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이세하는 다시한번 손에 들고있는 종이가방을 확인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물건을 확인하는 것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일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늘에서는 따스한 5월 낮의 햇살이 모두를 축복하듯 내리쬐고 있음에도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불안감 뿐이었다. 그의 앞을 막아선 연립식 주택의 현관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괴수가 살고있는 미궁의 입구로 치환되어 그의 발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녀가 사는 집의 호수는 잘 알고 있었다. 203호. 이제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겨우 들어올려 ‘2’라고 적힌 창백한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애써 쫓아냈던 불안감이 다시 돌아와 그의 손을 잡아챘다. 가만, 내가 그걸 챙겨왔던가? 이세하의 시선이 다시 가방으로 향하려던 찰나 작은 목소리가 그를 호명했다.

 

“이세하?”

 

맙소사. 이세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마음을 조금만 빨리 다잡았더라면 ‘집에 없었다’라는 변명거리가 생겼을 터였건만. 기긱거리는 소리가 날 법한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의외라는 얼굴로 바라보는 이슬비를 확인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대부분 감기 마스크가 가리고 있었으나 벛꽃을 연상케하는 그 분홍빛 머리칼만으로도 그녀의 신원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약국에라도 다녀온 것일까, 그녀의 손에는 하얀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이세하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는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여보란 듯 손의 종이가방을 들어보였다.

 

“병문안 왔어.”

 

*


아마도, 모든 일의 발단은 복구대상 지역중 한 곳에 갑작스레 대규모로 출몰한 차원종 무리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해당 지역 내에 얼마 남지않은 잔당이 B급 차원종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최후의 습격을 감행한 듯 했다. 해당 구역을 담당하고있던 이슬비는 통신을 통해 지원을 요청한 뒤 차원종 무리와 교전을 벌였다. 대피중인 작업인원들의 보호와 차원종과의 교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운 나쁘게 때맞춰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겹치자 그녀는 격심한 전투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다행히 가장 가까이 위치해있던 이세하가 늦기전에 도착해 그녀를 지원해주었기에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사이킥 무브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쳤음에도 도움을 애써 받지 않으려는 그녀를 반강제적으로 부축해서 귀환한 이세하는 이정도면 그래도 한 건은 해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음날 이슬비가 병가를 냈다는 소식을 김유정에게서 전해듣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병가요? 어제 슬비를 데려왔을 땐 분명 별 문제가 없었잖아요?”

“그래. 분명 큰 상처를 입거나 하진 않았지. 하지만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고 연락이 왔어.”

“네?”

 

위상능력자가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어렸을 적부터 누구나 일년에 한두번쯤은 통과의례로 걸리기 마련인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살아왔던 터다. 그렇기에 그는 이슬비가 지쳐보였어도 쉬고 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김유정 역시도 그의 그런 의문을 파악했는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위상능력자는 병에 잘 걸리지 않아. 하지만 위상력을 극심하게 소모한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지. 아무래도 어제 복구인원들을 구하느라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야.”

 

평소의 제이를 떠올린 이세하는 그녀의 설명을 이해했다. 원래부터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툭하면 종합감기약이나 진통제를 찾는 그의 모습에 평소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김유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위상력이 거의 남지 않아 임기응변과 편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그가 그런 상황일 만도 했다. 이슬비가 빠진 자리를 메꾸기 위함인지 근무표를 조정하고 있던 김유정이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생각에 잠겨있던 그를 불렀다.

 

“세하야, 혹시 슬비한테 병문안을 좀 가줄 수 있겠니?”

 

“제가요?”

 

이세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귀찮다’였다. 병문안이라니. 병문안에 대해 그가 알고있는 것은 미디어 매체에서 접한 모습 뿐이었다. 선물을 잔뜩 사들고 간다거나, 음식을 만들어서 먹여준다거나, 환자의 물수건을 갈아준다거나 하는 부담스럽고 손이 많이 가는 행동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다루는 매체에서 이런 일은 으레 연인이나 그와 유사한 관계인 사람의 몫이였으니, 이세하로서는 그녀와 시덥잖은 일로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 일쑤인 자신이 왜 하필이면 병문안을 가는 사람으로 선발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왜 하필 제가?”

