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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 클로저스/신서울 이야기 (7)

  1. 김유정이 과음으로 필름이 끊긴 이야기 - 2017.01.01
  2. 검은양 팀이 회식을 하는 이야기 - 2016.05.16
  3. 이슬비가 이세하와 함께 행사장을 가는 이야기 - 2016.05.05
  4. 이세하가 행복한 꿈을 꾸는 이야기 - 2016.04.22
  5. 서유리가 정식 요원복 때문에 고생하는 이야기 - 2016.04.15
  6. 김유정과 이슬비가 초콜릿을 만드는 이야기 - 2016.04.13
  7. 이세하가 병문안을 가는 이야기 - 2016.03.28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들은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하나의 팀을 관리한다는 것은 소규모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인 김유정 역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강남 사태가 종결된 이후에도 그녀에게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분량의 일이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여름의 기세에 낮이 점점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해가 저물기 전에 집에 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이를 증명하듯 김유정의 스마트폰 달력에는 잔업일을 표시한 날짜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런 와중이니만큼 오랜만에 정시 퇴근에 성공한 그녀가 포장마차에 들러 술이라도 한잔 마실 계획을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됐건 그녀는 애주가인 것이다. 일이 바쁘기로는 마찬가지 형편이었던 특경대 소속 송은이 경정-그녀의 경우는 요령좋게 일과를 빼먹기 일쑤였기에 김유정만큼의 피로가 쌓여있지는 않았다-이 왠지 질린 얼굴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지라 김유정은 홀로 가까운 포장마차로 향하기로 했다. 


강남 일대에는 아직 토벌하지 못한 차원종이 남아있었기에 복구지역 근처의 상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유정은 포장마차로 가기 위해 제법 긴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점심식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던 김유정은 한바탕 달릴 준비를 할 겸 낮에 이슬비에게 받은 우유를 꺼내들어 마셨다. 빈 우유곽을 버릴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유정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껑충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 약간 구부정한 자세에 언뜻 보면 껄렁해 보이는 걸음걸이. 무엇보다 그녀에게 확신을 안겨준 것은 보기 드문 백발이었다. 우유곽을 대충 던져버린 김유정은 걸음을 약간 빠르게 해 그에게 다가갔다.


“제이 씨?”


뒤를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 걸린 노란 선글라스와 훅 풍겨오는 파스 냄새에 김유정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검은양 팀의 클로저 요원인 제이였다. 김유정을 알아본 제이는 뜨악했다.


“유정 씨? 일찍 퇴근하더니만 여긴 왠 일이지?”


“요즘 워낙 뜸했던지라, 한 잔 꺾을까 해서 말이죠.”


술잔을 기울이는 흉내를 내는 김유정을 보며 제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애주 취미는 제이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격무에 시달리다가 맞이한 가뭄의 단비같은 정시 퇴근을 음주에 소모한다는 것은 그녀의 최근 생활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던 그에게는 의외의 행동이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실 생각에 들뜬 것인지, 김유정은 그런 제이에게 그녀답지 않게 볼을 살짝 부풀리며 딴죽을 걸었다.


“뭘 그런 얼굴을 하는 거예요? 제이 씨 집은 여기서 반대 방향이잖아요? 제이 씨도 같은 입장 아니에요?”


“후, 그렇기는 하지.”


“마침 잘 됐네요. 글쎄, 송 경정님한테 같이 가자고 했더니만 자기는 안 되겠다지 뭐예요? 제이 씨가 좀 같이 마셔줘요.”


제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가 술에 약한데다 술버릇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송은이 경정의 반응은 그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이도 김유정이 주정을 부리기 시작하면 제대로 대처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음주를 목적으로 포장마차로 향하고 있음을 이미 시인한 상태라 김유정의 제안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제이는 마뜩찮아하며 김유정의 제안을 수락했다.


*


비틀거리는 김유정을 부축하며 제이는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다시 곱씹었다. 방에 꽉 들어찬 빈 맥주캔을 떠올리며 오늘은 밖에서 속 편하게 마셔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이렇게 큰 실수일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김유정은 그를 끌고 포장마차에 들어가자마자 안주를 마다하고 미친 듯이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미 만취한 취객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던 제이는 그녀의 템포에 따라가지 못해 한 병을 채 비우지 못한 채 김유정의 술주정에 시달려야만 했다. 서류 결재가 어쨌느니, 유니온 내부의 라인이 어땠느니 하는 김유정의 술주정은 강남사태 당시 데미플레인에서 쏟아져 나오던 차원종 마냥 끊임없이 이어졌고, 개중에는 일반인이 들어서는 안 될 기밀 사항까지 있어 제이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거나 위험한 언급을 막느라 온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완전히 지쳐버린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구색 맞추기로 주문한 조촐한 안주를 대충 입에 밀어 넣은 뒤 김유정을 포장마차에서 끌고나왔다. 점점 시끄러워지는 김유정의 주정에 비례하여 험악해지는 주인의 표정도 제이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고주망태가 된 김유정은 당연하게도 술값을 지불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제이의 지갑이 한층 더 가벼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더해, 곤란하게도 제이는 김유정의 집을 몰랐다.


“이봐, 유정 씨. 집이 어디야? 이 근처인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그에게 기대있던 김유정이 뭐라고 웅얼거렸다. 제이는 김유정을 살살 흔들며 그녀의 주의를 촉구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제이는 난감했다. 자신의 집은 정 반대방향이라 그녀를 끌고 가기엔 힘든 상황인데다가, 애초에 쓰레기로 가득 찬 집 안에 그녀를 재울 공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순간적으로 다른 팀원들을 떠올린 제이는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이들에게 이런 꼴을 보이느니 차라리 지옥에서 돌아온 아스타로트와 다시한번 맞붙는 쪽을 택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 참. 평생 이런 일과는 거리가 멀었을 텐데 말이지.”


결국 제이는 절대 선택할 일이 없을 줄만 알았던 마지막 수단을 택해야만 했다. 십여분 뒤, 제이는 김유정을 모텔방의 침대에 눕히고는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근처에서 아직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몇 안되는 모텔 중 하나답게 가격은 어처구니없이 비쌌다. 상황이 상황이라 이용객이 별로 없는 것인지, 후덥지근한 방을 식히기 위해 낡은 에어컨을 켜자 에어컨이 먼지를 쿨럭쿨럭 토해냈다. 제이는 투덜거리며 에어컨을 다시 꺼버리고는 구석에 세워진 선풍기를 침대 옆으로 끌고와 전원을 올리고는 창문을 열었다. 방이 덥긴 해도 이 정도면 아마 문제는 없으리라. 연속되는 혹사에 속을 완전히 비운 채로 운명한 자신의 지갑에게 잠시 묵념한 뒤 서둘러 방을 나서려는 제이를,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린건지 김유정이 발음을 마구 흩뜨리며 불러세웠다.


“제이 씨..., 잠깐 저좀 일으켜 세워줘요...”


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김유정 쪽을 바라보았다. 김유정은 어느 틈에 움직였는지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린 채 누워서는 그에게 잡아달라는 듯 양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자세를 바꾸기 위해 침대에서 구르기라도 했는지 셔츠 깃이 흐트러져있었다. 제이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옮겼다.


“정말이지..., 부탁인데 앞으로는 이렇게 마시지 말라고, 유정 씨.”


제이가 김유정의 손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김유정은 자신의 다리로 일어서는 대신 그를 향해 고꾸라졌고, 그녀를 당기느라 뒤로 무게중심이 쏠려있던 제이는 자연히 김유정에게 밀려 뒤로 넘어가게 되었다. 


“잠깐, 잠깐, 유정 씨...?”


제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늘어뜨려진 김유정의 머리카락 때문에 시야에는 그녀의 얼굴만이 들어왔다. 술기운으로 붉게 물든 김유정의 이마에는 방의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제이 씨..., 저 있잖아요...”


정말로 더운 방이었다.


*


잠에 취해 눈을 뜬 김유정의 시야에 낯선 천장이 들어왔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보고있던 김유정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관자놀이가 쿵쿵 울리며 위험신호를 보내왔고, 머리를 당장이라도 박살낼듯한 두통이 그녀를 반겼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새벽녘이었다.


“죽겠네...”


관심과 보살핌을 촉구하는 이마를 짚으며 김유정은 어제밤의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신통찮았다. 방을 나가려는 제이를 불러세워 그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려다 넘어진 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제이는 집에 돌아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씻기라도 하기 위해  끈적끈적 기분 나쁘게 달라붙는 상의를 벗으려던 김유정은 자신이 평소 입던 옷 대신 헐렁한 셔츠를 입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이의 셔츠였다. 김유정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만 싶었다. 자신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검은양 팀의 아이들에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가.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질주하는 생각을 억지로 끊어낸 김유정은 당장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일단 제이에게 답을 들어야만 했다. 김유정은 황급히 몸을 씻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그녀의 옷을 걸친 뒤 황급히 모텔을 나섰다.


강남 복구본부의 임시 컨테이너 안에서 업무를 보던 김유정은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것이 숙취 뿐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평소 자신이 온 것을 귀신같이 알아내서는 농을 걸어오던 제이건만, 어째서인지 그날따라 얼굴을 보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녀를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김유정은 제이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몇 번이고 고민해봤지만, 어떻게 해도 자신이 끝내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자 결국 생각을 그만두었다. 홧김에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김유정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녀가 관리하는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였다. 김유정은 곤란함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그녀와 제이 사이의 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있는 이슬비라면 제이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금새 눈치챌 터였다. 그녀가 오기전에 상황을 확인하고 제이와 말을 맞췄어야 하건만, 어느틈엔가 그녀가 작전에 참여할 시간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나이에 맞지않게 똑 부러지는 성격인 이슬비의 일처리에 큰 신뢰를 보내는 그녀였지만, 드라마 시청이라는 그 취미가 문제였는지 어느틈엔가 자신의-김유정이 보기에는 실존하는지도 의심스러운-연애전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된 이슬비가 지금과 같은 곤란한 상황에 놓인 김유정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김유정은 일단 그녀의 안테나에 걸려 괜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일단 현 상황을 흔히 있을만한 해프닝으로 만들어놓기로 했다.


“어서오렴, 슬비야.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더니 숙취가 잘 안 풀리네.”


이슬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날에 김유정의 마무리 작업을 도운 그녀였기에, 이슬비 역시도 전날 김유정이 오랜만에 정시퇴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니도 참, 술은 적당히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괜찮아. 어제는 제이 씨도 같이 있었거든.”


이슬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예의 스위치가 켜진 것이 분명했다. 김유정에게 한걸음 더 다가서며 이슬비가 질문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셨어요?”


“아휴, 말도 마. 내가 어제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 제이 씨가 오늘 내 얼굴도 보지 않으려고 하지 뭐니. 술김에 내가 또 진상이라도 부렸나 봐.”


이슬비는 답답하다는 듯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제이 씨가 계셨으면 더 조심하셨어야죠. 언니랑 제이 씨,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요? 그렇게 어물대시다간 정말로 누가 휙 채가버려요?”


김유정은 내심 승리의 제스쳐를 취했다. 이런 흐름이라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김유정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생각해둔 말을 시작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서말인데, 있다가 작전 끝나고 제이 씨한테 나한테 혼자 좀 와달라고 하지 않을래?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겠어. 자, 이거 가져가고.”


“네, 언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김유정이 건네준 작전 파일을 건네받은 이슬비가 컨테이너에서 나갔다. 긴장이 갑작스레 풀리자 김유정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뒀으니 그녀가 제이에게 어젯밤에 대해 질문을 하는 일은 없을 테고, 배려심 있는 그녀라면 서유리나-그럴 리는 없겠지만-이세하가 엉뚱한 말을 하지 않게 잘 막아줄 것이다. 김유정은 책상에 앉아서 요원증을 만지작거리며 제이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를 생각했다. 머리 속에서 대강의 시뮬레이팅을 완료한 김유정은 책상에 쌓인 서류에 달려들었다. 서류의 양을 보건대, 아무래도 오늘 역시도 제때 퇴근하긴 틀린 것 같았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김유정이 세운 계획은 채 시작도 하기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제이가 그녀의 호출에 불응한 탓이었다. 묘하게 기운 없어보이는 얼굴로 금일의 경계작전 완료를 보고한 이슬비는 뒤이어 제이가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먼저 가보겠다며 돌아갔다는 사실을 김유정에게 전했다. 김유정은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전날 밤에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그가 자신을 이토록 피한단 말인가. 이슬비는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는 김유정을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다가 손뼉을 치며 말을 꺼냈다.


“김유정 언니, 오늘 제이 씨한테 가보시는게 어때요?”


“뭐? 무슨 소리니?”


“아무리 제이 씨라도 설마 집까지 찾아온 여자를 문전박대하겠어요? 언니, 어떻게 보면 이건 기회라구요. 제이 씨 집은 알고 계실 것 아니에요?”


이슬비의 말대로, 팀의 관리요원으로서 김유정은 제이가 살고있는 옥탑방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유정은, 솔직히 말해서 제이의 집까지 찾아가서 문을 두들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늦은 저녁에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그녀를 제이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이상하거나 귀찮은 여자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김유정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슬비는 김유정을 닦달했다.


“언니, 괜한 생각하지 마시구요. 장담하는데, 제이 씨도 분명 언니한테 마음이 있다니까요? 일 때문에 그러시는거면 제가 오늘 남아서 잔업 도와드릴께요.”


평소와 달리 불도저마냥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질려버린 김유정은 결국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평소의 행동이 어땠건 그녀도 그 나이 또래의 소녀구나, 하는 것이 김유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슬비의 도움 덕에 예상보다 1시간가량 일찍 업무를 종료한 김유정은 이슬비에게 반쯤 떠밀리다시피 하며 제이의 집으로 향했다. 찾아가기 어려운 길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도매상가 근처에 위치한 제이의 집 근방 위생 상태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쓰레기장에 가까웠다. 별 생각 없이 발걸음을 내딛다가 개인지 고양인지 알 수 없는 동물의 배설물을 밟을 뻔한 위기를 넘긴 김유정은 발밑을 주의하며 한 블록정도 앞에서 건물 지붕들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제이의 옥탑방을 바라보았다. 물탱크가 시야를 가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물탱크를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 제이가 집에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내심 제이가 집에 없기를 바라던 김유정은 퇴로가 막히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것일까. 갑작스레 드는 후회가 김유정의 가슴을 옥죄었다. 앞으로 한 블록, 앞으로 반 블록,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후회는 점점 커져갔고, 예의 불안감이 김유정의 발걸음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들었다. 고민 끝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자는 결단을 내리려는 순간 그녀는 이미 제이의 집 앞에 도착해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김유정은 반쯤 자포자기한 채로 계단을 올랐다. 4층 가량 되는 계단을 올라 옥상에 도착한 김유정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반하기라도 한 듯한 탈진감을 느꼈다. 그녀의 후각을 자극하는 풀내음에 주변을 둘러보자 건물 주인이 기르는 것인가 싶은 화분과 텃밭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뜸을 들인 김유정은 옥탑방의 문을 두드리며 오랜만에 하늘에 기도했다. 제발 제이가 불을 켠 채로 자고 있는 것이기를, 아니면 뭔가 사러 나가서 집에 없기라도 하기를.


“나갑니다.”


노크에 응답하는 제이의 목소리에 김유정은 식은땀이 났다. 빼꼼히 문이 열리고 제이의 날카로운 눈매가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김유정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라, 유정 씨?”


제이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 머릿속을 애써 뒤적이며 할 말을 찾던 김유정의 다리에서 뭔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슬쩍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바라본 김유정은 자신에게 붙어있는 바퀴벌레를 발견하고는 기함하며 발을 헛디뎠다. 안 돼, 안 돼, 안 돼... 김유정에게 있어서 영원같았던 한 순간이 지나고, 그녀는 제이에게 성대하게 넘어지며 제이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


제이의 방은 과연 남자가 혼자 사는 방답게 엉망진창이었다. 제이는 자신은 기본적으로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두는 편이며, 최근 일이 바쁘다보니 정리할 틈이 없어서 잠시 이런 모양새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김유정은 그의 말을 대충 흘러 넘겼다. 혼자 술이라도 먹고 있었던 것인지 원룸형식의 조촐한 방 중앙에는 술상이 차려져있었고 그 주변을 반원을 그리며 하루, 이틀 마신 것이 아닌 듯 심상찮은 수량의 맥주캔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방에 이런 상황이 겹치자 김유정이 앉을 자리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김유정은 제이가 방을 정리하는동안 문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방금 전의 사건을 아직 뇌리에서 지우지 못했던 김유정은 문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고 움찔하며 다리를 털어냈다. 십여분정도 뒤, 제이가 다시 문을 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들어와, 유정 씨.”


제이는 김유정을 그나마 정리된 방안으로 들여보내어 테이블 앞에 앉히고는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김유정은 생각을 정리하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껑충한 제이의 몸에 맞춘 것인지 다리가 유난히 긴 침대 아래에는 약이 들어있는 것인지 구급상자가 잔뜩 들어가 있었고, 하나 있는 책장에는 무언가를 스크랩해서 모아두기라도 한 것인지 서류철이 잔뜩 꽂혀있었다. 책장에 투명 테이프로 붙여놓은 건강식품 관련 기사를 보니 무엇을 스크랩한 것인지 알만했다. 계속해서 방을 훑던 김유정의 시야에 웬일인지 옷장에서 나와 있는 제이의 정식 요원복이 들어왔다. 요원복이 여러모로 불편하다면서 평소에는 늘 검은양 팀의 요원복을 입고 다니던 제이이기에 그의 정식 요원복을 보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김유정이 그의 요원복을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절부절 못하고 그녀의 앞에 앉아있던 제이가 먼저 운을 떼었다.


“어..., 유정 씨. 혹시 어제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어제 일 때문이면 나는 괜찮으니까, 유정 씨만 정리하면...”


“네?”


