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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석양이 죽은 자리에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시계를 검게 물들였다. 그 어둠 속에서 의료 물품과 종이로 어지럽혀진 교실을 정리하던 푸른 머리의 청년, 아니, 소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그러모으다가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종이는 이면지였다. 알아볼 수 없는 그래프나 표가 잔뜩 인쇄된 종이를 뒤집자 ‘신강 고등학교’라는 학교명이 적힌 시험지가 얼굴을 드러냈다. 아마 교무실에서 적당히 집어온 종이일 것이다. 제 소명을 잊고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상자 속에 갇혀있던 종이. 그 뒤 영문 모를 실험에 동원되고 다시 버려진 그것에 푸른 머리의 소년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쓰레기통까지 가기도 귀찮다는 듯 종이를 구겨 내던지려던 그는 마음을 고쳐 한 장을 적당히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차원종을 치료했다는 사실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 맘바를 치료한 흔적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무기질적인 기계. 그리고 그 기계보다 더욱 무기질적인 단어를 나열하는 목소리. 평소에도 늘상 겪던 상황이었건만 이만큼이나 그를 답답하게 만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생각을 곱씹으며 주머니 속의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기계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시야에 흰 장발과 머리에서 솟아난 뿔이 눈에 띄는 소녀가 들어왔다.

“나타 님.”

나타라고 불린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소녀는 목을 움츠리며 그에게 주눅든 눈빛을 향했다.

“뭐야? 금방 끝낸다고 했잖아.”

“아뇨, 그게...”

나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처음 그녀를 만난 뒤로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을 늘이는 데에는 정말이지 신물이 났다. 나타는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감각을 애써 억눌렀다.

“젠장, 빨리 용건만 말해. 바쁘다고.”

“아, 네. 그, 트레이너님이 뒷정리는 다른 쪽에서 맡기로 했으니, 이동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잠깐 휴식을 취하시라고...”

“알았어.”

나타가 한숨을 쉬듯 내뱉자 백발의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갔다.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타는 책상에 걸터앉아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눈으로 훑었다.

그로서는 영원히 겪어보지 못할 세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는 누구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대공원에서 상대했던 자기 또래의 남성 클로저를 떠올린 나타는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과 그가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나타와 그를 나눈 기준에 논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시험지를 바라볼수록 음울한 방향으로 가속하는 의식을 되돌리며 나타는 정리해 두었던 펜을 집어 들었다. 공란으로 가득 메워져 있던 시험지에 두 글자가 적혔다.

‘이름: 나타’

그에게는 분명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흐릿한 기억을 아무리 되새겨도 그에게 주어진 이름 석 자가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지긋지긋한 두 글자가 남아 그를 구속했다.

“빌어먹을.”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다시금 떨쳐낸 나타는 시험지에 펜을 놀렸다. 답 따위는 모른다. 그저 적당히 객관식 문제의 답을 체크할 뿐이었다. 금새 칸을 채운 나타는 시험을 일찍 끝낸 학생들이 으레 그러하듯 공란에 낙서를 끼적였다. 쿠크리를 든 자신, 포장마차, 어묵이라는 이름의 음식, 자신에게 어묵을 건네주던 포장마차의 주인. 여우귀가 장식된 노란 후드를 그린 나타는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를 본 지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았을 텐데. 나타는 후드 아래를 검게 칠했다. 그녀의 기억 속 그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사라져버린 푸른 머리의 소년. 그 외에 그가 그녀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나타는 종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종이를 잡은 손에 위상력을 슬쩍 끌어모았다. 손바닥으로 분출된 위상력에 휘말린 종이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펜을 집어든 나타는 교실 구석으로 향했다.

*

“나타 님, 이동 명령이 내려왔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고있던 눈을 뜬 나타는 교실 밖에서 자신을 부른 소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달이 텅 빈 교실을 비추자 하얀 벽 한켠에 이전에는 없었던 얼룩이 드러났다.

