아뇨, 그... 저는 잠시만...”

 

김유정은 주저하는 그녀의 빈 쪽 손을 잡고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시야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이와 그를 깔아뭉갠 채 깔깔 웃고 있는 서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방으로 들어오는 김유정을 발견한 제이의 표정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김유정은 다시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검은양 사무실의 아침이 오늘도 이렇게 소란스러워졌다.

 

“제이 씨! 뭐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