제이에게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김유정은 당황했다. 무엇이 괜찮고, 자신이 무엇을 정리해야 한단 말인가? 제이가 뭐라고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단어들은 김유정의 귀로 들어오지 못하고 덧없이 지나갔다. 혼란에 빠진 김유정의 머릿속으로 이슬비가 쉬는 시간에 보던 드라마의 내용이 스쳐갔다. 차가운 표정으로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하던 악역 주인공의 모습. 그 악역의 얼굴을 제이에게서 겹쳐보며 김유정은 머릿속으로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분노로 빨개진 얼굴로 김유정은 제이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제이 씨, 이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실망이에요! 매번 우리 애들, 우리 애들, 하면서 정작 진짜 자기 일에는 이런 식인가요? 역시 남자란 결국 눈 앞에 닥치고나면 다들 이런 식인거죠?”


“뭐?”


이번에 당황한 것은 제이 쪽이었다. 제이가 뭐라고 말 할 틈도 없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김유정의 비난을 들으며 제이는 자신의 손이 어디 있는지 잊은 사람처럼 손을 허우적거렸다. 김유정은 그 와중에 속이 답답하다는 듯 제이가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맥주를 따서 한 입에 들이켰다. 제이는 얼굴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빈 맥주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은 김유정은 벌써 술기운이 올랐는지 약간 발음이 꼬인 상태로 마지막이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변명은 됐어요! 전 갈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김유정을 본 제이는 퉁기듯 일어나서 김유정의 어께를 붙잡았다.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그였지만, 여기에서 그녀를 그대로 보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유정 씨, 일단 진정하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일단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무슨 일인지나 좀 알게 해줘. 응?”


“몰라요! 애 생기면 제가 알아서 지울테니깐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어?”


제이는 마침내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오해를 했는지까지. 어처구니가 없어진 제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어께를 붙잡힌 김유정이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자 제이는 일단 힘을 주어 그녀를 다시 앉혔다.


“유정 씨.”


“뭐예요! 이거 놔줘요!”


“당신, 어제 나한테 토했어. 기억 안나?”


김유정의 몸부림이 딱 멈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해진 얼굴로 제이를 올려다보는 김유정의 모습에 제이는 웃음을 참느라 끅끅거릴 수밖에 없었다.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제이는 김유정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


“제이 씨..., 저 있잖아요...”


제이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제이도 이런 류의 이야기에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즐기는 편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그 자신은 평생 팔자에 없을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제이는 반쯤 패닉상태에 빠져서 김유정의 이름을 불렀다.


“유정 씨, 잠깐만...”


그때, 제이는 김유정에게서 어떤 징후를 포착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을 증상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자세에서는 결코 보고싶지 않을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제이는 급하게 김유정을 옆으로 눕히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제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키고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웁.”


결국 제이는 김유정의 위장 상태를 얼굴로 진찰해야만 했다. 주변인의 건강에도 제법 신경을 써왔던 그에게도 이런 상황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제이에게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김유정이 속이 텅 빈 상태로 안주도 거의 먹지 않은 채 술만을 잔뜩 들이켰다는 점일까. 이 이야기는 어디 가서 다른 사람한테 못 하겠구만, 하고 제이는 얼굴과 가슴팍에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을 애써 외면하며 자포자기한 상태로 멍하니 생각했다.


얼마정도 시간이 지난 뒤, 제이는 화장실에서 상의를 모두 벗은 채 등목을 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겉에 입고있던 검은양 요원복을 끝까지 잠근 상태로 입고 있었던 덕분인지 속에 입고있던 셔츠는 무사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사태를 장렬히 받아내고 만 요원복은 아무래도 세탁소에 맡길 수밖에 없어보였다. 냄새가 풀풀 올라오는 요원복의 상태에 인상을 찌푸리던 제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김유정은 그가 눕혀놓은 바닥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얼마 남지도 않았을 위장의 내용물을 마저 게워놓은 채라는 것 정도일까. 엉망이 된 김유정의 와이셔츠를 본 제이는 또다시 한숨을 쉬며 그녀의 와이셔츠를 벗겨냈다. 평소에도 이러한 행위를 상상해본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그의 상상이 이뤄지는 것은 온갖 상황을 헤쳐온 그로서도 사절이었다. 눈을 둘 데가 없어진 제이는 김유정의 입가를 닦아준 뒤 자신의 셔츠를 벗어서 입혀주고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가 방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것은 김유정의 와이셔츠를 빨아서 옷걸이에 널어놓는 일이었다. 시간이 벌써 자정에 가까워진 것을 확인한 제이는 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방을 나섰다.


*


제이의 설명을 듣고나자 김유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멋대로 제이를 술자리에 동행시켜 있는대로 민폐를 부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더해 어처구니 없는 착각까지 덧붙여 피해자인 그를 매도한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채, 자신이 아까 앉힌 모양새 그대로 석상마냥 미동도 하지않는 김유정을 보며 제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 유정 씨? 나는 괜찮으니까 그렇게 신경 쓸 필요없어. 그렇게 큰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제이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물론 김유정이 갑자기 벌컥 화를 낼 때는 그 역시도 당황했지만, 제대로 상황설명을 하지 않은 채로 왠지 껄끄럽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피한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이 제이의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와의 사이가 어색해질 경우 이제야 겨우 마찰없이 굴러가기 시작한 검은양 팀 내의 분위기는 다시 엉망이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어찌됐건 그도 김유정에게 어느정도의 호의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 상황은 제쳐둔다고 하더라도 제이 스스로도 그녀와의 관계가 안 좋아지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제이는 조용히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그녀의 어께를 감쌌다.


“유정 씨, 정말로 별일 아니었으니까. 신경쓸 필요없어.”


김유정의 몸이 꿈틀했다. 겨우 그녀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제이는 안도했다. 하지만 제이의 곤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했다. 제이의 말을 들은 김유정이 조금씩 훌쩍거리더니 그의 품 안에서 펑펑 울기 시작한 것이다. 제이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니, 유정 씨? 왜, 왜 우는거야? 나한테 닿는게 싫어서 그래?”


자신에게서 냄새라도 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제이는 코를 킁킁거렸다. 하지만 그가 맡을 수 있는 것은 김유정의 머리에서 나는 린스 향과 어렴풋이 올라오는 술 냄새 뿐이었다. 곤란하게도 김유정이 울기 시작하면서 그의 팔을 붙들어버린 탓에 그는 이 자세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김유정은 끅끅거리면서 파편화된 말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치만, 제이 씨가... 저한테 너무, 잘 해주니까...”


“어어?”


제이의 머릿속에서 의미모를 폭죽이 터졌다. 당황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것이 기뻤던 것인지는 그 자신도 의문이었다.


“저, 관리요원이라고 매번, 제이 씨 부려먹기만 하고... G타워에서도, 말도 안되는, 임무 계속 투입 시키고... 괜히 오해해서 야밤에, 찾아와서 행패부리고...”


“괜찮아.”


“그런데도, 제이 씨는, 불평없이 제 말에 따라주고... 저는 그게 정말 고마워서...”


김유정이 코를 훌쩍였다. 세상에, 하는 감상이 제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갑작스레 전쟁이 터지고, 어느 순간 위상력에 각성하고. 그런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쫓겨다니기 바쁘다가 최후에는 헌신짝처럼 버려진 그였다. 선택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외통수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 속에서 이런 이야기,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의 호의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을 듣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정 씨.”


제이는 김유정의 어께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는 있잖아, 평생 나만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야. 그러니까, 다들 그걸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지.”


“그, 러니깐...”


“그러니까, 유정 씨가 나한테 고맙다고 해주는 것 만으로 충분해.”


제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저 그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을 해주는 순간을 그 자신이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그 스스로도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 같았다. 큐브에서 스스로의 또다른 분신에게서 들었던,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그는 지금이라면 제대로 답변해줄 수 있으리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 따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야.”


그 다음은, 아무래도 통곡이었던 것 같다. 김유정은 몇 년 분은 채우겠다는 듯이 제이의 품 안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그것이 한심한 그녀 자신에 대한 감정 때문인지, 혹은 제이의 대답 때문인지, 혹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제이는 알지 못했다. 제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의 가슴에 마냥 파고드는 그녀를 안아주는 것 뿐이었다.


*


이럭저럭 관계가 정상화되고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김유정과 제이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유정이 출근하고 임시 사무실에 자리를 잡으면 어느틈에 알았는지 제이가 들어와서는 브리핑을 시작하려는 그녀에게 농을 건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어느샌가 그 둘에게 있어서 일종의 의식으로 자리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둘의 사이에 큰 진전이 있기를 바랐던 이슬비가 간혹 김유정을 닦달하곤 했지만 김유정은 그날 이후로 제이와 따로 약속을 잡지는 않았다. 한가지 차이점이 생겼다면 김유정이 술을 줄였다는 것일까. 일이 바쁜 것이 여전하기에 술을 마실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탓도 분명 있었으나, 간혹 정시퇴근을 하는 날이 생기더라도 김유정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한번 크게 데였으니만큼 제이에게 다시는 같은 추태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출근한 김유정이 서류를 확인하던 중, 그녀의 예상대로 누군가가 컨테이너에 슥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기에 그녀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시작했다.


“어서오세요, 제이 씨. 오늘 작전의 브리핑을 해드릴게요.”



검은양 팀은 지금까지 친목을 도모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팀원 간의 사이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큼직한 사건들을 함께 겪은 만큼, 이들의 관계는 다른 클로저 팀과 비교해도 매우 돈독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저 일이 바빠 사적으로 만날 일이 없었을 뿐이다. 검은양 팀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상황에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어찌됐건, 그들이 바쁘게 뛰어다닐수록 세상은 한결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제이는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팀원들도 그 전쟁의 직∙간접적 피해자들이었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조금 바쁘게 살아서 신도시의 시민들이 일상을 구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유니온의 상층부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선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요식행위를 좋아하는 것은 유니온 역시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렇게 해서, 상위 부서로부터 김유정에게 ‘팀원들의 결속 재고 및 피로 회복, 그리고 강남 사태를 무사히 해결한 공로에 대한 포상 개념의 회식 자리’를 마련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렇잖아도 여유가 생기고 나면 이러한 자리를 한 번쯤은 가지리라 생각했던 김유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바람이 명령의 형태가 되어서 돌아오자 그녀는 곤란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어쩔까요?”

 

재해복구본부의 임시 사무실 안에 김유정의 목소리가 울렸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것이 상부의 제멋대로인 명령에 꽤나 골치가 아픈 듯 했다. 미성년자 팀원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시간대였기에, 김유정은 제이와 함께 간단하게라도 계획을 짜놓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을 데리고 술판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아냐? 저녁엔 애들은 애들 나름대로 숙제라던가, 공부라던가 할 일이 꽤 있을 테고. 그렇게 시간이 여유롭지 않으니 여기서 뭐라도 시켜 먹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제이가 대답했다. 즉흥적이고 허술해 보이는 의견이었지만 정론이었다. 아무리 시간을 비워도 작전대기로 한, 두 명은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대부분의 클로저 팀의 현실이었기에 다른 클로저들 역시도 이런 식으로 회식을 하곤 했었던 것이다. 음주가 낄 경우 누군가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는 방식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대부분인 검은양 팀은 이 문제로 곤란할 일이 없었다. 이미 이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김유정 역시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죠. 그간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여기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서 쉬게 하는 편이 좋겠어요. 메뉴, 는... 어떻게 할까요?”

 

이왕이면 아이들에게 평소에 먹기 힘든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은 것이 김유정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상부에서 내려온 지원금은, 굳이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쥐꼬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사비를 털자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내려온 명령의 타이밍이 어찌나 적절했던지, 김유정의 지갑은 바닥을 드러내던 참이었다. 김유정이 보여준 문서에 적힌 지원금을 보자 제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 여전하구만 진짜. 그 많은 운영비는 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군. 이러면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 아냐?”

 

제이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김유정의 시선은 그녀도 종종 이용하는지라 때마침 벽에 붙여놓았던 중국집의 전단지에 도달했다. 제이의 의견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참에 그 싼 티 나는 전단지를 보게 된 김유정의 얼굴은 참으로 볼만한 모양새가 되었다. 자신도 허탈했던지 연신 헛웃음을 짓던 제이는 김유정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만지며 변명조로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그 돈을 누구 코에 붙인다고 그래? 애들 데리고 어디 좋은데 가서 고기라도 구워먹으면 참 좋겠지. 현실이 그렇질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 거고.”
“그러게 말이죠. 모처럼 뭐라도 지원을 해주나 싶더니만...”

 

김유정이 표정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예전부터 유니온의 탁상행정에 진절머리를 내던 그녀였건만, 관리요원으로 현장에 나와 피부로 느끼는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상식을 벗어난 행정이 무엇 하나 바뀌는 것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김유정을 반쯤 염세주의자로 만들곤 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아무리 불평을 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고, 결국 김유정은 제이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오후에 출근한 나머지 팀원들이 급조한 회식 계획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김유정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이슬비와 이세하, 그리고 서유리는 같은 학교의 학생이었을 뿐 본래 서로를 모르는 사이였다. 그런 이들이 한 팀의 팀원이 되었다고 갑자기 의기투합하여 함께 다닐 리 만무했기에, 이들은 교내에서 서로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이 셋이 이럴진대, 아예 나이대가 다른 미스틸테인은 오죽했을까.

 

그런 상황이었기에 이들은 김유정이 꺼낸 회식 이야기에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회식 장소가 고기집이 아니라 현장이라는 이야기에 서유리가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김유정이 마주했던 유일한 반대 입장이었다. 하지만 예산 문제가 등장하자 그녀 역시도 김유정에 설명에 납득했다. 금전 문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온 것은 그녀 역시도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이전에 해당 중국집을 이용해 본 경험이 있던 김유정과 자신의 고기 애호 취향을 열렬히 피력한 서유리의 의견을 조합한 결과, 메뉴는 탕수육과 각자가 고른 개인 음식이라는 매우 정석적인 조합이 되었다. 회식 예정일을 이틀 뒤로 확정한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김유정은 팀원들에게 그날의 당일 과업에 대해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

 

사람의 음식 취향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채식주의자와 같은 극단적인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호불호는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렇다곤 하더라도, 김유정은 중국 음식 같은 간단한 메뉴에서 이렇게 첨예한 갈등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이 음식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논쟁을 생각해보면 메뉴를 선택한 시점부터 여기에 대해 고민을 해두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찰 임무가 늦어져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스틸테인과 제이를 제외한 나머지 검은양 팀원들은 모두 김유정의 컨테이너에 모여 있었다. 두 책상을 붙여서 만든 간이 식탁에 모여 앉은 검은양 팀원들은 저마다 짜장면이나 볶음밥 등을 앞에 놓은 채, 탕수육 접시와 소스 그릇을 마주보고 앉아 한창 입씨름을 벌이는 중이었다.

 

“탕수육에는 소스를 부어서 먹는 게 당연한 것 아냐?”

 

이세하가 말했다. 그 새를 못 참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얼핏 보면 탕수육에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수시로 식탁을 곁눈질하는 그의 시선은 그의 본심이 겉보기와는 정반대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보야, 탕수육에 소스를 다 부어버리면 탕수육이 눅눅해지잖아! 그럼 보관하기가 얼마나 나쁜지 알아?”

 

서유리의 말이었다. 회식 시작 후 삼십 분을 버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탕수육을 굳이 보관까지 이야기하면서 걱정하는 모습이 과연 평소 돈에 쪼들리는 그녀답다고 할만 했다. 회식에 늦은 두 팀원을 염려한 이슬비가 옆에서 서유리를 거들었다.

 

“제이 씨와 테인이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을 부담할 수는 없어, 이세하. 우리끼리 먼저 먹기 시작하더라도 최소한 그 둘에게도 선택권을 줘야만 해. 소스를 붓는 건 조금만 참아주면 안될까?”
“선택권? 탕수육은 당연히 소스를 부어서 먹는 음식이잖아. 탕수육은 기본적으로 소스와 함께 볶아서 내놓는 음식이지. 소스를 따로 주는 것은 배달음식의 한계로 발생한 고육지책일 뿐, 고기에 잘 스며든 소스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당연히 지금 소스를 부어야지.”

 

평소 집에서 요리를 포함한 가사를 책임지고 있는 이세하다운 이야기였다. 자신의 이야기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두 팀원의 모습에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고는 계속해서 주장을 피력했다.

 

“탕수육을 소스에 대충 찍어먹겠단 건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문외한들의 생각 아냐? 테인이도 통신으로 연락했잖아? 금방 올 거라고. 제대로 만든 탕수육이라면 10분 정도의 시간으로는 눅눅해지지 않아.”

 

말을 마친 이세하가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 소스 그릇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릇은 그의 손을 피해 둥실 떠올라 이슬비의 앞에 안착했다. 아직 비닐도 벗기지 못한 소스 그릇의 온도를 확인한 이슬비가 이세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현 시점에서 너의 요리철학은 중요하지 않아, 이세하. 두 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게...”
“세하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탕수육은 당연히 찍어먹어야지! 고소한 튀김옷 맛이 탕수육에선 제일 중요한 거잖아! 그런 걸로 무슨 무뇌한이니, 어쩌니... 내가 바보라 이거야?”

 

이슬비의 말을 끊으며 서유리가 말했다. 어느 틈엔가 이슬비 앞의 소스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 뒤였다. 서유리가 말하는 틈을 타 소스를 탈환하려다 그녀의 재빠른 방어에 실패한 이세하가 외쳤다.

 

“무뇌한이 아니고 문외한이라고! 애초에, 소스와 함께 먹는 것을 전제하는 요리에 왜 찍어먹는다는 개념이 들어가는거야?”

 

말을 하면서도 이세하는 서유리에게서 탕수육 소스를 빼앗을 셈으로 연신 팔을 뻗었다. 무의식중에 위상력이 발휘되기라도 했는지 일반적인 팔의 움직임과는 사뭇 다른 속도였지만, 서유리 역시도 그에 지지 않고 이세하의 손을 요리조리 피하며 그릇을 사수해냈다. 의자 째로 뒤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체를 젖혀 그릇을 빼내면서 서유리가 외쳤다.

