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몇 년을 치장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야전용 간이 침대가 끼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켜켜이 싸인 먼지와 곰팡내가 뒤섞여 코를 괴롭힌다. 지친다. 자신의 방에 놓여있을 인형이 그립다. 차라리 경계를 서고 있는 동료들과 자리를 바꾸고 싶다. 안 돼, 이슬비. 체력을 온존하는 것도 필요해.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모포를 뒤집어썼다가 다시 내렸다. 불안감에 들썩이는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내린다. 빨리, 자자.


그녀의 노력은 천막이 들춰지는 소리에 맥없이 스러졌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잠깐 물건이라도 가지러 온 거겠지. 이슬비는 돌아보지 않았다. 뜻밖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내리누를 때까진 그랬다.


“쉿.”


놀라 들썩이는 몸이 억눌리고 숨죽인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동시에 눈앞이 푸른 어둠으로 가려졌다. 이 감촉, 이 빛깔, 이 목소리. 이세하. 넥타이라도 끌러서 온 것일까. 머리에 떠오른 이름을 내뱉으려 입을 열자 대번에 손가락이 쑤셔 들어왔다. 어디서 긁혀서 온 것인지 눅진하게 굳은 피 맛이 찝찔하다. 혼란한 중에도 기어코 머릿속을 스쳐가는 걱정에 이슬비는 흐릿하게 쓴웃음을 흘렸다. 내 코가 석자네.


몸을 더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똑, 똑, 단추 풀리는 소리. 떨리는 손길에 속도가 여의찮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뚜둑. 몇 개는 억지로 뜯겨나간다. 거칠어지는 숨소리. 귀가 간지럽다. 땀 냄새라던가, 안 나려나. 묘하게 한가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의외로 그녀는 제법 잠에 가까워져 있었는지도. 이 상황 전체에, 현실감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는 냉랭한 소리가 뒤늦게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이거, 풀어.”


제법 서늘하게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했건만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모기 날갯짓같은 호소였다. 대답은 없다. 여보라는 듯 고개를 휘저어도 시야를 가리는 푸른 천은 요지부동이다. 변하는 것이라곤 몸을 훑는 손길 뿐. 아래로, 아래로. 얇은 천 위를 쓰다듬는 손가락의 감촉이 선명하다. 신음이 제멋대로 흐른다. 한동안 무엇도 품지 못했던 비부는 금새 젖어들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침의 감촉에 이슬비는 자신이 어느샌가 입안의 손가락을 핥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속옷 위를 맴돌던 손가락이 흘러나온 꿀을 조금 퍼내올려 그녀의 달아오른 뺨에 비볐다. 지금은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잠시였다. 힘을 빼고 몸을 기대자 손길이 그녀를 안아들어 앉혔다.


숨죽인 목소리가 텐트를 채울 때까지는, 그로부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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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나서야 겨우 있었구나, 하고 깨닫고 마는 것들이 있다. 집에 돌아오면 당연하다는 듯 반겨주는 목소리. 눈을 뜨면 차려져있는 아침밥.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친구. 첨단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가락. 기타등등. 이세하는 그 목록의 끝에 작게 항목을 추가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자각.

—인간성.


“쇼그, 대상: 이슬비. 고통 피드백 활성화. AI 지원 익일 06시까지 비활성화.”

“사용자 이세하. 명령권 확인했습니다. 실행합니다.”


불만이 가시지 않은 반 쪽의 자홍빛 눈길. 이세하는 그녀의 두 눈이 모두 푸르렀던 시절을 기억한다. 글쎄, 그녀를 마지막까지 말렸다면, 그래서 그녀의 머리가 여전히 4월의 벚꽃과 같았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그렇더라도 어딘가에서 그녀는 그만 벽에 부딪히고 말았을까. 그 스스로가 좀 더 열심이었다면, 그녀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면.


“말했잖아. 집에서는 돌려 놓겠다고.”

“…불편하단 말야.”


이슬비의 볼이 부푼다. 이런 부분에선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일과가 끝나면 예외없이 드라마 삼매경에 빠진다던가. 그가 딴 짓이라도 할라 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던가. 그렇게 딱딱하게 굴다가도 묘한 부분에서 귀여운 면이 있다던가. 누군가가 그녀가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세하는 할 말이 없었다.