“벌이야. 어제 건물을 부숴먹은 건 잊지 않았겠지?”

 

이세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슬비의 지원요청에 급하게 사이킥 무브를 사용하다가 착지 과정에서 건물과 정면충돌해 벽을 무너뜨린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 건물은 어차피 복구 과정에서 철거될 장소였기에 별다른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모니터링중이던 김유정이 여기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기에 불문에 붙이려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던 이세하는 그녀가 이 시점에서 그 때의 이야기를 꺼내들자 할 말이 없었다.

 

“팀에서 둘이나 빠지면 작전에 문제가 없을까요?”

“걱정 마. 어제의 차원종 출현 사건으로 오늘은 복구작업이 예정보다 축소 진행될 예정이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은 특경대 쪽에서 협조하기로 했어. 평소에 많이 신세를 지고 있으니 이럴 때라도 제대로 협조하겠다나?”

 

이슬비가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 병문안을 가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송은이 경정의 모습이 생각난 김유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의 언행으로 보건대 땡땡이를 치려는 의도가 많든 적든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을테지만,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그녀가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첫 출동때부터 시작해서,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사건을 함께 거쳐왔기에 그녀에게 단순한 동료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검은양 팀원들도 같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채민우 경정의 잔소리에 결국 직접 이슬비의 병문안을 가는 것을 포기하고는 인원이 부족할 경우 특경대 측의 지원을 약속한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이세하는 특경대의 협조에 그다지 고마워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복구작업이 시작된 이후로 클로저 활동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어제의 일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었다. 현 시점에서 검은양 팀원들의 활동은 대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리를 순찰하거나 정해진 위치에서 경계 근무를 보는 것 뿐이었다. 이런 업무들은 대개 1인 단위로 이루어졌기에 이세하에게 있어 이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게임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금같은 시간에 병문안이라니.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그가 귀찮아하는 낌새를 눈치챈 김유정이 다시한번 무너진 벽 건을 들먹이며 감봉 이야기를 꺼내들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에 출시되는 신작 게임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한 푼이라도 봉급을 더 받아야만 했다. 그가 받는 봉급이 적은 것은 아니였지만 그 대부분은 그의 어머니인 서지수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돌아오는 것은 그 일 할 가량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결국 이세하는 김유정과 나머지 팀원들이 모은 돈을 들고는 마트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이세하는 이슬비의 집 거실-이라고 해봐야 투룸 방의 부엌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지만-에 앉아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가 병문안을 왔다는 말에 예상대로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는 식의 맥빠지는 대답을 한 이슬비는 이왕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뭐라도 먹고 가라면서 그를 집에 들였다. 이슬비는 그를 거실에 앉히고는 준비를 좀 해야하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참이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게임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도무지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대체 내가 왜 병문안을 가겠다고 한 것일까, 이세하는 다시한번 후회를 곱씹었다.

 

마켓에서 간단한 요리재료와 이런저런 물건을 사서 나올 때까지 이세하의 머리 속에는 ‘귀찮다’라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병문안 물품을 손에 들고나자 그의 생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평소에 그에게 잔소리만 늘어놓는 데다가 귀여운 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긴 해도 그녀는 어찌됐건 그 나이 또래의 여성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이 18년 인생의 지상과제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언감생심 여자가 혼자 사는 집이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마트에서 그녀의 방이 있는 연립주택까지 이동하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동안에도 그의 불안감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주택 앞에서 시간을 끌다가 맞은 결말이 이 꼴이다. 이세하는 후회감을 삭히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어떻게 보면 딱 그의 생각대로이기도 한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혼자 사는 방이라면 으레 떠올리는 엉망진창인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없는 개인물품들은 각을 맞춰 전시해두기라도 한 것 마냥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보통 기름 얼룩이라도 조금 튀어있기 마련인 조리공간 역시도 도대체 사용은 하는것인가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 자신도 평소에 청소를 자주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개중에 그나마 사람 냄새라도 느껴지는 것은 설거지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물기가 맺힌 채로 건조대에 올려져있는 식기 몇 개와 수저 한 세트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식기의 수는 왠지모를 허전함이 느껴질만큼 적었다.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진 이세하는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제법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이슬비의 상황이 궁금해져 그녀를 불러보았다.