 

“탕수육은 고기잖아, 고기! 너는 고기집에 가면 소스를 고기에 뿌려 먹을거야? 아니잖아? 정 그렇게 탕수육에 소스를 붓고 싶으면 네가 먹을 만큼 고기를 소스에 담가두면 될 거 아냐!”

 

정론에 가까운 발언이었지만 이세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셈으로 보였다.

 

“그거랑은 다른 문제라고! 요리를 뭘로 보는 거야?”
“먹는 사람이 중요하지! 그리고 요리라면 나도 한단 말야!”

 

이세하와 서유리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갔다. 고조되기 시작한 그 둘의 말싸움은 곧 자연스럽게 탕수육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진 채 말꼬리를 잡으며 자존심 싸움을 시작하는 영역으로 넘어갔다. 어느 틈엔가 싸움의 원래 주제였던 탕수육 소스는 테이블 구석으로 밀려나있었다.

 

“애초에 서유리 넌 저번에도 과일 깎아서 접대하는 것 밖에 더했어?”

“뭐? 그러는 네가 한 것도 고작 라면 따위였잖아!”

“고작 라면이라고? 하긴, 그 라면에 얼마나 많은 노하우가 접목됐는지 네가 알 리가 없지. 어차피 네가 뭘 만든다고 해봐야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는 카레밖에 더 있냐?”

 

고작 배달 탕수육 따위에 소스를 붓네 마네 하는 이야기로 평소 그렇게 사이가 좋던 팀원들이 싸우기 시작하는 모습에 이슬비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녀가 그나마 의지할 법한 상식인인 김유정은 상황을 어떻게든 중재해보려다 실패한 뒤 구석에서 멍한 눈으로 현실도피를 하게 된지 오래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둘의 말싸움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슬비는 김유정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저 둘을 어쩌죠? 제이 씨와 테인이가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아? 아, 그래. 지금 연락을 하는 중이긴 한데... 대답이 없네. 마지막으로 금방 도착한다고 한지 5분이 다 되가는데...”

 

김유정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컨테이너의 문이 벌컥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문을 향해 시선을 향한 이슬비는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육중한 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Ich bin daheim! 우와! 냄새 엄청 좋네요! 이게 그 탕슉이라는 음식인가요?”

 

컨테이너 안에 진동하던 냄새를 맡은 미스틸테인이 장비 거치대에 창을 기대놓으며 김유정과 이슬비에게 질문했다. 이슬비와 마찬가지로 내심 안도하고 있던 김유정이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 맞아. 탕슉이 아니라 탕수육이라고 발음하는 거야, 테인아. 그런데 제이 씨는 같이 오지 않았니?”
“우웅, 제이 아저씨는 잠깐 특경대원 아저씨들이랑 이야기를 좀 한다고 했어요. 먼저 먹고 있으라던데요?”

 

미스틸테인의 대답에 김유정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특경대 사무실 앞에서 특경대 대원들과 함께 송은이와 대화를 나누고있는 제이의 뒷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서유리와 이세하를 본 미스틸테인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Übrigens, 그런데, 유리 누나랑 세하 형은 왜 저러고 있는 거예요?”
“아, 하하... 그냥 그런 일이 있어. 그보다 테인아, 전에 탕수육을 먹어본 적 있니?”

 

그의 질문에 다시 현실의 막막함을 확인한 김유정이 말을 얼버무리고 되묻자 미스틸테인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해외에서 파견 온 클로저에게 제공되는 유니온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그가 급식 외의 음식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뇨. 뭐 특별한 거라도 있나요?”
“아아, 탕수육은 소스를 곁들여먹는 음식이거든. 한번 먹어볼래? 제이 씨는 금방 올테니 먼저 먹어볼래?”
“Ja, natürlich! 저 그릇이 그 소스인거죠?”

 

미스틸테인은 김유정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들뜬 채로 테이블로 달려갔다. 미스틸테인은 소스 그릇의 랩을 벗겨내고 즉시 탕수육에 소스를 부었다. 아직까지도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이세하와 서유리가 채 반응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목격한 이세하와 서유리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아?”

 

서유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녀보다 한 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세하는 그제야 그가 말싸움을 하고 있던 원인을 기억해냈는지 씩 웃으며 미스틸테인의 어께를 툭툭 쳤다.

 

“잘 했어, 테인아!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세하 형, 탕수육 좋아해요?”
“당연하지! 얼른 먹자. 식겠다.”

 

허무한 표정으로 소스로 뒤덮인 탕수육을 바라보는 서유리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세하가 말했다. 이세하는 미스틸테인 몫의 짜장면을 그에게 건네면서도 싱글벙글하는 얼굴을 여과 없이 드러내보였다. 그를 바라보며 의자에 주저앉는 서유리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이야, 중국집 음식 냄새 정말 오랜만인데? 오랜만에 식욕이 다 돌아오는 기분이야.”

 

때마침 이야기가 끝났는지 제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 안을 한바퀴 둘러본 제이는 당황하며 이슬비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혼이 빠져나간 듯 힘없이 앉아있는 서유리와 희희낙락하며 미스틸테인의 나무젓가락을 두 개로 나눠주고 있는 이세하의 모습은 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이슬비는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뒤, 제이는 서유리에게 다가가 힘을 내라는 듯 그녀의 어께를 잡아주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서유리에게 제이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다음에 찍어먹으면 되잖아?”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감을 사기 쉬운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의 손을 잘 빌리지 않는 편이었고, 그녀가 누군가의 도움을 청할 땐 대개 상대가 수긍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슬비는 지금까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해도 큰 문제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슬비는 자신이 지금까지 유연한 화술을 갈고닦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평소 유니온 아카데미의 교육방식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던 그녀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매끄러운 사회생활을 위한 화술 교육에 시간을 할당하지 않은 아카데미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휴대용 게임기를 두들기고 있는 이세하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세하는 눈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푸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까다로운 리더가 지금까지 자신의 취미생활을 방해해온 것이 도대체 몇 번인지, 그는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업무 시간에도 잠시만 짬이 나면 기어코 게임기의 전원을 켜고야 마는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작전을 촬영한 동영상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을 편집하고 나니 분량이 너무 적어 방송물로 만들 수가 없더라는 박심현 요원의 이야기는 그로서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세하는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작전 중에 게임을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식 시간에 아지트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신의 자유가 아닌가. 게임에 집중하느라 게임기를 고정하는 손가락이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타 기어코 손을 빠져나가 그녀를 향해 날아가는 게임 콘솔을 맥없이 바라보는 것은 이제 사양이었다. 이세하는 콘솔을 잡는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방해한 것은 다른 방법의 공격이었다.

“이세하.”
“잠깐, 5분만.”

어쩌면 저렇게 타이밍이 안 맞을 수가 있을까. 이세하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슬비에게는 염동력 이외에도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모종의 능력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녀가 이세하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그를 부르는 때는 대체로 손을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다가 집중이 흐트러져 얼마 안 남은 목표를 놓친 것이 몇 번이던가. 용돈을 털어 새로 구매한 DLC의 클리어가 눈앞이건만 저 분홍빛 머리의 소녀는 어째서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것일까.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불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얼마 뒤, 이세하는 이슬비를 오래 기다리게 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스테이지를 마무리하고 게임을 세이브했다. 콘솔이 종료되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슬비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슬비는 자신이 들어왔을 때 본 모습 그대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왜 불러?”
“응?”

이슬비는 그의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다급히 팔짱을 풀며 이세하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세하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그가 게임기를 집어넣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발표 수업에서 볼 법한 사무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하던 그녀였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낀 이세하는 아직도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라도 있나?”

이세하의 실수였다. 검은양 팀에 들어오기 전까지, 가족을 제외하면 인간관계라고 해봐야 동성 친구인 한석봉뿐이었던 그였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외의 것들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에서 본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지뢰를 밟은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세하도 눈앞에서 이슬비의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점점 붉게 물드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강대한 알파퀸의 아들이자, 본인 역시도 촉망받는 클로저인 그도 엎지른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세하는 자신의 정수리를 목표로 두꺼운 영어사전이 날아들고 있다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슬비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고, 지금까지의 몇 번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이세하의 무신경한 행동거지는 지금까지 질리도록 보아왔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도 방금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눈앞에서 꽤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문지르고 있는 이세하를 보자 미안하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릿속의 분노를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사적인 일로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이슬비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이세하를 불렀다.

“이제 정신 차렸어?”
“그래.”

제법 아픈 듯한 제스처를 취하더니만 타격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도 험악한 상황을 몇 번 겪은 클로저 나부랭이니 그럴 만도 했다. ‘평소처럼’을 머릿속에서 되뇌며 이슬비는 이세하에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녀 자신의 현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코믹월드, 라고, 알고 있지?”

결국 이슬비는, 앞으로 몇 년간은 후회할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야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

이세하는 코믹월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 아이템을 증정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코믹월드 행사장에 방문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세하는 이 분홍빛 소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코믹월드의 이미지를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은 좁은 공간 안에 우글거리는 사람과 거기서 기인하는 숨 막히는 공기뿐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이 깐깐하고 고지식한 완벽주의자가 그곳에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이세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이슬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일단 말을 시작하긴 했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도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엔 ‘이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다’라는 식의 예제들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이대로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말재간을 저주하며, 이슬비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세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셜록 홈즈 관련 합동지를 판매하는 부스의 소식을 트위터에서 들었으니 사러 가야겠으며, 자신은 초행길이니 이런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이세하가 자신과 동행해줬으면 한다’라는 것이 이세하가 들은 그녀의 요지였다. 이슬비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녀를 놀리다가 본전도 못 찾고 부들부들 떨며 돌아온 제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열의가 이 정도일 것일 줄이야. 홈즈가 그려진 컵받침에 감히 컵을 올리지도 못하던 만화 속 주인공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세하는 그녀에게도 이런 부류의 장난이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에는 이세하가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세하는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너, 거기 뭐 하는 데인지는 알아?”
“간단하게 조사는 했어. 특정 미디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동인지나 관련 상품을 파는 곳이잖아?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매우 긍정적인 활동이지. 인상 깊었어.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이세하는 머리가 아파졌다. 이 반응을 보건대, 그녀는 ‘동인지’라는 단어를 국어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정의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녀를 코믹월드같은 곳에 데려갔다간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이세하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녀가 택한 동행인이 하필 자신이란 것 역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성인인 제이나 동성인 서유리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 둘에게는 이미 물어봤어. 유리는 코믹월드가 뭔지도 모른다고 했고, 제이 씨는..., 반응이 이상하던데. 그런 건 네가 잘 알 거라며 너를 추천해주셨어.”

이세하의 안에서 제이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이렇게 능글거리니까 결국 아저씨인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을 추천한 뒤에 속으로 제이가 얼마나 웃었을지는 굳이 그를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이 광대놀음을 회피할 방도를 찾기 위해 핑곗거리를 찾아 머릿속을 뒤지던 이세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난 어머니가 반대해서 못 갈 것 같은데. 예전에 한 번 갔을 때도 어머니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

이슬비가 그의 대답에 수긍하는 모습에 이세하는 조용히 안도했다. 그녀가 그의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존경심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그녀가 더는 자신을 귀찮게 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그리고 그의 리더는 그를 이 정도로 놓아줄 정도로 녹록치 않았다.

“그럼 내가 너희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허락을 받을게. 그럼 문제없겠지?”

난데없는 제안에 이세하는 또다시 당황했다.

“네가 우리 어머니 번호는 어떻게 알아?”
“나는 팀의 리더야. 팀원이 부재중이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비상 연락망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오늘은 아무래도 액일이 분명했다. 이세하는 아침으로 돌아가 방에서 농성하는 자신의 모습을 맹렬히 상상했다. 하다못해 쉬는 동안엔 게임을 좀 해야겠다며 검은양 아지트로 향하지 않는 모습이라도. 당연하게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핑곗거리가 떨어진 이세하는 결국 자신의 선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이세하는 자신이 코믹월드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의 행사 때에도 이번 한 번 만이라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몇 주간의 투쟁의 열매를 얻어냈던 이세하인 것이다. 그랬기에 이슬비가 전화 한 통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허락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 이세하의 생각이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저런 유감스러운 이유로 전화가 간다는 것은 이세하로서도 기분이 다소 묘해지는 이야기였으나, 어찌됐건 상황을 정리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그가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그랬기에, 이세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슬비를 에스코트하여 코믹월드에 가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듣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어딜 가요?”
“저번에 세하 네가 갔던데 말이야. 글쎄, 너 오기 조금 전에 슬비가 전화를 해서 너를 좀 빌렸으면 한다지 뭐니? 어쩜 나이도 너랑 동갑인 애가 그렇게 야무진지! 그 애, 정말 괜찮지 않니? 저번에도 내가 이 말 했었나?”

이세하는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의 어머니가 이슬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 정도였단 말인가. 아카데미에 다녀온 서지수가 그에게 이슬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신붓감 운운할 때에 미리 선을 그어놓지 못한 것을 이세하는 후회했다. 물론 그 시점에서 이슬비와 이런 식으로 엮이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터였으니 의미 없는 후회였지만. 결국, 이세하는 다음날 학교에서 다음 주 주말에 코믹월드 행사장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표 예매를 이슬비에게 맡긴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행사 당일, 이세하와의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한 이슬비는 인도를 메운 인파에 경악했다.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강남 사태가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만한 민간인이 한 곳에 모인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그녀가 행렬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에도 그녀의 뒤에서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고, 조끼를 입은 진행요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줄을 정리하느라 부산을 떨어댔다. 이세하의 모습을 찾아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이슬비는 줄을 서있거나 줄의 끝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위상능력자임을 드러내는 분홍빛 머리와 푸른 눈은 어딜 가도 주목의 대상인 것이다. 신강고등학교에 등교한 첫 날 아침,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벌어진 소동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그녀였다. 이런저런 추억에 잠겨있던 이슬비의 어께를 누군가가 툭툭 건드렸다.

“누구신지?”

뒤를 돌아본 이슬비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이세하를 발견했다. 그녀가 아는 이세하는 머리에 무언가를 걸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었던 터라 이슬비는 그를 알아보는데 시간을 꽤 잡아먹어야만 했다. 이슬비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그녀의 손을 대뜸 붙잡고는 그녀를 인적 드문 곳으로 잡아끌었다.

“잠깐, 이세하! 뭐하는 거야!”
“너야말로 뭘 한가롭게 그러고 있는 거야?”
“내가 뭘 잘못한거야?”

이슬비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인가 싶어 자신이 바라보던 인파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행사장에 오려면 무언가 특별한 장식과 같은 것을 챙겨서 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 속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색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이 모자부터 써. 이것도. 이런 데서 머리를 다 드러내고 다니면 어떡해?”

이세하가 사이드백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이슬비는 의아해졌다.

“왜? 위상 능력자가 이런데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는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TV도 안 보냐?”
“TV가 왜?”

이슬비는 최근 일주일간의 뉴스를 곰곰이 떠올려보았지만, 위상 능력자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 이런 건 인터넷에서 더 많이 퍼졌으려나? 우리 팀은 대체로 그렇고, 특히 너랑 서유리말야. 지금 완전 유명 인사거든?”

이슬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뭘 했다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된단 말인가?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세하는 설명을 이어갔다.

“저번에 한기남 아저씨한테 작전 중에 회수한 인형들 대량 납품한 거, 기억 안 나? 그 인형들 전부 어디 갔을 것 같아? 다 사람들이 사 갔다고. 재고가 없어서 난리라더라.”
“...그 많은 게 정말 다 팔렸어?”

자신들의 인형이 제법 인기 있다는 한기남의 이야기는 이슬비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도 잠시간의 붐이라 생각했다. 한 달이 넘게 지나 파괴된 구획의 복구도 제법 진척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 이슬비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야 클로저 옷만 벗으면 일반인하고 구별이 안 되고 서유리는 지나가는 사람 눈 색을 일일이 확인하는 사람이 잘 없으니까 그나마 낫지만, 넌 그러잖아도 그 머리색 때문에 구별이 쉽단 말이야. 아까도 딱 보니 벌써 너 알아본 사람이 있더구만. 그대로 5분만 있었으면, 너, 아마 사람들 틈에 꽉 붙들려서 사인만 하다가 집에 갔을 거다.”

이슬비는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아무래도 세상은 그녀가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 했다. 군말없이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이세하와 마찬가지로 모자를 푹 눌러쓴 이슬비는 손가방에서 예매권을 꺼내 한 장을 이세하에게 건넸다. 이슬비의 손가방을 본 이세하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 가방 좀 큰 거 없었냐?”
“왜?”
“그 합동진지 뭔지 사면 어디에다 넣을 셈인데?”

이슬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세하의 머리가 정말로 아파오기 시작했다. 제이라면 여기서 능글맞게 농담을 하나쯤 던지면서 이슬비를 놀리며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세하는 그런 재주를 따라 할 수 없었다. 결국, 스트레스는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거기서 종이가방 줄 거 아니야?”
“안 줘. 여기가 무슨 서점인 줄 알아? 자기 가방에 다 넣어가야 한다고.”
“뭐? 그럼 어떡해?”

이슬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하고 이세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작전 중에는 그렇게 빠릿빠릿하건만, 이런 데에서 왜 나사가 빠져있는 것인지. 이세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슬비에게 자신의 사이드백을 건네었다.

“가방 빌려줄 테니까, 월요일 날 줘.”

이세하를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던 이슬비는 이세하의 가방을 받아들어 어깨에 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세하는 꾸역꾸역 행사장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을 인원들을 생각하며 약간의 다급함을 느꼈다. 어서 볼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게임을 하고 싶었던 이세하는 그 장소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이슬비의 손을 잡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자, 자. 내가 경험자니까 내 말 들어. 얼른 안 가면 굉장한 꼴을 볼 테니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야 한다니까.”
“아, 알았어.”

묘하게 조용해진 이슬비를 이끌고 행사장 입구로 향하며, 이세하는 도대체 집에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속으로 한탄을 늘어놓았다.

