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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고등학교 2학년 서유리를 아는 이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한 가지 의견은, 그녀가 일반적인 남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인간적으로 결격사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외모는 TV에서만 볼 수 있는 소위 아이돌들의 그것과도 비견해도 손색이 없었다. 거기에 모나지 않고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격이기까지 했으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고 할만했다. 하지만 남자나 다름없는 그녀의 평소 행동거지를 본 사람들은 대개 마음속에서 그녀의 등급을 신경 쓰이는 이성에서 좋은 친구로 격하시키기 마련이었다.

 

서유리 본인 역시도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자신은 머리도 나쁘고, 분위기도 잘 못 읽는다. 소꿉친구인 우정미도 그녀를 종종 아저씨 같다고 이야기할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남성들이란 으레 자신이 지켜주고 싶어지는, 그러니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땀내-그녀의 경우는 호구 특유의 냄새도-나는 운동계에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억척스러운 면이 있는 자신보다는, 클로저 활동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팀 리더 이슬비나 강남사태 당시 만난 오세린이라는 선배가 남성들에게 더 인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서유리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대담한 시도를 한 것은 클로저 정식 요원복을 지급받는 과정에서였다. 보급품 품목을 대강 훑어보던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짙은 커피색 스타킹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얼마 전 놀러 간 이슬비의 집에서 본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었다. 빠릿빠릿한 일처리가 자랑인, 소위 말하는 ‘유능한 사무원’ 스타일.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녀가 양복과 함께 신는 스타킹이었다. 한 번 기억 속에 박혀버린 이미지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맴돌았다. 서유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요원복을 수령해왔다.

 

그날의 복구 작업 지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서유리는 자신이 수령한 요원복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다. 처음 신어보는 스타킹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이게... 나야?”

 

평소의 다소 흐트러져 보이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여성이 한 명 서있었다. 꼭 맞는 검은 수트에 단정한 넥타이와 포인트를 잡아주는 푸른 스커트. 거기에 처음 신는 스타킹에 꼭 어울리는 롱부츠는 그녀의 긴 다리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잠시 넋을 놓고 거울을 보던 서유리는 이 옷을 수령한 것을 자찬하며 들떠 있다가 잠을 청했다.

 

딱히 그녀의 일상이 그날부터 마술처럼 180도 반전한 것은 아니었다. 학우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좋은 친구’나 ‘착한 누나’등에 가까웠고, 그녀의 행동거지 역시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원복을 입고 클로저 활동을 하고 있으면 서유리는 자신과 예의 기억 속 사무원을 어느 정도 동일시할 수 있었다. 복구 작업은 순조로웠고, 이전 강남 사태 때는 물론이고 학교나 구로역에서 차원종과 싸우던 때와 비교해도 상황은 점점 호전되고 있어 위험한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을 쉴 때면, 뿌듯한 기분이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

 

“유리야, 잠깐만.”

 

이슬비가 작전 종료 후 땀을 닦아내던 서유리를 잠시 불러 세운 것은 그런 나날 중 하루였다. 그녀는 구슬땀이 맺힌 서유리의 이마를 잠시 바라보았다.

 

“응? 왜, 슬비야?”

“몸이 안 좋거나, 피곤하거나 하진 않아? 요즘 날씨도 점점 더워지는데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은 어느덧 초여름이라고 해도 좋을 때가 되어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차원종 잔당을 처리하다 보면 몸은 어느새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고, 그런 상태로 퇴근 시간이 되어갈 때 즈음이면 샤워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비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징후를 느낀 적은 없었다.

 

“괜찮은데? 나, 검도할 땐 이거보다 훨씬 힘들었어. 몸만 움직여도 지치는데 검도부는 완전 찜통이고, 거기에 호구 생각만 하면... 아휴...”

“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이슬비는 서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리 쪽을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미간을 약간 찌푸린 것이, 뭔가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유리야, 그, 옷 말인데...”
“응? 이거 왜?”
“그 요원복, 덥지 않아? 땀이 찬다던가...”

 

서유리는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옷이 뭐 어때서? 서유리는 의문의 시선으로 이슬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다리 쪽을 향해있었다.

 

“옷? 괜찮은데? 왜 그러는데?”
“음... 아냐. 괜찮다면 됐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봐.”

 

서유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잠시간의 생각 끝에 한 생각은 역시 자신은 이런 고민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는 결론을 내린 뒤 그녀는 웃으며 이슬비를 껴안았다. 이슬비의 얼굴은 금세 당혹으로 물들었다.

 

“에이, 우리 슬비는 걱정도 많아! 뭔진 모르겠지만 괜찮아, 괜찮아!”
“아니, 잠깐. 유리야!”

 

이슬비의 반응을 보면서 깔깔 웃으며 서유리는 생각했다. 별 문제 없을 거야.

