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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고등학교 2학년 서유리를 아는 이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한 가지 의견은, 그녀가 일반적인 남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인간적으로 결격사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외모는 TV에서만 볼 수 있는 소위 아이돌들의 그것과도 비견해도 손색이 없었다. 거기에 모나지 않고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격이기까지 했으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고 할만했다. 하지만 남자나 다름없는 그녀의 평소 행동거지를 본 사람들은 대개 마음속에서 그녀의 등급을 신경 쓰이는 이성에서 좋은 친구로 격하시키기 마련이었다.

 

서유리 본인 역시도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자신은 머리도 나쁘고, 분위기도 잘 못 읽는다. 소꿉친구인 우정미도 그녀를 종종 아저씨 같다고 이야기할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남성들이란 으레 자신이 지켜주고 싶어지는, 그러니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땀내-그녀의 경우는 호구 특유의 냄새도-나는 운동계에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억척스러운 면이 있는 자신보다는, 클로저 활동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팀 리더 이슬비나 강남사태 당시 만난 오세린이라는 선배가 남성들에게 더 인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서유리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대담한 시도를 한 것은 클로저 정식 요원복을 지급받는 과정에서였다. 보급품 품목을 대강 훑어보던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짙은 커피색 스타킹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얼마 전 놀러 간 이슬비의 집에서 본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었다. 빠릿빠릿한 일처리가 자랑인, 소위 말하는 ‘유능한 사무원’ 스타일.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녀가 양복과 함께 신는 스타킹이었다. 한 번 기억 속에 박혀버린 이미지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맴돌았다. 서유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요원복을 수령해왔다.

 

그날의 복구 작업 지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서유리는 자신이 수령한 요원복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다. 처음 신어보는 스타킹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이게... 나야?”

 

평소의 다소 흐트러져 보이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여성이 한 명 서있었다. 꼭 맞는 검은 수트에 단정한 넥타이와 포인트를 잡아주는 푸른 스커트. 거기에 처음 신는 스타킹에 꼭 어울리는 롱부츠는 그녀의 긴 다리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잠시 넋을 놓고 거울을 보던 서유리는 이 옷을 수령한 것을 자찬하며 들떠 있다가 잠을 청했다.

 

딱히 그녀의 일상이 그날부터 마술처럼 180도 반전한 것은 아니었다. 학우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좋은 친구’나 ‘착한 누나’등에 가까웠고, 그녀의 행동거지 역시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원복을 입고 클로저 활동을 하고 있으면 서유리는 자신과 예의 기억 속 사무원을 어느 정도 동일시할 수 있었다. 복구 작업은 순조로웠고, 이전 강남 사태 때는 물론이고 학교나 구로역에서 차원종과 싸우던 때와 비교해도 상황은 점점 호전되고 있어 위험한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을 쉴 때면, 뿌듯한 기분이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

 

“유리야, 잠깐만.”

 

이슬비가 작전 종료 후 땀을 닦아내던 서유리를 잠시 불러 세운 것은 그런 나날 중 하루였다. 그녀는 구슬땀이 맺힌 서유리의 이마를 잠시 바라보았다.

 

“응? 왜, 슬비야?”

“몸이 안 좋거나, 피곤하거나 하진 않아? 요즘 날씨도 점점 더워지는데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은 어느덧 초여름이라고 해도 좋을 때가 되어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차원종 잔당을 처리하다 보면 몸은 어느새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고, 그런 상태로 퇴근 시간이 되어갈 때 즈음이면 샤워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비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징후를 느낀 적은 없었다.

 

“괜찮은데? 나, 검도할 땐 이거보다 훨씬 힘들었어. 몸만 움직여도 지치는데 검도부는 완전 찜통이고, 거기에 호구 생각만 하면... 아휴...”

“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이슬비는 서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리 쪽을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미간을 약간 찌푸린 것이, 뭔가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유리야, 그, 옷 말인데...”
“응? 이거 왜?”
“그 요원복, 덥지 않아? 땀이 찬다던가...”

 

서유리는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옷이 뭐 어때서? 서유리는 의문의 시선으로 이슬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다리 쪽을 향해있었다.

 

“옷? 괜찮은데? 왜 그러는데?”
“음... 아냐. 괜찮다면 됐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봐.”