‘나타 왔다 감’

얼마 뒤, 현장 정리를 맡은 인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벽의 얼룩을 확인한 뒤 그 낙서를 깨끗이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 다섯 글자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달빛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담담히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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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가 많이 배치되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인구가 밀집된 수도권이나 지방의 광역시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아무래도 지켜야 할 사람도 많을뿐더러, 구획 자체가 복잡해서 차원종을 조기에 발견, 격퇴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만큼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고만고만한 대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는 반대다. 클로저가 가장 많이 배치되는 곳은 유동인구가 적고 인구밀도도 낮은 지역이다. 위상력 억제기의 존재 때문이다. 무식한 나로서는 그 원리를 짐작할 수도 없다만, 어찌 됐건 이 기계를 설치하기만 하면 그 일대의 차원종 발생 위험도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억제기가 가동 중이라도 하급 차원종이 종종 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 정도는 경력 있는 클로저가 아니라도 처리할 수 있으니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렵다. 이 편리한 장비의 유일한 단점은 비용 문제다. 전력을 무진장 잡아먹는 데다가 한 대만 들이려고 해도 0이 몇 개나 붙었는지 한눈에 알기 어려운 돈이 들어간다. 그렇기에 위상력 억제기는 인구가 일정 규모 이상인 중요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한다. 다른 지역은? 클로저를 잔뜩 보내서 해결한다.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먹기는 해도 위상력 억제기에 비하면 훨씬 싼 값이니까.

우리 L팀이 배치된 곳은 그중에서도 위험한 축에 속하는 강원도 산간지방이다. ‘시골’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그런 곳 말이다. 해가 지면 사방이 컴컴해지고, 기분이 꿀꿀해서 술이라도 마실까 하고 괜찮은 주점을 찾으려니 읍내까지는 한참을 나가야 한다. 사이킥 무브를 쓰면 안 되냐고? 돌아올 땐 어쩌고? 나는 취한 채로 위상력을 사용하다가 착지 실수로 병원에 실려 간 클로저가 되어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기는 싫다.

갑자기 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느냐 하면, 우리 팀원들이 정말 죽도록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이런 험지에 발령된 새 리더가 한동안 온갖 상상과 추측의 대상이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젊고 유능한 리더에게 신경 쓰이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팀원들은 당연하게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점에선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고로, 예의 옛 동료가 방문한 이후 내게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리더의 책상에 있는 달력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보통은 별다른 소득이 없다. 그의 달력에는 대개 잡다한 업무 관련 일정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4월이 되는 순간 그 달력에 특기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 4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4월 30일에 또다시 붉은 원이 그려진 것이다. 저번에 붉은 원이 그려진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번에도 제법 기대해볼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다른 팀원들 역시도 여기에 열렬히 동의했고.

문제는 그 날이 도대체 무슨 날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원 외에는 달력에 따로 적힌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저번에도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누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었다. 게다가 이번 연도의 4월 30일은 주말이었다. 그가 굳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이상 우리로서는 그가 그 날에 무슨 계획을 잡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심심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팀원 중 하나가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우리를 만족시킬만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개인적인 일이라나, 뭐라나. 아니, 누가 그걸 모를까보냐. 훤히 보이는 달력에 눈에 띄는 붉은색으로 떡하니 원을 그려놓은 쪽이 잘못이지.

결국, 그는 그 뒤로 계속해서 질문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팀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에게 그 일정에 대해 질문했다. 직접적으로 물어보거나, 아직 몇 달은 남은 휴가 시즌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뜬금없이 화살을 돌려보거나, 마지막 주 주말에 술이라도 한잔 꺾지 않겠냐고 에둘러 물어보거나, 기타 등등.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4월이 절반 이상 지난 뒤에도 30일의 계획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동안 나는 그런 모습을 즐겁게 구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일정이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팀원들의 바보짓에 그가 곤란해 하는 모습도 내게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

오늘도 어제를 똑같이 붙여넣은 듯한 오전이 지나갔다. 적당히 점심을 해치우고 사무실 건물 앞 쉼터에서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중 내 옆자리에 누군가가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민에 찬 리더의 얼굴이 보였다.

