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12시가 되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서른 번 째 생일을 맞았다. 특별히 무언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 업 할 때처럼 팡파레가 울리거나 빛이 비추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질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무언가 달라지기는 했다. 안 좋은 방향으로. 그녀에게 연락하기가 전보다 어려워진 것이다. 평소처럼 자연스레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열 두 살.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서른 살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녀와의 간격이 더욱 벌어진 기분이었다. 십대와 삼십 대. 차가운 숫자가 그의 감정을 정의 내렸다. 도둑놈. 이상한 사람. 그리고 남자는 거기에 반박할 수단이 없었다.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화면을 보자 그녀가 보낸 기프티콘이 눈에 들어왔다.

 

'생일 축하해요.'

 

간단한 메시지였다. 남자는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여 답변을 보냈다. '고마워요.'

 

남자는 그녀에게 늘 존댓말을 했다. 그녀를 가벼이 여긴다는 인상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이 차이를 떠나 그녀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것으로 보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둘 사이에 놓인 세월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어느 쪽이 자신의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담뱃갑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핸드폰을 든 채 옥상으로 나왔다. 메시지에 답변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녀는 아마 시험 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라고, 학창시절의 희미한 기억이 위안하듯 속삭였다. 그럴 만도 했다. 제법 바쁠 시기니까. 하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너무 짧은 답은 아니었을까.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다.

 

그녀는 남자가 담배를 피는 것을 싫어했다. 직접 얼굴을 볼 일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가 흡연을 위해 방을 나왔다는 낌새가 보이면 늘 담배를 끊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이었다. '줄이겠다.' 하지만 그가 그 텅 빈 대답을 지키는 일은 없었다. 몇 달이 지난 뒤에도 그는 하루에 한 갑씩, 담뱃갑을 꼬박꼬박 비웠다. 남자는 괜스레 코를 손가락에 묻고 냄새를 맡았다. 매캐한 잿가루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자는 손을 털었다. 그렇게 하면 손가락에 배인 냄새가 가시기라도 할 것처럼.

 

담배를 다 태운 뒤에도 답변은 없었다. 남자는 메신저 창을 올려 과거의 대화를 다시 읽어보았다. 느리게 화면을 굴리던 그의 손가락이 멎었다. 며칠 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이야기에 대한 그녀의 답변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 짧은 답을 쓰면서 제법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 답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남자는 지금까지도 답을 내지 못했다. 그녀가 얽힌 일은 모두 그랬다. 그녀에 대해서는 그는 백지 답안을 제출하는 낙제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담배 하나를 새로 꺼내 물었다.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려 불을 붙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메시지였다. 남자는 담배를 내던졌다. 메신저 창을 여니 웃는 얼굴처럼도 보이는 묘한 이모티콘이 눈에 들어왔다. 메신저에 스티커 기능이 있음에도 그녀는 굳이 직접 쓰는 이모티콘을 사용하곤 했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놀렸다.

 

'많이 바쁜가 봐요.'

 

남자는 이모티콘에 서툴렀다. 몇 번을 고쳐 써도 그의 문장은 딱딱했다. 그녀와 그 사이의 간격이 드러나는 것만 같아 그럴 때마다 남자는 서글펐다. 그녀의 답장은 곧바로 돌아왔다. 시험 준비 때문에 많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또다시 자신의 고민을 유보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는 존재로 족하다는 것이 그가 다시 한번 내린 결론이었다. 그 이상을 그는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자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답변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서른 살이 되었어도 그다지 변한 것은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남자의 소감이었다. 역시 알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의 생각은 그랬다.

'기타, 패러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생전  (0) 2016.03.23

조용히 울리는 휴대폰 알람에 이슬비의 손이 그녀보다 빨리 일어났다. 침대 머리맡의 탁자 위에 놓여있는 휴대폰의 알람을 종료하고 나서야 그녀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이슬비는 잠시 그대로 누운 채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피곤했다. 5분이라도 더 침대에 있고 싶었다. 평소처럼 바삐 준비할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직장에는 연차를 썼고, 그녀가 오늘 향할 목적지는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팔을 움직여 두꺼운 블라인드를 걷어냈다. 6월 초의 이른 아침이 방을 밝히며 그녀의 한쪽뿐인 눈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이른 아침의 기상은 언제나 괴롭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메트로놈처럼 살아온 이슬비였지만 그녀가 이른 기상을 달게 받아들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곗바늘이 5시 30분을 가리키면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 톱니바퀴라는 물건은 한 번이라도 이가 어긋나면 대번에 망가지고 마는 물건이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간 지켜온 리듬이 깨지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탁자에 다시 한 번 손을 뻗은 그녀는 기계 의안을 집어 들고 수면용 의안과 교체했다. 반쪽짜리 세상이 온전해졌다. 잠시 눈을 돌리며 오른쪽 눈이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한 이슬비는 천근 같은 몸을 억지로 떠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향한 곳은 늘 그렇듯 아이의 방이었다. 행여나 잠을 못 이루고 밤을 새우지는 않았을까, 악몽을 꾸다가 일어나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란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걱정이 현실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미 된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아이는 조용히 자고 있었다. 이슬비는 아이가 행여 깨어날까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당연하게도 거실은 어두웠다. 거실에 걸린 시계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하릴없이 째깍거렸다. 형광등 대신 벽걸이 램프를 켠 이슬비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았다. 할 일이 없었다. 여느 때였으면 바삐 몸을 씻고 화장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평일에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것이 얼마 만인지 그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보통은 커피라도 한 잔 타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법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그녀를 떠밀었다. 그녀가 낭비한 시간이 모여 굶주린 짐승처럼 그녀를 덮쳐들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거실을 표류했다. 뭐라도 할 것이 없을까. 신통찮았다. 애초에 텅 비어있는 시간이 더 긴 집이다. 걸레질을 하고 가끔 가구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새 식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톡, 톡. 시계가 울리는 초침 소리와 식탁을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가 한데 겹쳤다. 나지막하게 통탕거리는 그녀의 심장소리도.