*

행사장 안은 이세하의 예상대로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입구 근처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그나마 상황이 나아진다는 것을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인파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이슬비를 억지로 끌고 행사장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입구 반대편의 벽 쪽에 자리를 잡은 이세하는 이슬비에게 예의 합동지를 판매하는 부스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몰라.”
“뭐?”

이세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혹여나 운 좋게 근처에 부스가 있지 않을까 하고 주변을 대충 둘러보았지만 신통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약이 오른 이세하는 이슬비를 닦달했다.

“야, 이슬비. 트위터에서 부스 소식 들었다면서? 왜 위치를 모르는 거야?”
“어쩌다 누가 지나가는 말투로 써놓은 걸 본 거란 말야. 와서 찾아보면 될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나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어.”

선글라스 너머로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리는 이슬비를 보며 이세하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 복잡한 작전 세부사항도 작전마다 달달 외우듯이 하고 다니는 그녀가 오늘따라 왜 이리 답답하게 구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오늘의 일을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으니 오죽할까. 행사장까지 들어왔으니 이제는 알아서 찾으라고 그녀를 내버려두고 돌아가고픈 욕망이 물밀듯 몰려왔건만, 분노한 어머니를 마주할 생각을 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세하는 이슬비가 보라는 듯 크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발품 팔아야겠다. 들어오면서 사람 봤지? 너, 정말 사람에 떠내려갈 수도 있으니까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와.”
“...알았어.”

이세하는 다시 이슬비의 손을 끌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줄이라도 가져오는 편이 낫지 않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이세하의 머릿속을 잠시 스쳐갔다.

이세하는 평소 자신의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 유감이 없었다. 좀 더 활동적인 타입이라면 키가 크다는 것이 큰 이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가시간에 집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는 편을 선호하는 이세하는 평소에 키 문제 때문에 아쉬울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큰 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재앙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싫어했던 이세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신의 체형에 내심 감사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자신이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행사장에 오는 사람 중에는 덩치 깨나 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인파의 중간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어느 부스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제법 힘든 일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오는 이슬비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더욱 나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학생으로 착각할만한 그녀의 체구로는 인파에 떠밀리지 않고 용케 그를 따라오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인파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던 이세하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끌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하여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붙잡은 손의 주인을 찾던 이세하는 부스 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낯익은 선글라스를 발견한 것이지만.

“아이쿠, 이게 누구야. 이세하 요원님 아니십니까?”
“한기남 아저씨?”

모두가 정신없이 바쁜 재해복구본부에서 특유의 웃음소리를 울리며 넉살 좋게 장사를 하던 그 얼굴을 어찌 잊겠는가. 어쩌다 보니 한기남을 따라 부스 뒤편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 이세하는 이슬비가 자신을 잘 따라왔단 것을 확인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나 크게 벌이시는데요?”

어찌 된 일인지 한기남은 여러 자리를 빌려 판을 크게 벌여놓고 있었다. 물건을 파느라 정신없는 그의 직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본 이세하는 그들이 판매하고 있는 물건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팔고 계신 물건, 설마 우리 팀원들이랑 관련된 거예요?”

“이야, 얼마나 잘 팔리는지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특히 서유리 요원 관련 상품이 아주 굉장하죠. 위험하게 차원종 잔해나 만지는 것보다 훨씬 돈이 되던데요?”

“이런 장사가 그렇게 돈이 된다고요?”

이세하 역시도 인터넷에서 과거 모 동인 서클이 책을 팔아 차를 샀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사람이 그런 사업을 시작하고, 거기에 그 소재가 자신들이라는 사실은 그에게서 현실 감각을 뺏어가기에 충분했다.

“아아, 여기는 그냥 홍보를 겸해서 벌이는 겁니다. 메인은 역시 인터넷이죠. 요원님들께 납품받은 인형으로 시작해서, 이제는 이런 거라던가...”

할 말이 없어진 이세하는 건성으로 그의 말을 받아넘기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기남의 말대로 물건이 많이 팔리기는 하는 것인지, 행사장이 개방된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원래는 상품이 담겨있었을 빈 상자가 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세하가 한기남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 일이 없었는지 이슬비는 매대 뒤편에서 진열된 물건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정식 요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데포르메 되어 그려진 카드 홀더를 집어 들고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피식 웃었다. 설마 우리 학교에도 저런 걸 갖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최근 점심시간에 한석봉과 게임을 하는 그를 향하는 시선이 부쩍 늘어난 것을 떠올린 그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혹시 셜록 홈즈 합동지 파는 부스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저기 우리 리더가 셜록 홈즈 광이거든요.”

이세하의 말을 들은 한기남의 눈빛이 한순간 반짝였다. 이세하는 여기서 또 다른 상품이 탄생하는 것인가, 이세하는 속으로 취미 생활이 만 천하에 공개될 이슬비에게 사과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하, 그러시군요. 그 부스는 아마..., 저기 반대편 G 열에 있을 겁니다. 몇 번 부스였더라...?”
“아, 그건 가서 찾아보면 되겠죠. 고맙습니다. 근데 이거, 뭐 제제당하거나 그러는 거 아니에요? 학생에다가 현직 유니온 요원들인데 이런 식으로 관련 상품을 막 팔아도 되나?”

이세하의 질문을 들은 한기남이 껄껄 웃고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하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저희 쪽에서 다 ‘원만히’ 해결했으니 걱정 마시길. 그럼 수고하십쇼!”

이세하는 한기남의 인사를 뒤로하고 부스를 나서며 이슬비를 불렀다. 그의 호출에 부스에서 나온 이슬비는 묘하게 뚱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의아해하면서도 별말을 하지 않은 채, 이세하는 그녀를 데리고 한기남이 알려준 G열로 향했다.

*

부스의 위치를 알고 나니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기남의 부스에서 나온 뒤 잠시 보였던 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로 어렵사리 구입한 합동지를 신줏단지라도 되는 마냥 가방에 조심조심 집어넣는 이슬비를 보며, 이세하는 집에 가서 게임을 할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를 집에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는듯 했다.

“코스프레를 보고싶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속이 답답해졌다. 부스에서 합동지를 사면서 지인이 셜록 홈즈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이슬비가 부스 옆에서 잡담을 나누던 시간이 어쩐지 길더라니만. 하릴없이 핸드폰 게임을 만지작거리는 대신 그녀를 억지로 끌고 나오는 것이 이세하에게 있어서는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야, 그런 건 나중에 인터넷에 잔뜩 올라온다니까? 뭣 하러 귀찮게 굳이 가서 그런 걸 구경해?”

이세하는 코스프레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 화면 속의 캐릭터는 화면 속에 있는 상태가 최상이며 그 외의 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인 마르시아의 코스프레 사진을 발견한 뒤로 며칠간 후폭풍에 시달린 뒤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지금 이 합동지를 가져가면 소품을 빌려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아.”

이세하는 기가 막혔다. 내가 약속한 것은 책의 구매까지였다, 이것은 계약 위반이다, 빨리 집에 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등등. 이세하는 귀가를 앞당기기 위해 두뇌를 총동원하여 이유를 짜내며 이슬비에게 항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핑곗거리가 떨어진 이세하는 이판사판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 몰라! 코스프레 구경은 혼자 하면 되잖아! 난 집에 간다!”
“이세하.”

이세하를 곤란으로 밀어넣을 때의 목소리였다. 이슬비가 저런 식으로 자신을 부른 뒤에는 십중팔구 실력 행사가 뒤따른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으로 알고있는 그는 황급히 핸드폰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손으로 붙잡았다. 하지만 이세하의 예상과 달리, 이슬비는 염동력을 행사하는 대신 자신이 매고 있는 이세하의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아까 빌려준 가방, 네 물건이 들어있더라?”

이세하는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가방 안에는 그가 평소에 사용하는 휴대용 게임 콘솔과 최근 플레이하던 타이틀이 들어있었다. 빠르게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 가방을 대충 건넨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이슬비의 약속에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터덜터덜 이슬비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이세하와 이슬비가 행사장을 나온 것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이슬비에게서 콘솔을 돌려받아 윗옷 안주머니에 소중히 집어넣은 이세하는 신세를 졌으니 밥이라도 사주겠다는 이슬비의 말에 그녀에 대한 작은 복수로 다소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 이세하는 할 일이 없어지자 이슬비에게 한기남이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세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슬비는 서유리 관련 상품들이 가장 잘 나간다는 부분에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유리같은 애가 인기 있구나.”
“뭐?”

별 생각 없이 이야기하던 이세하는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이슬비의 뜬금없는 반응에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이세하가 보던 그의 리더의 모습과는 신강고와 유니온 본부만큼이나 거리가 먼 반응이었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가 평소에 생각해온 이슬비의 이미지였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찾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이세하는 한기남의 부스에서 본 이슬비의 뚱한 표정을 떠올렸다.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판매대의 상품 말이야. 사람들이 유리가 그려진 물건은 두 개, 세 개씩 집어가던데.”

귀찮다. 그것이 이세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괴롭혀왔던 그녀였다. 오랜만에 클로저 일에서 해방된 만큼 조금 나사가 풀린 정도는 그도 이해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식사 중에도 이렇게 귀찮게 구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적당히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기로 마음먹은 이세하는 짐짓 눈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긴 하지. 그런데, 막상 걔랑 하루만 같이 있어 보면 절반은 넘게 도망갈 걸? 걔 성격이 어지간해야 사람이 버텨내지 않겠어?”

이세하의 농담에 이슬비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웨이트리스가 가져다준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이슬비가 한숨을 쉬었다. 평소 팀원들의 엉뚱한 행동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무거운 한숨이었다. 이상하다. 이러는 애가 아니었는데. 이세하는 자신이 또다시 지뢰를 밟은 것이 아닌지 불안해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도 유리 정도면 어딜 가도 통할만 한 애잖아? 예쁘지, 붙임성 좋지... 이것저것 말이야. 인기가 있을 만도...”
“너무 열등감 느끼는 거 아냐? 너도 학교에서 꽤 인기 있는 편인데.”

이세하가 이슬비의 말을 잘랐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남학생들이 여자 이야기를 할 때 서유리만큼이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슬비의 이름이었으니까. 평소 그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쓸데없이 떠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놓은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뭐?”
“진짜야. 다들 귀엽다고 난린데. 인형 같다고 말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슬비는 말없이 시선을 내린 채 물수건을 쥔 손가락을 놀렸다. 가늘고 모양도 잘 잡힌 손가락이었다. 평소에 큼직한 단검을 쥔 모습만을 보다가 이런 모습을 접하니 제법 색다르다는 것이 이세하의 감상이었다. 시선을 슬쩍 내려 자신의 손과 그녀의 손을 비교해보니 그 차이가 제법 크다. 거대한 건 블레이드를 쥐고 휘두르는 데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의 손등은 핏줄이 드러나고 굴곡이 심해져 제법 험하게 변한 상태였다. 반면에 염동력을 이용한 투척 공격 외에는 무기를 사용할 일이 많지 않은 그녀는 그 나잇대 소녀의 매끈한 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이슬비는 손 자체의 크기도 차이가 제법 컸다. 그가 그대로 감싸 쥘 수 있을 법한 작은 손과 얇은 손목, 그리고 좁은 어깨. 지나가듯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을 뿐이었건만, 직접 비교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이세하는 그녀가 정말로 인형처럼 느껴졌다.

식사가 나오고 그릇이 모두 빌 때까지도 이슬비는 말없이 식기를 놀릴 뿐이었다. 이세하는  드디어 찾아온 평온에 쾌재를 불렀다. 그녀의 일변한 태도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반나절 간의 고생 끝에 찾아온 휴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식사를 마친 이세하와 이슬비는 특별한 일 없이 귀갓길에 올랐다. 신강고 근처의 역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세하는 이슬비의 오늘 하루 동안의 언동을 생각했다. 이상하게 수동적이다가도 묘한 데서 억지를 부리던 행사장에서의 모습. 그리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던 식사 중의 대화. 이세하는 그녀가 자신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슬비는 오늘 하루 계속해서 그래왔듯 그보다 한 걸음 정도 뒤에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평소 작전 중에 팀원들을 이끌던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곁눈질로 뒤를 보면 평소 그녀의 태도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이슬비의 작은 체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어깨높이에 머무르는 작은 키에 위태롭고 가냘프게만 보이는 마른 체구. 클로저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 촉망받는 유소년 클로저 팀 검은양의 리더, 그리고 차원종의 대규모 습격에서 강남을 구한 영웅이라는 칭호는 이세하의 눈에 들어오는 그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그 작은 어깨로 얼마만큼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을까. 그러한 기대감의 무게를, 그리고 그 무게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세하와 이슬비의 집 사이에는 조금 거리가 있다. 둘이 각자의 길로 향해야 할 갈림길에 도달하자 이슬비는 이세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의 집을 향해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세하는 그녀가 고아임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가면 그녀는 아무도 없는 집의 불을 켜고 자신뿐이 먹지 않을 식사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아마도 그녀가 좋아하는 TV 드라마를 조금 보다가 역시 홀로 침대에 들어가 잠들 것이고, 아침에 일어난 그녀가 집을 떠나면 그 집은 텅 빌 것이다. 갑작스레 쓸쓸해 보이는 이슬비의 뒷모습에 이세하의 마음속에서 기분 나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슬비가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어머니의 얼굴을 그렇게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던지라, 돌아가면 결국 혼자인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는 혼란스러웠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세하는 아직 제법 여유가 있음을 확인하고 이슬비의 뒤를 따라갔다.

“뭐야, 이세하.”

이세하의 발걸음을 들은 이슬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세하는 짐짓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 리더님이 혼자 가는게 맘에 안 들어서.”
“게임 세계를 지키러 가는 쪽이 급한 거 아니었어?”

이슬비가 이세하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잘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변명 삼아 멋쩍게 대꾸했다.

“가끔 이런 기분도 들 때도 있는 거야.”

결국 이세하는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왔던 길을 제법 돌아와야만 했기에 이미 해가 질 무렵이 된 뒤였다. 얼마 뒤에 집으로 돌아올 어머니의 몫까지 식사를 준비하고, 끼니를 때운 뒤 그 뒷정리까지 마무리하자 그가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남지 않았다. 잠을 줄여볼까 고민하던 이세하는 당장 다음날에 검은양 팀의 회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졸린 눈으로 아지트에 들어가는 그를 덮칠 이슬비의 잔소리를 떠올린 그는 투덜거리며 게임의 클리어를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그 뒤로는 별다른 일 없는 일주일이 흘러갔다. 이슬비는 이세하의 기억이 마치 꿈이었기라도 한 듯이 평소의 깐깐한 리더로 돌아왔고, 강남 지역의 복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작전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이세하는 검은양 아지트로 먼저 돌아와 게임 콘솔의 전원을 켰다. 반 시간쯤 뒤, 이슬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평소의 조용한 입실과는 정반대인 모습에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본 이세하는 바들바들 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푸른 눈을 마주 보게 되었다.

“이세하.”

이세하는 안 좋은 예감을 느끼고는 머릿속을 다급히 뒤적였다. 최근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일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엔 작전 중에도, 또 회의 중에도 게임을 한 적이 없었고, 전날 밤새 게임을 하고는 학교에서 잠을 몰아 자다가 시뻘게진 눈으로 아지트에 들어오는 횟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어있었다. 그렇다면 이 예감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슬비는 곧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그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이거, 네가 얘기한 거, 맞지?”

이슬비가 보여준 트위터에는 한기남이 새롭게 발매한 검은양 관련 굿즈의 라인업이 리트윗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팀의 리더인 이슬비와 셜록 홈즈를 크로스오버한 상품이었다. 셜록 홈즈의 트레이드마크인 사냥 모자와 망토 달린 코트를 착용하고 돋보기를 들고 있는 이슬비의 그림과 그녀의 취미 운운하는 홍보 글귀를 발견한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 뭐라고해야 되나... 그... 미안...?”

이세하는 자신을 향해 무엇이 날아올지를 궁금해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충격에 대비하며 이세하는 내심 웃었다.

어찌됐건 그녀는, 그가 알고 있는 이슬비였다.

꿈에서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꿈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의 지각을 전제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지각하는 ‘나’가 사라진다면 세계는 더는 존속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꿈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꾸고 싶지 않은, 그래서 끝내고 싶은 꿈속에 갇혀버렸다면, 높은 곳을 찾아가 뛰어내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세하는 최근 매일 밤 꿈을 꾼다.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 그가 매일 아침 컬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이야기를. 꿈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발현된 위상력을 저주하던 시절, 이세하는 그러한 꿈을 셀 수도 없을 만큼 꾸곤 했다.

 

하지만 그가 최근 꾸는 꿈은 과거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같은 꿈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점이 그랬다. 매일 밤,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면 그는 꿈속의 이세하가 되어 꿈속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그리고 꿈속의 평범한 이세하가 일과를 마치고 잠에 빠지면 그는 다시 클로저 이세하가 되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세하는 그 꿈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고 하는 쪽이 옳았다. 꿈속에서 그는 친구가 많은 편이었고, 점심시간이면 그들과 함께 축구공을 차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완벽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꿈속의 이세하는 과거의 그가 늘 동경해왔던 모습이었다. 두 사람분의 인생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피로해질 만도 했건만, 이세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이세하는 자기 전의 게임 플레이를 조금 줄이고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오늘의 꿈은 어떨까, 하고 기대하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꿈속에서 검은 머리의 이슬비를 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이세하, 듣고 있어?”

 

눈을 감은 채 상념에 빠져있던 이세하를 익숙한 목소리가 현실로 건져 올렸다. 눈을 뜬 이세하는 낯선 곳에서 잠을 청했던 여행자처럼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떠올려야만 했다. 이곳은 검은양 사무실. 시간은 아침. 서유리와 미스틸테인은 경계근무 중. 그와 제이는 이슬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일과 시작 전에 그녀를 따라 이곳에 왔다. 머리에 금세 떠오른 정보들과 달리 현실감은 조금 늦게 부상했다. 부유하는 현실감에 기대어 정신을 차리자,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한창 오늘의 일정에 관해 설명하던 이슬비가 그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딴생각을 좀 하느라.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의 반응을 본 이슬비는 여보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동생, 밤샘게임은 좀 줄이라고 했잖아.”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이가 볼펜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이슬비가 제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보다 제이 씨, 앞에 놓인 신문의 십자말풀이가 점점 완성되어가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이겠죠?”