“어라, 이세하 씨. 웬일로 점심시간에 여길 다 나오셨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점심시간에도 끼니를 때우고 나면 사무실에 처박혀 업무와 씨름하기 일쑤였으니까. 이 시간에 쉼터에서 그를 본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별것 아닙니다. 그냥 좀 고민하던 일이 있어서요.”

머릿속에 그의 달력과 4월 30일이 스쳐 갔다. 이 시간이면 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 터인데도 굳이 이곳으로 나온 것을 보건대, 한 번쯤 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단 한 대 피겠습니다. 냄새 싫으실 텐데 잠시 실례 좀...”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여기서 피세요.”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나를 멀뚱히 보고 있는 리더의 모습이 제법 재미있다.

“이세하 씨, 담배 안 피우죠? 이런 거 피지 마요.”
“담배 피우시는 분들은 늘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하, 그런가요.”

다시 한 번 연기를 푹 내뱉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시간도 별로 없는 판에 뭘 이렇게 빼는 건지. 귀찮아진 나는 그냥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그래서, 뭐가 묻고 싶은데요?”

내 질문에 그의 표정이 제법 다채롭게 변한다. 이럴 때는 정말 영락없이 제 나잇대의 청년이다.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는지. 싫다는 건 아니지만 뻣뻣한 자세는 좀 풀어줬으면 한다.

“K 씨한테는 정말이지 당할 수가 없네요.”
“그 얘기 몇 번은 들었어요. 본론으로 넘어가죠. 시간도 별로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른 팀원들이 들었으면 환호성을 내질렀을 대답을 내놓았다.

“생일 선물을 준비 중입니다.”

*

몇 번을 캐물은 결과, 예의 그 동료의 생일이 4월 30일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여성의, 그것도 좋아하는 여성의 생일 선물이라, 과연 청춘이구만. 내 감상을 들은 리더는 극구 부인했다. 그의 귀가 불이라도 붙은 마냥 새빨개졌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선물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에이, 잘 아시는 분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뭐랄까, 생각나는 물건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녀의 취미는 드라마 시청이라고 한다. 방에 가면 ‘명작’ 드라마의 블루레이 디스크가 책장을 점령하고 있다나. 20대 초반의 여성치고는 제법 고전적인 취미라고 할 만하다. 그쪽에는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디스크를 쌓아놓는 것 자체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만, 남의 취미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아무튼, 그런 수집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 새 수집품을 선물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이해는 간다.

“그래도 이세하 씨가 선물해준 물건이니만큼 각별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하하.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니라서 말이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는 소리가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집어넣었다. 평소에도 숫기가 없는 편이라고 생각을 하긴 했다만,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좀 해줬으면 한다. 이쯤 되면 웃기도 힘들다.

“그럼 적당히 비싼 물건 해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될까요?”

될 리가 있나. 속이 답답해져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기로 했다. 말없이 담뱃갑을 꺼내는 내 모습에 리더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에 대해 도통 정보가 없는 나로서는 작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추천을 해줄 수 없다면 아닌 것부터 솎아내면 알아서 하겠지.

“화장품은?”
“뭘 쓰는지를 모릅니다. 애초에 화장품이라고 해봐야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요.”
“옷이나 장식품은요?”
“취향을 모르니 제가 막 사주기는 좀 그렇군요.”
“구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순조로운 편이다. 내가 받는 입장이라도 저런 물건을 말도 없이 갑자기 사 들고 온다면 심란할 테지.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덥석 받아들였다면 곤란할 뻔했다.