 

이슬비는 자리에서 와락 일어났다. 초조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운동복을 대충 걸쳐 입은 그녀는 집에서 나와 근처의 놀이터로 향했다. 한동안 쉬었던 운동이라도 시험 삼아 해볼 심산이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기껏 해봐야 6시 남짓인 시각.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 잠자리에 있거나 겨우 일어나고 있을 시간대였다. 놀이터 역시도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적막한 놀이터를 잠시 바라보던 이슬비는 놀이터 주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슬비의 뜀박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금세 턱까지 차오른 숨 때문이었다. 예전 같아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동안의 입원 생활,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바쁜 나날들은 그녀의 체력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슬비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다른 운동을 시도해보았다. 역시 신통찮았다. 폐에서 달아오른 석탄이 요동치고, 오랜만에 무리를 한 팔다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떨려왔다. 불쾌하고 피곤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한때 자신이 운동을 끝낸 뒤의 충만한 노곤함에 매료되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이슬이 방울방울 맺힌 벤치에 쓰러지듯 앉아 사지를 늘어뜨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낀 하늘이었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다. 그녀는 챙길 물건의 목록에 우산을 추가했다.

 

*

 

이슬비는 텅 빈 집의 문을 열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뒤였다. 필요한 물건은 전날에 이미 정리해서 종이가방에 담아두었다. 시간 여유가 아직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잠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가가 근질거렸다.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 눈을 툭툭 두드린다. 차가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의안은 눈과 달리 손가락에 반응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놀릴 때마다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상을 바라보며 이슬비는 이세하를 생각했다. 잘 지내고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터이다. 또다시 엉망이 되었을 그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나 스스로는 어떨까. 눈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눈가로 향했다. 거칠해진 피부와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한 눈가의 요철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슬비는 땀으로 끈적이는 몸을 씻기 위해 샤워실에 들어갔다. 헐벗은 몸이 낯설었다. 팀원들과 함께 신서울을 누비던 날이 엊그제처럼 느껴졌건만 거울에 비치는 몸은 그녀에게 현실을 여과 없이 들이밀었다. 푸석하고 윤기 없는 머리칼, 눈 아래를 잠식한 다크서클, 살집 없이 비쩍 마른 몸.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슬비는 거울에 물을 뿌렸다. 거울 속의 이슬비가 흐르는 물과 함께 일그러졌다. 그녀는 거울에 등을 돌린 채로 몸을 씻었다.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예전보다 가늘어진 기분이었다.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말린 이슬비는 간단하게 화장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간단하게 하려고 했다. 평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던 잔주름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컨실러를 몇 번을 고쳐 발라도 주름은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핏기없는 입술도, 그림자가 드리운 뺨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얼굴 전체를 뜯어고치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되레 평소보다 진한 화장을 하게 되었다. 이세하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이슬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옷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적당히 활동성 있는 옷을 차려입었다. 이슬비는 마지막으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눈에 띄는 벚꽃색의 머리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좋은 기억만 있는 곳은 결코 아니었다. 면식이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거울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이슬비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가방을 챙겨 든 그녀는 마지막으로 집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이슬비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집을 나섰다.

 

하늘은 이른 아침에 나왔을 때보다 더욱 흐려져 있었다. 따가운 햇볕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대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짐이 제법 많았던 탓이다. 택시기사는 말없이 그녀가 말한 주소로 향했다. 기사의 눈은 전방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시선이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샅샅이 훑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슬비는 창밖을 바라보는 척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이세하의 집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찌 됐건 그녀의 집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슬비는 눈을 감고도 그의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다만, 거리의 풍경은 그녀의 기억과 사뭇 달랐다. 자주 들르던 가게의 자리에 다른 점포가 들어선 것을 보고 이슬비는 약간의 상실감을 느꼈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간다. 그녀와 이세하만이 그 비가역적인 흐름에서 유리되어 과거에 못박혀있었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던 것일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매번 고기를 사던 정육점은 남아있었다. 점주는 고기를 사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를 새댁이라고 부르며 유난히 잘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이슬비는 평가를 뒤로 미루었다.