 

아닌 게 아니라, 제이의 앞에 펼쳐진 신문의 십자말풀이는 어느새 완성까지 세 문제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30분쯤 전, 그를 처음 볼 때만 해도 그것이 새 신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세하는 그가 어느 틈에 그 칸을 다 채운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이는 비뚤어진 선글라스를 바로잡으며 그녀에게 변명했다.

 

“윽, 아니, 대장. 그게, 빈칸이 어서 나를 채워달라고 유혹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제이 씨. 저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슬비와 제이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자 이세하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둘의 대화가 이세하의 귀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반대편 귀로 흘러나갔다. 제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슬비의 분홍빛 머리에 꿈속 그녀의 검은 머리가 겹쳐 보였다. 이세하는 괜스레 손을 들어 잠을 깨우는 양 얼굴을 비볐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었다. 이슬비가 속사포처럼 내뱉는 지적사항에 난타당하던 제이가 테이블 아래로 이세하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시야를 가리는 손을 내리고 제이 쪽을 보려던 이세하는 어느 틈엔가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제이를 향해 서 있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그간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이는 이슬비의 눈에 띄지 않게 손을 움직여 사무실의 출입문을 가리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와.’

 

그녀가 늘어놓는 잔소리에 점점 매몰되어가는 제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세하는 그에게 손을 들어 감사를 표하고는 검은양 사무실을 슬쩍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

 

그늘진 비상계단에서 받는 바람은 시원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멍하니 난간에 기대어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이세하의 귀로 이런저런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운행 중인 버스 소리, 공사장에서 울려 퍼지는 중장비의 소리, 등교 중인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꺅꺅거리는 소리. 여느 때였다면 자신의 손으로 지켜낸 강남이 다시금 생기를 찾아가는 모습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세하는 그로부터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과연 이것이 현실일까. 스스로 질문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세하야.”

 

어느새 그를 따라 나온 이슬비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의 그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왜 나왔어. 금방 들어갈 텐데.”

 

이세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녀의 푸른 눈에 암갈색 빛이 겹쳐 보이는 순간, 그의 세상은 발아래부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너, 요즘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이세하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왔다. 평소에도 그녀가 너무 많은 걱정을 안고 산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마저 걱정하려 드는 그녀가 미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겨주고야 만 자신도.

 

“모르겠어.”

 

이슬비가 힘없이 말했다. 이세하는 당장 돌아서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기는 괜찮다고, 그냥 묘한 꿈 때문에 잠시 이상한 기분이 되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세하는 그녀를 마주 보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네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럴지도 몰라.”

 

이세하의 입에서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실수였다. 등 뒤에서 이슬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로 말을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세하는 억지로 입을 움직였다.

 

“슬비야. 혹시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차원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 안 해봤어?”

 

그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이슬비는 뚝뚝 끊어진 답을 내놓았다.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대답에, 그리고 그 대답 사이에 무겁게 걸친 휴지(休止)에 개미처럼 짓눌려 뭉개졌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상황에서도 앞을 보고 계속해서 달려온 그녀는 어떤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음, 해봤지. 아마 바이올린을 계속 배우지 않았을까. 그땐 콩쿠르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 어머니께서 소리가 참 곱다며 칭찬해주시는 게 그렇게 기뻤는데.”

 

그녀의 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와 몸통, 그리고 사지가 모두 멀쩡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녀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말에는 생기가 없었다.

 

바이올린이 특기인 이슬비. 처음 들었을 때는 특기 난에 게임을 적은 자신과의 차이에 놀란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들으니 새삼 무거운 이야기였다. 그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존재인 그로서는, 무엇을 하더라도 그녀의 짐을 덜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세하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

 

수많은 위로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하지만 이세하는 그중 자신이 꺼낼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

 

그날 밤, 이세하는 학교의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검은 머리의 이슬비를 보았다. 전후 관계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그녀가 모 콩쿠르에서 입상한 기념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쪽 세상의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행복한 그녀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니 그 역시도 행복했다.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와 가족과 포옹하는 그녀에게서는 빛이 흘러넘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세하는 어두운 객석에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검은양 팀의 리더인 그녀를 볼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드러난 것 같아 서글퍼졌다.

 

무대가 끝난 뒤 이슬비는 가족들과 함께 학교를 나서는 듯했다. 왁자지껄 떠들며 강당을 나서는 인파 사이에 끼인 채, 이세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이세하는 그것이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를 불러볼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이쪽의 이슬비는 이세하를 알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와 그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인 검은양 팀은 그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세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애초에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그녀가 그를 만나게 된 세상 쪽이,

 

더욱 비정상인 것이 당연했다.

 

이세하는 행복으로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

 

이세하는 며칠간 계속해서 고민했다. 본디 그는 문제에 당당히 마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넘기 어려운 벽이 앞을 가로막으면 그 벽을 넘을 궁리를 하기보다는 우회로를 찾거나 그 길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그의 행동양식이었다. 그렇기에 20년 가까이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한 주제를 이토록 길게 고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세하는 마음을 굳혔다.

 

며칠 뒤, 늦은 저녁, 이세하는 검은양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옥상에서 이슬비를 기다렸다. 빡빡한 팀 리더의 업무량에 더해 관리요원인 김유정의 일까지 돕고 있었으니 그녀가 퇴근이 늦는 것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몸을 혹사하는 그녀에게 걱정 섞인 핀잔을 건네곤 했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늦은 퇴근이 반갑게 느껴졌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보름달이 걸려있었다. 신호등처럼 붉은 기운이 도는 달이었다. 그런 달이 그에게는 세상이 보내는 경고로 보였다. 그곳에서 정지. 건너지 마시오. 이세하는 그 경고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왜 불렀어?”

 

일이 마무리되었는지 옥상으로 올라온 이슬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꺼내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와글와글 아우성쳤다. 혼란스러워진 그는 엉망진창이 된 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슬비야, 만약에...”

 

그의 목이 턱 막혀왔다. 그가 감히 꺼내기엔 너무도 무거운 이야기였다. 답답해진 이세하는 넥타이를 대충 끌러 내던졌다. 이세하는 속으로 되뇌었다. 되돌리기엔 늦었어.

 

“만약에, 돌아가신 부모님이랑 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도한 질문이 이슬비를 후려쳤다.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흐릿한 달빛만이 유일한 광원인 옥상에서도 이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이슬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장난치는 거야?”
“진지하게 들어줘.”

 

말도 안 되는 비교란 것은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연인도 뭣도 아니다. 그냥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의 팀원일 뿐이었다. 그 둘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헛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냥 ‘예.’, ‘아니오.’로 대답만 해줘. 내가 사라지고 대신 너희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너는 그렇게 할 거야?”

 

비겁한 질문이었다. 그 아닌 누구라도, 그리고 몇 번을 묻더라도 그녀는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쭉 그녀를 보아온 이세하는 그 사실을 자기 일인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세하가 들으려고 하던 것은 그녀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고마워.”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대답하기 전의 침묵이었다. 그래서 이세하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 그대로 옥상 아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이슬비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세하는 몸에 둘러쳐진 위상력을 의식적으로 해제했다.

 

그녀에게 남긴 감사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세하는 진심으로 이슬비에게 감사했다. 목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흑백사진 같았던 그의 삶에 색채를 되찾아주었다.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던 과거에서 그를 자유롭게 했다. 새로운 목표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중한 가족과 자신을 저울질해주었다. 이세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잠에 들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이슬비를 멀리서 조용히 지켜볼 것이다. 아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너를 가까이에서 봤으면. 이세하의 머릿속에 아쉬움이 스쳐 갔다. 그것도 잠시, 충격과 함께 이세하는 의식을 잃었다.

 

*

 

눈을 뜬 이세하의 시야에 낯익은 천장이 들어왔다. 그가 일과 뒤에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방이었다. 아침이 되었는지 창밖에서 햇빛이 들어와 시야는 밝았다. 이불 아래로 손발을 움직여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몸을 일으켰다.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이래서는 자신이 지금 어느 쪽 세상에 있는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는 생각에 이세하는 집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고 두 발로 서려던 이세하는 발아래에서 딱딱한 바닥 대신 다른 것이 느껴지자 당황했다.

 

“크헉.”
“아저씨?”
“이, 일어났어, 동생?”

 

예상 밖의 목소리에 시선을 내린 이세하는 그에게 허리를 밟힌 채 몸을 떠는 제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다시 침대에 앉았다. 아무래도 바닥에 누워 있었던듯 했다.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이세하의 목소리가 음침해졌다. 그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일이 그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제법 아프다는 듯 허리를 쿵쿵 때리며 자리에 앉은 제이는 그에게 한숨을 쉬어보였다.

 

“왜겠어? 동생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서 그런 거잖아.”
“제가 왜 살아있는 거죠.”

 

이세하의 질문에 제이는 이세하의 얼굴에 시선을 향했다. 제이는 평소의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채였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이세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듯한 그 눈빛에 이세하는 그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네?”

 

이세하는 그의 질문에 놀라 침대 위에서 몸을 튀겼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 역시도 예상 내였던 것인지, 제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동생은 꿈에 간섭하는 차원종의 영향을 받았어.”

 

*

 

차원종이 위험한 것은 단순히 힘이 세고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기괴한 생물들 중 적지 않은 종류는 인간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차원종의 정신간섭은 그러한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들을 잔인하게 괴롭혔다. 제이는 그 어떤 공격에도 굳건할 것 같았던 이들이 이러한 공격에 너무도 간단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이세하가 영향을 받은 차원종 역시도 그러한 개체 중 하나였다. 행복한 꿈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목표물을 피폐하게 만드는 존재. 하지만 그뿐이었다.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가벼운 우울증과 비슷한 증세로 일시적으로 몸져눕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희생자를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아예 정신을 파괴하여 폐인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던 다른 차원종에 비하면 무해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제이는 이세하의 상태를 파악했어도 거기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상태에 대해 팀의 리더인 이슬비에게 이야기하기는 했다. 이세하가 정 힘들어한다면 그 건을 핑계로 그간 고생한 보상을 겸해 며칠 정도 휴가를 주기라도 하면 그만이라는 첨언과 함께. 며칠 전, 이세하를 비상계단으로 내보낸 뒤 제이가 이슬비와 단둘이 남았을 때가 그때였다.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세하가 그가 생각한 만큼 정신이 굳건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세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간의 그의 상태를 확인한 결과를 바탕으로 제이를 대기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슬비였다. 제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미안해, 동생. 괜한 고생을 시켜서. 대장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했어.”

 

이야기를 마친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에게 사과했다. 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이세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다시 앉혀놓았다.

 

“제가 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건 맞지. 차원종에게 당했으니까. 그런데, 동생?”
“왜요?”

 

그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빛이 음흉해졌다. 이성 문제로 이세하를 놀릴 때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꿈에 뭐가 나왔어?”
“...그걸 꼭 말해야 돼요?”

 

평소 그에게 여러 번 당해온 전적이 있는 이세하는 절대로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차원종의 영향하에 있었다고는 해도 자신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세하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의 반응을 본 제이는 묘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아냐, 안 해도 돼. 그보다, 슬슬 긴장하는 게 좋지 않겠어?”
“왜요?”
“곧 대장이 네 식사를 들고 들이닥칠 거거든.”

 

제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발칵 열렸다. 이슬비가 그가 곤란할 때를 노리는 데에는 귀신임을 익히 알고 있던 그였지만, 이쯤 되면 뭔가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 동생. 대장도.”

 

이슬비와 교대하듯 방을 나서며 제이가 그를 놀리듯 말했다. 방으로 들어온 이슬비는 쿵쿵 소리가 날 법한 발걸음으로 그의 방을 가로질러 책상 위에 식사를 올린 쟁반을 내려놓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세하, 너...!”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려던 이세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이슬비는 그런 그의 고개를 억지로 숙이게 하고는 그의 어깨를 투닥투닥 때려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세하는 어깨를 두드리는 그녀의 주먹 한 대 한 대가 온 힘을 담은 차원종의 일격보다 아프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시끄러. 넌, 늘, 제멋대로야!”
“내가 잘못했어.”
“구로에서도, 강남에서도, 늘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윽.”

 

그녀가 과거의 일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이세하는 입이 턱 막혀버렸다. 이슬비가 한 마디씩 쏘아 보내는 원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상능력자도 막아낼 수 없는 화살이 되어 그를 꿰뚫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주먹을 얻어맞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제이 씨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어...”

 

그의 어깨를 때리던 손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탁해졌다. 이세하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제에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니,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바보야.”
“정말로, 미안해.”

 

*

 

그 뒤로도 한동안 이슬비는 그를 때리면서 그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았다. 이슬비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자 기운이 쭉 빠져버린 이세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녀가 가져온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분이 금세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아침 식사는 많이 식어있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이세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정말 무슨 꿈을 꾼 거야?”

 

맙소사. 이세하는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방문 앞에서 그와 제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이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 말 안하면 안 될까?”
“응. 안 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피해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세하는 생각을 바꿨다. 그녀는 그 질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답을 들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꿈에 대해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의 말에 이슬비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이 소녀에게 이길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신강고등학교 2학년 서유리를 아는 이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한 가지 의견은, 그녀가 일반적인 남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인간적으로 결격사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외모는 TV에서만 볼 수 있는 소위 아이돌들의 그것과도 비견해도 손색이 없었다. 거기에 모나지 않고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격이기까지 했으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고 할만했다. 하지만 남자나 다름없는 그녀의 평소 행동거지를 본 사람들은 대개 마음속에서 그녀의 등급을 신경 쓰이는 이성에서 좋은 친구로 격하시키기 마련이었다.

 

서유리 본인 역시도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자신은 머리도 나쁘고, 분위기도 잘 못 읽는다. 소꿉친구인 우정미도 그녀를 종종 아저씨 같다고 이야기할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남성들이란 으레 자신이 지켜주고 싶어지는, 그러니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땀내-그녀의 경우는 호구 특유의 냄새도-나는 운동계에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억척스러운 면이 있는 자신보다는, 클로저 활동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팀 리더 이슬비나 강남사태 당시 만난 오세린이라는 선배가 남성들에게 더 인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서유리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대담한 시도를 한 것은 클로저 정식 요원복을 지급받는 과정에서였다. 보급품 품목을 대강 훑어보던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짙은 커피색 스타킹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얼마 전 놀러 간 이슬비의 집에서 본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었다. 빠릿빠릿한 일처리가 자랑인, 소위 말하는 ‘유능한 사무원’ 스타일.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녀가 양복과 함께 신는 스타킹이었다. 한 번 기억 속에 박혀버린 이미지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맴돌았다. 서유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요원복을 수령해왔다.

 

그날의 복구 작업 지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서유리는 자신이 수령한 요원복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다. 처음 신어보는 스타킹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이게... 나야?”

 

평소의 다소 흐트러져 보이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여성이 한 명 서있었다. 꼭 맞는 검은 수트에 단정한 넥타이와 포인트를 잡아주는 푸른 스커트. 거기에 처음 신는 스타킹에 꼭 어울리는 롱부츠는 그녀의 긴 다리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잠시 넋을 놓고 거울을 보던 서유리는 이 옷을 수령한 것을 자찬하며 들떠 있다가 잠을 청했다.

 

딱히 그녀의 일상이 그날부터 마술처럼 180도 반전한 것은 아니었다. 학우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좋은 친구’나 ‘착한 누나’등에 가까웠고, 그녀의 행동거지 역시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원복을 입고 클로저 활동을 하고 있으면 서유리는 자신과 예의 기억 속 사무원을 어느 정도 동일시할 수 있었다. 복구 작업은 순조로웠고, 이전 강남 사태 때는 물론이고 학교나 구로역에서 차원종과 싸우던 때와 비교해도 상황은 점점 호전되고 있어 위험한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을 쉴 때면, 뿌듯한 기분이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

 

“유리야, 잠깐만.”

 

이슬비가 작전 종료 후 땀을 닦아내던 서유리를 잠시 불러 세운 것은 그런 나날 중 하루였다. 그녀는 구슬땀이 맺힌 서유리의 이마를 잠시 바라보았다.

 

“응? 왜, 슬비야?”

“몸이 안 좋거나, 피곤하거나 하진 않아? 요즘 날씨도 점점 더워지는데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은 어느덧 초여름이라고 해도 좋을 때가 되어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차원종 잔당을 처리하다 보면 몸은 어느새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고, 그런 상태로 퇴근 시간이 되어갈 때 즈음이면 샤워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비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징후를 느낀 적은 없었다.

 

“괜찮은데? 나, 검도할 땐 이거보다 훨씬 힘들었어. 몸만 움직여도 지치는데 검도부는 완전 찜통이고, 거기에 호구 생각만 하면... 아휴...”

“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이슬비는 서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리 쪽을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미간을 약간 찌푸린 것이, 뭔가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유리야, 그, 옷 말인데...”
“응? 이거 왜?”
“그 요원복, 덥지 않아? 땀이 찬다던가...”

 

서유리는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옷이 뭐 어때서? 서유리는 의문의 시선으로 이슬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다리 쪽을 향해있었다.

 

“옷? 괜찮은데? 왜 그러는데?”
“음... 아냐. 괜찮다면 됐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봐.”

 

서유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잠시간의 생각 끝에 한 생각은 역시 자신은 이런 고민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는 결론을 내린 뒤 그녀는 웃으며 이슬비를 껴안았다. 이슬비의 얼굴은 금세 당혹으로 물들었다.

 

“에이, 우리 슬비는 걱정도 많아! 뭔진 모르겠지만 괜찮아, 괜찮아!”
“아니, 잠깐. 유리야!”

 

이슬비의 반응을 보면서 깔깔 웃으며 서유리는 생각했다. 별 문제 없을 거야.