 

서유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잠시간의 생각 끝에 한 생각은 역시 자신은 이런 고민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는 결론을 내린 뒤 그녀는 웃으며 이슬비를 껴안았다. 이슬비의 얼굴은 금세 당혹으로 물들었다.

 

“에이, 우리 슬비는 걱정도 많아! 뭔진 모르겠지만 괜찮아, 괜찮아!”
“아니, 잠깐. 유리야!”

 

이슬비의 반응을 보면서 깔깔 웃으며 서유리는 생각했다. 별 문제 없을 거야.

 

*

 

하지만 며칠 뒤, 서유리의 생각은 틀렸음이 드러났다. 그녀에게 있어서 최악의 방식으로. 그 시작을 알린 것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서유리를 맞아준 그녀의 동생이었다. 부츠를 벗고 집안에 들어온 그녀를 반기러 나온 동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나, 냄새나!”
“응?”

 

서유리는 당황했다. 작전중에 묻은 차원종의 피가 아직 배어있는 걸까? 서유리는 동생처럼 코를 킁킁대보았지만,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라 이미 적응이 된 것인지 별다른 냄새를 맡지는 못했다. 차원종의 체액이 일반인에게 위험할 수 있다며, 일과 종료 후 장비수입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파하던 이슬비가 생각난 서유리는 재빨리 몸을 둘러보았지만 신통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서유리는 동생의 어께를 붙잡고 직접 질문했다.

 

“무슨 냄새? 이상한 비린내 같은 게 나니? 역한 냄새야?”

 

동생은 고개를 젓고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맡은 냄새를 표현할 단어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뒤, 동생은 이거다, 싶은 단어가 생각난 듯 얼굴을 확 펴고는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빠 발 냄새랑 똑같은 냄새 나!”

 

*

 

“그래서, 나한테 약을 받았으면 한다?”

 

제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평소 약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던 그녀가 이런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리라곤 제이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제이는 손가락 사이로 서유리를 훑어보았지만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일 뿐, 그로서는 어디가 문제인지, 무엇이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옷을 제외하고는.

 

“그러고 보니 유리야, 그 옷은 오랜만이다?”

 

서유리가 입고 있는 옷은 한 달 넘게 계속해서 봐와서 익숙해진 정식 요원복이 아닌, 처음에 지급받은 검은양 팀의 요원복이었다. 서유리가 정식 요원복을 썩 맘에 들어 한다는 것을 그간 익히 봐와서 알고 있었던 제이는 그녀가 왜 옷을 바꿔 입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 저어, 그게 있잖아요, 아저씨...”
“오빠라니까.”

 

제이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 사람 말 안 듣는 아가씨는 처음 볼 때부터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굳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마저도 ‘아저씨’라는 호칭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자신이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일까, 하고 제이는 잠시 울적해졌다.

 

“아니, 어쨌든 그건 됐고. 무슨 약이 필요한건데? 어디 다쳤어? 자, 자. 이 오빠한테 말해 보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이는 서유리가 답답해진 제이가 캐물었지만 서유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진 제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서유리를 달래는 작업을 시작했다. 몇 분 뒤, 모기 목소리로 대답하는 서유리의 요구를 들은 제이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만지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좀약을 달라고?”
“아저씨, 목소리가 크잖아요!”

 

서유리가 빽 고함을 질렀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재해복구 본부의 한가운데였고, 시끄러운 장비 가동음을 뚫고 우렁차게 울려퍼진 서유리의 고함소리는 주변에서 쉬고있던 특경대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서유리는 얼굴에만 때이른 가을이 온 양 다시금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 참... 뭐라 해야되나...”

 

제이는 난감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위로할 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건만, 이런 식으로 개인의, 그것도 다 큰 여성의 치부를 듣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럴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가. 제이로서는 자신은 받아본 적도 없는 압박 면접이 이런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눈앞에 서있는 서유리의 어께가 조금씩 떨리며 들썩거리는 것이, 우물쭈물하다가는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제이를 더욱 압박해왔다.

 

“일단, 지금은, 그 뭐냐... 약, 없으니까... 끝나고 나면 우리 집으로 가자. 응? 진정하고, 유리야. 제발 부탁이다.”

