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들은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하나의 팀을 관리한다는 것은 소규모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인 김유정 역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강남 사태가 종결된 이후에도 그녀에게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분량의 일이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여름의 기세에 낮이 점점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해가 저물기 전에 집에 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이를 증명하듯 김유정의 스마트폰 달력에는 잔업일을 표시한 날짜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런 와중이니만큼 오랜만에 정시 퇴근에 성공한 그녀가 포장마차에 들러 술이라도 한잔 마실 계획을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됐건 그녀는 애주가인 것이다. 일이 바쁘기로는 마찬가지 형편이었던 특경대 소속 송은이 경정-그녀의 경우는 요령좋게 일과를 빼먹기 일쑤였기에 김유정만큼의 피로가 쌓여있지는 않았다-이 왠지 질린 얼굴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지라 김유정은 홀로 가까운 포장마차로 향하기로 했다. 


강남 일대에는 아직 토벌하지 못한 차원종이 남아있었기에 복구지역 근처의 상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유정은 포장마차로 가기 위해 제법 긴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점심식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던 김유정은 한바탕 달릴 준비를 할 겸 낮에 이슬비에게 받은 우유를 꺼내들어 마셨다. 빈 우유곽을 버릴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유정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껑충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 약간 구부정한 자세에 언뜻 보면 껄렁해 보이는 걸음걸이. 무엇보다 그녀에게 확신을 안겨준 것은 보기 드문 백발이었다. 우유곽을 대충 던져버린 김유정은 걸음을 약간 빠르게 해 그에게 다가갔다.


“제이 씨?”


뒤를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 걸린 노란 선글라스와 훅 풍겨오는 파스 냄새에 김유정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검은양 팀의 클로저 요원인 제이였다. 김유정을 알아본 제이는 뜨악했다.


“유정 씨? 일찍 퇴근하더니만 여긴 왠 일이지?”


“요즘 워낙 뜸했던지라, 한 잔 꺾을까 해서 말이죠.”


술잔을 기울이는 흉내를 내는 김유정을 보며 제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애주 취미는 제이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격무에 시달리다가 맞이한 가뭄의 단비같은 정시 퇴근을 음주에 소모한다는 것은 그녀의 최근 생활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던 그에게는 의외의 행동이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실 생각에 들뜬 것인지, 김유정은 그런 제이에게 그녀답지 않게 볼을 살짝 부풀리며 딴죽을 걸었다.


“뭘 그런 얼굴을 하는 거예요? 제이 씨 집은 여기서 반대 방향이잖아요? 제이 씨도 같은 입장 아니에요?”


“후, 그렇기는 하지.”


“마침 잘 됐네요. 글쎄, 송 경정님한테 같이 가자고 했더니만 자기는 안 되겠다지 뭐예요? 제이 씨가 좀 같이 마셔줘요.”


제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가 술에 약한데다 술버릇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송은이 경정의 반응은 그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이도 김유정이 주정을 부리기 시작하면 제대로 대처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음주를 목적으로 포장마차로 향하고 있음을 이미 시인한 상태라 김유정의 제안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제이는 마뜩찮아하며 김유정의 제안을 수락했다.


*


비틀거리는 김유정을 부축하며 제이는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다시 곱씹었다. 방에 꽉 들어찬 빈 맥주캔을 떠올리며 오늘은 밖에서 속 편하게 마셔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이렇게 큰 실수일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김유정은 그를 끌고 포장마차에 들어가자마자 안주를 마다하고 미친 듯이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미 만취한 취객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던 제이는 그녀의 템포에 따라가지 못해 한 병을 채 비우지 못한 채 김유정의 술주정에 시달려야만 했다. 서류 결재가 어쨌느니, 유니온 내부의 라인이 어땠느니 하는 김유정의 술주정은 강남사태 당시 데미플레인에서 쏟아져 나오던 차원종 마냥 끊임없이 이어졌고, 개중에는 일반인이 들어서는 안 될 기밀 사항까지 있어 제이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거나 위험한 언급을 막느라 온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완전히 지쳐버린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구색 맞추기로 주문한 조촐한 안주를 대충 입에 밀어 넣은 뒤 김유정을 포장마차에서 끌고나왔다. 점점 시끄러워지는 김유정의 주정에 비례하여 험악해지는 주인의 표정도 제이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고주망태가 된 김유정은 당연하게도 술값을 지불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제이의 지갑이 한층 더 가벼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더해, 곤란하게도 제이는 김유정의 집을 몰랐다.