 

걸음을 옮기던 이슬비는 아파트 현관 앞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세하를 발견했다. 반바지에 얇은 셔츠만을 입고 있는 모습이 백수나 다름없어 보였다. 나름 정확한 표현이긴 했지만. 웬일로 굳이 집 밖까지 나와서 흡연을 하는 것일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멍하니 선 채 이세하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잠시 망설이던 이세하가 어설프게 웃음을 엮어냈다.

 

“왔어?”

 

그다지 상황에 맞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와 그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엉성한 인사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왔어.”

 

이세하가 하수구에 담배를 던져 넣었다. 그다지 권장할 만한 행동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이슬비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였다. 그녀를 마주보고 허술하게나마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만했다. 그녀에게서 짐을 건네받은 이세하를 따라 이슬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때 그녀의 보금자리였던 곳으로 향했다.

 

*

 

집으로 들어온 이슬비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커피 향의 방향제 냄새였다. 이세하가 방향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슬비는 의아해졌다. 게다가 커피 향이라니. 그녀가 잠을 쫓으려 커피를 탈 때마다 커피 냄새는 싫다며 투덜거리던 그였다. 문제는 그것 뿐 만이 아니었다. 냄새가 너무나도 짙었다. 방향제 캔 하나를 완전히 비우면 이 정도로 진한 향이 날까. 이슬비는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좀 가려볼까 했지.”

 

이세하가 변명처럼 말했다. 현관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던 그의 행동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알만한 이야기였다. 빈말로도 정상적인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세하가 2년간 홀로 살았던 집이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러놨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종이가방을 들고 멀거니 서있었다.

 

“하아, 일단 그건 부엌에 놔줘.”

“알았어.”

 

엉거주춤 부엌 쪽에 짐을 내려놓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슬비는 현관과 바로 이어지는 거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냥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이슬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집에는 새 가구를 채우겠다며 자를 들고 돌아다니던 이세하.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버린 게임기를 내다 팔면서 아쉬워하던 이세하. 아이를 가졌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날뛰던 이세하. 그리고...

 

그녀의 추억에 잡음이 끼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거실은 그녀의 기억과 똑같았다. 지나칠 정도로. 그녀가 아침밥을 기다리며 종종 껴안고 있던 쿠션이며 서랍장 위에 놓인 시계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이슬비는 어두침침한 거실의 불을 켰다. 파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거실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청소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바닥은 말끔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손조차 거의 대지 않은 듯 물건들에는 먼지가 부옇게 앉아있었다. 자신을 안내한 이세하가 아니었다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이슬비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그녀는 그다지 넓지 않은 거실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슬비는 요동치는 감정을 애써 찍어 눌렀다. 지금의 이세하는 그녀의 감정변화에 몹시 예민하다. 그녀의 동요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세하는 아직도 멍하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령을 기다리며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를 떠올리며 이슬비는 애써 웃어 보였다.

 

“왜 그러고 있어?”
“미안해.”

 

그녀의 질문에 이세하가 황망히 사과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광의적인 의미일 것이다. 이슬비는 평범함을 가장하며 그에게 잔소리했다. 평소처럼, 평소처럼.

 

―예전처럼.

 

“청소 좀 하고 살아. 이게 뭐야, 전부 먼지투성이가 돼선.”

 

이세하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소파는 그나마 먼지가 덜했다. 거실에 와서 앉아 있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손으로 소파의 먼지를 대강 털어낸 이슬비는 그를 붙잡고 데려와 소파에 앉혔다.

 

“앉아있어. 오늘 생일이잖아.”

 

이세하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손을 놀리는 대로 저항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낡은 인형 같았다. 소파에 앉혀진 채 그녀를 바라보며 이세하가 말했다.

 

“도와줄 건 없어?”

“없어. 그냥 앉아있어.”

 

그를 마냥 앉혀두는 것 역시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를 부엌에 들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조리대 역시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다. 찬장 깊숙이 처박혀있는 조리 도구에는 거미줄이 끼어있었다.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조리대에 선 그의 모습을 다시 볼 날이 올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슬비는 마음이 아팠다. 얌전히 앉아서 눈을 굴리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짐에서 음식 재료들을 꺼냈다.

 

*

 

생일에는 미역국이라는 공식은 누가 만든 것일까. 몇 번 정도 인터넷을 찾아봤지만 그럴싸한 답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음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뭔가 의미도 있고 그의 의욕도 북돋워 줄 만한 음식이 없을까. 이슬비는 며칠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최초의 선택지로 회귀해야만 했다. 이세하가 좋아하는 소고기를 선택하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타협점이었다.

