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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락처 등록하기 - 2016.03.21

핸드폰이 고장났다. 전파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는 차원종의 영향인 듯 했다. 하긴,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험하게 굴리는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용케 버텨왔다. 망가진 휴대폰을 가지고 대리점에 가보니 기기 자체는 수리가 가능하지만 데이터는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게임 데이터는 클라우딩으로 복구가 가능하고, 교우관계가 좁으니만큼 전화번호 같은 것은 애초에 별로 저장되어 있지도 않다. 수리를 하는 김에 여기저기 흠집이 난 액정화면도 교체받아 아예 새것이 된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가게를 나왔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돌아오는 길. 돌려받은 핸드폰을 열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연락처 정보를 입력한다. 친숙한 이름들이 목록에 하나, 둘 추가되어간다. 서지수, 한석봉... 나는 연락처 정보를 저장할 때 반드시 본명으로 저장한다. 한편, 어머니는 나와 정 반대로 별명이나 호칭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저번에 슬쩍 봤을 때 내 전화번호가 ‘우리 아들♡’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해서 하트를 지워봤지만, 유일한 수익은 내 등짝을 내려치는 손바닥을 통해 어머니가 아직 정정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뿐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이니만큼 어머니는 내 핸드폰의 연락처 정보를 볼 때마다 삭막하다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람을 단순한 사회적 기능으로 기억하는 쪽이 더 삭막하고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머니를 예로 들어보자. 나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차원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그냥 ‘서지수’였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떤가? 서지수라는 개인은 어디에도 없다. ‘알파 퀸’과 ‘세하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누군가가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상황은 이제는 사양이다. 나는 ‘알파 퀸의 아들’이 아니라 ‘이세하’니까.


“대충 끝났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제 추가할 것은 팀원들과 김유정 누나의 것 뿐이다.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팀원들의 연락처를 확인한다. ‘아직 다 외우지 못했는데 데이터가 날아갔으니 전화번호를 좀 적어달라’는 내 요청을 들어주며 바보를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유리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거지, 서로 만난지 두어 달밖에 안 됐는데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애초에 누가 누구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매번 제이 아저씨의 놀림감이 되는 주제에...


쪽지에 적혀있는 순으로 이름을 입력해본다. 김유정, 서유리, 제이, 미스틸테인(요금은 도대체 누가 내고 있는건지 의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력을 마친 뒤 미묘한 위화감에 목록을 다시 확인해보니 세글자 기준의 칸을 꽉 채우는 이름들 사이로 방금 추가한 ‘제이’와 ‘리더’가 눈에 띄었다. 아니, 제이 아저씨는 내가 이름을 모르니 어쩔 수 없겠지. 그럼 역시 리더가 문제일 것이다. 평소에 매번 리더, 리더하고 부르다보니 습관이 된 것일까, 폴리시와는 맞지 않게 괜스레 리더라고 적어버린 모양이다. 수정 란으로 들어가 그녀의 정보를 수정한다. 이슬비. 그럼에도 위화감은 가시지 않는다. 왜일까.

 

*


“세하야, 그래서 핸드폰 바꾼거야?”


사무실에 들어오는 나를 예상대로 서유리가 맞이했다. 1시간 뒤에 나갈 근무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야, 아까 갈 때도 말했잖아. 새로 사는게 아니라 저번에 수리맡긴 물건을 찾아오는 거라고... 어, 야!”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그녀는 내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채갔다. 저게 무슨 레인저란 말인가, 로그나 시프지. 유니온의 담당자들이 RPG 게임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이걸로 밝혀졌다. 세상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비일상에 관심이 없어서야 세상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 분명하다. 왠지는 모르겠다만. 아차, 그러고보면 정보 입력에 급급해서 비밀번호 설정을 잊었다. 빗장이 열린 성문으로 밀고 들어가는 병사처럼 그녀는 어떤 방해도 없이 내 프라이버시를 유린했다. 


“에이, 어쨌든 새 거가 된 건 똑같잖아? 그게 그거지 뭐.”


천연덕스레 셀카를 찍어 자신의 연락처 정보에 등록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굴리며 목록을 살펴보던 그녀가 예상대로의 태클을 걸어왔다.


“세하야, 이름을 왜 이렇게 딱딱하게 적어놨어? 내가 바꾼다?”


“아, 예. 맘대로 하십쇼.”


내가 뭐라고 하건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있기에 헛수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탈환하는 것도 요원한 일일테고. 반 억지로 내 허락을 받아낸 유리는 자신의 핸드폰에서 사진을 전송하면서까지 내 연락처 정보를 뜯어고쳤다. 결국 10여분이 지나서야 내게로 돌아온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결과물이 가관이다. 제저씨에 유정언니(이건 내 핸드폰이란 말이다!), 우리 테인이 등등... 연락처 하나하나 친절하게 붙어있는 사진에 이르러서는 그 정성에 감탄할 지경이 되었다.


“야, ‘유리유링♡’이 뭐냐? 하트는 또 왜 붙였어?”


“귀엽잖아?”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태연히 반문하니 되려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하여간 대단한 애다. 투덜거리며 주소록의 이름을 복구하는 중에 손가락이 딱 멈췄다. 이슬비의 연락처다.


‘슬비☆’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항목명이다. 사진을 확인해보니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이런 건 어느 틈에 찍은 것인지, 원. 정말이지 로그나 시프가 딱 맞는 행동거지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녀의 이름 두 글자 뒤에 붙은 별을 지우고 수정을 마무리했다. 


김유정

미스틸테인

서유리

슬비

제이


목록을 보고있자니 아까부터 느끼던 묘한 위화감이 싹 가셨음을 알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아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 신경을 꺼도 무방하리라. 교대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으니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떼워야겠다.


며칠 뒤, 자신이 조는 모습이 내 핸드폰에 등록되어있는 것을 본 리더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안 바꿔줄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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