“이봐, 유정 씨. 집이 어디야? 이 근처인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그에게 기대있던 김유정이 뭐라고 웅얼거렸다. 제이는 김유정을 살살 흔들며 그녀의 주의를 촉구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제이는 난감했다. 자신의 집은 정 반대방향이라 그녀를 끌고 가기엔 힘든 상황인데다가, 애초에 쓰레기로 가득 찬 집 안에 그녀를 재울 공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순간적으로 다른 팀원들을 떠올린 제이는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이들에게 이런 꼴을 보이느니 차라리 지옥에서 돌아온 아스타로트와 다시한번 맞붙는 쪽을 택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 참. 평생 이런 일과는 거리가 멀었을 텐데 말이지.”


결국 제이는 절대 선택할 일이 없을 줄만 알았던 마지막 수단을 택해야만 했다. 십여분 뒤, 제이는 김유정을 모텔방의 침대에 눕히고는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근처에서 아직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몇 안되는 모텔 중 하나답게 가격은 어처구니없이 비쌌다. 상황이 상황이라 이용객이 별로 없는 것인지, 후덥지근한 방을 식히기 위해 낡은 에어컨을 켜자 에어컨이 먼지를 쿨럭쿨럭 토해냈다. 제이는 투덜거리며 에어컨을 다시 꺼버리고는 구석에 세워진 선풍기를 침대 옆으로 끌고와 전원을 올리고는 창문을 열었다. 방이 덥긴 해도 이 정도면 아마 문제는 없으리라. 연속되는 혹사에 속을 완전히 비운 채로 운명한 자신의 지갑에게 잠시 묵념한 뒤 서둘러 방을 나서려는 제이를,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린건지 김유정이 발음을 마구 흩뜨리며 불러세웠다.


“제이 씨..., 잠깐 저좀 일으켜 세워줘요...”


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김유정 쪽을 바라보았다. 김유정은 어느 틈에 움직였는지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린 채 누워서는 그에게 잡아달라는 듯 양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자세를 바꾸기 위해 침대에서 구르기라도 했는지 셔츠 깃이 흐트러져있었다. 제이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옮겼다.


“정말이지..., 부탁인데 앞으로는 이렇게 마시지 말라고, 유정 씨.”


제이가 김유정의 손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김유정은 자신의 다리로 일어서는 대신 그를 향해 고꾸라졌고, 그녀를 당기느라 뒤로 무게중심이 쏠려있던 제이는 자연히 김유정에게 밀려 뒤로 넘어가게 되었다. 


“잠깐, 잠깐, 유정 씨...?”


제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늘어뜨려진 김유정의 머리카락 때문에 시야에는 그녀의 얼굴만이 들어왔다. 술기운으로 붉게 물든 김유정의 이마에는 방의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제이 씨..., 저 있잖아요...”


정말로 더운 방이었다.


*


잠에 취해 눈을 뜬 김유정의 시야에 낯선 천장이 들어왔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보고있던 김유정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관자놀이가 쿵쿵 울리며 위험신호를 보내왔고, 머리를 당장이라도 박살낼듯한 두통이 그녀를 반겼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새벽녘이었다.


“죽겠네...”