“핸드백 어때요, 핸드백! 여자는 일단 백 선물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요?”
“...K씨, 진지하게 말씀드리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 세하 씨, 뭘 모르시네!”
“아뇨, 아무리 생각해도 백은 아닙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연애치는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다. 최소한 저쪽이 뭘 싫어하는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함께 활동한 시간이 몇 년이니 오죽하겠냐만. 머릿속이 아예 빈 건 아닐 테고, 주고 싶은 선물은 정해졌지만 확신이 없는 쪽일 것이다. 아마 내가 더 나설 필요도 없겠지. 필터까지 타들어가기 직전인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는 교통정리를 해주었다.

“거, 선물은 벌써 정해놓으신 거 아니에요?”
“예?”

그는 내 질문에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자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떠오른 게 있으신 모양인데, 그대로 가요.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생각해준 물건보다, 이세하 씨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선물 쪽을 훨씬 기뻐할 겁니다.”
“그럴, 까요?”
“그래요. 그리고 같이 사진이나 한 장 찍어서 보내요. 이만큼 도와줬으니 나도 구경이나 좀 합시다.”

내 말을 들은 리더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이쯤 되니 재미보다는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부터가 당장 상대가 없어서 곤란한 판인데 남의 연애전선까지 참견을 해줘야 한다니, 어이가 없다. 나는 누가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 없으려나?

마지막으로 한 대만, 한 대만 더 피우고 들어가도록 해야겠다.

*

시간은 지나 5월 첫날이 왔다. 리더와 나는 비번이었고, 나머지 팀원들은 아마 옷도 대충 차려입은 채로 출근해 휴게실에서 뒹굴뒹굴하며 주말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굉장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위치만 내 방으로 바뀌었을 뿐, 나도 똑같이 의미도 뭣도 없는 주말을 보냈다. 젠장, 솔직히 말해, 리더가 부럽다.

쉼터에서의 대화 뒤에도 팀원들의 질문공세는 계속되었다. 물론, 그의 철벽 수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답을 캐내려고 하는 팀원들과, 거기에 노코맨트로 일관하는 하는 리더의 모습은 남은 4월을 즐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4월이 끝난 오늘까지도 리더의 주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팀원 중 하나가 그 사실을 알고는 내게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해도 그다지 할 말은 없었다. 그냥 지금의 상황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미묘한 감각을 표현하기엔 좀 부족한 설명이었다. 결국, 나는 이유도 모른 채로 벙어리가 되어 팀원들을 구경해야만 했다.

지금은 또다시 점심시간이다. 나는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쉼터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인터넷 대신 사진 앨범을 보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 휴대폰 화면에는 분홍빛 머리의 여성, 그러니까 이슬비 양과 리더가 어색한 표정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 레스토랑이라도 예약해뒀던 것인지 사진 한구석으로 식기가 살짝 비쳐 보였다. 좁아터진 시야의 핸드폰 카메라로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니만큼, 둘은 거의 밀착하다시피 한 수준으로 붙어있었다. 사진 이야기를 할 때 이 점을 노리긴 했다만 정말로 찍어서 보낼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이 사진을 찍은 것인지, 원.

정복과 사복의 차이를 제외하면 그녀는 예전에 처음 봤을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그녀의 한쪽 머리를 묶은 검은 리본 정도일까? 이미 사회의 한 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성인 여성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머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에 한해서는 어색한 부분 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진과 함께 온 메시지에는 조언에 대한 감사와 함께 생일선물이 그 리본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예전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나. 왜 굳이 예전에 있었던 리본을 또 선물하는지 나는 모른다. 거기에 대해서는 그 둘이 잘 알 테고, 나는 굳이 참견하지 않을 셈이다.