 

그녀가 헤맬 이유는 없었다. 물건들은 모두 그녀의 기억 속 그 자리에 바뀐 것 하나 없이 놓여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늘 불평하던 낡아빠진 압력밥솥까지도. 하지만 그것은 이 집 전체가 그녀를 옥죄는 과거 그 자체라는 의미기도 했다.

 

나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밥솥은 과거 정도연 박사가 이세하에게 선물한 물건이었다. 이세하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그러니까 그가 이슬비에게 처음으로 식사를 만들어 주었을 때에 쓰인 것 역시도 그 밥솥이었다. 싱크대에 놓여있는 식기세트는 검은양 팀원들의 집들이 선물이었다. 벽에 걸린 휴지걸이도, 구석에 놓인 오븐도. 모두 나름의 기억이 남아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행복했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의 통제력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세하는 어떻게 2년을 살았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뇌리에서 지우기 위해 더욱 가열하게 요리에 매달렸다.

 

상을 차린 뒤, 이슬비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세하는 식탁에 앉아 맞은편의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슬비는 그의 시선을 이해했다.

 

“난 됐어. 아침도 먹고 왔고.”

 

거짓말이다. 어제저녁 이후로 그녀는 물 한잔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세하와 마주앉아 음식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요리를 하면서 떠올린 추억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그와 마주보고 식사를 하는 순간 그녀가 애써 쌓아올린 감정의 댐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이세하는 그녀의 답에 군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대뜸 밥그릇을 들어 미역국에 말아 넣었다. 최대한 빠르게 식사를 해치우던 어린 시절의 버릇일까, 식사에 국을 올리면 그는 그렇게 밥을 말아 국과 밥으로만 배를 채우곤 했다.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쓸어 넣는 모습 역시도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발 천천히, 반찬도 섞어가면서 먹으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의 행동은 바뀌지 않았다. 이슬비는 국그릇에 거의 얼굴을 처박다시피 하면서 숟가락을 놀리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맛있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세하가 얼굴을 들어 말했다.

 

“먹기나 해. 식사 좀 잘 챙기라니까.”
“미안.”

 

또다. 5월에 만났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는 사과가 많이 늘었다. 예전 같았으면 머쓱해 하며 적당히 넘어갔을 일에도 그는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매번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일까. 그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세하가 다시 숟가락을 뜨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이슬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을 좀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세하가 어떤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먹고 있어. 집안 좀 둘러볼게.”

 

그녀의 말을 들은 이세하가 와락 몸을 일으켰다. 예상외의 격렬한 반응이었다.

 

“앉아있어.”
“왜? 좀 둘러본다고 문제 될 건 없잖아.”

 

이세하의 시선이 표류했다. 뭔가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듯했다. 이슬비는 자신과 아이의 방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러지 마.”

 

이세하가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더 알아야만 했다. 문손잡이는 생각보다 쉽게 돌아갔다. 이슬비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벌컥 열었다.

 

방은 예상대로 황량했다. 그녀가 집을 떠나며 대부분의 가구를 옮겨간 까닭이었다. 남아있는 것은 텅 빈 책상과 선반, 서랍장 하나 정도였다. 먼지는 여전했다. 그가 이 방에 출입할 일이 많지는 않을 터이니 당연한 일일까. 아이가 벽에 남긴 낙서자국이 눈에 띄었다. 이 집이 품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가능성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슬비는 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슬비가 발을 멈춘 곳은 액자가 세워진 선반 앞이었다. 그녀가 두고 간 과거의 기억들. 함께 벚꽃놀이를 갔던 날.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때. 모두가 그곳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추억들은 완전하지 않았다. 사진마다 이세하의 얼굴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법은 다양했다. 라이터로 지진 자국, 매직으로 덮은 흔적. 개중에는 아예 그의 얼굴이 잘려나간 사진도 있었다. 그녀와 아이의 얼굴만을 담은 액자들은 몇 번을 닦았는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액자가 퍽 이질적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비참함으로 이 모습을 조각해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오만이었다. 그녀는 이세하라는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슬비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한쪽뿐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세하의 목소리에 이슬비는 몸을 돌렸다. 여전히 음침한 얼굴이었다. 이슬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의 상처는 깊었다. 그와 그녀의 관계가 바뀐다고 해도, 그녀가 그를 몇 번을 용서한다고 해도, 그의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온다는 이야기에 이세하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잘 받지도 않는 방향제를 뿌리면서, 집 밖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집 앞까지 나와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그의 노력에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의 영역에 흙발로 걸어 들어와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던가. 이슬비는 그의 앙상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키에 맞춰 몸을 숙이는 이세하의 몸에 밴 듯한 반응에 이슬비는 더욱 슬퍼졌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똑, 똑, 똑. 창문을 빗방울이 노크했다. 이슬비는 빗소리를 무시한 채 이세하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무반응에 화가 난 빗방울은 창문을 두드리는 기세를 더했다. 뚝, 툭, 투둑, 투둑.