 

“야, 이슬비. 멀었어?”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진 이세하는 그녀의 방문을 툭툭 두들기며 노크했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왠지 불안해진 이세하는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방문을 잠궈두진 않은 것인지 손잡이는 저항의 기색이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방문을 연 이세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방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곰인형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그렇게 될 테니 불가항력이라고 할 만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허전할 법한 곳마다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있는 동물 인형들이 좀 더 눈에 띄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한쪽 벽을 차지한 붙박이장에 반쯤 쑤셔박힌 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거의 사람만한 크기의 펭귄 인형과 살짝 보이는 분홍빛 머리칼의...

 

“슬비야?”

 

인형의 움직임이 순간 딱 하고 멈췄다. 이세하가 한숨을 쉬며 펭귄 인형을 잡고 끌어내자 인형과 씨름을 하고 있던 이슬비와 함께 붙박이장 안에 억지로 구겨져 들어가있던 인형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사자, 하마, 나무늘보, 양, 개... 다큐멘터리 채널을 방불케하는 수많은 종류와 크기의 인형에 이세하는 할 말을 잃었다. 인형의 파도에 떠밀려나온 이슬비는 당혹에 물든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또 하나의 인형마냥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세하는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신통한 아이디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타임 리미트를 초읽기하듯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이슬비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더욱 그랬다. 이럴 때에도 역시 팀의 리더라고 해야할까, 이 기묘한 교착상태를 먼저 푼 것은 이슬비 쪽이였다. 홍시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던 그녀는 바로 옆에 떨어져있던 인형을 집어들고는 혼란에 빠진 비명을 지르며 이세하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달려들려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중 발치의 인형에 걸려 이세하를 향해 넘어진 까닭에 그녀는 그를 인형으로 가격하는 대신 그를 향해 성대하게 넘어졌다. 엉겁결에 그녀를 받아낸 그는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쓰러졌다. 감기 때문에 제대로 씻지 못한 까닭일까, 그녀에게선 희미하게 땀냄새가 났다.

 

‘아-, 이거 큰일이네.’

 

머릿속으로 현실도피를 하며 제 삼자가 된 듯 현 상황을 평가하던 이세하는 그녀의 몸이 불덩이같이 뜨겁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챘다. 아까까지의 멀쩡해보이던 모습은 연기였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며 질문을 건넸다.

 

“야, 너 지금 대체 몇 도야?”

“삼십..., 삼십 칠 도.”

 

조금 흐려진 눈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세하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꼬리를 잠시 흐렸던 것을 보건대 보나마나 삼십 팔 도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세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 손으로 이슬비의 상체와 다리를 떠받치며 그녀를 들어올렸다. 방금 전에 그나마 있던 힘을 다 써버렸는지 예상 외로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고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만을 입고 있었던 탓에 그녀의 속옷이 슬쩍 비쳐보였지만 이세하는 애써 눈을 돌렸다. 그녀를 들어올리는 데에 별다른 부담은 없었다. 전날에 그녀를 부축하면서 이미 느껴봤을 터였건만 몇 번을 경험해도 적응이 되지않는 무게였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정식 클로저이자 한 팀의 리더라니, 누가 믿겠는가. 이세하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직접 물수건을 갈고 있었는지 침대 옆의 서랍장 위에는 물이 담긴 대야와 물수건이 들어있었다. 물에 손을 담가본 이세하는 미지근한 물에 인상을 쓰고 물을 갈아와서는, 열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일단 그녀의 팔과 목, 그리고 슬쩍 드러난 어께 부분의 땀을 닦아주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했다. 몸에 와닿는 물수건의 차가운 느낌에 이슬비는 작게 움찔했다.

 

‘움찔하고 싶은 건 내 쪽인데.’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니 이세하는 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간병에 대해 지식으로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첫 상대가 이슬비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뒤 시간을 확인한 그는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허락을 구하려고 해도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할 테지. 이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툭 던지듯 말했다.

 

“죽 끓여올테니 한 숨 자던가.”