사진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보니 내가 다른 팀원들에게 그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를 대충 알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이 잘 어울리는 커플을 방해하지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팀원들이 그녀의 생일에 대해 알게 되어 왁자지껄 떠드는 걸 지켜보는 것 보다는 이 둘이 어색하게 마주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편이 즐겁다. 나머지 팀원들에겐 조금 미안하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맙소사, 이런 식의 생각을 할 나이는 아직 되지 않았을 터인데. 이 둘의 조합은 정말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젠장,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려온다. 담배나 한 대 더 피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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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아닌 리더  (0) 2016.03.21

꿈에서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꿈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의 지각을 전제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지각하는 ‘나’가 사라진다면 세계는 더는 존속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꿈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꾸고 싶지 않은, 그래서 끝내고 싶은 꿈속에 갇혀버렸다면, 높은 곳을 찾아가 뛰어내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세하는 최근 매일 밤 꿈을 꾼다.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 그가 매일 아침 컬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이야기를. 꿈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발현된 위상력을 저주하던 시절, 이세하는 그러한 꿈을 셀 수도 없을 만큼 꾸곤 했다.

 

하지만 그가 최근 꾸는 꿈은 과거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같은 꿈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점이 그랬다. 매일 밤,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면 그는 꿈속의 이세하가 되어 꿈속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그리고 꿈속의 평범한 이세하가 일과를 마치고 잠에 빠지면 그는 다시 클로저 이세하가 되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세하는 그 꿈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고 하는 쪽이 옳았다. 꿈속에서 그는 친구가 많은 편이었고, 점심시간이면 그들과 함께 축구공을 차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완벽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꿈속의 이세하는 과거의 그가 늘 동경해왔던 모습이었다. 두 사람분의 인생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피로해질 만도 했건만, 이세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이세하는 자기 전의 게임 플레이를 조금 줄이고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오늘의 꿈은 어떨까, 하고 기대하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꿈속에서 검은 머리의 이슬비를 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이세하, 듣고 있어?”

 

눈을 감은 채 상념에 빠져있던 이세하를 익숙한 목소리가 현실로 건져 올렸다. 눈을 뜬 이세하는 낯선 곳에서 잠을 청했던 여행자처럼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떠올려야만 했다. 이곳은 검은양 사무실. 시간은 아침. 서유리와 미스틸테인은 경계근무 중. 그와 제이는 이슬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일과 시작 전에 그녀를 따라 이곳에 왔다. 머리에 금세 떠오른 정보들과 달리 현실감은 조금 늦게 부상했다. 부유하는 현실감에 기대어 정신을 차리자,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한창 오늘의 일정에 관해 설명하던 이슬비가 그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딴생각을 좀 하느라.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의 반응을 본 이슬비는 여보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동생, 밤샘게임은 좀 줄이라고 했잖아.”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이가 볼펜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이슬비가 제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보다 제이 씨, 앞에 놓인 신문의 십자말풀이가 점점 완성되어가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이겠죠?”

 

아닌 게 아니라, 제이의 앞에 펼쳐진 신문의 십자말풀이는 어느새 완성까지 세 문제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30분쯤 전, 그를 처음 볼 때만 해도 그것이 새 신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세하는 그가 어느 틈에 그 칸을 다 채운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이는 비뚤어진 선글라스를 바로잡으며 그녀에게 변명했다.

 

“윽, 아니, 대장. 그게, 빈칸이 어서 나를 채워달라고 유혹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제이 씨. 저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슬비와 제이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자 이세하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둘의 대화가 이세하의 귀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반대편 귀로 흘러나갔다. 제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슬비의 분홍빛 머리에 꿈속 그녀의 검은 머리가 겹쳐 보였다. 이세하는 괜스레 손을 들어 잠을 깨우는 양 얼굴을 비볐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었다. 이슬비가 속사포처럼 내뱉는 지적사항에 난타당하던 제이가 테이블 아래로 이세하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시야를 가리는 손을 내리고 제이 쪽을 보려던 이세하는 어느 틈엔가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제이를 향해 서 있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그간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이는 이슬비의 눈에 띄지 않게 손을 움직여 사무실의 출입문을 가리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와.’

 

그녀가 늘어놓는 잔소리에 점점 매몰되어가는 제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세하는 그에게 손을 들어 감사를 표하고는 검은양 사무실을 슬쩍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

 

그늘진 비상계단에서 받는 바람은 시원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멍하니 난간에 기대어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이세하의 귀로 이런저런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운행 중인 버스 소리, 공사장에서 울려 퍼지는 중장비의 소리, 등교 중인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꺅꺅거리는 소리. 여느 때였다면 자신의 손으로 지켜낸 강남이 다시금 생기를 찾아가는 모습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세하는 그로부터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과연 이것이 현실일까. 스스로 질문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세하야.”