 

“모르겠어.”

 

얇은 셔츠 너머로 선명히 드러난 그의 뼈마디가 만져졌다. 그녀와 맞닿은 이세하의 몸이 떨렸다. 공포. 혹은 슬픔.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일까. 그의 몸을 뒤흔드는 감정의 뿌리를 이슬비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미안해.”

 

쏴아아아.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야 할 건 나야. 이슬비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녀는 그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이세하의 떨림이 멈춘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그녀도,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

 

먹다가 남은 국은 완전히 식은 채 죽이 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세하가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로 식탁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결과였다. 이슬비는 한숨을 내쉬며 국그릇을 치우고는 냄비에 남은 국을 데우기 시작했다. 그녀에 의해 또다시 식탁머리에 앉혀진 이세하가 변명처럼 말했다.

 

“그냥 그대로 먹어도 괜찮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이슬비가 대꾸했다. “얼마 만에 해주는 밥인데 그런 걸 먹이라고?”
“너무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그래.”

 

그녀를 바라보는 이세하의 눈은 붉었다. 눈물을 잔뜩 참았던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에 이슬비는 괜히 냄비를 다시 확인했다. 당연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약불에 데우기만 하면 그만인 물건이니까. 이슬비는 잠시 고민했다. 이 말을 해야만 할까. 괜히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대로 두는 것 역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사진 말이야.”
“어?”

 

이세하의 목소리에 당혹이 묻어났다. 이슬비는 냄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더 있으니까, 다음번에 줄게.”
“...왜?”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냥 싫다. 그렇게 말해도 이세하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슬비는 억지로 이유를 짜내었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지.”

 

침묵. 이슬비는 고개를 돌려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이세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누군가가 그를 사냥해 박제해놓은 것 같다. 벽난로 위에서 오랜 세월 시간에 그을린 얼굴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슬비는 자신이 적절한 대답을 한 것이기를 바랐다. 미역국이 적당히 데워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이세하에게 다시 상을 차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진은 망치지 마.”

 

이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한 이슬비는 부엌 근처에 다른 짐과 함께 놓인 종이가방을 띄워 자신에게 오게끔 했다. 가방 안에는 TV에서 종종 선전하는 전기면도기가 들어있었다. 제법 시간을 들여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선물이 없었기에 택한 차선책이었다. 선물을 받고 그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빤한 이야기였다. 그녀를 보며 어설프게 웃어 보일 것이다.

 

불안하다. 그 웃음 뒤로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오늘은 모든 것이 물음표투성이다. 이슬비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의 상처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슬비는 굳이 몸을 숙여 상자를 꺼냈다.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이세하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생일선물이야.”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이세하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슬비는 그의 미소를 조금 더 키워보고 싶어졌다.

 

“고마워?”
“그래. 고마워.”

 

미묘한 얼굴. 이슬비는 손을 뻗어 눈썹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그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며칠을 방치했는지 기름기로 꾸덕해진 앞머리는 그녀가 넘긴 모양을 그대로 유지했다. 말을 잘 듣는 것이 제법 주인을 닮은 머리카락이다. 이슬비는 어린 학생에게 시범을 보이는 선생처럼 그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웃어봐.”

 

이세하는 웃었다. 이슬비는 우선은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그 웃음을 지속시키는 것이 될 터였다. 이슬비는 그가 다시 예전처럼 웃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클로저스 > 부부의 나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오는 여름날  (0) 2017.06.03
부부의 날  (0) 2016.05.21

아침 6시. 눈을 뜬 그는 시곗바늘처럼 몸을 일으켰다. 한발 늦게 눈을 뜬 알람이 수면을 방해받은 연인처럼 불만스레 울었다. 남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텅 빈 집에는 알람을 달래줄 다른 손이 없었다. 남자의 무시에 알람이 청승맞게 칭얼거렸다.


5분쯤 지났을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바닥은 그의 머리처럼 엉망이었다. 대충 벗어 던진 셔츠와 속옷을 피해 걷던 그의 발이 종이컵을 쳤다. 종이컵은 바닥에 널브러지며 술에 절은 담배꽁초를 쏟아냈다. 곤란한데. 그는 난처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것도 잠시, 담뱃진에 검붉게 변색한 액체가 담배꽁초 무더기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모습에 그는 기함했다. 흘러나온 내장을 보물처럼 부여잡고 의사를 찾던 시민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남자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화장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누구라도 자신의 손을 잡아줬으면 했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다 괜찮다고, 이제는 지나간 일이라고 해줬으면 싶었다. 그런 사람은 더는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그의 눈가에 잔주름이 덩굴처럼 기어오르고, 세월이 머리칼에 하얗게 쌓이고, 마침내는 얼굴이 무너져 추한 흔적만 폐가처럼 남는 그 순간까지도. 뻣뻣하게 굳은 채 떨리는 손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손목으로 억지로 물을 틀었다. 남자는 샤워기가 쏟아내는 찬물에 머리를 적시면서 영혼을 토해내듯 울었다.


