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핸드폰이 고장났다. 전파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는 차원종의 영향인 듯 했다. 하긴,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험하게 굴리는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용케 버텨왔다. 망가진 휴대폰을 가지고 대리점에 가보니 기기 자체는 수리가 가능하지만 데이터는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게임 데이터는 클라우딩으로 복구가 가능하고, 교우관계가 좁으니만큼 전화번호 같은 것은 애초에 별로 저장되어 있지도 않다. 수리를 하는 김에 여기저기 흠집이 난 액정화면도 교체받아 아예 새것이 된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가게를 나왔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돌아오는 길. 돌려받은 핸드폰을 열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연락처 정보를 입력한다. 친숙한 이름들이 목록에 하나, 둘 추가되어간다. 서지수, 한석봉... 나는 연락처 정보를 저장할 때 반드시 본명으로 저장한다. 한편, 어머니는 나와 정 반대로 별명이나 호칭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저번에 슬쩍 봤을 때 내 전화번호가 ‘우리 아들♡’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해서 하트를 지워봤지만, 유일한 수익은 내 등짝을 내려치는 손바닥을 통해 어머니가 아직 정정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뿐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이니만큼 어머니는 내 핸드폰의 연락처 정보를 볼 때마다 삭막하다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람을 단순한 사회적 기능으로 기억하는 쪽이 더 삭막하고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머니를 예로 들어보자. 나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차원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그냥 ‘서지수’였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떤가? 서지수라는 개인은 어디에도 없다. ‘알파 퀸’과 ‘세하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누군가가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상황은 이제는 사양이다. 나는 ‘알파 퀸의 아들’이 아니라 ‘이세하’니까.


“대충 끝났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제 추가할 것은 팀원들과 김유정 누나의 것 뿐이다.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팀원들의 연락처를 확인한다. ‘아직 다 외우지 못했는데 데이터가 날아갔으니 전화번호를 좀 적어달라’는 내 요청을 들어주며 바보를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유리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거지, 서로 만난지 두어 달밖에 안 됐는데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애초에 누가 누구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매번 제이 아저씨의 놀림감이 되는 주제에...


쪽지에 적혀있는 순으로 이름을 입력해본다. 김유정, 서유리, 제이, 미스틸테인(요금은 도대체 누가 내고 있는건지 의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력을 마친 뒤 미묘한 위화감에 목록을 다시 확인해보니 세글자 기준의 칸을 꽉 채우는 이름들 사이로 방금 추가한 ‘제이’와 ‘리더’가 눈에 띄었다. 아니, 제이 아저씨는 내가 이름을 모르니 어쩔 수 없겠지. 그럼 역시 리더가 문제일 것이다. 평소에 매번 리더, 리더하고 부르다보니 습관이 된 것일까, 폴리시와는 맞지 않게 괜스레 리더라고 적어버린 모양이다. 수정 란으로 들어가 그녀의 정보를 수정한다. 이슬비. 그럼에도 위화감은 가시지 않는다. 왜일까.

 

*


“세하야, 그래서 핸드폰 바꾼거야?”


사무실에 들어오는 나를 예상대로 서유리가 맞이했다. 1시간 뒤에 나갈 근무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야, 아까 갈 때도 말했잖아. 새로 사는게 아니라 저번에 수리맡긴 물건을 찾아오는 거라고... 어, 야!”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그녀는 내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채갔다. 저게 무슨 레인저란 말인가, 로그나 시프지. 유니온의 담당자들이 RPG 게임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이걸로 밝혀졌다. 세상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비일상에 관심이 없어서야 세상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 분명하다. 왠지는 모르겠다만. 아차, 그러고보면 정보 입력에 급급해서 비밀번호 설정을 잊었다. 빗장이 열린 성문으로 밀고 들어가는 병사처럼 그녀는 어떤 방해도 없이 내 프라이버시를 유린했다. 


“에이, 어쨌든 새 거가 된 건 똑같잖아? 그게 그거지 뭐.”


천연덕스레 셀카를 찍어 자신의 연락처 정보에 등록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굴리며 목록을 살펴보던 그녀가 예상대로의 태클을 걸어왔다.


“세하야, 이름을 왜 이렇게 딱딱하게 적어놨어? 내가 바꾼다?”


“아, 예. 맘대로 하십쇼.”