 

어느새 그를 따라 나온 이슬비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의 그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왜 나왔어. 금방 들어갈 텐데.”

 

이세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녀의 푸른 눈에 암갈색 빛이 겹쳐 보이는 순간, 그의 세상은 발아래부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너, 요즘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이세하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왔다. 평소에도 그녀가 너무 많은 걱정을 안고 산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마저 걱정하려 드는 그녀가 미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겨주고야 만 자신도.

 

“모르겠어.”

 

이슬비가 힘없이 말했다. 이세하는 당장 돌아서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기는 괜찮다고, 그냥 묘한 꿈 때문에 잠시 이상한 기분이 되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세하는 그녀를 마주 보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네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럴지도 몰라.”

 

이세하의 입에서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실수였다. 등 뒤에서 이슬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로 말을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세하는 억지로 입을 움직였다.

 

“슬비야. 혹시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차원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 안 해봤어?”

 

그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이슬비는 뚝뚝 끊어진 답을 내놓았다.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대답에, 그리고 그 대답 사이에 무겁게 걸친 휴지(休止)에 개미처럼 짓눌려 뭉개졌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상황에서도 앞을 보고 계속해서 달려온 그녀는 어떤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음, 해봤지. 아마 바이올린을 계속 배우지 않았을까. 그땐 콩쿠르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 어머니께서 소리가 참 곱다며 칭찬해주시는 게 그렇게 기뻤는데.”

 

그녀의 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와 몸통, 그리고 사지가 모두 멀쩡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녀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말에는 생기가 없었다.

 

바이올린이 특기인 이슬비. 처음 들었을 때는 특기 난에 게임을 적은 자신과의 차이에 놀란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들으니 새삼 무거운 이야기였다. 그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존재인 그로서는, 무엇을 하더라도 그녀의 짐을 덜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세하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

 

수많은 위로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하지만 이세하는 그중 자신이 꺼낼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

 

그날 밤, 이세하는 학교의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검은 머리의 이슬비를 보았다. 전후 관계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그녀가 모 콩쿠르에서 입상한 기념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쪽 세상의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행복한 그녀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니 그 역시도 행복했다.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와 가족과 포옹하는 그녀에게서는 빛이 흘러넘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세하는 어두운 객석에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검은양 팀의 리더인 그녀를 볼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드러난 것 같아 서글퍼졌다.

 

무대가 끝난 뒤 이슬비는 가족들과 함께 학교를 나서는 듯했다. 왁자지껄 떠들며 강당을 나서는 인파 사이에 끼인 채, 이세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이세하는 그것이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를 불러볼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이쪽의 이슬비는 이세하를 알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와 그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인 검은양 팀은 그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세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애초에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그녀가 그를 만나게 된 세상 쪽이,

 

더욱 비정상인 것이 당연했다.

 

이세하는 행복으로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

 

이세하는 며칠간 계속해서 고민했다. 본디 그는 문제에 당당히 마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넘기 어려운 벽이 앞을 가로막으면 그 벽을 넘을 궁리를 하기보다는 우회로를 찾거나 그 길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그의 행동양식이었다. 그렇기에 20년 가까이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한 주제를 이토록 길게 고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세하는 마음을 굳혔다.

 

며칠 뒤, 늦은 저녁, 이세하는 검은양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옥상에서 이슬비를 기다렸다. 빡빡한 팀 리더의 업무량에 더해 관리요원인 김유정의 일까지 돕고 있었으니 그녀가 퇴근이 늦는 것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몸을 혹사하는 그녀에게 걱정 섞인 핀잔을 건네곤 했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늦은 퇴근이 반갑게 느껴졌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보름달이 걸려있었다. 신호등처럼 붉은 기운이 도는 달이었다. 그런 달이 그에게는 세상이 보내는 경고로 보였다. 그곳에서 정지. 건너지 마시오. 이세하는 그 경고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왜 불렀어?”

