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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감을 사기 쉬운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의 손을 잘 빌리지 않는 편이었고, 그녀가 누군가의 도움을 청할 땐 대개 상대가 수긍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슬비는 지금까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해도 큰 문제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슬비는 자신이 지금까지 유연한 화술을 갈고닦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평소 유니온 아카데미의 교육방식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던 그녀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매끄러운 사회생활을 위한 화술 교육에 시간을 할당하지 않은 아카데미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휴대용 게임기를 두들기고 있는 이세하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세하는 눈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푸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까다로운 리더가 지금까지 자신의 취미생활을 방해해온 것이 도대체 몇 번인지, 그는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업무 시간에도 잠시만 짬이 나면 기어코 게임기의 전원을 켜고야 마는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작전을 촬영한 동영상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을 편집하고 나니 분량이 너무 적어 방송물로 만들 수가 없더라는 박심현 요원의 이야기는 그로서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세하는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작전 중에 게임을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식 시간에 아지트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신의 자유가 아닌가. 게임에 집중하느라 게임기를 고정하는 손가락이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타 기어코 손을 빠져나가 그녀를 향해 날아가는 게임 콘솔을 맥없이 바라보는 것은 이제 사양이었다. 이세하는 콘솔을 잡는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방해한 것은 다른 방법의 공격이었다.

“이세하.”
“잠깐, 5분만.”

어쩌면 저렇게 타이밍이 안 맞을 수가 있을까. 이세하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슬비에게는 염동력 이외에도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모종의 능력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녀가 이세하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그를 부르는 때는 대체로 손을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다가 집중이 흐트러져 얼마 안 남은 목표를 놓친 것이 몇 번이던가. 용돈을 털어 새로 구매한 DLC의 클리어가 눈앞이건만 저 분홍빛 머리의 소녀는 어째서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것일까.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불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얼마 뒤, 이세하는 이슬비를 오래 기다리게 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스테이지를 마무리하고 게임을 세이브했다. 콘솔이 종료되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슬비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슬비는 자신이 들어왔을 때 본 모습 그대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왜 불러?”
“응?”

이슬비는 그의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다급히 팔짱을 풀며 이세하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세하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그가 게임기를 집어넣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발표 수업에서 볼 법한 사무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하던 그녀였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낀 이세하는 아직도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라도 있나?”

이세하의 실수였다. 검은양 팀에 들어오기 전까지, 가족을 제외하면 인간관계라고 해봐야 동성 친구인 한석봉뿐이었던 그였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외의 것들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에서 본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지뢰를 밟은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세하도 눈앞에서 이슬비의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점점 붉게 물드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강대한 알파퀸의 아들이자, 본인 역시도 촉망받는 클로저인 그도 엎지른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세하는 자신의 정수리를 목표로 두꺼운 영어사전이 날아들고 있다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슬비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고, 지금까지의 몇 번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이세하의 무신경한 행동거지는 지금까지 질리도록 보아왔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도 방금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눈앞에서 꽤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문지르고 있는 이세하를 보자 미안하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릿속의 분노를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사적인 일로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이슬비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이세하를 불렀다.

“이제 정신 차렸어?”
“그래.”

제법 아픈 듯한 제스처를 취하더니만 타격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도 험악한 상황을 몇 번 겪은 클로저 나부랭이니 그럴 만도 했다. ‘평소처럼’을 머릿속에서 되뇌며 이슬비는 이세하에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녀 자신의 현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코믹월드, 라고, 알고 있지?”

결국 이슬비는, 앞으로 몇 년간은 후회할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야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