관심과 보살핌을 촉구하는 이마를 짚으며 김유정은 어제밤의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신통찮았다. 방을 나가려는 제이를 불러세워 그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려다 넘어진 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제이는 집에 돌아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씻기라도 하기 위해  끈적끈적 기분 나쁘게 달라붙는 상의를 벗으려던 김유정은 자신이 평소 입던 옷 대신 헐렁한 셔츠를 입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이의 셔츠였다. 김유정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만 싶었다. 자신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검은양 팀의 아이들에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가.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질주하는 생각을 억지로 끊어낸 김유정은 당장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일단 제이에게 답을 들어야만 했다. 김유정은 황급히 몸을 씻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그녀의 옷을 걸친 뒤 황급히 모텔을 나섰다.


강남 복구본부의 임시 컨테이너 안에서 업무를 보던 김유정은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것이 숙취 뿐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평소 자신이 온 것을 귀신같이 알아내서는 농을 걸어오던 제이건만, 어째서인지 그날따라 얼굴을 보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녀를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김유정은 제이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몇 번이고 고민해봤지만, 어떻게 해도 자신이 끝내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자 결국 생각을 그만두었다. 홧김에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김유정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녀가 관리하는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였다. 김유정은 곤란함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그녀와 제이 사이의 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있는 이슬비라면 제이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금새 눈치챌 터였다. 그녀가 오기전에 상황을 확인하고 제이와 말을 맞췄어야 하건만, 어느틈엔가 그녀가 작전에 참여할 시간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나이에 맞지않게 똑 부러지는 성격인 이슬비의 일처리에 큰 신뢰를 보내는 그녀였지만, 드라마 시청이라는 그 취미가 문제였는지 어느틈엔가 자신의-김유정이 보기에는 실존하는지도 의심스러운-연애전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된 이슬비가 지금과 같은 곤란한 상황에 놓인 김유정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김유정은 일단 그녀의 안테나에 걸려 괜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일단 현 상황을 흔히 있을만한 해프닝으로 만들어놓기로 했다.


“어서오렴, 슬비야.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더니 숙취가 잘 안 풀리네.”


이슬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날에 김유정의 마무리 작업을 도운 그녀였기에, 이슬비 역시도 전날 김유정이 오랜만에 정시퇴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니도 참, 술은 적당히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괜찮아. 어제는 제이 씨도 같이 있었거든.”


이슬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예의 스위치가 켜진 것이 분명했다. 김유정에게 한걸음 더 다가서며 이슬비가 질문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셨어요?”


“아휴, 말도 마. 내가 어제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 제이 씨가 오늘 내 얼굴도 보지 않으려고 하지 뭐니. 술김에 내가 또 진상이라도 부렸나 봐.”


이슬비는 답답하다는 듯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제이 씨가 계셨으면 더 조심하셨어야죠. 언니랑 제이 씨,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요? 그렇게 어물대시다간 정말로 누가 휙 채가버려요?”


김유정은 내심 승리의 제스쳐를 취했다. 이런 흐름이라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김유정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생각해둔 말을 시작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서말인데, 있다가 작전 끝나고 제이 씨한테 나한테 혼자 좀 와달라고 하지 않을래?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겠어. 자, 이거 가져가고.”


“네, 언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김유정이 건네준 작전 파일을 건네받은 이슬비가 컨테이너에서 나갔다. 긴장이 갑작스레 풀리자 김유정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뒀으니 그녀가 제이에게 어젯밤에 대해 질문을 하는 일은 없을 테고, 배려심 있는 그녀라면 서유리나-그럴 리는 없겠지만-이세하가 엉뚱한 말을 하지 않게 잘 막아줄 것이다. 김유정은 책상에 앉아서 요원증을 만지작거리며 제이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를 생각했다. 머리 속에서 대강의 시뮬레이팅을 완료한 김유정은 책상에 쌓인 서류에 달려들었다. 서류의 양을 보건대, 아무래도 오늘 역시도 제때 퇴근하긴 틀린 것 같았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김유정이 세운 계획은 채 시작도 하기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제이가 그녀의 호출에 불응한 탓이었다. 묘하게 기운 없어보이는 얼굴로 금일의 경계작전 완료를 보고한 이슬비는 뒤이어 제이가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먼저 가보겠다며 돌아갔다는 사실을 김유정에게 전했다. 김유정은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전날 밤에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그가 자신을 이토록 피한단 말인가. 이슬비는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는 김유정을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다가 손뼉을 치며 말을 꺼냈다.