 

일이 마무리되었는지 옥상으로 올라온 이슬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꺼내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와글와글 아우성쳤다. 혼란스러워진 그는 엉망진창이 된 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슬비야, 만약에...”

 

그의 목이 턱 막혀왔다. 그가 감히 꺼내기엔 너무도 무거운 이야기였다. 답답해진 이세하는 넥타이를 대충 끌러 내던졌다. 이세하는 속으로 되뇌었다. 되돌리기엔 늦었어.

 

“만약에, 돌아가신 부모님이랑 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도한 질문이 이슬비를 후려쳤다.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흐릿한 달빛만이 유일한 광원인 옥상에서도 이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이슬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장난치는 거야?”
“진지하게 들어줘.”

 

말도 안 되는 비교란 것은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연인도 뭣도 아니다. 그냥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의 팀원일 뿐이었다. 그 둘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헛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냥 ‘예.’, ‘아니오.’로 대답만 해줘. 내가 사라지고 대신 너희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너는 그렇게 할 거야?”

 

비겁한 질문이었다. 그 아닌 누구라도, 그리고 몇 번을 묻더라도 그녀는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쭉 그녀를 보아온 이세하는 그 사실을 자기 일인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세하가 들으려고 하던 것은 그녀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고마워.”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대답하기 전의 침묵이었다. 그래서 이세하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 그대로 옥상 아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이슬비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세하는 몸에 둘러쳐진 위상력을 의식적으로 해제했다.

 

그녀에게 남긴 감사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세하는 진심으로 이슬비에게 감사했다. 목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흑백사진 같았던 그의 삶에 색채를 되찾아주었다.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던 과거에서 그를 자유롭게 했다. 새로운 목표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중한 가족과 자신을 저울질해주었다. 이세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잠에 들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이슬비를 멀리서 조용히 지켜볼 것이다. 아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너를 가까이에서 봤으면. 이세하의 머릿속에 아쉬움이 스쳐 갔다. 그것도 잠시, 충격과 함께 이세하는 의식을 잃었다.

 

*

 

눈을 뜬 이세하의 시야에 낯익은 천장이 들어왔다. 그가 일과 뒤에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방이었다. 아침이 되었는지 창밖에서 햇빛이 들어와 시야는 밝았다. 이불 아래로 손발을 움직여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몸을 일으켰다.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이래서는 자신이 지금 어느 쪽 세상에 있는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는 생각에 이세하는 집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고 두 발로 서려던 이세하는 발아래에서 딱딱한 바닥 대신 다른 것이 느껴지자 당황했다.

 

“크헉.”
“아저씨?”
“이, 일어났어, 동생?”

 

예상 밖의 목소리에 시선을 내린 이세하는 그에게 허리를 밟힌 채 몸을 떠는 제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다시 침대에 앉았다. 아무래도 바닥에 누워 있었던듯 했다.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이세하의 목소리가 음침해졌다. 그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일이 그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제법 아프다는 듯 허리를 쿵쿵 때리며 자리에 앉은 제이는 그에게 한숨을 쉬어보였다.

 

“왜겠어? 동생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서 그런 거잖아.”
“제가 왜 살아있는 거죠.”

 

이세하의 질문에 제이는 이세하의 얼굴에 시선을 향했다. 제이는 평소의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채였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이세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듯한 그 눈빛에 이세하는 그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네?”

 

이세하는 그의 질문에 놀라 침대 위에서 몸을 튀겼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 역시도 예상 내였던 것인지, 제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동생은 꿈에 간섭하는 차원종의 영향을 받았어.”