이세하는 코믹월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 아이템을 증정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코믹월드 행사장에 방문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세하는 이 분홍빛 소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코믹월드의 이미지를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은 좁은 공간 안에 우글거리는 사람과 거기서 기인하는 숨 막히는 공기뿐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이 깐깐하고 고지식한 완벽주의자가 그곳에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이세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이슬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일단 말을 시작하긴 했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도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엔 ‘이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다’라는 식의 예제들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이대로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말재간을 저주하며, 이슬비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세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셜록 홈즈 관련 합동지를 판매하는 부스의 소식을 트위터에서 들었으니 사러 가야겠으며, 자신은 초행길이니 이런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이세하가 자신과 동행해줬으면 한다’라는 것이 이세하가 들은 그녀의 요지였다. 이슬비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녀를 놀리다가 본전도 못 찾고 부들부들 떨며 돌아온 제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열의가 이 정도일 것일 줄이야. 홈즈가 그려진 컵받침에 감히 컵을 올리지도 못하던 만화 속 주인공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세하는 그녀에게도 이런 부류의 장난이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에는 이세하가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세하는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너, 거기 뭐 하는 데인지는 알아?”
“간단하게 조사는 했어. 특정 미디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동인지나 관련 상품을 파는 곳이잖아?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매우 긍정적인 활동이지. 인상 깊었어.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이세하는 머리가 아파졌다. 이 반응을 보건대, 그녀는 ‘동인지’라는 단어를 국어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정의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녀를 코믹월드같은 곳에 데려갔다간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이세하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녀가 택한 동행인이 하필 자신이란 것 역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성인인 제이나 동성인 서유리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 둘에게는 이미 물어봤어. 유리는 코믹월드가 뭔지도 모른다고 했고, 제이 씨는..., 반응이 이상하던데. 그런 건 네가 잘 알 거라며 너를 추천해주셨어.”

이세하의 안에서 제이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이렇게 능글거리니까 결국 아저씨인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을 추천한 뒤에 속으로 제이가 얼마나 웃었을지는 굳이 그를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이 광대놀음을 회피할 방도를 찾기 위해 핑곗거리를 찾아 머릿속을 뒤지던 이세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난 어머니가 반대해서 못 갈 것 같은데. 예전에 한 번 갔을 때도 어머니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

이슬비가 그의 대답에 수긍하는 모습에 이세하는 조용히 안도했다. 그녀가 그의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존경심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그녀가 더는 자신을 귀찮게 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그리고 그의 리더는 그를 이 정도로 놓아줄 정도로 녹록치 않았다.

“그럼 내가 너희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허락을 받을게. 그럼 문제없겠지?”

난데없는 제안에 이세하는 또다시 당황했다.

“네가 우리 어머니 번호는 어떻게 알아?”
“나는 팀의 리더야. 팀원이 부재중이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비상 연락망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오늘은 아무래도 액일이 분명했다. 이세하는 아침으로 돌아가 방에서 농성하는 자신의 모습을 맹렬히 상상했다. 하다못해 쉬는 동안엔 게임을 좀 해야겠다며 검은양 아지트로 향하지 않는 모습이라도. 당연하게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핑곗거리가 떨어진 이세하는 결국 자신의 선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이세하는 자신이 코믹월드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의 행사 때에도 이번 한 번 만이라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몇 주간의 투쟁의 열매를 얻어냈던 이세하인 것이다. 그랬기에 이슬비가 전화 한 통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허락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 이세하의 생각이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저런 유감스러운 이유로 전화가 간다는 것은 이세하로서도 기분이 다소 묘해지는 이야기였으나, 어찌됐건 상황을 정리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그가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그랬기에, 이세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슬비를 에스코트하여 코믹월드에 가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듣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어딜 가요?”
“저번에 세하 네가 갔던데 말이야. 글쎄, 너 오기 조금 전에 슬비가 전화를 해서 너를 좀 빌렸으면 한다지 뭐니? 어쩜 나이도 너랑 동갑인 애가 그렇게 야무진지! 그 애, 정말 괜찮지 않니? 저번에도 내가 이 말 했었나?”

이세하는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의 어머니가 이슬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 정도였단 말인가. 아카데미에 다녀온 서지수가 그에게 이슬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신붓감 운운할 때에 미리 선을 그어놓지 못한 것을 이세하는 후회했다. 물론 그 시점에서 이슬비와 이런 식으로 엮이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터였으니 의미 없는 후회였지만. 결국, 이세하는 다음날 학교에서 다음 주 주말에 코믹월드 행사장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표 예매를 이슬비에게 맡긴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행사 당일, 이세하와의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한 이슬비는 인도를 메운 인파에 경악했다.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강남 사태가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만한 민간인이 한 곳에 모인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그녀가 행렬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에도 그녀의 뒤에서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고, 조끼를 입은 진행요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줄을 정리하느라 부산을 떨어댔다. 이세하의 모습을 찾아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이슬비는 줄을 서있거나 줄의 끝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위상능력자임을 드러내는 분홍빛 머리와 푸른 눈은 어딜 가도 주목의 대상인 것이다. 신강고등학교에 등교한 첫 날 아침,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벌어진 소동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그녀였다. 이런저런 추억에 잠겨있던 이슬비의 어께를 누군가가 툭툭 건드렸다.