“김유정 언니, 오늘 제이 씨한테 가보시는게 어때요?”


“뭐? 무슨 소리니?”


“아무리 제이 씨라도 설마 집까지 찾아온 여자를 문전박대하겠어요? 언니, 어떻게 보면 이건 기회라구요. 제이 씨 집은 알고 계실 것 아니에요?”


이슬비의 말대로, 팀의 관리요원으로서 김유정은 제이가 살고있는 옥탑방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유정은, 솔직히 말해서 제이의 집까지 찾아가서 문을 두들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늦은 저녁에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그녀를 제이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이상하거나 귀찮은 여자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김유정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슬비는 김유정을 닦달했다.


“언니, 괜한 생각하지 마시구요. 장담하는데, 제이 씨도 분명 언니한테 마음이 있다니까요? 일 때문에 그러시는거면 제가 오늘 남아서 잔업 도와드릴께요.”


평소와 달리 불도저마냥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질려버린 김유정은 결국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평소의 행동이 어땠건 그녀도 그 나이 또래의 소녀구나, 하는 것이 김유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슬비의 도움 덕에 예상보다 1시간가량 일찍 업무를 종료한 김유정은 이슬비에게 반쯤 떠밀리다시피 하며 제이의 집으로 향했다. 찾아가기 어려운 길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도매상가 근처에 위치한 제이의 집 근방 위생 상태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쓰레기장에 가까웠다. 별 생각 없이 발걸음을 내딛다가 개인지 고양인지 알 수 없는 동물의 배설물을 밟을 뻔한 위기를 넘긴 김유정은 발밑을 주의하며 한 블록정도 앞에서 건물 지붕들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제이의 옥탑방을 바라보았다. 물탱크가 시야를 가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물탱크를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 제이가 집에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내심 제이가 집에 없기를 바라던 김유정은 퇴로가 막히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것일까. 갑작스레 드는 후회가 김유정의 가슴을 옥죄었다. 앞으로 한 블록, 앞으로 반 블록,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후회는 점점 커져갔고, 예의 불안감이 김유정의 발걸음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들었다. 고민 끝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자는 결단을 내리려는 순간 그녀는 이미 제이의 집 앞에 도착해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김유정은 반쯤 자포자기한 채로 계단을 올랐다. 4층 가량 되는 계단을 올라 옥상에 도착한 김유정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반하기라도 한 듯한 탈진감을 느꼈다. 그녀의 후각을 자극하는 풀내음에 주변을 둘러보자 건물 주인이 기르는 것인가 싶은 화분과 텃밭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뜸을 들인 김유정은 옥탑방의 문을 두드리며 오랜만에 하늘에 기도했다. 제발 제이가 불을 켠 채로 자고 있는 것이기를, 아니면 뭔가 사러 나가서 집에 없기라도 하기를.


“나갑니다.”


노크에 응답하는 제이의 목소리에 김유정은 식은땀이 났다. 빼꼼히 문이 열리고 제이의 날카로운 눈매가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김유정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라, 유정 씨?”