 

그의 말에 대답하듯 이슬비가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웅얼거렸다. 이세하는 손에 남은 물기를 옷에 슥슥 닦아내고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거실 겸 부엌으로 나왔다. 준비물은 이미 오는 길에 다 사왔으니 그녀를 귀찮게 할 일은 없었다. 종이가방 안의 재료를 꺼내며 이세하는 머리 속의 레시피를 되새겼다.

 

*


죽을 끓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세하의 요리실력에 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사일에 소질이 없는데다가 평소에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는 어머니를 두었기에 이세하는 가사 전반에 능숙했다. 다만, 요리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뜬금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마는 그의 의식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흐름에 편승해 끝냈기에 별 문제없이 그녀를 간호하긴 했지만, 막상 일을 해치우고 이미 익숙한 일인 요리를 시작하자 잡생각이 그의 머리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료를 손질하다가도 물수건 너머로 손 끝에 느껴지던 부드러운 촉감이 생각나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손을 다칠 뻔한다던가, 불을 조절하면서 손등을 간질이던 그녀의 머리칼을 떠올리다 죽을 숯으로 바꿀 뻔 한다던가 하는 등의 실수를 몇 번이나 한 끝에 이세하는 평소 실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단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죽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것일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죽의 상태에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던 이세하는 반쯤 포기한 채로 앉은뱅이 상에 죽을 올려 방으로 들고 돌아갔다.

 

죽을 끓이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던 탓일까, 이슬비는 어느 새 잠든 채였다. 분명 스스로도 한 숨 자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막상 곤히 자고있는 그녀를 보니 이세하는 곤란해졌다. 일단 그녀를 깨워서 식사를 시키는 편이 회복에 도움이 될 테지만, 이세하는 그녀를 어떻게 깨워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야, 이슬비.”

 

시험삼아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르락, 내리락. 다시 오르락. 이불에 가려진 이슬비의 가슴이 그녀의 숨결을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세하는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다시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반응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약이 오른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볼을 찔렀다.

 

“으응...”

 

잠에 취한 그녀의 신음소리에 이세하는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물렸다. 이슬비는 귀찮다는 듯이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그녀의 이마에서 물수건이 스르르 흘러내려 베개 위로 떨어졌다. 안도감와 함께 이세하의 머릿속에 장난기가 찾아들었다. 이세하는 다시 손가락을 들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보이는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야, 이슬비. 일어나.”

 

간질간질, 간질간질.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에서 귀로, 다시 목으로, 그리고... 살짝 드러난 등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오락실에서 어머니 몰래 하던 탈의 땅따먹기 게임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이세하는 배덕감 섞인 추억에 잠기며 손장난을 계속했다. 어느 순간, 그의 손가락이 딱 하고 굳었다. 예상 외의 상황에 당황한 이세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손가락은 무언가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의 귀에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하...!”

 

어느 새 깨어난 것일까, 이슬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은 그녀가 염동력을 행사한 결과인 듯 했다. 굳어버린 손가락을 포기하고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반대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세하는 그를 향해 휘둘러지는 베개를 확인하며 눈을 감았다.

 

*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세하는 말없이 죽을 먹고있는 이슬비의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다시한번 사죄의 말을 건네었다. 강남역에 출현한 말렉과 맞설 때보다 지금이 더욱 공포스럽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오늘의 일에 대해 한 마디라도 언급하는 순간 그의 사회적 지위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 뻔했다. 어째서 직장 동료이자 동급생인 그녀에게 그런 장난을 쳤는가 하면, 그 스스로도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잠시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그가 시행한 자가진단의 결과였다.