늘 그렇듯, 평범하게 외로운 기상이었다.



내키지 않는 아침이었지만 챙겨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약을 거르기엔 너무도 중요한 날이었다. 메뉴는 늘 그렇듯 라면과 인스턴트 밥이었다. 퇴근이 늦어 밤이 짧은 아내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만들던 때가 있음을 그는 기억했다. 낯설다. 그때의 그와 자신 사이에는 지나치게 큰 간극이 놓여있었다. 그의 손이 다시 부엌칼을 잡을 날이 올까. 고민 같은 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남자는 부정했다. 부엌칼을 잡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목에 구멍을 낼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찰기 없는 밥을 라면과 함께 억지로 밀어 넣으며 위장을 달랬다. 식사를 마친 남자는 입을 열고 약봉지를 털어냈다. 씁쓸했다.


남자는 오랜만에 몸을 씻기 위해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행여 묵은 냄새가 나지 않을까 그는 몸을 꼼꼼히 씻었다. 혹시 덜 씻어내 거뭇한 부분이 있지 않나 몇 번을 확인하면서. 악몽에 시달리며 긁어댄 가슴께의 상처에 흉하게 딱지가 앉아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세워 딱지를 억지로 뜯어냈다. 몸을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붉은 기운이 섞였다. 딱지가 없어도 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은 이미 흉터투성이였다. 대부분은 자해 때문이었다.


물기를 닦아내며 거울 앞에 서자 볼품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집 없이 굴곡진 얼굴, 제멋대로 자라 꼬부라진 수염, 군데군데 검게 변한 피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의 얼굴은 버려진 무덤 같았다. 움푹 들어가 퀭한 눈두덩이 안에서 그의 두 눈만이 도깨비불처럼 매가리 없이 빛났다. 수도꼭지를 열고 얼굴을 씻어도 그런 인상은 가시지 않았다.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손을 뻗어 면도기를 집어 들자 한참을 쓰지 않은 면도날이 붉게 녹슬어있었다. 들지 않는 칼날을 억지로 얼굴에 굴렸다. 얼굴이 따가웠다. 그녀에게 맞은 뺨이 다시 시큰거리는 느낌이었다. 성긴 칫솔에 치약을 대충 묻히고 이를 닦아냈다. 치실질도 잊지 않는다.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한 손길로 치실과 한참을 씨름하던 그는 거울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화장실을 나왔다. 지쳤다.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이불에 파고들고 싶었다. 오늘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옷을 입으며 거실 구석의 종이가방을 확인한다. 간밤에 그를 두고 도망치진 않았을까. 더는 그와 있을 수 없다며 그를 버리지는 않았을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가방은 그가 놓아둔 곳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남자는 문득 불안해졌다. 그녀는 오늘 나를 만나러 나와줄까. 혼자일까. 둘일까. 나를 보자마자 아름답던 얼굴이 구겨지지 않을까. 나의 모습에 또다시 실망하진 않을까. 그녀는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역겨운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는 그녀가 자신을 다시 사랑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혐오가 가속되었다. 남자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자신을 쓰레기로 격하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싫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신 역시도 싫었다. 자신은 애초에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비참했다. 남자는 또다시 울었다.


*


오랜만에 집을 나오니 아침임에도 날이 제법 무더웠다. 6월이 가까워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남자는 옷을 좀 더 가볍게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사실 미리 알았다 해도 그다지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싶었다. 모두에게 보이기엔 너무나도 추한 모습이었다.


약속 장소는 남자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여자는 그가 그의 집에서 멀리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의 정신이,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탓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배려가 무거웠다. 여느 남자들처럼 그녀의 집으로 그녀를 마중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을 나선지 겨우 10여 분이 지났을 뿐임에도 이미 떨리기 시작한 그의 시야가 그에게 차갑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남자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곳은 자그마한 시민 공원이었다. 평일이었던 터라 공원은 거의 텅 빈 채였다. 주름이 자글한 노인 둘만이 유일한 그늘인 등나무 교실을 차지하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그들이 부러웠다.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태양 빛에 몸을 그슬린다면 좀 더 빨리 늙을 수 있을까. 그는 헛된 상상을 했다. 햇빛에 노출된 손등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몸을 타고 오르는 주름을. 등은 굽어들고, 어깨가 쭈그러들고, 마침내 눈이 희미해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미래를 생각했다. 하지만 짧지 않은 시간 칩거의 나날을 이어왔음에도 그의 몸은 굳건했다. 그의 머릿속만이 좌절에 시커멓게 찌들어 있었다.