“누구신지?”

뒤를 돌아본 이슬비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이세하를 발견했다. 그녀가 아는 이세하는 머리에 무언가를 걸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었던 터라 이슬비는 그를 알아보는데 시간을 꽤 잡아먹어야만 했다. 이슬비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그녀의 손을 대뜸 붙잡고는 그녀를 인적 드문 곳으로 잡아끌었다.

“잠깐, 이세하! 뭐하는 거야!”
“너야말로 뭘 한가롭게 그러고 있는 거야?”
“내가 뭘 잘못한거야?”

이슬비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인가 싶어 자신이 바라보던 인파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행사장에 오려면 무언가 특별한 장식과 같은 것을 챙겨서 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 속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색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이 모자부터 써. 이것도. 이런 데서 머리를 다 드러내고 다니면 어떡해?”

이세하가 사이드백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이슬비는 의아해졌다.

“왜? 위상 능력자가 이런데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는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TV도 안 보냐?”
“TV가 왜?”

이슬비는 최근 일주일간의 뉴스를 곰곰이 떠올려보았지만, 위상 능력자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 이런 건 인터넷에서 더 많이 퍼졌으려나? 우리 팀은 대체로 그렇고, 특히 너랑 서유리말야. 지금 완전 유명 인사거든?”

이슬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뭘 했다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된단 말인가?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세하는 설명을 이어갔다.

“저번에 한기남 아저씨한테 작전 중에 회수한 인형들 대량 납품한 거, 기억 안 나? 그 인형들 전부 어디 갔을 것 같아? 다 사람들이 사 갔다고. 재고가 없어서 난리라더라.”
“...그 많은 게 정말 다 팔렸어?”

자신들의 인형이 제법 인기 있다는 한기남의 이야기는 이슬비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도 잠시간의 붐이라 생각했다. 한 달이 넘게 지나 파괴된 구획의 복구도 제법 진척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 이슬비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야 클로저 옷만 벗으면 일반인하고 구별이 안 되고 서유리는 지나가는 사람 눈 색을 일일이 확인하는 사람이 잘 없으니까 그나마 낫지만, 넌 그러잖아도 그 머리색 때문에 구별이 쉽단 말이야. 아까도 딱 보니 벌써 너 알아본 사람이 있더구만. 그대로 5분만 있었으면, 너, 아마 사람들 틈에 꽉 붙들려서 사인만 하다가 집에 갔을 거다.”

이슬비는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아무래도 세상은 그녀가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 했다. 군말없이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이세하와 마찬가지로 모자를 푹 눌러쓴 이슬비는 손가방에서 예매권을 꺼내 한 장을 이세하에게 건넸다. 이슬비의 손가방을 본 이세하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 가방 좀 큰 거 없었냐?”
“왜?”
“그 합동진지 뭔지 사면 어디에다 넣을 셈인데?”

이슬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세하의 머리가 정말로 아파오기 시작했다. 제이라면 여기서 능글맞게 농담을 하나쯤 던지면서 이슬비를 놀리며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세하는 그런 재주를 따라 할 수 없었다. 결국, 스트레스는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거기서 종이가방 줄 거 아니야?”
“안 줘. 여기가 무슨 서점인 줄 알아? 자기 가방에 다 넣어가야 한다고.”
“뭐? 그럼 어떡해?”

이슬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하고 이세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작전 중에는 그렇게 빠릿빠릿하건만, 이런 데에서 왜 나사가 빠져있는 것인지. 이세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슬비에게 자신의 사이드백을 건네었다.

“가방 빌려줄 테니까, 월요일 날 줘.”