제이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 머릿속을 애써 뒤적이며 할 말을 찾던 김유정의 다리에서 뭔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슬쩍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바라본 김유정은 자신에게 붙어있는 바퀴벌레를 발견하고는 기함하며 발을 헛디뎠다. 안 돼, 안 돼, 안 돼... 김유정에게 있어서 영원같았던 한 순간이 지나고, 그녀는 제이에게 성대하게 넘어지며 제이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


제이의 방은 과연 남자가 혼자 사는 방답게 엉망진창이었다. 제이는 자신은 기본적으로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두는 편이며, 최근 일이 바쁘다보니 정리할 틈이 없어서 잠시 이런 모양새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김유정은 그의 말을 대충 흘러 넘겼다. 혼자 술이라도 먹고 있었던 것인지 원룸형식의 조촐한 방 중앙에는 술상이 차려져있었고 그 주변을 반원을 그리며 하루, 이틀 마신 것이 아닌 듯 심상찮은 수량의 맥주캔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방에 이런 상황이 겹치자 김유정이 앉을 자리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김유정은 제이가 방을 정리하는동안 문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방금 전의 사건을 아직 뇌리에서 지우지 못했던 김유정은 문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고 움찔하며 다리를 털어냈다. 십여분정도 뒤, 제이가 다시 문을 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들어와, 유정 씨.”


제이는 김유정을 그나마 정리된 방안으로 들여보내어 테이블 앞에 앉히고는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김유정은 생각을 정리하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껑충한 제이의 몸에 맞춘 것인지 다리가 유난히 긴 침대 아래에는 약이 들어있는 것인지 구급상자가 잔뜩 들어가 있었고, 하나 있는 책장에는 무언가를 스크랩해서 모아두기라도 한 것인지 서류철이 잔뜩 꽂혀있었다. 책장에 투명 테이프로 붙여놓은 건강식품 관련 기사를 보니 무엇을 스크랩한 것인지 알만했다. 계속해서 방을 훑던 김유정의 시야에 웬일인지 옷장에서 나와 있는 제이의 정식 요원복이 들어왔다. 요원복이 여러모로 불편하다면서 평소에는 늘 검은양 팀의 요원복을 입고 다니던 제이이기에 그의 정식 요원복을 보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김유정이 그의 요원복을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절부절 못하고 그녀의 앞에 앉아있던 제이가 먼저 운을 떼었다.


“어..., 유정 씨. 혹시 어제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어제 일 때문이면 나는 괜찮으니까, 유정 씨만 정리하면...”


“네?”


제이에게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김유정은 당황했다. 무엇이 괜찮고, 자신이 무엇을 정리해야 한단 말인가? 제이가 뭐라고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단어들은 김유정의 귀로 들어오지 못하고 덧없이 지나갔다. 혼란에 빠진 김유정의 머릿속으로 이슬비가 쉬는 시간에 보던 드라마의 내용이 스쳐갔다. 차가운 표정으로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하던 악역 주인공의 모습. 그 악역의 얼굴을 제이에게서 겹쳐보며 김유정은 머릿속으로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분노로 빨개진 얼굴로 김유정은 제이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제이 씨, 이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실망이에요! 매번 우리 애들, 우리 애들, 하면서 정작 진짜 자기 일에는 이런 식인가요? 역시 남자란 결국 눈 앞에 닥치고나면 다들 이런 식인거죠?”


“뭐?”


이번에 당황한 것은 제이 쪽이었다. 제이가 뭐라고 말 할 틈도 없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김유정의 비난을 들으며 제이는 자신의 손이 어디 있는지 잊은 사람처럼 손을 허우적거렸다. 김유정은 그 와중에 속이 답답하다는 듯 제이가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맥주를 따서 한 입에 들이켰다. 제이는 얼굴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빈 맥주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은 김유정은 벌써 술기운이 올랐는지 약간 발음이 꼬인 상태로 마지막이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변명은 됐어요! 전 갈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김유정을 본 제이는 퉁기듯 일어나서 김유정의 어께를 붙잡았다.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그였지만, 여기에서 그녀를 그대로 보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유정 씨, 일단 진정하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일단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무슨 일인지나 좀 알게 해줘. 응?”