 

*

 

하지만 며칠 뒤, 서유리의 생각은 틀렸음이 드러났다. 그녀에게 있어서 최악의 방식으로. 그 시작을 알린 것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서유리를 맞아준 그녀의 동생이었다. 부츠를 벗고 집안에 들어온 그녀를 반기러 나온 동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나, 냄새나!”
“응?”

 

서유리는 당황했다. 작전중에 묻은 차원종의 피가 아직 배어있는 걸까? 서유리는 동생처럼 코를 킁킁대보았지만,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라 이미 적응이 된 것인지 별다른 냄새를 맡지는 못했다. 차원종의 체액이 일반인에게 위험할 수 있다며, 일과 종료 후 장비수입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파하던 이슬비가 생각난 서유리는 재빨리 몸을 둘러보았지만 신통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서유리는 동생의 어께를 붙잡고 직접 질문했다.

 

“무슨 냄새? 이상한 비린내 같은 게 나니? 역한 냄새야?”

 

동생은 고개를 젓고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맡은 냄새를 표현할 단어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뒤, 동생은 이거다, 싶은 단어가 생각난 듯 얼굴을 확 펴고는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빠 발 냄새랑 똑같은 냄새 나!”

 

*

 

“그래서, 나한테 약을 받았으면 한다?”

 

제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평소 약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던 그녀가 이런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리라곤 제이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제이는 손가락 사이로 서유리를 훑어보았지만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일 뿐, 그로서는 어디가 문제인지, 무엇이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옷을 제외하고는.

 

“그러고 보니 유리야, 그 옷은 오랜만이다?”

 

서유리가 입고 있는 옷은 한 달 넘게 계속해서 봐와서 익숙해진 정식 요원복이 아닌, 처음에 지급받은 검은양 팀의 요원복이었다. 서유리가 정식 요원복을 썩 맘에 들어 한다는 것을 그간 익히 봐와서 알고 있었던 제이는 그녀가 왜 옷을 바꿔 입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 저어, 그게 있잖아요, 아저씨...”
“오빠라니까.”

 

제이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 사람 말 안 듣는 아가씨는 처음 볼 때부터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굳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마저도 ‘아저씨’라는 호칭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자신이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일까, 하고 제이는 잠시 울적해졌다.

 

“아니, 어쨌든 그건 됐고. 무슨 약이 필요한건데? 어디 다쳤어? 자, 자. 이 오빠한테 말해 보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이는 서유리가 답답해진 제이가 캐물었지만 서유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진 제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서유리를 달래는 작업을 시작했다. 몇 분 뒤, 모기 목소리로 대답하는 서유리의 요구를 들은 제이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만지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좀약을 달라고?”
“아저씨, 목소리가 크잖아요!”

 

서유리가 빽 고함을 질렀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재해복구 본부의 한가운데였고, 시끄러운 장비 가동음을 뚫고 우렁차게 울려퍼진 서유리의 고함소리는 주변에서 쉬고있던 특경대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서유리는 얼굴에만 때이른 가을이 온 양 다시금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 참... 뭐라 해야되나...”

 

제이는 난감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위로할 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건만, 이런 식으로 개인의, 그것도 다 큰 여성의 치부를 듣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럴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가. 제이로서는 자신은 받아본 적도 없는 압박 면접이 이런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눈앞에 서있는 서유리의 어께가 조금씩 떨리며 들썩거리는 것이, 우물쭈물하다가는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제이를 더욱 압박해왔다.

 

“일단, 지금은, 그 뭐냐... 약, 없으니까... 끝나고 나면 우리 집으로 가자. 응? 진정하고, 유리야. 제발 부탁이다.”

 

이미 부끄러움이 임계점을 넘었는지 서유리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런 서유리의 양 어께를 붙들고 이야기하는 제이의 뒤통수를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난타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 한 이 꼴을 대장이 봤으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잡생각이 제이의 머리를 잠시 스쳤다.

 

*

 

“이거 참. 좁고 더러워서 미안하구만. 일단 들어와.”

 

제이의 집은 좁은 옥탑방이다. 제이는 전쟁 기간 동안 군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기도 했고 실험 때문에 연구소에서 살았던 적도 있어 나름 깔끔한 성격이었지만, 최근 바쁘기도 했고 꿈자리도 사나워 자기 전에 술 한 잔이 습관이 된 탓에 방 여기저기엔 맥주 캔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발로 빈 캔을 밀어내 대충 앉을 자리를 만들고 서유리를 앉힌 제이는 침대 밑에서 구급상자를 잔뜩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게 어디로 갔지...?”
“...없는 거 아니에요?”