—여러분께는 필요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말해드리고 싶네요.


“안 돼. 말 들어.”

“…….”


그가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슬비가 도무지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였다. 물론 그녀에게 딱히 식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유지하는 것은 음식이 아닌 충전한 에너지니까. 하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음식을 씹고, 삼키고, 소화하고, 그리고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이어온 의식이자 즐거움을 갑작스레 멈출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하세요. 신체의 몇 퍼센트가 기계인지는 상관없어요.


미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뜨거운 음식을 기계적으로 밀어넣는 모습에 의문을 표하는 그에게 이슬비는 감각 센서를 대부분 꺼놓고 있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편리하니까. 맞는 이야기다. 감각이라는 것은 때로 불편하다. 그녀처럼 왠만해선 다치지 않는 몸을 가진 경우엔 더욱 그랬다. 합리적인 결정. 지극히 그녀답다. 그리고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아이는, 여전히 인간이에요.


그녀라면, 예전의 그녀라면, 정말로 그랬을까.


*


어제와도, 그제와도 같은 저녁이었다. 이슬비는 간단히 세면세족을 마친 뒤—이 역시도 이세하의 주문이었다—거실에 들어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식사의 준비는 늘 이세하의 담당이었다. 순수히 자신의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를 귀중한 시간을 뺏어가며 그녀에게 준비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엔 당번제를 주장하던 그녀였지만 이세하는 완고했다. 그렇게 이슬비가 두 손을 든 것이 한 달쯤 전의 일이다. 이세하는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떠올리며 최대한 가볍게 식사를 준비했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TV에서 울려퍼지는 CM송과 한데 섞였다.


“밥 먹어.”


이세하의 말에 이슬비가 몸을 띄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몸을 일으키면 될 것을. 그가 그녀에게 억지로 식사를 시키게 된 이후로 그녀는 꼭 그런 식이었다. 괜한 일을 시키는 그를 향한 작은 항의일까. 그렇잖으면 저 편이 오히려 몸에 익어버린 것일까. 이세하는 작게 혀를 찼다.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집어올리는 그녀의 매끄러운 손가락. 이세하는 수저를 들기 전에 잠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림을 집어들어 입에 넣는다. 오물오물. 작게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 그 입술은 차가울까. 따뜻할까. 부드러울까. 손가락을 들어 저 볼을 살짝 찔러보고 싶다. 잡다한 생각에 표류하던 이세하는 그를 향하는 이슬비의 시선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왜?”

“밥.”

“…?”

“안 먹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너 보느라 바빠서.”

“장난치지 말고.”


이슬비의 눈가가 살짝 찌푸러들었다. 저 표정은 본디 그녀의 것이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고개를 흔들어 털어낸다. 예전처럼, 늘 이렇게 가벼운 이야기만 할 수 있다면.


“정말인데.”

“됐거든요.”


괜히 웃어보였다. 이슬비는 고개를 젓고는 젓가락을 놀린다. 오물오물. 입이 다시 움직인다. 관찰은 이어진다. 이세하는 입에 들어가는 반찬의 맛을 잊었다. 그의 그릇은 금새 비었다. 식사가 제법 느린 편인 이슬비 역시도 조만간 식사를 마칠 터였다. 이세하는 머릿속의 시계를 다시한번 확인한다. 한동안 잠자코 식사를 하던 이슬비가 그러고보니, 하고 운을 떼었다.


“오늘은 양이 좀 적네.”

“…그래?”


약간의 휴지가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실수였다. 그녀의 눈에 대번 걱정이 어린다. 내 고민은 다 너 때문인데. 이세하는 약간 원망스럽다.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럼 왜 그래. 이슬비가 볼멘스레 묻는다. 글쎄, 왜일까. 지금 냉장고를 열었다간 그녀는 그의 선물을 기계적으로 밥과 함께 입 안으로 밀어넣을 것 같다. 이세하는 대답을 미룬다. 그녀가 케묻는다면, 그럼 그는 어떤 핑계를 대야할까.


“좀 이따가 얘기할게.”

“그러던가.”