 

이미 부끄러움이 임계점을 넘었는지 서유리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런 서유리의 양 어께를 붙들고 이야기하는 제이의 뒤통수를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난타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 한 이 꼴을 대장이 봤으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잡생각이 제이의 머리를 잠시 스쳤다.

 

*

 

“이거 참. 좁고 더러워서 미안하구만. 일단 들어와.”

 

제이의 집은 좁은 옥탑방이다. 제이는 전쟁 기간 동안 군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기도 했고 실험 때문에 연구소에서 살았던 적도 있어 나름 깔끔한 성격이었지만, 최근 바쁘기도 했고 꿈자리도 사나워 자기 전에 술 한 잔이 습관이 된 탓에 방 여기저기엔 맥주 캔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발로 빈 캔을 밀어내 대충 앉을 자리를 만들고 서유리를 앉힌 제이는 침대 밑에서 구급상자를 잔뜩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게 어디로 갔지...?”
“...없는 거 아니에요?”

 

등 뒤에 서유리가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우울한 모습으로 앉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제이는 자신이 아무렇게나 뒹굴던 집이 가시방석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약상자를 평소에 좀 정리해놓을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제이를 짓눌렀다. 워낙 독하다 보니 자신은 잘 쓰지 않는 약들이라고 구비만 해놓고 어딘가에 처박아놓은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십여분이 지나고 방이 수많은 약병으로 약국을 방불케하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나서야 제이는 겨우 무좀약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유리야! 찾았어!”

 

어울리지도 않는 호들갑을 떨며 제이가 약을 치켜들고 뒤를 돌아보자,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묻은 채로 앉아있던 서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거, 예요?”
“그래. 이건 먹는 약이고 이건 바르는 약이야. 일단 둘다 줄 테니 일단 챙겨. 바르는 약부터 써봐.”

 

제이의 말을 들은 서유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이거 바르면 바로 나아요? 곧바로?”
“아니, 이거 작전용 회복약같은거 아니니까...”
“고마워요, 오빠! 가서 이거 발라볼께요! 동생들 밥 때문에 저 빨리 가볼게요! 내일 봬요!”

 

당황한 제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서유리는 문을 열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계단을 급히 내려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내일 아침에 주인집에게 한 소리를 들을 듯 했다. 지금의 모습을 보건대, 아마 서유리는 저 약의 효과를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짜 싸움은 내일부터이리라. 제이는 머리를 긁으며 책장을 뒤적였다.

 

“여기 어디에 신문 스크랩을 해둔 게 있을 텐데...”

 

*

 

다음날, 꼼꼼하게 약을 바르고 잤건만-당연하게도-차도는 없었고, 클로저 일이 비번이었기에 서유리는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채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저씨... 좋은 약은 자기가 다 먹고는...”

 

자신에게 자신만만하게 약을 내주던 제이의 얼굴을 떠올린 서유리는 짜증이 치밀었다. 서유리가 투덜거리며 약을 꺼내던 차에 벨이 울렸다. 약을 책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커다란 가방을 맨 제이가 서있었다.

 

“안녕.”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제이를 보자 서유리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전날 밤에 기분좋게 들어와 기대에 부풀어 약을 바르고 잤던 자신을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짜증이 치밀었다.

 

“뭐, 유정 씨한테 물어봤지. 너희 집 찾기 정말 힘들더라.”

 

한밤중에 전화해 서유리의 집을 묻자 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목소리가 차가워지던 김유정의 반응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제이는 잠시 오한을 느끼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다 뭐고요?”
“별건 아니고. 도와주는 김에 확실히 도와주려고.”

 

제이가 아래, 정확히는 서유리의 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양말을 신은 채였다. 제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서유리의 눈이 자신의 발에 닿자 서유리는 발칵 화를 냈다.

 

“아저씨가 안 도와주셔도 되요!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요! 약도 효과도 없던데요, 뭐!”

 

제이는 헛웃음을 쳤다. 어쩌면 이 아가씨는 어제 예상이랑 한 치도 다르지 않을까.

 

“아니, 어제도 말했지만 그 약은 그냥 평범하게 오랫동안 써야 되는 약인데. 하루 만에 나을 리가 없잖니, 유리야.”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했어. 네가 안 들어서 그렇지.”
“아휴, 안 했어요!”
“했어.”