 

등 뒤에 서유리가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우울한 모습으로 앉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제이는 자신이 아무렇게나 뒹굴던 집이 가시방석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약상자를 평소에 좀 정리해놓을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제이를 짓눌렀다. 워낙 독하다 보니 자신은 잘 쓰지 않는 약들이라고 구비만 해놓고 어딘가에 처박아놓은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십여분이 지나고 방이 수많은 약병으로 약국을 방불케하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나서야 제이는 겨우 무좀약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유리야! 찾았어!”

 

어울리지도 않는 호들갑을 떨며 제이가 약을 치켜들고 뒤를 돌아보자,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묻은 채로 앉아있던 서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거, 예요?”
“그래. 이건 먹는 약이고 이건 바르는 약이야. 일단 둘다 줄 테니 일단 챙겨. 바르는 약부터 써봐.”

 

제이의 말을 들은 서유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이거 바르면 바로 나아요? 곧바로?”
“아니, 이거 작전용 회복약같은거 아니니까...”
“고마워요, 오빠! 가서 이거 발라볼께요! 동생들 밥 때문에 저 빨리 가볼게요! 내일 봬요!”

 

당황한 제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서유리는 문을 열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계단을 급히 내려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내일 아침에 주인집에게 한 소리를 들을 듯 했다. 지금의 모습을 보건대, 아마 서유리는 저 약의 효과를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짜 싸움은 내일부터이리라. 제이는 머리를 긁으며 책장을 뒤적였다.

 

“여기 어디에 신문 스크랩을 해둔 게 있을 텐데...”

 

*

 

다음날, 꼼꼼하게 약을 바르고 잤건만-당연하게도-차도는 없었고, 클로저 일이 비번이었기에 서유리는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채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저씨... 좋은 약은 자기가 다 먹고는...”

 

자신에게 자신만만하게 약을 내주던 제이의 얼굴을 떠올린 서유리는 짜증이 치밀었다. 서유리가 투덜거리며 약을 꺼내던 차에 벨이 울렸다. 약을 책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커다란 가방을 맨 제이가 서있었다.

 

“안녕.”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제이를 보자 서유리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전날 밤에 기분좋게 들어와 기대에 부풀어 약을 바르고 잤던 자신을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짜증이 치밀었다.

 

“뭐, 유정 씨한테 물어봤지. 너희 집 찾기 정말 힘들더라.”

 

한밤중에 전화해 서유리의 집을 묻자 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목소리가 차가워지던 김유정의 반응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제이는 잠시 오한을 느끼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다 뭐고요?”
“별건 아니고. 도와주는 김에 확실히 도와주려고.”

 

제이가 아래, 정확히는 서유리의 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양말을 신은 채였다. 제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서유리의 눈이 자신의 발에 닿자 서유리는 발칵 화를 냈다.

 

“아저씨가 안 도와주셔도 되요!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요! 약도 효과도 없던데요, 뭐!”

 

제이는 헛웃음을 쳤다. 어쩌면 이 아가씨는 어제 예상이랑 한 치도 다르지 않을까.

 

“아니, 어제도 말했지만 그 약은 그냥 평범하게 오랫동안 써야 되는 약인데. 하루 만에 나을 리가 없잖니, 유리야.”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했어. 네가 안 들어서 그렇지.”
“아휴, 안 했어요!”
“했어.”

 

씩씩대는 서유리를 보고 있던 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현관으로 밀고 들어왔다. 서유리는 그런 그를 낑낑대며 막아보려 했으나, 위상능력자이긴 하나 어찌됐건 여성에 고등학생인 서유리가 단순한 완력 싸움에서 그를 막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서유리의 방을 발견한 제이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움찔했다.

 

“아니, 역시 이건 좀 그런가. 어디 앉을 데 없나?”
“식탁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오, 그렇네. 땡큐.”

 

제이가 넉살좋게 식탁 의자에 앉자 맞은편 의자에 서유리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세게 앉았다. 자기가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 그리 유복한 환경도 아니었고, 그런 자랑할 것 없는 모습을 팀원에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니 서유리는 우울해졌다.

 

“가족들은? 동생들은 아직 학교인가?”
“친구랑 놀러갔어요. 저녁밥 먹을 때가 되면 오겠죠.”
“그렇게 시간이 넉넉하진 않구만. 그럼 빨리 본론만 얘기하고 가지.”

 

본론이라는 이야기에 서유리가 다시 도끼눈을 하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배신감을 떠올리면 당장 식탁 아래로 발길질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이상한 아저씨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하는 생각을 서유리는

해보았지만, 이세하나 이슬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미스틸테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강남사태 당시에 제이가 무좀약 이야기를 잠시 꺼냈던 것을 기억해내어 제이에게 상담해보려 했지만 결국 이 꼴이다. 서유리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서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제이는 벗어놓은 가방에서 자그마한 약통을 주섬주섬 꺼냈다. 소아용의 감기약 등이 들어갈 법한, 액체가 들어있는 튜브 타입의 작은 플라스틱 병이었다.