이세하를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던 이슬비는 이세하의 가방을 받아들어 어깨에 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세하는 꾸역꾸역 행사장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을 인원들을 생각하며 약간의 다급함을 느꼈다. 어서 볼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게임을 하고 싶었던 이세하는 그 장소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이슬비의 손을 잡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자, 자. 내가 경험자니까 내 말 들어. 얼른 안 가면 굉장한 꼴을 볼 테니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야 한다니까.”
“아, 알았어.”

묘하게 조용해진 이슬비를 이끌고 행사장 입구로 향하며, 이세하는 도대체 집에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속으로 한탄을 늘어놓았다.

*

행사장 안은 이세하의 예상대로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입구 근처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그나마 상황이 나아진다는 것을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인파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이슬비를 억지로 끌고 행사장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입구 반대편의 벽 쪽에 자리를 잡은 이세하는 이슬비에게 예의 합동지를 판매하는 부스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몰라.”
“뭐?”

이세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혹여나 운 좋게 근처에 부스가 있지 않을까 하고 주변을 대충 둘러보았지만 신통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약이 오른 이세하는 이슬비를 닦달했다.

“야, 이슬비. 트위터에서 부스 소식 들었다면서? 왜 위치를 모르는 거야?”
“어쩌다 누가 지나가는 말투로 써놓은 걸 본 거란 말야. 와서 찾아보면 될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나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어.”

선글라스 너머로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리는 이슬비를 보며 이세하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 복잡한 작전 세부사항도 작전마다 달달 외우듯이 하고 다니는 그녀가 오늘따라 왜 이리 답답하게 구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오늘의 일을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으니 오죽할까. 행사장까지 들어왔으니 이제는 알아서 찾으라고 그녀를 내버려두고 돌아가고픈 욕망이 물밀듯 몰려왔건만, 분노한 어머니를 마주할 생각을 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세하는 이슬비가 보라는 듯 크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발품 팔아야겠다. 들어오면서 사람 봤지? 너, 정말 사람에 떠내려갈 수도 있으니까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와.”
“...알았어.”

이세하는 다시 이슬비의 손을 끌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줄이라도 가져오는 편이 낫지 않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이세하의 머릿속을 잠시 스쳐갔다.

이세하는 평소 자신의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 유감이 없었다. 좀 더 활동적인 타입이라면 키가 크다는 것이 큰 이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가시간에 집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는 편을 선호하는 이세하는 평소에 키 문제 때문에 아쉬울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큰 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재앙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싫어했던 이세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신의 체형에 내심 감사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자신이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행사장에 오는 사람 중에는 덩치 깨나 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인파의 중간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어느 부스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제법 힘든 일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오는 이슬비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더욱 나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학생으로 착각할만한 그녀의 체구로는 인파에 떠밀리지 않고 용케 그를 따라오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인파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던 이세하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끌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하여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붙잡은 손의 주인을 찾던 이세하는 부스 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낯익은 선글라스를 발견한 것이지만.

“아이쿠, 이게 누구야. 이세하 요원님 아니십니까?”
“한기남 아저씨?”

모두가 정신없이 바쁜 재해복구본부에서 특유의 웃음소리를 울리며 넉살 좋게 장사를 하던 그 얼굴을 어찌 잊겠는가. 어쩌다 보니 한기남을 따라 부스 뒤편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 이세하는 이슬비가 자신을 잘 따라왔단 것을 확인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나 크게 벌이시는데요?”

어찌 된 일인지 한기남은 여러 자리를 빌려 판을 크게 벌여놓고 있었다. 물건을 파느라 정신없는 그의 직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본 이세하는 그들이 판매하고 있는 물건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팔고 계신 물건, 설마 우리 팀원들이랑 관련된 거예요?”

“이야, 얼마나 잘 팔리는지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특히 서유리 요원 관련 상품이 아주 굉장하죠. 위험하게 차원종 잔해나 만지는 것보다 훨씬 돈이 되던데요?”

“이런 장사가 그렇게 돈이 된다고요?”

이세하 역시도 인터넷에서 과거 모 동인 서클이 책을 팔아 차를 샀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사람이 그런 사업을 시작하고, 거기에 그 소재가 자신들이라는 사실은 그에게서 현실 감각을 뺏어가기에 충분했다.

“아아, 여기는 그냥 홍보를 겸해서 벌이는 겁니다. 메인은 역시 인터넷이죠. 요원님들께 납품받은 인형으로 시작해서, 이제는 이런 거라던가...”