 

씩씩대는 서유리를 보고 있던 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현관으로 밀고 들어왔다. 서유리는 그런 그를 낑낑대며 막아보려 했으나, 위상능력자이긴 하나 어찌됐건 여성에 고등학생인 서유리가 단순한 완력 싸움에서 그를 막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서유리의 방을 발견한 제이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움찔했다.

 

“아니, 역시 이건 좀 그런가. 어디 앉을 데 없나?”
“식탁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오, 그렇네. 땡큐.”

 

제이가 넉살좋게 식탁 의자에 앉자 맞은편 의자에 서유리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세게 앉았다. 자기가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 그리 유복한 환경도 아니었고, 그런 자랑할 것 없는 모습을 팀원에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니 서유리는 우울해졌다.

 

“가족들은? 동생들은 아직 학교인가?”
“친구랑 놀러갔어요. 저녁밥 먹을 때가 되면 오겠죠.”
“그렇게 시간이 넉넉하진 않구만. 그럼 빨리 본론만 얘기하고 가지.”

 

본론이라는 이야기에 서유리가 다시 도끼눈을 하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배신감을 떠올리면 당장 식탁 아래로 발길질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이상한 아저씨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하는 생각을 서유리는

해보았지만, 이세하나 이슬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미스틸테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강남사태 당시에 제이가 무좀약 이야기를 잠시 꺼냈던 것을 기억해내어 제이에게 상담해보려 했지만 결국 이 꼴이다. 서유리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서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제이는 벗어놓은 가방에서 자그마한 약통을 주섬주섬 꺼냈다. 소아용의 감기약 등이 들어갈 법한, 액체가 들어있는 튜브 타입의 작은 플라스틱 병이었다.

 

“자. 니가 원하던 즉효약인데, 이게.”
“네?”
“너 학교에 있는 동안에 얻어왔다. 전쟁 중엔 이렇다 할 클로저용 옷 같은 것도 모자라서, 다들 아무렇게나 군복에 전투화 차림으로 싸워대느라 너랑 같은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았거든.”

 

시큰둥하게 제이의 이야기를 듣던 서유리가 와락 일어섰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이 약을 받았단 말인가? 서유리의 머릿속에 캐롤리엘의 조수로 일하고 있는 우정미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서유리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잃을 것만 같았다.

 

“그걸 또 누구한테 말했어요? 아저씨 때문에 못 살겠어, 정말! 누구한테요?”
“캐롤리엘한테. 그냥 내가 무좀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걱정 말고.”

 

제이가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어 물고는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기 전에 이번엔 그걸 바르고 자 봐. 그럼 일단 상황은 나아질 거야.”
“‘일단’요?”
“그래. 그리고 이거 읽어보고.”

 

제이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서 서유리에게 건네주었다. 가방 안에는 비슷한 서류철이 잔뜩 들어있었다. 상황이 자꾸만 휙휙 바뀌는 탓에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가방이 컸던 까닭이 저것인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서류철을 열자 신문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무좀, 재발, 재감염 막는 것이 중요...’...?”
“그 약은 어디까지나 당장 급한 불만 꺼주는 거거든. 뭐니뭐니해도 평소에 관리를 잘 해주는 게 제일이지.”
“...이렇게 읽어서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머리가 나쁘잖아요.”

 

서유리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제이는 선글라스를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다. 그래서 내버려둘 수 없는 거겠지만.

 

“일단 읽어보고... 잘 모르는 부분은 나중에 이 오빠한테 물어봐. 다른 서류철 보면 양복 입을 때 주의해야할 점 같은 것도 모아둔거 있으니까 그것도 보고. 가방은 놓고 간다.”
“네? 가시려구요?”
“네 동생들 올텐데 뭘. 그럼 수고해.”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 넓지 않은 서유리의 집 거실을 뚜벅뚜벅 가로질렀다. 서유리는 아직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로 제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신발을 신은 제이는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그녀에게 인사삼아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건강이 제일이다.”

 

*

 

복구본부의 일상은 계속된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제이는 연구용 잔해의 전달을 위해 우정미에게 향했다. 그녀는 임시로 설치해둔 컨테이너에서 무언가를 배송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캐롤리엘에게 보내는 물품이리라.