 

잠에서 깨어난 이슬비가 그에게 엄청난 패널티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당한 앙갚음은 그의 얼굴을 강타한 베개정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매도하고 집 밖으로 쫓아내는 편이 차라리 나았으리라는 것이 이세하의 생각이었다. 그를 상 반대편에 무릎꿇게 한 뒤 아무 말도 하지않고 그가 준비한 죽을 먹고있는 이슬비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뭔가 무시무시한 처벌을 준비하고 있으리라는 암담한 예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죽이 너무 뜨거운 것인지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죽을 취식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세하는 다시한번 불길한 상상을 뇌 한 구석으로 추방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을 돌리고자 이세하는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며 그녀의 방을 둘러보았다. 거실에서 느껴지던 살풍경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거의 전시물 수준으로 정리된 딱딱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사이사이에 장식된 복슬복슬한 동물 인형들-붙박이장에서 쏟아진 동물 인형들까지 생각해보면 그 양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이 그 몰감정적인 인상을 상당히 줄여주고 있었다. 자주 사용하는 듯 금방 꺼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는 다리미와 그 옆의 강아지 발자국 무늬가 그려진 다리미판을 보고 이세하는 어디에 처박혀있는지도 가물가물한 자신의 집의 다리미를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요원복을 매일 다려서 입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의 잘 각이 잡혀 손질된 요원복 치마를 생각해보면 신빙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방을 구경하던 그의 눈에 벽에 걸린 액자들이 들어왔다. 그녀가 아카데미 시절 수상한 상장들인 듯 했다. 최우수상, 1위, 최우수상, 학교장상... 이세하는 그녀가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가 어쩌다가 어딘가에서 장려상이라도 받아왔다 치면 뛸 듯이 기뻐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세하는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잘 정리되고 깨끗하게 청소된 방의 다른 물건들과 달리 그 액자들은 관리가 잘 되지 않은 듯 먼지가 살짝 쌓여있었고, 개중의 하나는 살짝 삐딱하게 걸려있기까지 했다. 의문에 빠져 액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느낀 이세하는 상장들을 구경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괜스레 무안해진 이세하는 일단 그녀를 칭찬하기로 했다.

 

“대단하다, 야. 나는 상장 하나 받을래도 고생을 하는데. 저게 대체 몇 장이야?”

 

그의 말을 들은 이슬비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세하는 의아해하며 자신이 방금전에 한 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세하는 일단 말을 잇기로 했다.

 

“이정도면 굳이 우리 팀이 아니더라도 네가 리더가 될 만하지. 게을러빠진 나에 비하면 너는 정말 대단...”

“아니야.”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이슬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냉기에 이세하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도대체 왜? 이슬비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것이 감기 때문인지, 그녀의 기분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이세하는 짚어낼 수가 없었다.

 

“저런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무슨 소리야. 저만한 결과는 아무나 낼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럼 뭐해!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슬비가 비명처럼 외쳤다. 고개숙인 그녀의 좁은 어께가 거친 호흡으로 요동쳤다. 이세하는 자신이 밟아서는 안 될 구역으로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후회했다. 이건 긁어 부스럼이다.

 

“그래. 처음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어른들보다도 잘 할 수 있다고, 다시는 나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어른보다 잘 할 수 있다. GGV에 훈련생 신분으로 처음 배치되었을 때 김유정에게 했던 말이다. 평소의 자신과는 정반대 스탠스라고 할 법한 인상적인 말이었기에 이세하는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보같은 생각이었어. 유치하고 순진해빠진... 어제만 해도 그래. 네가 아니였으면 내가 모든걸 다 망쳐놨겠지.”

 

어제라, 이세하는 전날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금방 답이 나왔다. 그가 건물에 충돌한 직후의 이야기일 것이다. 충돌의 여파로 띵해진 머리를 무시하고 급하게 뛰어나온 그의 앞에 보였던 모습. 미처 도망치지 못한 작업자를 향해 천천히 무기를 들어올리는 차원종, 그리고 한 블록쯤 떨어진 거리에서 급하게 뛰어오던 이슬비. 거리를 가늠해 본 이세하는 아무래도 그녀가 늦을 것 같다는 판단에 3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차원종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다른 사람들은 네가 노력한 덕분에 다들 무사했잖아. 그 사람도 좀 놀랐을 뿐이지 별 다른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고.”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네가 제때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 뻔했어? 오늘도 봐. 내가 좀 더 유능했다면, 더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몸 관리도 못하고 쉬게 될 일도 없었겠지. 네가 굳이 이렇게 올 필요도 없었을테고. 바보같아. 얼마 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슬비의 말에 이세하는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래도 어제의 일은 그저 도화선에 튀긴 불씨 정도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도화선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마음을 시커멓게 태우며 쌓아온 화약들이 모조리 연결되어 있었다.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해체해야만 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이세하는 그것이 하필이면 지금, 그리고 자신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방면에는 좀 더 전문가가 많지 않은가. 팀의 관리요원인 김유정이라던가, 아니면 허당끼가 있긴 해도 사람은 잘 다루는 제이라던가. 하는 수 없이 이세하는 잠자코 앉아 그녀가 닥치는대로 떠내려보내는 후회와 자기혐오를 갈무리했다. 어느새 그녀는 좀 더 이전의 이야기까지 주워섬기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도 전부 마찬가지야. 나는 하나가 잘못된 길을 걷는 걸 미리 알아채지 못했어. 차원종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강남이 불타는 것도 막지 못했을거야. 그리고 우리 팀원들도...”