 

“자. 니가 원하던 즉효약인데, 이게.”
“네?”
“너 학교에 있는 동안에 얻어왔다. 전쟁 중엔 이렇다 할 클로저용 옷 같은 것도 모자라서, 다들 아무렇게나 군복에 전투화 차림으로 싸워대느라 너랑 같은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았거든.”

 

시큰둥하게 제이의 이야기를 듣던 서유리가 와락 일어섰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이 약을 받았단 말인가? 서유리의 머릿속에 캐롤리엘의 조수로 일하고 있는 우정미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서유리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잃을 것만 같았다.

 

“그걸 또 누구한테 말했어요? 아저씨 때문에 못 살겠어, 정말! 누구한테요?”
“캐롤리엘한테. 그냥 내가 무좀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걱정 말고.”

 

제이가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어 물고는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기 전에 이번엔 그걸 바르고 자 봐. 그럼 일단 상황은 나아질 거야.”
“‘일단’요?”
“그래. 그리고 이거 읽어보고.”

 

제이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서 서유리에게 건네주었다. 가방 안에는 비슷한 서류철이 잔뜩 들어있었다. 상황이 자꾸만 휙휙 바뀌는 탓에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가방이 컸던 까닭이 저것인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서류철을 열자 신문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무좀, 재발, 재감염 막는 것이 중요...’...?”
“그 약은 어디까지나 당장 급한 불만 꺼주는 거거든. 뭐니뭐니해도 평소에 관리를 잘 해주는 게 제일이지.”
“...이렇게 읽어서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머리가 나쁘잖아요.”

 

서유리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제이는 선글라스를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다. 그래서 내버려둘 수 없는 거겠지만.

 

“일단 읽어보고... 잘 모르는 부분은 나중에 이 오빠한테 물어봐. 다른 서류철 보면 양복 입을 때 주의해야할 점 같은 것도 모아둔거 있으니까 그것도 보고. 가방은 놓고 간다.”
“네? 가시려구요?”
“네 동생들 올텐데 뭘. 그럼 수고해.”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 넓지 않은 서유리의 집 거실을 뚜벅뚜벅 가로질렀다. 서유리는 아직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로 제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신발을 신은 제이는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그녀에게 인사삼아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건강이 제일이다.”

 

*

 

복구본부의 일상은 계속된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제이는 연구용 잔해의 전달을 위해 우정미에게 향했다. 그녀는 임시로 설치해둔 컨테이너에서 무언가를 배송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캐롤리엘에게 보내는 물품이리라.

 

“안녕. 늘 하던 일 하러 왔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

 

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이 아이들과 연관되기 시작한 이후로 한숨이 부쩍 늘어난 기분이 드는 제이였다. 차원전쟁 당시만 해도 팀의 마스코트였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제이는 그가 가져온 차원종 잔해를 수령한 우정미가 그에게 종이가방을 하나 내민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초콜릿? 역시 이 오빠는 인기 있구만.”

“밸런타인데이가 몇 달 전 얘긴데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지.”

 

웃으며 가방을 받아든 제이는 안에서 약봉투를 발견하고 우정미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우정미는 그런 그에게 측은하다는 듯한 눈빛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캐롤리엘 선생님한테 들었어요. 그... 무좀 때문에 고생하신다면서요? 일단 평소에 많이 도와주시니까 드리는 거예요. 정말이지... 관리 좀 하시라구요. 매번 건강, 건강 하시면서.”

 

제이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그가 캐롤리엘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이런 식이어서는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제이가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대답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등을 둔탁한 충격이 덮쳤다.

 

“크헉!”
“정미정미야!”
“서유리 너, 여기 위험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 조심히 좀 들어오라니깐!”
“아휴, 미안! 우리 정미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만 잊었지 뭐야! 아저씨, 미안해요!”

 

제이는 위험 신호를 머리가 쾅쾅 울리도록 보내오는 허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서유리의 뒤를 이어 검은양 팀의 다른 멤버들도 컨테이너로 들어왔다.

 

“임무 수고하셨습니다, 제이 씨. 정미야, 그거 전해드린거야?”
“무좀약 말이지? 방금 드렸어.”

 

우정미와 이슬비의 대화를 듣자 제이는 목에서 피 맛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지금 정도면 아마 피를 토하더라도 괜찮은 상황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제이는 나머지 멤버들이 우정미와 이야기하는 틈을 타 유리에게 슬쩍 눈짓했다. 부디 그녀가 이 신호를 이해해서 화재를 좀 돌려주기를. 제이의 눈을 본 유리는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에이, 제이 오빠도 참! 어쩌다가 무좀이 다 걸린 거예요!”

 

제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