남자는 미끄럼틀에 기다려 여자를 기다렸다. 햇볕이 따가웠다. 하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 있을 생각이었다. 여자는 시간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앞으로 몇 분만 더 기다리면 그녀가 나타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거짓말이다. 남자는 그늘로 향하기가 무서웠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한 자리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쥐새끼처럼 숨어들어도 그들이 그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그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순간 남자는 신화 속 괴물의 눈을 마주 보고 만 불행한 도전자처럼 돌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버린 남자를 그들은 기괴한 구경거리처럼 바라볼 것이다. 남자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급히 고개를 푹 숙이는 남자를 익숙한 목소리가 불렀다.


“뭐하는 거야.”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벚꽃색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입을 열려다 꽉 막힌 목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남자는 애써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슬비.”


그의 부름에 응하듯 그녀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세하.”


어두운 집안에서 심해어처럼 떠돌던 남자는 그녀의 부름에 오랜만에 수면으로 부상하여 이세하가 되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일단, 옮길까.”

“자리 말이지. 그래.”


이슬비가 따라오라는 듯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인사부터 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뭔가 할 말이 많았을 터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던가, 여전히 예쁘다던가, 요즘 사는 게 어떻냐던가.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눈은 그를 발가벗겨 내팽개치는 듯 했다. 결국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숨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세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이세하는 카페가 싫었다. 그가 좀 더 젊었던 시절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카페에는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분위기. 그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듯 노력하는 사람들. 역시 불안하다. 그는 허락받지 못한 불청객이 된 느낌이었다. 당장에라도 테이블을 닦던 점원이 다가와 그를 내쫓을 것만 같았다. 이세하는 괜스레 커피를 뒤적이며 얼음 소리를 냈다. 이슬비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시선 처리였다. 이슬비는 그가 자신의 시선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녀를 살폈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것은 2년쯤 전이었다. 그에게 숨길 수 없는 손자국을 남긴 2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기억 속의 이슬비와 지금 눈앞에서 말없이 앉아있는 이슬비의 모습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니, 무언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기엔 그가 너무 피폐해진 것일지도. 사실 그는 2년 전의 이슬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의 모습을 기억에 다시 덮어씌운 것일 수도 있었다. 이세하는 무엇이 답인지 알지 못했다.


“뭐 물어볼 것 없어?”


불현듯 이슬비가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일은 어떤지, 여전히 바쁜지, 힘들지는 않은지, 아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그중 하나라도 좋지 않은 답이 나오는 순간 그는 죄책감에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검은 가장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터였다. 모든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수술을 받은 것도, 그녀가 그의 곁에서 떠난 것도, 그녀가 아이를 홀로 키우게 된 것도. 모두 그가 한심하게도 과거에 짓눌려 헤어 나오지 못한 탓이었다. 결국, 그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다지.”

“표정이 전혀 안 그런데.”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있잖아.”

“안 봐도 뻔해.”


옳은 말이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소용없었다. 자기 일에는 그렇게 둔감한 주제에, 그의 말에서는 없는 행간도 찾아내어 읽곤 했다. 괜히 약이 올라 반론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세하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잘살고 있어. 거의 책상에서 먹물만 파는 일이고, 위험할 일은 전혀 없으니까.”


그녀는 질문 없이도 그에게 대답했다. 이전과 똑같았다. 이세하는 묘한 안락함을 느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잠시나마 당시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애써 용기를 짜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슬비야.”

“왜?”


지금 말해야 한다. 다음 기회는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혀를 이세하는 억지로 놀렸다.


“지금, 나 봐줄 수 있어?”


이슬비가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달착지근한 계피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찻잔 속의 새하얀 어둠을 바라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사과하지 마.”


이슬비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세하는 후회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은 역시 미쳐있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낼 리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너를 못 봐도, 괜찮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날 봐줘.”

“...진심이야?”


찻잔과 그의 얼굴 사이에서 표류하는 그녀의 시선에 그는 다시 한 번 죄책감을 느꼈다. 미친 소리였다. 자신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올 자격이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소리 없는 사과가 그를 내리눌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야, 역시 됐어. 잊어줘.”

“그 말이 아니야.”


이슬비의 시선이 갑작스레 그를 똑바로 향했다. 이세하는 그녀의 눈길에 또다시 몸이 굳었다. 보지 마. 아니, 날 봐줘.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기 없는 왼쪽 눈이 그를 준엄하게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자격이 없어.


“나를 다시는 못 봐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가 몇 시간 뒤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말해야만 했다. 불필요한 각주라도 변명처럼 덧붙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최초의 요청조차 꺼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에 이세하는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거짓말.”


이슬비가 그의 대답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를 참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래. 우리의 관계는 끝났을지도 몰라.”


그녀의 말에 이세하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희망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앞으로 계속, 죽을 때까지, 영원히 그는 어둑한 방구석 어딘가에서 홀로 썩어들어 갈 운명이었다. 그녀의 행복을 망가뜨린 그에게 어울리는 음울한 결말이었다. 꽉 다문 입에서 다 자라지 못한 비명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이세하는 자신의 신음 속에 파묻혔다.


그래서 그는 이슬비의 다음 말을 조금 늦게 들었다.