“몰라요! 애 생기면 제가 알아서 지울테니깐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어?”


제이는 마침내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오해를 했는지까지. 어처구니가 없어진 제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어께를 붙잡힌 김유정이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자 제이는 일단 힘을 주어 그녀를 다시 앉혔다.


“유정 씨.”


“뭐예요! 이거 놔줘요!”


“당신, 어제 나한테 토했어. 기억 안나?”


김유정의 몸부림이 딱 멈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해진 얼굴로 제이를 올려다보는 김유정의 모습에 제이는 웃음을 참느라 끅끅거릴 수밖에 없었다.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제이는 김유정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


“제이 씨..., 저 있잖아요...”


제이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제이도 이런 류의 이야기에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즐기는 편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그 자신은 평생 팔자에 없을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제이는 반쯤 패닉상태에 빠져서 김유정의 이름을 불렀다.


“유정 씨, 잠깐만...”


그때, 제이는 김유정에게서 어떤 징후를 포착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을 증상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자세에서는 결코 보고싶지 않을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제이는 급하게 김유정을 옆으로 눕히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제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키고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웁.”


결국 제이는 김유정의 위장 상태를 얼굴로 진찰해야만 했다. 주변인의 건강에도 제법 신경을 써왔던 그에게도 이런 상황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제이에게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김유정이 속이 텅 빈 상태로 안주도 거의 먹지 않은 채 술만을 잔뜩 들이켰다는 점일까. 이 이야기는 어디 가서 다른 사람한테 못 하겠구만, 하고 제이는 얼굴과 가슴팍에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을 애써 외면하며 자포자기한 상태로 멍하니 생각했다.


얼마정도 시간이 지난 뒤, 제이는 화장실에서 상의를 모두 벗은 채 등목을 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겉에 입고있던 검은양 요원복을 끝까지 잠근 상태로 입고 있었던 덕분인지 속에 입고있던 셔츠는 무사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사태를 장렬히 받아내고 만 요원복은 아무래도 세탁소에 맡길 수밖에 없어보였다. 냄새가 풀풀 올라오는 요원복의 상태에 인상을 찌푸리던 제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김유정은 그가 눕혀놓은 바닥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얼마 남지도 않았을 위장의 내용물을 마저 게워놓은 채라는 것 정도일까. 엉망이 된 김유정의 와이셔츠를 본 제이는 또다시 한숨을 쉬며 그녀의 와이셔츠를 벗겨냈다. 평소에도 이러한 행위를 상상해본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그의 상상이 이뤄지는 것은 온갖 상황을 헤쳐온 그로서도 사절이었다. 눈을 둘 데가 없어진 제이는 김유정의 입가를 닦아준 뒤 자신의 셔츠를 벗어서 입혀주고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가 방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것은 김유정의 와이셔츠를 빨아서 옷걸이에 널어놓는 일이었다. 시간이 벌써 자정에 가까워진 것을 확인한 제이는 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방을 나섰다.


*


제이의 설명을 듣고나자 김유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멋대로 제이를 술자리에 동행시켜 있는대로 민폐를 부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더해 어처구니 없는 착각까지 덧붙여 피해자인 그를 매도한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채, 자신이 아까 앉힌 모양새 그대로 석상마냥 미동도 하지않는 김유정을 보며 제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 유정 씨? 나는 괜찮으니까 그렇게 신경 쓸 필요없어. 그렇게 큰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제이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물론 김유정이 갑자기 벌컥 화를 낼 때는 그 역시도 당황했지만, 제대로 상황설명을 하지 않은 채로 왠지 껄끄럽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피한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이 제이의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와의 사이가 어색해질 경우 이제야 겨우 마찰없이 굴러가기 시작한 검은양 팀 내의 분위기는 다시 엉망이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어찌됐건 그도 김유정에게 어느정도의 호의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 상황은 제쳐둔다고 하더라도 제이 스스로도 그녀와의 관계가 안 좋아지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제이는 조용히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그녀의 어께를 감쌌다.