의외로 시원스레 납득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맥이 빠졌다. 그녀가 그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다. 예전같았으면 곤란하게도 몇 번이고 그를 닦달했을까. 지금의 이슬비는 이슬비일까. 시끄러워. 이세하는 찬물을 들이켰다. 이슬비는 이슬비야. 이세하는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이슬비는 이슬비야.


*


드라마의 차회예고가 시작되자 이슬비는 TV를 껐다. 그녀는 차회예고를 보는 것보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는 편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세하는 그녀가 처음 수술을 받았을 무렵을 떠올렸다. 실수로 전황예측 시스템을 작동시켜 한창 흥미진진하던 드라마의 전개를 스포일링 당했던 날. 하루종일 시무룩해있던 그녀의 모습을 지금의 그녀와 겹쳐본다. 지금의 그녀는 다음 화를 상상하는 것일까, 그렇잖으면 프로그램이 도출해낸 전개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일까. 


“끝났어?”

“응. 끝났어.”


이슬비가 소파에 몸을 기댄다. 드라마란 건 몸의 긴장을 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재밌는 것일까.


“이제 쉬어야지.”


와서 앉으라는 듯, 그녀의 손이 소파를 통통 두들긴다. 이세하는 그 자리에 서서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궁금증이 어린다.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만.”

“…그래서, 아까는 뭐였어?”

“글쎄, 뭘까.”


조심스레 운을 띄워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맞춰봐.”

“음….”


그녀의 고민이 제법 길다. 이세하는 그 시간 속에 빠져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손에 잡히는 이것은 무엇일까. 냉장고 문이다. 어느새 땀이 배였는지 손아귀에 잡히는 감각이 제법 미끄럽다. 그녀의 손에는 땀이 날까. 그렇지 않을까. 이세하는 그저 손잡이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답을 기다렸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글쎄. 네가 말해줄래?”


시야가 어둡다. 이세하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여전히 어둡다. 그는 맥없이 답을 토해냈다.


“오늘은, 네 생일이야.”


무표정. 돌아오는 반응은 없다. 이세하는 슬펐다. 그가 공포에 질려 장님처럼 더듬거리던 장막이 갑작스레 벗겨진 기분이었다. 장막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끝없는 공허 뿐이었다. 조금 늦게, 이슬비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야.”


참담하다. 이세하는 충동적으로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음식. 초콜릿 케이크. 이세하는 케이크를 꺼내 그녀에게 들어보였다.


“그럼, 이건 누구 케이크야?”


침묵이 제법 길었다. 어깨가 무엇에 짓눌리듯 무겁다.


“……글쎄.”


그녀에게 주었던 첫 번째 선물을 떠올린다. 팀원들과 함께 산 펭귄 인형. 선물을 받아들며 행복한 미소를 띠우던 그녀. 그 모습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이세하는 그 날에 그녀를 막지 못한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웠다. 털썩. 케이크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세하.”

“왜.”


대답하는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눅눅했다. 이세하는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그를 바라보며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우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클로저야.”

“…….”

“차원종을 쓰러뜨리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자야.”


부정의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강남이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당당히 외쳤던 그녀의 다짐. 이세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난, 그거면 충분해.”

“이슬비는, 어딨어?”


반항처럼 되묻는 그의 말에 이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색이 다른 두 눈. 이세하는 거기에 기억 속 푸르른 두 눈을 애써 대입해보았다.


“…이슬비는, 필요없어.”

“나는 필요해.”


치솟는 욕지기에 헛구역질을 내뱉으며 이세하가 말했다. 이 말을 조금 더 빨리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몇 번을 후회하면서도 실체는 희미했던 미련이 구체화된다. 그날, 너를 붙잡고 말할 수 있었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슬비가, 필요해.”

“…….”


대답이 없다. 이세하는 주저앉는다. 그저 울고싶었다. 자존심따윈 내던진 채로 미친 듯 울고 싶었다. 시야 한 켠에 들어온 케이크 상자는 한 켠이 우그러져 있었다. 이세하는 그 망가진 상자가 꼭 자신같다고 생각했다.


“…꼭, 드라마같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몸이 물 먹은 솜 같다.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다. 이슬비가 작게 웃는다. 그녀의 웃음은 허무하다.


“후회같은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가오는 그림자에 이세하는 고개를 들었다. 이슬비는 그녀의 앞에 그와 꼭 닮은 자세로 주저앉았다.


“나빴어.”