내가 뭐라고 하건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있기에 헛수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탈환하는 것도 요원한 일일테고. 반 억지로 내 허락을 받아낸 유리는 자신의 핸드폰에서 사진을 전송하면서까지 내 연락처 정보를 뜯어고쳤다. 결국 10여분이 지나서야 내게로 돌아온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결과물이 가관이다. 제저씨에 유정언니(이건 내 핸드폰이란 말이다!), 우리 테인이 등등... 연락처 하나하나 친절하게 붙어있는 사진에 이르러서는 그 정성에 감탄할 지경이 되었다.


“야, ‘유리유링♡’이 뭐냐? 하트는 또 왜 붙였어?”


“귀엽잖아?”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태연히 반문하니 되려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하여간 대단한 애다. 투덜거리며 주소록의 이름을 복구하는 중에 손가락이 딱 멈췄다. 이슬비의 연락처다.


‘슬비☆’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항목명이다. 사진을 확인해보니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이런 건 어느 틈에 찍은 것인지, 원. 정말이지 로그나 시프가 딱 맞는 행동거지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녀의 이름 두 글자 뒤에 붙은 별을 지우고 수정을 마무리했다. 


김유정

미스틸테인

서유리

슬비

제이


목록을 보고있자니 아까부터 느끼던 묘한 위화감이 싹 가셨음을 알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아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 신경을 꺼도 무방하리라. 교대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으니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떼워야겠다.


며칠 뒤, 자신이 조는 모습이 내 핸드폰에 등록되어있는 것을 본 리더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안 바꿔줄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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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하고 발에 무언가 채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발밑을 보니 탄화된 차원종의 시체가 내 발길질에 부스러져 잿가루를 날리고 있었다. 작전은 별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듯 했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겠냐만.


팀에 새로운 리더가 부임하고 계절 하나가 지나갔다. 과연 일이 많으면 시간이 빨리 가는 듯 하다.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에 들어선 애송이가 갑자기 원래 활동하던 곳도 아닌 우리 팀의 리더로 온다는 이야기에 낙하산 인사인가, 하는 비웃음 섞인 생각을 했던 것이 엊그제같건만, 녀석은 어느틈엔가 녹아들어 우리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과연 과거 신서울이 쑥대밭이 될 뻔한 G타워 사태 당시라던가, 신서울 지부의 지부장이 테러리스트와 내통하여 어마어마한 사건을 획책했을 때라던가 하는 여러 상황에서 활약했다던 팀의 구성원다운 실력이랄까, 그와 함께 작전을 나가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내가 할 일이 없다. 시커멓게 타버린 차원종 시체 사이를 거닐며 혹시나 아직 살아있는 차원종이 있을까 확인하는 정도가 최근 내 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 몇 번인가는 가만히 구경만 하기도 무안하던 터라 후방지원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보았지만, 출력 조절이 아직 불안정해 폭발에 휘말릴지도 모르니 뒷처리를 부탁한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하, 저 수준에 출력 조절이 안된다고? 도대체 위상력을 몸 안에 얼마나 쌓아두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내 위상력을 물 한 바가지라고 한다면 그는 수영장쯤 되기라도 하는건가.


“상황 종료 확인. 복귀하겠습니다.”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마지막 차원종을 처리한 모양이다. 관리요원에게 보고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랄까, 이럴 때 보면 묘하게 딱딱한 모습이다. 간혹 말하는 투를 보면 원래 그런 성격인 것 같지는 않은데..., 마치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이다.


“K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너무 생각에 깊게 빠져든 것 같다. 모르는 새에 내 옆까지 와서 의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대답을 했다. 슬슬 발갛게 석양이 지는 것을 보니 오늘의 일과도 이정도면 대충 마무리 된 듯하다. 저벅저벅, 말없이 귀환길에 오른다.


“리더? 그런데 말이죠...,”


분위기라도 환기시켜볼까, 하는 생각에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한것인지 내 앞에서 말없이 걸어가고 있다. 아차, 그러고보니 그는 자신을 리더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었다. 리더라고 그를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을 여러차례 겪고 난 뒤 그가 우리에게 한 부탁이다. 이 역시도 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팀 리더를 리더라고 부르지 말라니. 처음 팀 리더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자신을 리더라고 부르는 팀원들에게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을 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일을 가지고 이렇게 잡다한 상상을 펼치는 나를 보며 팀원들은 나이 서른이 넘은 시커먼 아저씨가 나이값도 못하고 여중생처럼 군다고 비웃기도 했지만, 저 젊은 리더가 그만큼 흥미로운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그보다, 나를 놀리기 전에 자기들이 매번 그와 임무를 나가는 내 입장이 되보았으면 한다. 도통 할 일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

 

“좋은 아침입니다.”