“유정 씨, 정말로 별일 아니었으니까. 신경쓸 필요없어.”


김유정의 몸이 꿈틀했다. 겨우 그녀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제이는 안도했다. 하지만 제이의 곤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했다. 제이의 말을 들은 김유정이 조금씩 훌쩍거리더니 그의 품 안에서 펑펑 울기 시작한 것이다. 제이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니, 유정 씨? 왜, 왜 우는거야? 나한테 닿는게 싫어서 그래?”


자신에게서 냄새라도 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제이는 코를 킁킁거렸다. 하지만 그가 맡을 수 있는 것은 김유정의 머리에서 나는 린스 향과 어렴풋이 올라오는 술 냄새 뿐이었다. 곤란하게도 김유정이 울기 시작하면서 그의 팔을 붙들어버린 탓에 그는 이 자세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김유정은 끅끅거리면서 파편화된 말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치만, 제이 씨가... 저한테 너무, 잘 해주니까...”


“어어?”


제이의 머릿속에서 의미모를 폭죽이 터졌다. 당황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것이 기뻤던 것인지는 그 자신도 의문이었다.


“저, 관리요원이라고 매번, 제이 씨 부려먹기만 하고... G타워에서도, 말도 안되는, 임무 계속 투입 시키고... 괜히 오해해서 야밤에, 찾아와서 행패부리고...”


“괜찮아.”


“그런데도, 제이 씨는, 불평없이 제 말에 따라주고... 저는 그게 정말 고마워서...”


김유정이 코를 훌쩍였다. 세상에, 하는 감상이 제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갑작스레 전쟁이 터지고, 어느 순간 위상력에 각성하고. 그런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쫓겨다니기 바쁘다가 최후에는 헌신짝처럼 버려진 그였다. 선택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외통수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 속에서 이런 이야기,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의 호의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을 듣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정 씨.”


제이는 김유정의 어께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는 있잖아, 평생 나만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야. 그러니까, 다들 그걸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지.”


“그, 러니깐...”


“그러니까, 유정 씨가 나한테 고맙다고 해주는 것 만으로 충분해.”


제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저 그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을 해주는 순간을 그 자신이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그 스스로도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 같았다. 큐브에서 스스로의 또다른 분신에게서 들었던,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그는 지금이라면 제대로 답변해줄 수 있으리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 따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야.”


그 다음은, 아무래도 통곡이었던 것 같다. 김유정은 몇 년 분은 채우겠다는 듯이 제이의 품 안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그것이 한심한 그녀 자신에 대한 감정 때문인지, 혹은 제이의 대답 때문인지, 혹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제이는 알지 못했다. 제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의 가슴에 마냥 파고드는 그녀를 안아주는 것 뿐이었다.


*


이럭저럭 관계가 정상화되고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김유정과 제이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유정이 출근하고 임시 사무실에 자리를 잡으면 어느틈에 알았는지 제이가 들어와서는 브리핑을 시작하려는 그녀에게 농을 건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어느샌가 그 둘에게 있어서 일종의 의식으로 자리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둘의 사이에 큰 진전이 있기를 바랐던 이슬비가 간혹 김유정을 닦달하곤 했지만 김유정은 그날 이후로 제이와 따로 약속을 잡지는 않았다. 한가지 차이점이 생겼다면 김유정이 술을 줄였다는 것일까. 일이 바쁜 것이 여전하기에 술을 마실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탓도 분명 있었으나, 간혹 정시퇴근을 하는 날이 생기더라도 김유정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한번 크게 데였으니만큼 제이에게 다시는 같은 추태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출근한 김유정이 서류를 확인하던 중, 그녀의 예상대로 누군가가 컨테이너에 슥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기에 그녀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시작했다.


“어서오세요, 제이 씨. 오늘 작전의 브리핑을 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