 

*

 

하지만 며칠 뒤, 서유리의 생각은 틀렸음이 드러났다. 그녀에게 있어서 최악의 방식으로. 그 시작을 알린 것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서유리를 맞아준 그녀의 동생이었다. 부츠를 벗고 집안에 들어온 그녀를 반기러 나온 동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나, 냄새나!”
“응?”

 

서유리는 당황했다. 작전중에 묻은 차원종의 피가 아직 배어있는 걸까? 서유리는 동생처럼 코를 킁킁대보았지만,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라 이미 적응이 된 것인지 별다른 냄새를 맡지는 못했다. 차원종의 체액이 일반인에게 위험할 수 있다며, 일과 종료 후 장비수입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파하던 이슬비가 생각난 서유리는 재빨리 몸을 둘러보았지만 신통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서유리는 동생의 어께를 붙잡고 직접 질문했다.

 

“무슨 냄새? 이상한 비린내 같은 게 나니? 역한 냄새야?”

 

동생은 고개를 젓고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맡은 냄새를 표현할 단어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뒤, 동생은 이거다, 싶은 단어가 생각난 듯 얼굴을 확 펴고는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빠 발 냄새랑 똑같은 냄새 나!”

 

*

 

“그래서, 나한테 약을 받았으면 한다?”

 

제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평소 약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던 그녀가 이런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리라곤 제이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제이는 손가락 사이로 서유리를 훑어보았지만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일 뿐, 그로서는 어디가 문제인지, 무엇이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옷을 제외하고는.

 

“그러고 보니 유리야, 그 옷은 오랜만이다?”

 

서유리가 입고 있는 옷은 한 달 넘게 계속해서 봐와서 익숙해진 정식 요원복이 아닌, 처음에 지급받은 검은양 팀의 요원복이었다. 서유리가 정식 요원복을 썩 맘에 들어 한다는 것을 그간 익히 봐와서 알고 있었던 제이는 그녀가 왜 옷을 바꿔 입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 저어, 그게 있잖아요, 아저씨...”
“오빠라니까.”

 

제이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 사람 말 안 듣는 아가씨는 처음 볼 때부터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굳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마저도 ‘아저씨’라는 호칭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자신이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일까, 하고 제이는 잠시 울적해졌다.

 

“아니, 어쨌든 그건 됐고. 무슨 약이 필요한건데? 어디 다쳤어? 자, 자. 이 오빠한테 말해 보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이는 서유리가 답답해진 제이가 캐물었지만 서유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진 제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서유리를 달래는 작업을 시작했다. 몇 분 뒤, 모기 목소리로 대답하는 서유리의 요구를 들은 제이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만지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좀약을 달라고?”
“아저씨, 목소리가 크잖아요!”

 

서유리가 빽 고함을 질렀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재해복구 본부의 한가운데였고, 시끄러운 장비 가동음을 뚫고 우렁차게 울려퍼진 서유리의 고함소리는 주변에서 쉬고있던 특경대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서유리는 얼굴에만 때이른 가을이 온 양 다시금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 참... 뭐라 해야되나...”

 

제이는 난감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위로할 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건만, 이런 식으로 개인의, 그것도 다 큰 여성의 치부를 듣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럴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가. 제이로서는 자신은 받아본 적도 없는 압박 면접이 이런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눈앞에 서있는 서유리의 어께가 조금씩 떨리며 들썩거리는 것이, 우물쭈물하다가는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제이를 더욱 압박해왔다.

 

“일단, 지금은, 그 뭐냐... 약, 없으니까... 끝나고 나면 우리 집으로 가자. 응? 진정하고, 유리야. 제발 부탁이다.”

 

이미 부끄러움이 임계점을 넘었는지 서유리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런 서유리의 양 어께를 붙들고 이야기하는 제이의 뒤통수를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난타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 한 이 꼴을 대장이 봤으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잡생각이 제이의 머리를 잠시 스쳤다.

 

*

 

“이거 참. 좁고 더러워서 미안하구만. 일단 들어와.”

 

제이의 집은 좁은 옥탑방이다. 제이는 전쟁 기간 동안 군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기도 했고 실험 때문에 연구소에서 살았던 적도 있어 나름 깔끔한 성격이었지만, 최근 바쁘기도 했고 꿈자리도 사나워 자기 전에 술 한 잔이 습관이 된 탓에 방 여기저기엔 맥주 캔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발로 빈 캔을 밀어내 대충 앉을 자리를 만들고 서유리를 앉힌 제이는 침대 밑에서 구급상자를 잔뜩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게 어디로 갔지...?”
“...없는 거 아니에요?”

 

등 뒤에 서유리가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우울한 모습으로 앉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제이는 자신이 아무렇게나 뒹굴던 집이 가시방석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약상자를 평소에 좀 정리해놓을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제이를 짓눌렀다. 워낙 독하다 보니 자신은 잘 쓰지 않는 약들이라고 구비만 해놓고 어딘가에 처박아놓은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십여분이 지나고 방이 수많은 약병으로 약국을 방불케하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나서야 제이는 겨우 무좀약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유리야! 찾았어!”

 

어울리지도 않는 호들갑을 떨며 제이가 약을 치켜들고 뒤를 돌아보자,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묻은 채로 앉아있던 서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거, 예요?”
“그래. 이건 먹는 약이고 이건 바르는 약이야. 일단 둘다 줄 테니 일단 챙겨. 바르는 약부터 써봐.”

 

제이의 말을 들은 서유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이거 바르면 바로 나아요? 곧바로?”
“아니, 이거 작전용 회복약같은거 아니니까...”
“고마워요, 오빠! 가서 이거 발라볼께요! 동생들 밥 때문에 저 빨리 가볼게요! 내일 봬요!”

 

당황한 제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서유리는 문을 열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계단을 급히 내려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내일 아침에 주인집에게 한 소리를 들을 듯 했다. 지금의 모습을 보건대, 아마 서유리는 저 약의 효과를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짜 싸움은 내일부터이리라. 제이는 머리를 긁으며 책장을 뒤적였다.

 

“여기 어디에 신문 스크랩을 해둔 게 있을 텐데...”

 

*

 

다음날, 꼼꼼하게 약을 바르고 잤건만-당연하게도-차도는 없었고, 클로저 일이 비번이었기에 서유리는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채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저씨... 좋은 약은 자기가 다 먹고는...”

 

자신에게 자신만만하게 약을 내주던 제이의 얼굴을 떠올린 서유리는 짜증이 치밀었다. 서유리가 투덜거리며 약을 꺼내던 차에 벨이 울렸다. 약을 책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커다란 가방을 맨 제이가 서있었다.

 

“안녕.”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제이를 보자 서유리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전날 밤에 기분좋게 들어와 기대에 부풀어 약을 바르고 잤던 자신을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짜증이 치밀었다.

 

“뭐, 유정 씨한테 물어봤지. 너희 집 찾기 정말 힘들더라.”

 

한밤중에 전화해 서유리의 집을 묻자 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목소리가 차가워지던 김유정의 반응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제이는 잠시 오한을 느끼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다 뭐고요?”
“별건 아니고. 도와주는 김에 확실히 도와주려고.”

 

제이가 아래, 정확히는 서유리의 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양말을 신은 채였다. 제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서유리의 눈이 자신의 발에 닿자 서유리는 발칵 화를 냈다.

 

“아저씨가 안 도와주셔도 되요!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요! 약도 효과도 없던데요, 뭐!”

 

제이는 헛웃음을 쳤다. 어쩌면 이 아가씨는 어제 예상이랑 한 치도 다르지 않을까.

 

“아니, 어제도 말했지만 그 약은 그냥 평범하게 오랫동안 써야 되는 약인데. 하루 만에 나을 리가 없잖니, 유리야.”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했어. 네가 안 들어서 그렇지.”
“아휴, 안 했어요!”
“했어.”

 

씩씩대는 서유리를 보고 있던 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현관으로 밀고 들어왔다. 서유리는 그런 그를 낑낑대며 막아보려 했으나, 위상능력자이긴 하나 어찌됐건 여성에 고등학생인 서유리가 단순한 완력 싸움에서 그를 막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서유리의 방을 발견한 제이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움찔했다.

 

“아니, 역시 이건 좀 그런가. 어디 앉을 데 없나?”
“식탁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오, 그렇네. 땡큐.”

 

제이가 넉살좋게 식탁 의자에 앉자 맞은편 의자에 서유리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세게 앉았다. 자기가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 그리 유복한 환경도 아니었고, 그런 자랑할 것 없는 모습을 팀원에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니 서유리는 우울해졌다.

 

“가족들은? 동생들은 아직 학교인가?”
“친구랑 놀러갔어요. 저녁밥 먹을 때가 되면 오겠죠.”
“그렇게 시간이 넉넉하진 않구만. 그럼 빨리 본론만 얘기하고 가지.”

 

본론이라는 이야기에 서유리가 다시 도끼눈을 하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배신감을 떠올리면 당장 식탁 아래로 발길질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이상한 아저씨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하는 생각을 서유리는

해보았지만, 이세하나 이슬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미스틸테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강남사태 당시에 제이가 무좀약 이야기를 잠시 꺼냈던 것을 기억해내어 제이에게 상담해보려 했지만 결국 이 꼴이다. 서유리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서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제이는 벗어놓은 가방에서 자그마한 약통을 주섬주섬 꺼냈다. 소아용의 감기약 등이 들어갈 법한, 액체가 들어있는 튜브 타입의 작은 플라스틱 병이었다.

 

“자. 니가 원하던 즉효약인데, 이게.”
“네?”
“너 학교에 있는 동안에 얻어왔다. 전쟁 중엔 이렇다 할 클로저용 옷 같은 것도 모자라서, 다들 아무렇게나 군복에 전투화 차림으로 싸워대느라 너랑 같은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았거든.”

 

시큰둥하게 제이의 이야기를 듣던 서유리가 와락 일어섰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이 약을 받았단 말인가? 서유리의 머릿속에 캐롤리엘의 조수로 일하고 있는 우정미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서유리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잃을 것만 같았다.

 

“그걸 또 누구한테 말했어요? 아저씨 때문에 못 살겠어, 정말! 누구한테요?”
“캐롤리엘한테. 그냥 내가 무좀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걱정 말고.”

 

제이가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어 물고는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기 전에 이번엔 그걸 바르고 자 봐. 그럼 일단 상황은 나아질 거야.”
“‘일단’요?”
“그래. 그리고 이거 읽어보고.”

 

제이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서 서유리에게 건네주었다. 가방 안에는 비슷한 서류철이 잔뜩 들어있었다. 상황이 자꾸만 휙휙 바뀌는 탓에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가방이 컸던 까닭이 저것인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서류철을 열자 신문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무좀, 재발, 재감염 막는 것이 중요...’...?”
“그 약은 어디까지나 당장 급한 불만 꺼주는 거거든. 뭐니뭐니해도 평소에 관리를 잘 해주는 게 제일이지.”
“...이렇게 읽어서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머리가 나쁘잖아요.”

 

서유리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제이는 선글라스를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다. 그래서 내버려둘 수 없는 거겠지만.

 

“일단 읽어보고... 잘 모르는 부분은 나중에 이 오빠한테 물어봐. 다른 서류철 보면 양복 입을 때 주의해야할 점 같은 것도 모아둔거 있으니까 그것도 보고. 가방은 놓고 간다.”
“네? 가시려구요?”
“네 동생들 올텐데 뭘. 그럼 수고해.”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 넓지 않은 서유리의 집 거실을 뚜벅뚜벅 가로질렀다. 서유리는 아직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로 제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신발을 신은 제이는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그녀에게 인사삼아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건강이 제일이다.”

 

*

 

복구본부의 일상은 계속된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제이는 연구용 잔해의 전달을 위해 우정미에게 향했다. 그녀는 임시로 설치해둔 컨테이너에서 무언가를 배송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캐롤리엘에게 보내는 물품이리라.

 

“안녕. 늘 하던 일 하러 왔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

 

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이 아이들과 연관되기 시작한 이후로 한숨이 부쩍 늘어난 기분이 드는 제이였다. 차원전쟁 당시만 해도 팀의 마스코트였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제이는 그가 가져온 차원종 잔해를 수령한 우정미가 그에게 종이가방을 하나 내민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초콜릿? 역시 이 오빠는 인기 있구만.”

“밸런타인데이가 몇 달 전 얘긴데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지.”

 

웃으며 가방을 받아든 제이는 안에서 약봉투를 발견하고 우정미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우정미는 그런 그에게 측은하다는 듯한 눈빛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캐롤리엘 선생님한테 들었어요. 그... 무좀 때문에 고생하신다면서요? 일단 평소에 많이 도와주시니까 드리는 거예요. 정말이지... 관리 좀 하시라구요. 매번 건강, 건강 하시면서.”

 

제이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그가 캐롤리엘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이런 식이어서는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제이가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대답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등을 둔탁한 충격이 덮쳤다.

 

“크헉!”
“정미정미야!”
“서유리 너, 여기 위험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 조심히 좀 들어오라니깐!”
“아휴, 미안! 우리 정미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만 잊었지 뭐야! 아저씨, 미안해요!”

 

제이는 위험 신호를 머리가 쾅쾅 울리도록 보내오는 허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서유리의 뒤를 이어 검은양 팀의 다른 멤버들도 컨테이너로 들어왔다.

 

“임무 수고하셨습니다, 제이 씨. 정미야, 그거 전해드린거야?”
“무좀약 말이지? 방금 드렸어.”

 

우정미와 이슬비의 대화를 듣자 제이는 목에서 피 맛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지금 정도면 아마 피를 토하더라도 괜찮은 상황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제이는 나머지 멤버들이 우정미와 이야기하는 틈을 타 유리에게 슬쩍 눈짓했다. 부디 그녀가 이 신호를 이해해서 화재를 좀 돌려주기를. 제이의 눈을 본 유리는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에이, 제이 오빠도 참! 어쩌다가 무좀이 다 걸린 거예요!”

 

제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언니, 곧 밸런타인데이인데 선물은 준비하셨나요?”

 

퇴근이 가까워진 시간, 달력을 보다가 이슬비의 난데없는 질문을 받자 김유정이 뜨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슬비는 이번에도 틀렸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2월에 들어서면서 이런저런 일이 많았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에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김유정이 망가진 표정을 바로잡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에게 질문을 되돌리자 이슬비의 답답함은 더욱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지. 뭐라도 준비했니, 슬비야?”

“아뇨. 주말에 팀원들에게 줄 걸 직접 만들어볼까 해서요. 설마, 잊고 계셨던 건가요?”

“응?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잖니?”

 

허공을 표류하는 그녀의 눈길에 이슬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곧 결실을 보리라 생각했던 제이와 김유정의 관계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지부진한 채였다. 두 사람이 감정을 앞세우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나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들이 도대체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제이와 김유정이 서로에게 평균 이상의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건만 어째서 매번 이런 식인 것일까. 억지로 붙여놓으려고 해도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를 슬금슬금 밀어내며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둘의 모습을 떠올린 이슬비는 결국 이번에도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저랑 같이 만들지 않으실래요? 제이 씨한테 주실 거잖아요? 초콜릿.”

“아? 어? 내가 왜 제이 씨한테 초콜릿을 준다는 거니?”

“제이 씨도 그래도 나이가 비슷한 사람한테 받아야 기분이 좋을 것 아니에요? 제가 드려봤자 그냥 주전부리나 다를 게 없다구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가슴께에 겨우 닿는 체구의 이슬비에게서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받는 제이의 모습이 김유정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유정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 봐요. 언니가 제이 씨정도는 좀 챙겨주세요. 테인이랑..., 세하는 제가 줄 테니까.”

 

엉뚱한 생각이 스쳐 말에 미묘한 휴지를 두고 만 이슬비는 김유정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김유정 역시도 나름의 생각에 빠져있어 그에 대해서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슬비는 안도하며 김유정과의 약속 시각을 잡았다.

 

*


김유정은 브라우니의 재료를 사기 위해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적당히 매장에서 산 기성품으로 때웠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와 그녀 사이의 일이라면 늘 그렇듯이 김유정은 평소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의 기세에 밀려 기어이 약속을 잡고야 만 김유정은 제작에 드는 재료비를 전액 자신이 부담하는 것으로 마지막 체면을 지켜야만 했다. 한숨을 쉬며 제빵 코너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던 김유정은 발렌타인 특선 코너를 깨작이는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제이 씨?”

“아, 안 사요! 그냥 구경하는 거..., 어라, 유정 씨?”

 

김유정을 본 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아, 뭐, 그냥 저녁 찬거리나 좀 살까 해서요.”

 

왠지 부끄러워진 김유정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그에게 줄 선물임에도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이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밸런타인데이지?”

 

덜컥. 김유정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가 으레 아무 생각 없이 엉뚱한 말을 늘어놓으며 장난을 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허당 같으면서도 종종 이렇게 허를 찌르는 그의 모습은 정신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이 씨는 어차피 팀원들한테 받을 거잖아요?”

“유리가 뭘 좀 산다고 하긴 하던데, 우리 리더도 별다른 말은 없어도 주지 않을까? 성격이 있으니.”

“그럼 됐어요.”

 

김유정이 짐짓 자르듯 말하자 제이의 몸이 축 처졌다. 그가 이런 일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이런 데 일일이 의식적으로 반응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럼 유정 씨는 우정 초콜릿이라던가, 안 주는 거야?”

 

‘우정 초콜릿’이라는 말에 김유정이 발끈했다. 이럴 때라도 빼지 말고 그냥 초콜릿을 달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감찰부의 최서희 요원이 그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인 만큼 그에게 초콜릿을 줄 사람은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많을지도 모른다. 가끔 헛소리를 해서 그렇지, 입만 다물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미남에 키도 큰 제이니 그를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는 여성 한, 둘쯤은 있을 것이다. 약이 오른 김유정은 그에게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안 줘요. 제이 씨는 다른 사람들한테 잔뜩 받을 거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서 빨리 들어가야 하니까 이만 실례할게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는 김유정의 등 뒤로 제이가 그녀를 부르며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모두 무시했다. 처음에는 ‘그라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생각했건만, 머리에 다시 떠올릴수록 그녀의 머릿속엔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초콜릿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서 술이나 진탕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김유정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구매목록에 맥주를 추가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초콜릿 재료를 사서 돌아갔다. 그만두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슬비가 지을 풀죽은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귀가한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맥주에 취한 채 곯아떨어졌다.