할 말이 없어진 이세하는 건성으로 그의 말을 받아넘기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기남의 말대로 물건이 많이 팔리기는 하는 것인지, 행사장이 개방된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원래는 상품이 담겨있었을 빈 상자가 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세하가 한기남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 일이 없었는지 이슬비는 매대 뒤편에서 진열된 물건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정식 요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데포르메 되어 그려진 카드 홀더를 집어 들고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피식 웃었다. 설마 우리 학교에도 저런 걸 갖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최근 점심시간에 한석봉과 게임을 하는 그를 향하는 시선이 부쩍 늘어난 것을 떠올린 그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혹시 셜록 홈즈 합동지 파는 부스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저기 우리 리더가 셜록 홈즈 광이거든요.”

이세하의 말을 들은 한기남의 눈빛이 한순간 반짝였다. 이세하는 여기서 또 다른 상품이 탄생하는 것인가, 이세하는 속으로 취미 생활이 만 천하에 공개될 이슬비에게 사과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하, 그러시군요. 그 부스는 아마..., 저기 반대편 G 열에 있을 겁니다. 몇 번 부스였더라...?”
“아, 그건 가서 찾아보면 되겠죠. 고맙습니다. 근데 이거, 뭐 제제당하거나 그러는 거 아니에요? 학생에다가 현직 유니온 요원들인데 이런 식으로 관련 상품을 막 팔아도 되나?”

이세하의 질문을 들은 한기남이 껄껄 웃고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하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저희 쪽에서 다 ‘원만히’ 해결했으니 걱정 마시길. 그럼 수고하십쇼!”

이세하는 한기남의 인사를 뒤로하고 부스를 나서며 이슬비를 불렀다. 그의 호출에 부스에서 나온 이슬비는 묘하게 뚱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의아해하면서도 별말을 하지 않은 채, 이세하는 그녀를 데리고 한기남이 알려준 G열로 향했다.

*

부스의 위치를 알고 나니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기남의 부스에서 나온 뒤 잠시 보였던 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로 어렵사리 구입한 합동지를 신줏단지라도 되는 마냥 가방에 조심조심 집어넣는 이슬비를 보며, 이세하는 집에 가서 게임을 할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를 집에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는듯 했다.

“코스프레를 보고싶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속이 답답해졌다. 부스에서 합동지를 사면서 지인이 셜록 홈즈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이슬비가 부스 옆에서 잡담을 나누던 시간이 어쩐지 길더라니만. 하릴없이 핸드폰 게임을 만지작거리는 대신 그녀를 억지로 끌고 나오는 것이 이세하에게 있어서는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야, 그런 건 나중에 인터넷에 잔뜩 올라온다니까? 뭣 하러 귀찮게 굳이 가서 그런 걸 구경해?”

이세하는 코스프레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 화면 속의 캐릭터는 화면 속에 있는 상태가 최상이며 그 외의 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인 마르시아의 코스프레 사진을 발견한 뒤로 며칠간 후폭풍에 시달린 뒤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지금 이 합동지를 가져가면 소품을 빌려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아.”

이세하는 기가 막혔다. 내가 약속한 것은 책의 구매까지였다, 이것은 계약 위반이다, 빨리 집에 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등등. 이세하는 귀가를 앞당기기 위해 두뇌를 총동원하여 이유를 짜내며 이슬비에게 항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핑곗거리가 떨어진 이세하는 이판사판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 몰라! 코스프레 구경은 혼자 하면 되잖아! 난 집에 간다!”
“이세하.”

이세하를 곤란으로 밀어넣을 때의 목소리였다. 이슬비가 저런 식으로 자신을 부른 뒤에는 십중팔구 실력 행사가 뒤따른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으로 알고있는 그는 황급히 핸드폰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손으로 붙잡았다. 하지만 이세하의 예상과 달리, 이슬비는 염동력을 행사하는 대신 자신이 매고 있는 이세하의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아까 빌려준 가방, 네 물건이 들어있더라?”