“…뭐가.”


정도연은 그녀가 인간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이세하는 과학도, 공학도 잘 몰랐다.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에 얼마만큼의 노력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 아이는, 여전히 인간이에요.


“네가 지금 그렇게 말하면….”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훑어냈다. 따뜻했다. 사람의 눈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바보였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주욱 여기에 있었다.


“그만 후회해버리잖아.”

“…….”


잔뜩 뒤엉키고, 동시에 텅 빈 머리를 억지로 정리한다. 그는 누덕누덕 누벼낸 단어를 애써 꺼내었다.


“…후회같은 건, 하지 마.”

“해.”

“…하지 마.”


이슬비가 말없이 그를 노려본다. 이세하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마저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무거운 팔을 들어, 이세하는 이슬비를 껴안았다. 품 안의 그녀는 따뜻했다. 실제로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결국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뭘?”

“넌 여전히 이슬비야.”


대답이 없다. 온기, 온기. 그저 온기 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넌, 이슬비야.”


그녀의 팔이 그를 마주 안았다. 고마워, 하는 속삭임에 이세하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더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슬비를. 클로저가 아닌 이슬비를.


*


“케이크, 맛있네.”


형태가 조금 망가진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이슬비가 말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케이크는 그에게 지나치게 달았다. 어쩌면 직원에게 상담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맛있어.”

“미안하네. 뭉개져서.”


이슬비는 상관없다는 듯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볼을 슬쩍 찔러보았다.


“하지 마.”

“…그간 많이 참았단 말이야.”


이슬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에게 한바탕 쏟아놓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축하드립니다. 이슬비 님, 이세하 님.”

“쇼그?”


이세하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아까 분명히 비활성화 했을 터인데.


“사실, 비상시를 대비해서 비활성화 상태에서도 기본적인 기능은 유지됩니다. 그동안은 재미있어서 말을 안 했을 뿐입니다.”

“…뭐?”


이세하보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슬비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러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세하는 이 다음의 상황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두 분의 대화는 정말 드라마를 뛰어넘는 성질의 것이더군요. 여러분의 협조로 저는 또다시 감정의 완성에 다가섰습니다.”

“…….”


이슬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폭발 직전의 화산이 이런 느낌일까. 이세하는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눈치가 없달까, 그저 평소대로랄까. 쇼그는 그녀에게 또다시 기름을 퍼부었다. 결국, 이슬비는 폭발하고야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이렇게 시술이 후회되는 건 처음이야!”


내일이 되면 당장 정도연에게 따져야겠다는 것이 이세하가 제대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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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과 이렇게 되는 걸 줄곧 기다렸어요.”


그녀는 여배우가 내는 흘러내리는 실크처럼 여린 목소리에 무심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펭귄인형을 끌어안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TV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여배우와 같이 누운 남자 배우가 품안의 여배우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한밤중이란 걸 알려주는 은은한 청색의 조명과, 두 사람을 뒤덮은 희미한 어둠은 외설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연인들의 달콤한 밀회에 초점을 맞춰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배우들의 행동과 대사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여배우는 따사로운 품에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했다. TV밖에서 그들의 밀회를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여배우가 남자의 심장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 배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배우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라마에선 흔히 자주 쓰이는 연출이었다. 보는 사람이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보는 이들마저 미혹해 마음을 안정케 한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빛나는 TV를 묵묵히 응시했다. 나도 언젠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 시민들의 안전을 수호하는 클로저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순수하게 요구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점점 더 드라마에 몰입해갔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좋아요.”

“왜?”

“나는 가끔씩 내가 나인지도 모를 때가 있거든요. 일에 집중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업무 때문에 전화를 받을 때조차…가끔씩 그래요. 남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생소한 기분이 들 때가 너무나 많아요. 어쩌면 현실에 적응하는 대가로 조금씩 나를 잃어가는 걸지도 모르죠.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게……이따금씩 정말 두려워요. 남들이 나를 조각조각내서 갈취해가는 것 같아.”