 

*


약속대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김유정의 넋두리를 들은 이슬비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 무슨 청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에피소드란 말인가. 업무 중에 자신의 감정을 능란하게 숨기는 그녀의 모습을 평소부터 곧잘 보아왔던 터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정도로 그녀가 제이에게 가진 감정이 특별하기에 그런 것이려니 하며 이슬비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었다.

 

“하아, 어찌 됐건, 제이 씨가 유정 언니한테 화가 많이 났거나 하진 않았을 거예요. 남은 건 언니가 밸런타인데이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숙취와 자책으로 얼룩져있던 김유정의 얼굴이 그녀의 말에 조금 밝아졌다. 그녀가 넋두리를 늘어놓는 사이 이슬비는 그녀가 가져온 재료들을 모두 꺼내 배치해 둔 뒤였다. 자취를 하면서 이런저런 요리를 많이 해본 김유정이었지만 초콜릿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던 김유정은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시 네가 만들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만들었다간 쓰레기만 늘어날 것 같은데...”

 

레시피를 다시 확인하던 이슬비는 김유정의 말에 힘이 빠진다는 제스쳐를 과장되게 취해 보였다.

 

“언니, 중요한 건 상태가 아니라니까요. 유정 언니가 직접 만들어준 초콜릿이라는 게 중요하지. 남자 마음을 잡는 데는 수제 요리만 한 게 없다구요.”

“...너도 남자친구 없잖니.”

“...드라마에서 봤어요.”

 

덩달아 어두워지는 이슬비의 표정에 김유정은 지뢰를 밟은 느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까지의 관계가 역전된 듯한 모습으로, 김유정은 음울하게 누군가를 중얼중얼 욕하고 있는 이슬비를 끌고 조리대 앞에 섰다.

 

“슬비야,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니?”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게 구는 김유정의 모습에 제정신을 찾은 이슬비가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자신의 행동에 PC의 전원을 켜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이슬비의 모습에 김유정은 자신이 이렇게 구는 것이 그렇게 안 어울리고 이상한 것인가 하고 약간의 우울감을 느꼈다.

 

“일단 이걸 읽어보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는 드리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아셔야 요리하기가 편하니까요.”

 

종이를 펼친 김유정은 인터넷 블로그에서 발췌한 듯한 화사한 프린트에 처음 외국에 갔을 때 느꼈던 이질적인 감정을 다시 느꼈다. 동글동글한 폰트로 여보란 듯 귀엽게 표시된 「남친이 좋아하는 브라우니 만들기」라는 제목을 보고나니 그 감정은 더욱 커졌다.

 

‘아아, 나는 역시 이런 걸 하기엔 늦은 나이가 아닐까...’

 

프린트를 펴든 자세로 굳어있는 자신을 물음표를 띄우고 바라보는 이슬비를 눈치챈 김유정은 서둘러 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괴감을 애써 씹어 삼키며 프린트를 끝까지 읽어내린 김유정은 이슬비와 함께 브라우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초콜릿 200g을 녹여서 중탕하도록 하죠. 판 초콜릿을 사 오셨으면 그걸 부숴야 하겠지만, 다행히 언니가 사 온 초콜릿이라면 부술 필요는 없겠네요.”

 

김유정은 그녀의 말에 따라 초콜릿의 분량을 쟀다. 평소 습관대로라면 손 감각으로 적당히 분량을 맞춰서 호쾌하게 요리했겠지만, 처음 하는 일인 데다 제이에게 줄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손길은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아니, 되려나? 될까?”

“...언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요리랑 다를 게 없잖아요. 더 쉬웠으면 쉬웠지.”

“그, 그러니?”

“그럼요. 정 부담되시면 계량은 제가 해 드릴게요. 언니는 중탕을 부탁해요.”

 

스스로의 손에 도무지 자신이 없었던 김유정은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뒤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없었다. 이슬비가 건네주는 재료들을 받아서 잘 섞기만 하면 되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세가 붙은 그대로 진행을 하던 김유정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반죽의 분량에 당황했다.

 

“슬비야, 이거 너무 크지 않니...?”

 

그녀가 완성한 반죽을 작은 프라이팬만 한 틀에 옮겨 담는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이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김유정이 상상한 브라우니는 손바닥만 한 작은 선물이었던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슬비가 당연하단 듯이 되물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언니랑 제이 씨 사인데요.”

“슬비야, 매번 말하는 거지만 제이 씨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

“글쎄요, 이걸 주시고 나서도 그럴까요.”

 

담담하지만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결국 김유정은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돌려받은 반죽 위에 그녀가 시키는 대로 슬라이스 된 아몬드와 코코넛을 뿌려 데코레이션까지 완료한 김유정은 언제 켰는지도 모를 사이에 예열이 끝나있는 소형 오븐에 틀을 밀어 넣어 일을 마무리했다.

 

“포장도 준비하셔야죠.”

 

큰일을 끝냈다는 느낌에 몸에서 힘을 쭉 빼던 김유정은 또다시 이슬비에게 끌려갔다. 정말이지, 이런 일에서는 그녀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 김유정의 감상이었다. 결국, 그녀는 제과점에서 파는 케이크나 파이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어마어마한 브라우니를 만들어서 돌아가게 되었다. 역까지 그녀를 바래다주겠다며 그녀를 따라나선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들겠다던 초콜릿은 어디에 있을까? 브라우니를 만드는 동안 그녀가 한 것은 김유정의 도우미역뿐이었다.

 

“슬비야, 너는 초콜릿 안 만드니?”

 

밸런타인데이에 대해 조잘조잘 즐겁게 이야기하던 이슬비의 말이 딱 하고 멈췄다. 의아해진 김유정이 그녀를 돌아보니 이슬비의 얼굴이 불안으로 물들어있었다.

 

“...역시 저는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슬비야.”

 

김유정은 손날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아프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은 작게 웃었다. 결국, 나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슬비나, 그녀 자신이나,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김유정은 오늘 하루의 보답으로 그녀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었다.

 

“팀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리더의 일인 거, 알지? 이것도 업무의 일환이야. 재료는 내가 충분히 사 왔으니까, 부탁할게?”

“...네.”

 

그녀 자신도 이슬비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밸런타인데이를 보냈거나, 간단한 기성품을 주고받으며 인사치레를 반복했을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김유정은 불안해하는 이슬비의 모습에 그녀 자신이 그러했듯 자신을 떠밀어 한 발자국 전진하게 하는 무언가를 건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라면 그 정도 도움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늘 하루 그녀를 도와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녀라면.

 

*


밸런타인데이 당일 아침, 상자를 들고 불안해하며 사무실 계단을 오르던 김유정은 종이가방을 손에 든 채로 검은양 사무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이슬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늘 꼴찌로 사무실에 도착하는 이세하의 게임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사무실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유리가 제이에게 장난을 치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게임의 BGM 사이로 그 둘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자 이슬비가 딱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오셨어요, 유정언니?”

“좋은 아침이야. 들어가야지.”
“아뇨, 그... 저는 잠시만...”

 

김유정은 주저하는 그녀의 빈 쪽 손을 잡고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시야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이와 그를 깔아뭉갠 채 깔깔 웃고 있는 서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방으로 들어오는 김유정을 발견한 제이의 표정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김유정은 다시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검은양 사무실의 아침이 오늘도 이렇게 소란스러워졌다.

 

“제이 씨! 뭐 하시는 거예요!”

 

이세하는 다시한번 손에 들고있는 종이가방을 확인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물건을 확인하는 것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일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늘에서는 따스한 5월 낮의 햇살이 모두를 축복하듯 내리쬐고 있음에도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불안감 뿐이었다. 그의 앞을 막아선 연립식 주택의 현관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괴수가 살고있는 미궁의 입구로 치환되어 그의 발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녀가 사는 집의 호수는 잘 알고 있었다. 203호. 이제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겨우 들어올려 ‘2’라고 적힌 창백한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애써 쫓아냈던 불안감이 다시 돌아와 그의 손을 잡아챘다. 가만, 내가 그걸 챙겨왔던가? 이세하의 시선이 다시 가방으로 향하려던 찰나 작은 목소리가 그를 호명했다.

 

“이세하?”

 

맙소사. 이세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마음을 조금만 빨리 다잡았더라면 ‘집에 없었다’라는 변명거리가 생겼을 터였건만. 기긱거리는 소리가 날 법한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의외라는 얼굴로 바라보는 이슬비를 확인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대부분 감기 마스크가 가리고 있었으나 벛꽃을 연상케하는 그 분홍빛 머리칼만으로도 그녀의 신원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약국에라도 다녀온 것일까, 그녀의 손에는 하얀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이세하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는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여보란 듯 손의 종이가방을 들어보였다.

 

“병문안 왔어.”

 

*


아마도, 모든 일의 발단은 복구대상 지역중 한 곳에 갑작스레 대규모로 출몰한 차원종 무리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해당 지역 내에 얼마 남지않은 잔당이 B급 차원종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최후의 습격을 감행한 듯 했다. 해당 구역을 담당하고있던 이슬비는 통신을 통해 지원을 요청한 뒤 차원종 무리와 교전을 벌였다. 대피중인 작업인원들의 보호와 차원종과의 교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운 나쁘게 때맞춰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겹치자 그녀는 격심한 전투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다행히 가장 가까이 위치해있던 이세하가 늦기전에 도착해 그녀를 지원해주었기에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사이킥 무브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쳤음에도 도움을 애써 받지 않으려는 그녀를 반강제적으로 부축해서 귀환한 이세하는 이정도면 그래도 한 건은 해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음날 이슬비가 병가를 냈다는 소식을 김유정에게서 전해듣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병가요? 어제 슬비를 데려왔을 땐 분명 별 문제가 없었잖아요?”

“그래. 분명 큰 상처를 입거나 하진 않았지. 하지만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고 연락이 왔어.”

“네?”

 

위상능력자가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어렸을 적부터 누구나 일년에 한두번쯤은 통과의례로 걸리기 마련인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살아왔던 터다. 그렇기에 그는 이슬비가 지쳐보였어도 쉬고 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김유정 역시도 그의 그런 의문을 파악했는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위상능력자는 병에 잘 걸리지 않아. 하지만 위상력을 극심하게 소모한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지. 아무래도 어제 복구인원들을 구하느라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야.”

 

평소의 제이를 떠올린 이세하는 그녀의 설명을 이해했다. 원래부터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툭하면 종합감기약이나 진통제를 찾는 그의 모습에 평소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김유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위상력이 거의 남지 않아 임기응변과 편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그가 그런 상황일 만도 했다. 이슬비가 빠진 자리를 메꾸기 위함인지 근무표를 조정하고 있던 김유정이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생각에 잠겨있던 그를 불렀다.

 

“세하야, 혹시 슬비한테 병문안을 좀 가줄 수 있겠니?”

 

“제가요?”

 

이세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귀찮다’였다. 병문안이라니. 병문안에 대해 그가 알고있는 것은 미디어 매체에서 접한 모습 뿐이었다. 선물을 잔뜩 사들고 간다거나, 음식을 만들어서 먹여준다거나, 환자의 물수건을 갈아준다거나 하는 부담스럽고 손이 많이 가는 행동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다루는 매체에서 이런 일은 으레 연인이나 그와 유사한 관계인 사람의 몫이였으니, 이세하로서는 그녀와 시덥잖은 일로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 일쑤인 자신이 왜 하필이면 병문안을 가는 사람으로 선발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왜 하필 제가?”

“벌이야. 어제 건물을 부숴먹은 건 잊지 않았겠지?”

 

이세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슬비의 지원요청에 급하게 사이킥 무브를 사용하다가 착지 과정에서 건물과 정면충돌해 벽을 무너뜨린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 건물은 어차피 복구 과정에서 철거될 장소였기에 별다른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모니터링중이던 김유정이 여기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기에 불문에 붙이려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던 이세하는 그녀가 이 시점에서 그 때의 이야기를 꺼내들자 할 말이 없었다.

 

“팀에서 둘이나 빠지면 작전에 문제가 없을까요?”

“걱정 마. 어제의 차원종 출현 사건으로 오늘은 복구작업이 예정보다 축소 진행될 예정이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은 특경대 쪽에서 협조하기로 했어. 평소에 많이 신세를 지고 있으니 이럴 때라도 제대로 협조하겠다나?”

 

이슬비가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 병문안을 가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송은이 경정의 모습이 생각난 김유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의 언행으로 보건대 땡땡이를 치려는 의도가 많든 적든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을테지만,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그녀가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첫 출동때부터 시작해서,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사건을 함께 거쳐왔기에 그녀에게 단순한 동료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검은양 팀원들도 같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채민우 경정의 잔소리에 결국 직접 이슬비의 병문안을 가는 것을 포기하고는 인원이 부족할 경우 특경대 측의 지원을 약속한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이세하는 특경대의 협조에 그다지 고마워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복구작업이 시작된 이후로 클로저 활동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어제의 일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었다. 현 시점에서 검은양 팀원들의 활동은 대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리를 순찰하거나 정해진 위치에서 경계 근무를 보는 것 뿐이었다. 이런 업무들은 대개 1인 단위로 이루어졌기에 이세하에게 있어 이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게임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금같은 시간에 병문안이라니.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그가 귀찮아하는 낌새를 눈치챈 김유정이 다시한번 무너진 벽 건을 들먹이며 감봉 이야기를 꺼내들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에 출시되는 신작 게임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한 푼이라도 봉급을 더 받아야만 했다. 그가 받는 봉급이 적은 것은 아니였지만 그 대부분은 그의 어머니인 서지수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돌아오는 것은 그 일 할 가량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결국 이세하는 김유정과 나머지 팀원들이 모은 돈을 들고는 마트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이세하는 이슬비의 집 거실-이라고 해봐야 투룸 방의 부엌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지만-에 앉아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가 병문안을 왔다는 말에 예상대로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는 식의 맥빠지는 대답을 한 이슬비는 이왕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뭐라도 먹고 가라면서 그를 집에 들였다. 이슬비는 그를 거실에 앉히고는 준비를 좀 해야하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참이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게임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도무지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대체 내가 왜 병문안을 가겠다고 한 것일까, 이세하는 다시한번 후회를 곱씹었다.

 

마켓에서 간단한 요리재료와 이런저런 물건을 사서 나올 때까지 이세하의 머리 속에는 ‘귀찮다’라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병문안 물품을 손에 들고나자 그의 생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평소에 그에게 잔소리만 늘어놓는 데다가 귀여운 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긴 해도 그녀는 어찌됐건 그 나이 또래의 여성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이 18년 인생의 지상과제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언감생심 여자가 혼자 사는 집이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마트에서 그녀의 방이 있는 연립주택까지 이동하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동안에도 그의 불안감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주택 앞에서 시간을 끌다가 맞은 결말이 이 꼴이다. 이세하는 후회감을 삭히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어떻게 보면 딱 그의 생각대로이기도 한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혼자 사는 방이라면 으레 떠올리는 엉망진창인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없는 개인물품들은 각을 맞춰 전시해두기라도 한 것 마냥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보통 기름 얼룩이라도 조금 튀어있기 마련인 조리공간 역시도 도대체 사용은 하는것인가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 자신도 평소에 청소를 자주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개중에 그나마 사람 냄새라도 느껴지는 것은 설거지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물기가 맺힌 채로 건조대에 올려져있는 식기 몇 개와 수저 한 세트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식기의 수는 왠지모를 허전함이 느껴질만큼 적었다.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진 이세하는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제법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이슬비의 상황이 궁금해져 그녀를 불러보았다.

 

“야, 이슬비. 멀었어?”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진 이세하는 그녀의 방문을 툭툭 두들기며 노크했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왠지 불안해진 이세하는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방문을 잠궈두진 않은 것인지 손잡이는 저항의 기색이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방문을 연 이세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방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곰인형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그렇게 될 테니 불가항력이라고 할 만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허전할 법한 곳마다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있는 동물 인형들이 좀 더 눈에 띄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한쪽 벽을 차지한 붙박이장에 반쯤 쑤셔박힌 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거의 사람만한 크기의 펭귄 인형과 살짝 보이는 분홍빛 머리칼의...

 

“슬비야?”

 

인형의 움직임이 순간 딱 하고 멈췄다. 이세하가 한숨을 쉬며 펭귄 인형을 잡고 끌어내자 인형과 씨름을 하고 있던 이슬비와 함께 붙박이장 안에 억지로 구겨져 들어가있던 인형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사자, 하마, 나무늘보, 양, 개... 다큐멘터리 채널을 방불케하는 수많은 종류와 크기의 인형에 이세하는 할 말을 잃었다. 인형의 파도에 떠밀려나온 이슬비는 당혹에 물든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또 하나의 인형마냥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세하는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신통한 아이디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타임 리미트를 초읽기하듯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이슬비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더욱 그랬다. 이럴 때에도 역시 팀의 리더라고 해야할까, 이 기묘한 교착상태를 먼저 푼 것은 이슬비 쪽이였다. 홍시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던 그녀는 바로 옆에 떨어져있던 인형을 집어들고는 혼란에 빠진 비명을 지르며 이세하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달려들려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중 발치의 인형에 걸려 이세하를 향해 넘어진 까닭에 그녀는 그를 인형으로 가격하는 대신 그를 향해 성대하게 넘어졌다. 엉겁결에 그녀를 받아낸 그는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쓰러졌다. 감기 때문에 제대로 씻지 못한 까닭일까, 그녀에게선 희미하게 땀냄새가 났다.

 

‘아-, 이거 큰일이네.’