일과 시작시간으로부터 약 1시간 전, 사무실에 들어오니 늘 그렇듯이 그가 어제의 작전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스스로 할 말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지각과는 거리가 먼 아침형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나보다 먼저 나와서 전날 업무를 재확인한다거나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는 그의 모습은 사람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런 건 적당히 하다가 내버려둬도 관리요원이 알아서 할 일이건만, 그는 작전내용을 녹화한 영상자료는 매번 확인해서는 팀원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영상을 보며 종이에 무언가를 끼적끼적 써내려가던 그는 영상이 종료되자 금일의 일정을 확인하는 듯 테이블 위에 놓여진 달력을 체크했다. 그러고보니 그의 달력에서 유독 눈에 띄는 붉은 색-나머지는 흑색이었으니 당연히 눈에 띄었다-으로 강조해놓은 날짜를 본 것도 같다. 대충 이번 주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리-, 아니지, 이세하 씨, 오늘 무슨 행사라도 있나요?”


젠장, 또다시 헛나온 호칭을 황급히 고쳤다. 잠이 덜 깨기라도 한 모양이다. 어젯밤에 잠을 설치기라도 한 것인지 나에게로 시선을 향해온 그의 눈 아래에도 다크 서클이 무겁게 매달려있었다. 특이한 일이다. 매번 제일 먼저 사무실에 나오면서도 피곤한 기색을 내비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데. 눈이 부석거리는지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며 그가 대답했다.


“아, 예. 오늘 감찰부에서 요원이 한 명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온 뒤로 처음 있는 일이라 긴장이 좀 되는군요.”


“아하,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에 관해서 팀원들에게 전파하실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


나의 질문에 그는 잠시 고민했다. 뭐, 예의상으로 물어봤을 뿐, 뭘 할지는 뻔한 이야기다. 딱히 책잡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만큼 그냥 적당히 사무실 청소만 해 두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그 이상이었다.


“특별히 추가로 할 일은 없습니다. 팀의 일도 있긴 하지만, 이번 감찰의 주 목표는 제가 될 것 같으니까요. 그냥 평소대로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서류철을 뒤적거리던 그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게 건네었다. 오늘의 일정표 사본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오늘 하루종일 감찰요원에게 붙잡혀 있을 것 같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감찰요원이 온다곤 해도 옷에 제법 신경쓰셨네요?”


그가 입고있는 것은 평소의 옷이 아닌 클로저 정복이었다. 외관상으로 그다지 흉한 옷은 아니고, 아무래도 클로저가 입는 옷이니만큼 어느정도의 활동성도 보장해주지만 어찌됐건 일종의 양복인 셈이라 하루종일 입고 있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유니온에서는 공식적인 행사나 비전투 업무 중에는 정복의 착용을 권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를 지키는 클로저는 별로 없다. 그 까다로운 감찰부 요원들도 정복 미착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을 정도니 오죽할까. 그런 상황이니만큼 감찰요원의 방문에 맞춰 굳이 정복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 뭐라고 말씀드리면 좋을까요. 이렇게 안 하면 안 될 성격이라 말입니다, 그 애는..., 아.”


아차 싶었는지 내 눈을 피해 허공을 맴도는 그의 시선이 재미있다. 그가 대화 중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다. ‘그 애’라, 하하. 이럴 때 한 번쯤은 장난을 치는 것도 연장자로서의 특권 아닐까?


“아하, 그 요원과 꽤 친하신가보죠?”


“...뭐, 그런 셈입니다. 예전 팀의 동료였으니 말입니다. 보나마나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서 저를 볶아대겠죠.”


예전 팀이라, 그가 속해있던 예전 팀은 내 기억으론 하나 뿐이다. 큼직큼직한 사건을 함께 헤쳐온 동료인 만큼 그가 옛 팀원들에게 가지고있을 감정은 단순한 동료애 이상일 것이다. 그가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것도 이해할 만 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한창 학교 동기들과 추억을 쌓고있을 나이에 클로저 활동을 하고있으니만큼 그에게 이런 기회가 자주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릴없이 늘어져있을 팀원들과 심심풀이로 튀길 팝콘정도는 될 법한 화젯거리였다.