이세하는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가방 안에는 그가 평소에 사용하는 휴대용 게임 콘솔과 최근 플레이하던 타이틀이 들어있었다. 빠르게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 가방을 대충 건넨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이슬비의 약속에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터덜터덜 이슬비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이세하와 이슬비가 행사장을 나온 것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이슬비에게서 콘솔을 돌려받아 윗옷 안주머니에 소중히 집어넣은 이세하는 신세를 졌으니 밥이라도 사주겠다는 이슬비의 말에 그녀에 대한 작은 복수로 다소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 이세하는 할 일이 없어지자 이슬비에게 한기남이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세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슬비는 서유리 관련 상품들이 가장 잘 나간다는 부분에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유리같은 애가 인기 있구나.”
“뭐?”

별 생각 없이 이야기하던 이세하는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이슬비의 뜬금없는 반응에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이세하가 보던 그의 리더의 모습과는 신강고와 유니온 본부만큼이나 거리가 먼 반응이었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가 평소에 생각해온 이슬비의 이미지였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찾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이세하는 한기남의 부스에서 본 이슬비의 뚱한 표정을 떠올렸다.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판매대의 상품 말이야. 사람들이 유리가 그려진 물건은 두 개, 세 개씩 집어가던데.”

귀찮다. 그것이 이세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괴롭혀왔던 그녀였다. 오랜만에 클로저 일에서 해방된 만큼 조금 나사가 풀린 정도는 그도 이해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식사 중에도 이렇게 귀찮게 구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적당히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기로 마음먹은 이세하는 짐짓 눈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긴 하지. 그런데, 막상 걔랑 하루만 같이 있어 보면 절반은 넘게 도망갈 걸? 걔 성격이 어지간해야 사람이 버텨내지 않겠어?”

이세하의 농담에 이슬비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웨이트리스가 가져다준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이슬비가 한숨을 쉬었다. 평소 팀원들의 엉뚱한 행동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무거운 한숨이었다. 이상하다. 이러는 애가 아니었는데. 이세하는 자신이 또다시 지뢰를 밟은 것이 아닌지 불안해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도 유리 정도면 어딜 가도 통할만 한 애잖아? 예쁘지, 붙임성 좋지... 이것저것 말이야. 인기가 있을 만도...”
“너무 열등감 느끼는 거 아냐? 너도 학교에서 꽤 인기 있는 편인데.”

이세하가 이슬비의 말을 잘랐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남학생들이 여자 이야기를 할 때 서유리만큼이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슬비의 이름이었으니까. 평소 그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쓸데없이 떠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놓은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뭐?”
“진짜야. 다들 귀엽다고 난린데. 인형 같다고 말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슬비는 말없이 시선을 내린 채 물수건을 쥔 손가락을 놀렸다. 가늘고 모양도 잘 잡힌 손가락이었다. 평소에 큼직한 단검을 쥔 모습만을 보다가 이런 모습을 접하니 제법 색다르다는 것이 이세하의 감상이었다. 시선을 슬쩍 내려 자신의 손과 그녀의 손을 비교해보니 그 차이가 제법 크다. 거대한 건 블레이드를 쥐고 휘두르는 데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의 손등은 핏줄이 드러나고 굴곡이 심해져 제법 험하게 변한 상태였다. 반면에 염동력을 이용한 투척 공격 외에는 무기를 사용할 일이 많지 않은 그녀는 그 나잇대 소녀의 매끈한 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이슬비는 손 자체의 크기도 차이가 제법 컸다. 그가 그대로 감싸 쥘 수 있을 법한 작은 손과 얇은 손목, 그리고 좁은 어깨. 지나가듯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을 뿐이었건만, 직접 비교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이세하는 그녀가 정말로 인형처럼 느껴졌다.