 

머릿속으로 현실도피를 하며 제 삼자가 된 듯 현 상황을 평가하던 이세하는 그녀의 몸이 불덩이같이 뜨겁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챘다. 아까까지의 멀쩡해보이던 모습은 연기였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며 질문을 건넸다.

 

“야, 너 지금 대체 몇 도야?”

“삼십..., 삼십 칠 도.”

 

조금 흐려진 눈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세하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꼬리를 잠시 흐렸던 것을 보건대 보나마나 삼십 팔 도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세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 손으로 이슬비의 상체와 다리를 떠받치며 그녀를 들어올렸다. 방금 전에 그나마 있던 힘을 다 써버렸는지 예상 외로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고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만을 입고 있었던 탓에 그녀의 속옷이 슬쩍 비쳐보였지만 이세하는 애써 눈을 돌렸다. 그녀를 들어올리는 데에 별다른 부담은 없었다. 전날에 그녀를 부축하면서 이미 느껴봤을 터였건만 몇 번을 경험해도 적응이 되지않는 무게였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정식 클로저이자 한 팀의 리더라니, 누가 믿겠는가. 이세하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직접 물수건을 갈고 있었는지 침대 옆의 서랍장 위에는 물이 담긴 대야와 물수건이 들어있었다. 물에 손을 담가본 이세하는 미지근한 물에 인상을 쓰고 물을 갈아와서는, 열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일단 그녀의 팔과 목, 그리고 슬쩍 드러난 어께 부분의 땀을 닦아주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했다. 몸에 와닿는 물수건의 차가운 느낌에 이슬비는 작게 움찔했다.

 

‘움찔하고 싶은 건 내 쪽인데.’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니 이세하는 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간병에 대해 지식으로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첫 상대가 이슬비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뒤 시간을 확인한 그는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허락을 구하려고 해도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할 테지. 이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툭 던지듯 말했다.

 

“죽 끓여올테니 한 숨 자던가.”

 

그의 말에 대답하듯 이슬비가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웅얼거렸다. 이세하는 손에 남은 물기를 옷에 슥슥 닦아내고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거실 겸 부엌으로 나왔다. 준비물은 이미 오는 길에 다 사왔으니 그녀를 귀찮게 할 일은 없었다. 종이가방 안의 재료를 꺼내며 이세하는 머리 속의 레시피를 되새겼다.

 

*


죽을 끓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세하의 요리실력에 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사일에 소질이 없는데다가 평소에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는 어머니를 두었기에 이세하는 가사 전반에 능숙했다. 다만, 요리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뜬금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마는 그의 의식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흐름에 편승해 끝냈기에 별 문제없이 그녀를 간호하긴 했지만, 막상 일을 해치우고 이미 익숙한 일인 요리를 시작하자 잡생각이 그의 머리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료를 손질하다가도 물수건 너머로 손 끝에 느껴지던 부드러운 촉감이 생각나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손을 다칠 뻔한다던가, 불을 조절하면서 손등을 간질이던 그녀의 머리칼을 떠올리다 죽을 숯으로 바꿀 뻔 한다던가 하는 등의 실수를 몇 번이나 한 끝에 이세하는 평소 실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단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죽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것일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죽의 상태에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던 이세하는 반쯤 포기한 채로 앉은뱅이 상에 죽을 올려 방으로 들고 돌아갔다.

 

죽을 끓이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던 탓일까, 이슬비는 어느 새 잠든 채였다. 분명 스스로도 한 숨 자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막상 곤히 자고있는 그녀를 보니 이세하는 곤란해졌다. 일단 그녀를 깨워서 식사를 시키는 편이 회복에 도움이 될 테지만, 이세하는 그녀를 어떻게 깨워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야, 이슬비.”

 

시험삼아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르락, 내리락. 다시 오르락. 이불에 가려진 이슬비의 가슴이 그녀의 숨결을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세하는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다시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반응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약이 오른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볼을 찔렀다.

 

“으응...”

 

잠에 취한 그녀의 신음소리에 이세하는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물렸다. 이슬비는 귀찮다는 듯이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그녀의 이마에서 물수건이 스르르 흘러내려 베개 위로 떨어졌다. 안도감와 함께 이세하의 머릿속에 장난기가 찾아들었다. 이세하는 다시 손가락을 들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보이는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야, 이슬비. 일어나.”

 

간질간질, 간질간질.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에서 귀로, 다시 목으로, 그리고... 살짝 드러난 등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오락실에서 어머니 몰래 하던 탈의 땅따먹기 게임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이세하는 배덕감 섞인 추억에 잠기며 손장난을 계속했다. 어느 순간, 그의 손가락이 딱 하고 굳었다. 예상 외의 상황에 당황한 이세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손가락은 무언가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의 귀에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하...!”

 

어느 새 깨어난 것일까, 이슬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은 그녀가 염동력을 행사한 결과인 듯 했다. 굳어버린 손가락을 포기하고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반대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세하는 그를 향해 휘둘러지는 베개를 확인하며 눈을 감았다.

 

*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세하는 말없이 죽을 먹고있는 이슬비의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다시한번 사죄의 말을 건네었다. 강남역에 출현한 말렉과 맞설 때보다 지금이 더욱 공포스럽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오늘의 일에 대해 한 마디라도 언급하는 순간 그의 사회적 지위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 뻔했다. 어째서 직장 동료이자 동급생인 그녀에게 그런 장난을 쳤는가 하면, 그 스스로도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잠시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그가 시행한 자가진단의 결과였다.

 

잠에서 깨어난 이슬비가 그에게 엄청난 패널티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당한 앙갚음은 그의 얼굴을 강타한 베개정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매도하고 집 밖으로 쫓아내는 편이 차라리 나았으리라는 것이 이세하의 생각이었다. 그를 상 반대편에 무릎꿇게 한 뒤 아무 말도 하지않고 그가 준비한 죽을 먹고있는 이슬비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뭔가 무시무시한 처벌을 준비하고 있으리라는 암담한 예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죽이 너무 뜨거운 것인지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죽을 취식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세하는 다시한번 불길한 상상을 뇌 한 구석으로 추방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을 돌리고자 이세하는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며 그녀의 방을 둘러보았다. 거실에서 느껴지던 살풍경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거의 전시물 수준으로 정리된 딱딱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사이사이에 장식된 복슬복슬한 동물 인형들-붙박이장에서 쏟아진 동물 인형들까지 생각해보면 그 양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이 그 몰감정적인 인상을 상당히 줄여주고 있었다. 자주 사용하는 듯 금방 꺼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는 다리미와 그 옆의 강아지 발자국 무늬가 그려진 다리미판을 보고 이세하는 어디에 처박혀있는지도 가물가물한 자신의 집의 다리미를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요원복을 매일 다려서 입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의 잘 각이 잡혀 손질된 요원복 치마를 생각해보면 신빙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방을 구경하던 그의 눈에 벽에 걸린 액자들이 들어왔다. 그녀가 아카데미 시절 수상한 상장들인 듯 했다. 최우수상, 1위, 최우수상, 학교장상... 이세하는 그녀가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가 어쩌다가 어딘가에서 장려상이라도 받아왔다 치면 뛸 듯이 기뻐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세하는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잘 정리되고 깨끗하게 청소된 방의 다른 물건들과 달리 그 액자들은 관리가 잘 되지 않은 듯 먼지가 살짝 쌓여있었고, 개중의 하나는 살짝 삐딱하게 걸려있기까지 했다. 의문에 빠져 액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느낀 이세하는 상장들을 구경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괜스레 무안해진 이세하는 일단 그녀를 칭찬하기로 했다.

 

“대단하다, 야. 나는 상장 하나 받을래도 고생을 하는데. 저게 대체 몇 장이야?”

 

그의 말을 들은 이슬비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세하는 의아해하며 자신이 방금전에 한 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세하는 일단 말을 잇기로 했다.

 

“이정도면 굳이 우리 팀이 아니더라도 네가 리더가 될 만하지. 게을러빠진 나에 비하면 너는 정말 대단...”

“아니야.”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이슬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냉기에 이세하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도대체 왜? 이슬비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것이 감기 때문인지, 그녀의 기분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이세하는 짚어낼 수가 없었다.

 

“저런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무슨 소리야. 저만한 결과는 아무나 낼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럼 뭐해!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슬비가 비명처럼 외쳤다. 고개숙인 그녀의 좁은 어께가 거친 호흡으로 요동쳤다. 이세하는 자신이 밟아서는 안 될 구역으로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후회했다. 이건 긁어 부스럼이다.

 

“그래. 처음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어른들보다도 잘 할 수 있다고, 다시는 나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어른보다 잘 할 수 있다. GGV에 훈련생 신분으로 처음 배치되었을 때 김유정에게 했던 말이다. 평소의 자신과는 정반대 스탠스라고 할 법한 인상적인 말이었기에 이세하는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보같은 생각이었어. 유치하고 순진해빠진... 어제만 해도 그래. 네가 아니였으면 내가 모든걸 다 망쳐놨겠지.”

 

어제라, 이세하는 전날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금방 답이 나왔다. 그가 건물에 충돌한 직후의 이야기일 것이다. 충돌의 여파로 띵해진 머리를 무시하고 급하게 뛰어나온 그의 앞에 보였던 모습. 미처 도망치지 못한 작업자를 향해 천천히 무기를 들어올리는 차원종, 그리고 한 블록쯤 떨어진 거리에서 급하게 뛰어오던 이슬비. 거리를 가늠해 본 이세하는 아무래도 그녀가 늦을 것 같다는 판단에 3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차원종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다른 사람들은 네가 노력한 덕분에 다들 무사했잖아. 그 사람도 좀 놀랐을 뿐이지 별 다른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고.”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네가 제때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 뻔했어? 오늘도 봐. 내가 좀 더 유능했다면, 더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몸 관리도 못하고 쉬게 될 일도 없었겠지. 네가 굳이 이렇게 올 필요도 없었을테고. 바보같아. 얼마 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슬비의 말에 이세하는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래도 어제의 일은 그저 도화선에 튀긴 불씨 정도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도화선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마음을 시커멓게 태우며 쌓아온 화약들이 모조리 연결되어 있었다.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해체해야만 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이세하는 그것이 하필이면 지금, 그리고 자신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방면에는 좀 더 전문가가 많지 않은가. 팀의 관리요원인 김유정이라던가, 아니면 허당끼가 있긴 해도 사람은 잘 다루는 제이라던가. 하는 수 없이 이세하는 잠자코 앉아 그녀가 닥치는대로 떠내려보내는 후회와 자기혐오를 갈무리했다. 어느새 그녀는 좀 더 이전의 이야기까지 주워섬기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도 전부 마찬가지야. 나는 하나가 잘못된 길을 걷는 걸 미리 알아채지 못했어. 차원종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강남이 불타는 것도 막지 못했을거야. 그리고 우리 팀원들도...”

 

“야, 이슬비.”

 

점점 흐름을 더해가는 그녀의 넋두리를 이세하가 끊었다.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둑에 차오르는 홍수처럼 그녀의 긴 속눈썹에 위태로이 걸려있는 눈물을 보자 이세하는 마음이 거북해졌다. 이런 식으로 남의 고민을 듣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그는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한번 오늘의 병문안을 후회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김유정이나 제이였다면, 아니면 밝은 성격의 서유리였다면, 그저 자신이 아닌 누군가였다면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오랜 세월 도피를 계속해온 그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이세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렸다.

 

“팀원을 무시하는 거냐?”

 

툭 튀어나온 말은 시비조였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었다.

 

“...뭐라고?”

“너 혼자 다 해치울거면 팀이 왜 있어? 우리가 못 미더워서 혼자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 이야, 대단한 리더님이시네.”

 

이슬비가 눈을 깜빡이자 그녀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밀려나와 또르륵 흘러내렸다. 방해라는 듯 손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친 이슬비가 그를 노려보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말한건 우리한테도 전부 포함되는 이야기잖아. 네가 다른 팀원을 도운 것도 한, 두번이 아닐텐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게 있으니까...”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녀가 일단 말로 따지고 보는 성격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녀가 감정에 휩싸여 그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했다면 사람을 잘 다루지 못하는 그로서는 손 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대화가 가능하다면 인터넷 채팅으로 말싸움을 벌이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중구난방의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생각을 뻔뻔하게 되돌려주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상대를 찍어누르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여러번 말이 오가고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를 공격하기 위해 열심히 논리를 짜내고 있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이세하는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아내렸다. 저쪽의 말문이 막히기 시작하면 이쪽의 승리는 한 순간이다. 그녀가 다시 자기비하를 시작하기 전에 이세하는 먼저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자, 이슬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아. 너뿐만 아니라 나도, 그리고 다른 팀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팀이잖아.”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조금만 더. 이세하는 애써 혀를 움직였다. 엉망진창인 말로 그녀를 공격-혹은 방어-했다.

 

“그리고, 봐. 구로에서 위상반전탄의 직접 사용에 반대한건, 그리고 신강고에서 죽을 뻔한 유하나를 구해내자고 처음 말했던건 누구지? 너야. G타워에서 강남을 날려버리는 대신 죽을 각오로 다시한번 나서기로 정한 것도 너지. 넌 늘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어. 팀원들은 모두 너를 믿고 있다고.”

 

스스로의 말이 유치하고 말도 안 된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책도 많이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할 것을 그랬다는 조금 늦어버린 후회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결국 이세하는 참지 못하고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아, 몰라! 내가 더 말 해서 뭣하겠냐. 잠깐 있어봐.”

 

이세하는 거실에 놓아둔 채인 종이가방에서 예의 물건을 꺼내왔다. 처음에 그가 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점검하려던 물건이었다. 둥글게 말려진 종이와 손바닥만한 선물상자를 가져온 이세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에게 그 둘을 건네었다.

 

“자, 복구본부 사람들이 전해주라더라.”

 

이세하는 그 종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복구본부의 인원들이 그녀가 감기에 걸려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전하고싶은 말을 적은 롤링 페이퍼였다. 선물상자의 내용물에 관해서는, 이세하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어찌보면 그 내용물의 탄생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전에 그 물건에 대해 알게된 이슬비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선물상자를 건네고 바로 도망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세하는 일단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슬비는 먼저 종이를 펴서 읽어보았다. 이세하가 알기로 그녀는 읽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하지만 그녀가 글을 다 읽는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롤링 페이퍼라는 것만 알 뿐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이세하는 그것이 좋은 신호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종이를 다시 말아놓는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도 선물상자를 열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한기남 컴퍼니의 자신작인 셜록홈즈 이슬비 인형을 발견한 이슬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세하는 그녀의 반응에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본따서 만든 인형을 그 모델에게 선물로 주자는 아이디어를 발안한 것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세하의 한숨소리에 그를 바라본 이슬비는 그의 할 말이 없다는 얼굴에 미소를 얼기설기 엮어보였다. 그다지 만족스러운 반응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이 정도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했기에 이세하 역시도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조용한 방에 갑작스레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아.”

 

이세하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면 그 역시도 아침밥을 먹은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였던 것이다. 죽의 간을 맞추느라 몇 술 정도를 뜨기는 했지만, 한창 팔팔한 청소년의 식사 요구량을 그 정도로 채울 수 있을리 만무했다. 무안해진 이세하가 시선을 피하며 여기저기 눈을 굴리자 이슬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죽, 같이 먹을래?”

 

“일단..., 다시 데워올게.”

 

이슬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죽그릇을 다시 들고 방문을 열었다. 문을 닫는 그에게 이슬비의 목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그녀의 말은 문이 닫히는 딱딱한 소리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에, 이세하는 그 내용은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고마워.’

 

*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 이세하가 의아해하는 서지수에게 이슬비의 병문안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흥미진진해하는 반응을 보여왔지만, 이세하는 이슬비의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이슬비가 그에게 일종의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에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한 이세하가 도대체 무엇을 숨기라는 것인지 되묻자 그에게 돌아온 이슬비의 대답은 그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 방에 있는 인형들 말이야.”

“뭐?”

“한 팀의 리더라는 사람이 방에 이렇게 인형을 장식해놨다는 이야기가 돌면 사람들이 얕볼 거 아냐?”

 

그녀에게 어울렸으면 어울렸지 딱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게 이세하의 생각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 괜스레 장난기가 도져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것은 이야기해도 되냐는 말을 했다가 베개로 한 대 더 얻어맞은 것은 덤이었다.

 

이슬비의 감기가 다 나아 그녀가 다시 클로저 업무를 시작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복구본부로 돌아온 그녀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 삼일간의 휴식은 더 나은 활동을 위해서였다고 온 몸으로 강변하듯,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가열차게 업무에 매달렸다. 그녀가 없는 사이 김유정의 책상에 점점 퇴적되어가던 서류가 그녀의 도움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며 사무실에서 농땡이를 피우던 송은이 경정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제이가 인형을 받은 소감에 대해 질문했을 때 뿐이었다. 웃음기를 띠고 장난스레 질문을 건네던 제이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선글라스를 깨뜨릴 듯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이슬비를 보고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허둥지둥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주로 1인 순찰등의 임무를 나가던 그녀가 다른 팀원과 동행하는 일이 늘어났다는 정도가 차이점일까. 다른 팀원들은 그녀의 미묘한 변화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세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곤 했다.

 

“이세하. 준비 끝났어?”

 

자신을 부르는 이슬비의 목소리에 이세하는 게임기를 꺼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든 그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이슬비의 손을 보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계작전 중 개인물품 소지 금지.”

“야, 좀 봐줘. 요즘 할 일도 없잖아?”

 

그의 말을 듣고 이슬비가 미소지었다. 손은 여전히 그를 향해 그대로 내민 채였다. 이세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갖다놓고 올게. 유정이 누나한테 전하면 되지?”

“응. 여기서 기다릴테니 빨리 와. 벌써 늦었어.”

 

이세하는 작게 투덜거리며 김유정이 사무실 대용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로 향했다. 콘솔을 맡기고 컨테이너를 나온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괜한 짓을 한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스쳐갔다. 그것도 잠시,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잡생각을 날려버린 이세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슬비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아, 귀찮아. 빨리 끝내고 게임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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