 

“야, 이슬비.”

 

점점 흐름을 더해가는 그녀의 넋두리를 이세하가 끊었다.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둑에 차오르는 홍수처럼 그녀의 긴 속눈썹에 위태로이 걸려있는 눈물을 보자 이세하는 마음이 거북해졌다. 이런 식으로 남의 고민을 듣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그는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한번 오늘의 병문안을 후회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김유정이나 제이였다면, 아니면 밝은 성격의 서유리였다면, 그저 자신이 아닌 누군가였다면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오랜 세월 도피를 계속해온 그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이세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렸다.

 

“팀원을 무시하는 거냐?”

 

툭 튀어나온 말은 시비조였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었다.

 

“...뭐라고?”

“너 혼자 다 해치울거면 팀이 왜 있어? 우리가 못 미더워서 혼자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 이야, 대단한 리더님이시네.”

 

이슬비가 눈을 깜빡이자 그녀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밀려나와 또르륵 흘러내렸다. 방해라는 듯 손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친 이슬비가 그를 노려보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말한건 우리한테도 전부 포함되는 이야기잖아. 네가 다른 팀원을 도운 것도 한, 두번이 아닐텐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게 있으니까...”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녀가 일단 말로 따지고 보는 성격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녀가 감정에 휩싸여 그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했다면 사람을 잘 다루지 못하는 그로서는 손 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대화가 가능하다면 인터넷 채팅으로 말싸움을 벌이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중구난방의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생각을 뻔뻔하게 되돌려주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상대를 찍어누르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여러번 말이 오가고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를 공격하기 위해 열심히 논리를 짜내고 있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이세하는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아내렸다. 저쪽의 말문이 막히기 시작하면 이쪽의 승리는 한 순간이다. 그녀가 다시 자기비하를 시작하기 전에 이세하는 먼저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자, 이슬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아. 너뿐만 아니라 나도, 그리고 다른 팀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팀이잖아.”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조금만 더. 이세하는 애써 혀를 움직였다. 엉망진창인 말로 그녀를 공격-혹은 방어-했다.

 

“그리고, 봐. 구로에서 위상반전탄의 직접 사용에 반대한건, 그리고 신강고에서 죽을 뻔한 유하나를 구해내자고 처음 말했던건 누구지? 너야. G타워에서 강남을 날려버리는 대신 죽을 각오로 다시한번 나서기로 정한 것도 너지. 넌 늘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어. 팀원들은 모두 너를 믿고 있다고.”

 

스스로의 말이 유치하고 말도 안 된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책도 많이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할 것을 그랬다는 조금 늦어버린 후회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결국 이세하는 참지 못하고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아, 몰라! 내가 더 말 해서 뭣하겠냐. 잠깐 있어봐.”

 

이세하는 거실에 놓아둔 채인 종이가방에서 예의 물건을 꺼내왔다. 처음에 그가 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점검하려던 물건이었다. 둥글게 말려진 종이와 손바닥만한 선물상자를 가져온 이세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에게 그 둘을 건네었다.

 

“자, 복구본부 사람들이 전해주라더라.”