식사가 나오고 그릇이 모두 빌 때까지도 이슬비는 말없이 식기를 놀릴 뿐이었다. 이세하는  드디어 찾아온 평온에 쾌재를 불렀다. 그녀의 일변한 태도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반나절 간의 고생 끝에 찾아온 휴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식사를 마친 이세하와 이슬비는 특별한 일 없이 귀갓길에 올랐다. 신강고 근처의 역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세하는 이슬비의 오늘 하루 동안의 언동을 생각했다. 이상하게 수동적이다가도 묘한 데서 억지를 부리던 행사장에서의 모습. 그리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던 식사 중의 대화. 이세하는 그녀가 자신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슬비는 오늘 하루 계속해서 그래왔듯 그보다 한 걸음 정도 뒤에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평소 작전 중에 팀원들을 이끌던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곁눈질로 뒤를 보면 평소 그녀의 태도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이슬비의 작은 체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어깨높이에 머무르는 작은 키에 위태롭고 가냘프게만 보이는 마른 체구. 클로저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 촉망받는 유소년 클로저 팀 검은양의 리더, 그리고 차원종의 대규모 습격에서 강남을 구한 영웅이라는 칭호는 이세하의 눈에 들어오는 그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그 작은 어깨로 얼마만큼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을까. 그러한 기대감의 무게를, 그리고 그 무게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세하와 이슬비의 집 사이에는 조금 거리가 있다. 둘이 각자의 길로 향해야 할 갈림길에 도달하자 이슬비는 이세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의 집을 향해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세하는 그녀가 고아임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가면 그녀는 아무도 없는 집의 불을 켜고 자신뿐이 먹지 않을 식사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아마도 그녀가 좋아하는 TV 드라마를 조금 보다가 역시 홀로 침대에 들어가 잠들 것이고, 아침에 일어난 그녀가 집을 떠나면 그 집은 텅 빌 것이다. 갑작스레 쓸쓸해 보이는 이슬비의 뒷모습에 이세하의 마음속에서 기분 나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슬비가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어머니의 얼굴을 그렇게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던지라, 돌아가면 결국 혼자인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는 혼란스러웠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세하는 아직 제법 여유가 있음을 확인하고 이슬비의 뒤를 따라갔다.

“뭐야, 이세하.”

이세하의 발걸음을 들은 이슬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세하는 짐짓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 리더님이 혼자 가는게 맘에 안 들어서.”
“게임 세계를 지키러 가는 쪽이 급한 거 아니었어?”

이슬비가 이세하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잘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변명 삼아 멋쩍게 대꾸했다.

“가끔 이런 기분도 들 때도 있는 거야.”

결국 이세하는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왔던 길을 제법 돌아와야만 했기에 이미 해가 질 무렵이 된 뒤였다. 얼마 뒤에 집으로 돌아올 어머니의 몫까지 식사를 준비하고, 끼니를 때운 뒤 그 뒷정리까지 마무리하자 그가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남지 않았다. 잠을 줄여볼까 고민하던 이세하는 당장 다음날에 검은양 팀의 회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졸린 눈으로 아지트에 들어가는 그를 덮칠 이슬비의 잔소리를 떠올린 그는 투덜거리며 게임의 클리어를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그 뒤로는 별다른 일 없는 일주일이 흘러갔다. 이슬비는 이세하의 기억이 마치 꿈이었기라도 한 듯이 평소의 깐깐한 리더로 돌아왔고, 강남 지역의 복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작전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이세하는 검은양 아지트로 먼저 돌아와 게임 콘솔의 전원을 켰다. 반 시간쯤 뒤, 이슬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평소의 조용한 입실과는 정반대인 모습에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본 이세하는 바들바들 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푸른 눈을 마주 보게 되었다.

“이세하.”

이세하는 안 좋은 예감을 느끼고는 머릿속을 다급히 뒤적였다. 최근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일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엔 작전 중에도, 또 회의 중에도 게임을 한 적이 없었고, 전날 밤새 게임을 하고는 학교에서 잠을 몰아 자다가 시뻘게진 눈으로 아지트에 들어오는 횟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어있었다. 그렇다면 이 예감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슬비는 곧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그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이거, 네가 얘기한 거, 맞지?”

이슬비가 보여준 트위터에는 한기남이 새롭게 발매한 검은양 관련 굿즈의 라인업이 리트윗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팀의 리더인 이슬비와 셜록 홈즈를 크로스오버한 상품이었다. 셜록 홈즈의 트레이드마크인 사냥 모자와 망토 달린 코트를 착용하고 돋보기를 들고 있는 이슬비의 그림과 그녀의 취미 운운하는 홍보 글귀를 발견한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 뭐라고해야 되나... 그... 미안...?”

이세하는 자신을 향해 무엇이 날아올지를 궁금해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충격에 대비하며 이세하는 내심 웃었다.

어찌됐건 그녀는, 그가 알고 있는 이슬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