여배우의 목소리는 대사를 읊을수록 울음기에 흠뻑 적셔들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치밀어오를 때라면 그녀 역시 겪었다. 처음으로 차원종과 대치했을 때가 그랬다. 그녀는 점점 극에 몰입했다. TV 속 남자의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설정인 건지 남자는 갈등에 처하면 표정을 내보이기 전에 입술을 오므렸다. 남자는 여자를 품 안에 당겼다. 카메라 앵글이 그들이 누운 침대를 훑었다. 이불 위로 여자를 껴안은 강인한 어깨가 드러나자,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넌 너무 감성적이야.”

“감성적이면 안 되나요?”

“그럼, 안되지. 감성적이란 건 남들과 똑같이 상처받아도 더 아파하고, 더 힘들어한단 거니까. 정말 안 좋은 거야.”


여자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알 바깥을 무서워하는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렸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남자는 여자의 말을 다 듣자마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씌웠다. 가슴을 간질이는 밀회는 계속 이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그녀는 때때로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짓기도 하고, 남자 배우처럼 입술을 달싹거리기도 하고, 얼굴을 귓바퀴까지 붉히면서 극에 집중했다. 이건…요즘에 본 드라마들 중에선 제일 표현이 노골적이야. 그녀는 TV에서 시선을 떼고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11시 24분.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시간이기도 한만큼 방송국도 그걸 모르고 이런 드라마를 틀어줄 리가 없었다. 방영시간이 한 시간도 넘는 프로그램이라면 품 안의 펭귄인형을 떼놓을 만도 하건만, 그녀는 한 시도 인형을 품안에서 떼질 않았다. 


그녀의 품으로부터 펭귄인형이 자유로워진 시간은 드라마가 끝나고 협찬 스폰서가 나올 때였다. 그녀는 펭귄인형을 소파에 가지런히 세워놓고, 베란다를 가린 커튼을 살짝 걷혔다. 막이 시작되기 전 관객의 수를 가늠하려는 여배우처럼. 여느 여배우처럼 화려한 치장은 아니었지만 연분홍빛의 머리만큼은 화사한 색깔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은 객석이 아니라 하늘로 향했다.


오늘은 달이 안보이네.


달빛이 닿지 않는 밤하늘은 새까맸다. 도시인 신서울에 살다보면 별 하나 없이 밤하늘이 까맣단 것쯤이야 대수로울 거 없는 일이지만, 달조차 보이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내일은 비가 온다는 걸 떠올리곤 커튼을 다시 닫았다.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새초롬해보였다. 


그녀는 몸을 깨끗이 씻고 따끈해진 몸으로 침대에 파고들었다. 슬비는 얇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기다 번뜩 후회가 들었다. 인형. 가지고 올걸. 동고동락한 펭귄을 거실에 두고 오니 품이 허전했다. 그녀는 언제까지 인형이 없으면 잠을 못자는 밤을 보낼 순 없단 생각이 들었다. 해서 슬비는 인형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내일 할 일. 아카데미에서 배운 격투술. 작전을 수행할 때 알아둬야 할 매뉴얼. 고전했던 차원종. 그리고 아는 이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좋아요. 


한순간, 가녀린 몸이 들썩거리고 이불은 슬비의 머리끝까지 뒤집어졌다. 왜 그게 지금 생각나는 거지! 한숨처럼 낮고 달콤하게 깔렸던 여배우의 음성은, 열여덟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기엔 무리였다. 그게 아니면 비가 오기 전날 밤이라 기분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드라마 속 연인들이 침대에서 나눴던 달콤한 말들이 망막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을 기울여서―베개로 귀를 막아보기도 하고 이불을 둘둘 말아서 잊고 잠에 들려고 했다― 잊어보려 노력을 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별수 없이 위상력을 사용해서 펭귄인형을 침대로 호출했다. 


한밤중 펭귄인형이 둥실둥실 떠올라서 다가오자, 그녀는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비록 피가 흐르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펭귄인형의 귀여운 외모와 푹신한 감촉은 그녀에게 안정을 가져다줬다. 이렇게만 보면 그녀는 흉악한 차원종과 대치하는 클로저나 팀을 짊어지는 리더로 보기엔 너무나도 여려보였다. 슬비는 인형을 품에 안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 잠 못 이루는 기나긴 사투가 비로소 끝난 셈이다. 


나는 당신과 이렇게 되는 걸 줄곧 기다렸어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잠이 들 때까지 몇 번이고 대사를 웅얼거렸다. 비가 오기 전날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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