 

*

 

차원종이 위험한 것은 단순히 힘이 세고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기괴한 생물들 중 적지 않은 종류는 인간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차원종의 정신간섭은 그러한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들을 잔인하게 괴롭혔다. 제이는 그 어떤 공격에도 굳건할 것 같았던 이들이 이러한 공격에 너무도 간단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이세하가 영향을 받은 차원종 역시도 그러한 개체 중 하나였다. 행복한 꿈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목표물을 피폐하게 만드는 존재. 하지만 그뿐이었다.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가벼운 우울증과 비슷한 증세로 일시적으로 몸져눕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희생자를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아예 정신을 파괴하여 폐인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던 다른 차원종에 비하면 무해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제이는 이세하의 상태를 파악했어도 거기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상태에 대해 팀의 리더인 이슬비에게 이야기하기는 했다. 이세하가 정 힘들어한다면 그 건을 핑계로 그간 고생한 보상을 겸해 며칠 정도 휴가를 주기라도 하면 그만이라는 첨언과 함께. 며칠 전, 이세하를 비상계단으로 내보낸 뒤 제이가 이슬비와 단둘이 남았을 때가 그때였다.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세하가 그가 생각한 만큼 정신이 굳건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세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간의 그의 상태를 확인한 결과를 바탕으로 제이를 대기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슬비였다. 제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미안해, 동생. 괜한 고생을 시켜서. 대장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했어.”

 

이야기를 마친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에게 사과했다. 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이세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다시 앉혀놓았다.

 

“제가 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건 맞지. 차원종에게 당했으니까. 그런데, 동생?”
“왜요?”

 

그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빛이 음흉해졌다. 이성 문제로 이세하를 놀릴 때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꿈에 뭐가 나왔어?”
“...그걸 꼭 말해야 돼요?”

 

평소 그에게 여러 번 당해온 전적이 있는 이세하는 절대로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차원종의 영향하에 있었다고는 해도 자신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세하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의 반응을 본 제이는 묘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아냐, 안 해도 돼. 그보다, 슬슬 긴장하는 게 좋지 않겠어?”
“왜요?”
“곧 대장이 네 식사를 들고 들이닥칠 거거든.”

 

제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발칵 열렸다. 이슬비가 그가 곤란할 때를 노리는 데에는 귀신임을 익히 알고 있던 그였지만, 이쯤 되면 뭔가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 동생. 대장도.”

 

이슬비와 교대하듯 방을 나서며 제이가 그를 놀리듯 말했다. 방으로 들어온 이슬비는 쿵쿵 소리가 날 법한 발걸음으로 그의 방을 가로질러 책상 위에 식사를 올린 쟁반을 내려놓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세하, 너...!”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려던 이세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이슬비는 그런 그의 고개를 억지로 숙이게 하고는 그의 어깨를 투닥투닥 때려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세하는 어깨를 두드리는 그녀의 주먹 한 대 한 대가 온 힘을 담은 차원종의 일격보다 아프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시끄러. 넌, 늘, 제멋대로야!”
“내가 잘못했어.”
“구로에서도, 강남에서도, 늘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윽.”

 

그녀가 과거의 일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이세하는 입이 턱 막혀버렸다. 이슬비가 한 마디씩 쏘아 보내는 원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상능력자도 막아낼 수 없는 화살이 되어 그를 꿰뚫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주먹을 얻어맞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제이 씨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어...”

 

그의 어깨를 때리던 손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탁해졌다. 이세하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제에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니,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바보야.”
“정말로, 미안해.”

 

*

 

그 뒤로도 한동안 이슬비는 그를 때리면서 그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았다. 이슬비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자 기운이 쭉 빠져버린 이세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녀가 가져온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분이 금세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아침 식사는 많이 식어있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이세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정말 무슨 꿈을 꾼 거야?”

 

맙소사. 이세하는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방문 앞에서 그와 제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이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 말 안하면 안 될까?”
“응. 안 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피해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세하는 생각을 바꿨다. 그녀는 그 질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답을 들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꿈에 대해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의 말에 이슬비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이 소녀에게 이길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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