 

이세하는 그 종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복구본부의 인원들이 그녀가 감기에 걸려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전하고싶은 말을 적은 롤링 페이퍼였다. 선물상자의 내용물에 관해서는, 이세하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어찌보면 그 내용물의 탄생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전에 그 물건에 대해 알게된 이슬비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선물상자를 건네고 바로 도망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세하는 일단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슬비는 먼저 종이를 펴서 읽어보았다. 이세하가 알기로 그녀는 읽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하지만 그녀가 글을 다 읽는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롤링 페이퍼라는 것만 알 뿐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이세하는 그것이 좋은 신호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종이를 다시 말아놓는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도 선물상자를 열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한기남 컴퍼니의 자신작인 셜록홈즈 이슬비 인형을 발견한 이슬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세하는 그녀의 반응에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본따서 만든 인형을 그 모델에게 선물로 주자는 아이디어를 발안한 것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세하의 한숨소리에 그를 바라본 이슬비는 그의 할 말이 없다는 얼굴에 미소를 얼기설기 엮어보였다. 그다지 만족스러운 반응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이 정도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했기에 이세하 역시도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조용한 방에 갑작스레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아.”

 

이세하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면 그 역시도 아침밥을 먹은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였던 것이다. 죽의 간을 맞추느라 몇 술 정도를 뜨기는 했지만, 한창 팔팔한 청소년의 식사 요구량을 그 정도로 채울 수 있을리 만무했다. 무안해진 이세하가 시선을 피하며 여기저기 눈을 굴리자 이슬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죽, 같이 먹을래?”

 

“일단..., 다시 데워올게.”

 

이슬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죽그릇을 다시 들고 방문을 열었다. 문을 닫는 그에게 이슬비의 목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그녀의 말은 문이 닫히는 딱딱한 소리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에, 이세하는 그 내용은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고마워.’

 

*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 이세하가 의아해하는 서지수에게 이슬비의 병문안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흥미진진해하는 반응을 보여왔지만, 이세하는 이슬비의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이슬비가 그에게 일종의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에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한 이세하가 도대체 무엇을 숨기라는 것인지 되묻자 그에게 돌아온 이슬비의 대답은 그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 방에 있는 인형들 말이야.”

“뭐?”

“한 팀의 리더라는 사람이 방에 이렇게 인형을 장식해놨다는 이야기가 돌면 사람들이 얕볼 거 아냐?”

 

그녀에게 어울렸으면 어울렸지 딱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게 이세하의 생각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 괜스레 장난기가 도져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것은 이야기해도 되냐는 말을 했다가 베개로 한 대 더 얻어맞은 것은 덤이었다.

 

이슬비의 감기가 다 나아 그녀가 다시 클로저 업무를 시작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복구본부로 돌아온 그녀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 삼일간의 휴식은 더 나은 활동을 위해서였다고 온 몸으로 강변하듯,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가열차게 업무에 매달렸다. 그녀가 없는 사이 김유정의 책상에 점점 퇴적되어가던 서류가 그녀의 도움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며 사무실에서 농땡이를 피우던 송은이 경정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제이가 인형을 받은 소감에 대해 질문했을 때 뿐이었다. 웃음기를 띠고 장난스레 질문을 건네던 제이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선글라스를 깨뜨릴 듯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이슬비를 보고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허둥지둥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주로 1인 순찰등의 임무를 나가던 그녀가 다른 팀원과 동행하는 일이 늘어났다는 정도가 차이점일까. 다른 팀원들은 그녀의 미묘한 변화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세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곤 했다.

 

“이세하. 준비 끝났어?”

 

자신을 부르는 이슬비의 목소리에 이세하는 게임기를 꺼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든 그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이슬비의 손을 보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계작전 중 개인물품 소지 금지.”

“야, 좀 봐줘. 요즘 할 일도 없잖아?”

 

그의 말을 듣고 이슬비가 미소지었다. 손은 여전히 그를 향해 그대로 내민 채였다. 이세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갖다놓고 올게. 유정이 누나한테 전하면 되지?”

“응. 여기서 기다릴테니 빨리 와. 벌써 늦었어.”

 

이세하는 작게 투덜거리며 김유정이 사무실 대용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로 향했다. 콘솔을 맡기고 컨테이너를 나온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괜한 짓을 한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스쳐갔다. 그것도 잠시,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잡생각을 날려버린 이세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슬비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아, 귀찮아. 빨리 끝내고 게임이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