“하지만, 너와 나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어.”

“뭐라고, 했어?”


이세하의 마음이 술렁였다. 이세하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짓밟았다. 깊은 의미는 없을 이야기였다. 그는 괜한 희망을 품을 자격이 없었다. 그녀의 사랑을 갈구할 자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되물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내가 널 싫어하게 됐을 리 없잖아.”


그러지 마. 이세하의 생각이 와글와글 끓어올랐다. 다시 생각해 봐. 네 눈앞에 있는 건 괴물이야. 내가 널 상처 입혔어. 나 자신이 가증스럽게도 그 날의 기억에 가위눌리고 있는데, 너는 오죽하겠어. 내가 네 세상을 절반으로 줄여버렸는데. 이세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랬다. 그는 눈물로밖에 말할 수 없었다.


“울지 마. 괜찮아.”


둑이 터졌다. 이세하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통곡했다. 미안했다. 그녀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했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는 그녀에게 짐이 될 뿐이었다. 머리에 와 닿는 그녀의 손에 그의 울음이 더욱 가열해졌다. 관리가 안 되어 푸석한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녀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였다. 자신에게 왜 이런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인지, 이세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알고 있는데, 자신은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은 그녀였다. 하지만 정작 지금 위로를 받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모든 것이 그랬다.


“괜찮아.”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울음을 그치고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세하의 모습에 이슬비는 픽 웃었다. 이세하는 시선을 피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은 이제 괜찮아.”


그럴 리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반년에 한 번, 정도연 씨에게 검사를 받아. 의안에 문제는 없는지, 거부반응은 없는지, 그런 것들 말야.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


이세하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꺽꺽거리는 딸꾹질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의 한심한 모습에 이슬비가 미소를 띠었다.


“약은 잘 챙겨 먹고 있지?”


이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약을 거르는 날도 잦았다. 식사를 한 끼도 하지 않는 날이 많은 탓이었다.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 역시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슬비는 그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알고 넘어가 줄 사람이었다.


“그거 알아? 우리 애,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


알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기계처럼 잊을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때까지 그 얼굴 좀 어떻게 해봐. 애 입학식에 그런 몰골로 갈 생각이야?”

“어?”


그녀의 말에 이세하는 얼빠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급히 입을 연 탓에 겨우 잠잠해지려던 딸꾹질이 다시 심해졌다. 요동치는 몸을 억지로 멈추려 끅끅거리는 이세하를 보며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평생 애 얼굴도 안 보고 살 생각이었어?”


이세하는 그럴 생각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언뜻 비치는 공포를 마주할 자신이 없기도 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찻숟가락이 떠올라 그의 이마를 툭 쳤다. 이슬비가 그를 놀릴 때면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바보.”


이세하는 항의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져온 종이가방은 어느 틈엔가 그녀의 옆으로 옮겨가 있었다. 가방을 열어본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방 안에는 교육에 좋다는 게임기가 들어있었다. 아이에게 전할 선물을 고르며 며칠을 고민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의 세상은 너무도 좁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 어쩜 그렇게 변한 게 없어?”

“미안.”


이세하의 어깨가 푹 수그러들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것이 없었다. 게임밖에 몰랐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게임기가 들어있는 상자를 살펴보던 이슬비가 또다시 픽 웃었다.


“집에 가면 청소부터 해.”

“청소?”

“그래. 어차피 엉망으로 만들어놨겠지.”


맞는 말이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2년간의 그는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는 존재였다. 인간 이세하는 그곳에 없었다. 배가 고프면 아무 음식이나 먹고, 마냥 누워 있다가 자신이 잠에 빠지는 것도 모른 채 잠들어 가위에 눌렸다. 그리고 눈을 뜨면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곤 했다.


“그리고 관리 좀 하고. 앞으로도 봐야 할 얼굴인데 그게 뭐야.”


이세하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계속해서 두려워하고 고민했던 일을 그녀는 몇 분 만에 정리해버렸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도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고심했을 것이다. 그것이 이세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는 다시 우울감에 짓눌릴 것이다. 내일 아침에도 그는 눈물을 쏟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또다시 혐오하리라. 하지만 그런 자신을 이슬비는 긍정해주었다. 다시는 상종 못 할 쓰레기, 자신의 반쪽을 해한 괴물 대신 그곳에서 이세하를 찾아내 주었다.


이세하는 또다시 눈시울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느끼고는 애써 기분을 다잡았다. 또다시 그녀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는 싫었다. 눈이 아프다는 양 짐짓 고개를 저으며 눈가를 훔친 이세하는 딱딱한 얼굴 근육을 애써 움직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빗자루를 파는 잡화상이 어디에 있더라, 이세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제법 바빠질 것 같았다.



'클로저스 > 부부의 나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오는 여름날  (0) 2017.06.03
그 남자의 생일  (0) 2016.06.03
1 ··· 5 6 7 8 9 10 11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