“그럼 귀찮은 일은 팀원들에게 맡기고 회포라도 좀 풀고 오시는게 좋겠네요. 관리요원 님께는 제가 말씀드리죠.”


팀의 관리요원이래봤자 적당주의에 물든 흔한 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니만큼, 그를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니다. 평소 저 청년에게 도움받는 일이 한, 두가지도 아니고, 업무에 지장이 없다는 것만 확인된다면 그는 별 상관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업무 시간에...”


“아, 평소에 고생 많이 하셨으니 좀 쉬라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팀원들도 좀 굴릴 줄 알아야 팀의 대장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그가 어쩌겠는가? 어찌됐건 내가 그보다 제법 연장자인데. 평소부터 내 주장에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여온 그이니만큼 이번에도 결국 내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K씨는 정말 제가 아는 누군가를 빼닮았네요.”


고개를 저으며 그가 말했다. 이럴 때마다 몇 번은 들어온 이야기이다. 역시 그가 몸담았던 옛 팀의 이야기일 것이다. 자세히 캐묻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나는 커피라도 한 잔 타마셔야겠다며 사무실을 나왔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눈을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밝은 분홍빛이었다.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제대로 바라보자 그 분홍빛이 그녀의 머리색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다른 부분보다 머리칼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평균에 약간 못 미치는 그녀의 키 때문일 것이다. 나이는 20대 초, 중반 정도일까. 아무래도 오늘 온다는 그 감찰요원인 듯 했다. 대장이 말했던 ‘아침 일찍’이라는 것은, 비교적 일찍이라는 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일찍’이었던 모양이다.


“클로저 L팀 사무실이 이 건물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만..., 혹시 우리 대장의 옛 동료분이시라는 그...?”


아, 잠이 덜 깨긴 한 것 같다. 괜히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옅게 인상을 구겼다.


“하아,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건만... 유니온 신서울지부 감찰부 소속 감찰요원 클로저 이슬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L팀 소속 클로저 K입니다. 아침 일찍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녀의 각 잡힌 인사에 황망히 답변했다. 우리 대장이 누구를 닮아 평소 말투가 어울리지도 않게 딱딱한지 알 만했다. 더 입을 놀렸다간 오랜만의 해후를 시작하기도 전에 망칠까 두려워졌기에, 나는 손에서 타들어가던 담배를 대충 내던지고는 그녀를 안내해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세하 씨, 손님이 왔습... 어라?”


사무실 문을 열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뻣뻣하던 리더가 휴대용 게임 콘솔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분명 그가 처음에 자기소개를 할 때 취미가 게임이라고 언급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그가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싶었지만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옆으로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 세... 하...!”


내 뒤에서 나를 따라온 이슬비 요원의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어디서 튀어나온지 알 수 없는 단검 한 자루가 그를 향해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위기감이 들 만한 상황일 법도 하건만, 그는 게임 콘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연스레 한 손을 들어 단검을 잡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 참.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연덕스레 게임을 일시정지 시키고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안내 감사합니다, K씨. 지금 모습을 보니 소개는 필요없어 보이는군요. 그리고, 오랜만이야. 리더.”


체구에 맞지않게 쿵쿵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이슬비 요원은 그의 인사는 듣지도 않은 채 그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쩜 그렇게 하나도 변한게 없냐느니, 책상 정리도 안 하고 사냐느니, 곧 일과가 시작될텐데 뭐하는 짓이냐느니 하는 지적사항의 소나기를 맞으며, 그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에게 미안하다는 얼굴로 나가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미안한 표정이라곤 해도, 내가 지금까지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편안해보이는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조용히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지금쯤이면 다른 팀원들은 일과 시작 전에 마지막으로 휴게실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의 대장은 옛 동료와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될 터이니 오늘 하루정도는 좀 느긋하게 해나가도 되겠지. ‘리더’라. 그는 분명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가 누군가가 자신을 리더라고 부르는 것을 잘 못 알아듣는 것도, 늘 그렇게 딱딱하게 구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그의 마음속에서 리더는 그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볶고있을 그녀일 테니까.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우울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휴게실로 향하기 전에 담배라도 한 대 다시 태우며 오늘 아침의 이야기를 정리해봐야겠다.


자, 이걸 어떻게 나머지 팀원들한테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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