 

“안녕. 늘 하던 일 하러 왔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

 

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이 아이들과 연관되기 시작한 이후로 한숨이 부쩍 늘어난 기분이 드는 제이였다. 차원전쟁 당시만 해도 팀의 마스코트였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제이는 그가 가져온 차원종 잔해를 수령한 우정미가 그에게 종이가방을 하나 내민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초콜릿? 역시 이 오빠는 인기 있구만.”

“밸런타인데이가 몇 달 전 얘긴데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지.”

 

웃으며 가방을 받아든 제이는 안에서 약봉투를 발견하고 우정미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우정미는 그런 그에게 측은하다는 듯한 눈빛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캐롤리엘 선생님한테 들었어요. 그... 무좀 때문에 고생하신다면서요? 일단 평소에 많이 도와주시니까 드리는 거예요. 정말이지... 관리 좀 하시라구요. 매번 건강, 건강 하시면서.”

 

제이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그가 캐롤리엘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이런 식이어서는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제이가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대답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등을 둔탁한 충격이 덮쳤다.

 

“크헉!”
“정미정미야!”
“서유리 너, 여기 위험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 조심히 좀 들어오라니깐!”
“아휴, 미안! 우리 정미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만 잊었지 뭐야! 아저씨, 미안해요!”

 

제이는 위험 신호를 머리가 쾅쾅 울리도록 보내오는 허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서유리의 뒤를 이어 검은양 팀의 다른 멤버들도 컨테이너로 들어왔다.

 

“임무 수고하셨습니다, 제이 씨. 정미야, 그거 전해드린거야?”
“무좀약 말이지? 방금 드렸어.”

 

우정미와 이슬비의 대화를 듣자 제이는 목에서 피 맛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지금 정도면 아마 피를 토하더라도 괜찮은 상황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제이는 나머지 멤버들이 우정미와 이야기하는 틈을 타 유리에게 슬쩍 눈짓했다. 부디 그녀가 이 신호를 이해해서 화재를 좀 돌려주기를. 제이의 눈을 본 유리는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에이, 제이 오빠도 참! 어쩌다가 무좀이 다 걸린 거예요!”

 

제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이세하는 미안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사안을 전달하던 김유정의 말을 떠올렸다. 눈앞의 칙칙한 방을 홀로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전에 대기실로 사용하던 검은양 팀의 사무실이 그다지 좋은 환경이었던 것은 아니다. 좁은 공간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채워 넣다 보니 청소라도 한번 할라치면 억지로 쑤셔 박혀있는 물건을 모조리 꺼내는 대공사를 해야만 했던 데다가, 팀원들이 모두 대기 중인 비좁은 방에 끼어 앉아 게임을 하다 보면 옆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이슬비의 불만스러운 눈초리가 뒤통수에 날아와 박히기 일쑤였으니.

 

그렇다곤 해도, 이 방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도 일단은 지명수배자인 늑대개 팀원들을 검은양 사무실에 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지 곰팡내가 진동하는 방과 임시방편으로 대충 구해온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엉망진창인 청소상태의 조화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이세하의 신경줄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김유정과 함께 방을 먼저 확인하고 돌아온 이슬비가 그를 향해서 보낸 묘한 시선 역시도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그가 측은하다고 말하는 듯한 기묘한 표정. 지금까지 그녀가 그에게 그런 얼굴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세하는 이슬비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뭐,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 중요한 일이었으면 말을 했을 테고.’

 

이세하는 나쁜 방향으로 질주하던 생각을 억지로 정리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그는 스마트폰 배터리의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안주머니에서 충전기를 꺼내 들었다. 문득 휴대용 게임기의 배터리 역시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두 전자기기의 충전을 위해 방을 훑으며 콘센트를 찾기 시작했다.

 

*

 

“오, 찾았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엉망진창인 방에서 어렵사리 콘센트를 발견한 그는 기분 좋게 충전기를 연결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스마트폰이 충전 중임을 알리는 표시등이 점등되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콘센트에 몇 번이나 충전기를 다시 연결해보던 이세하는 엄습하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투덜거렸다. 구석에서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는 커다란 TV가 연결된 콘센트를 확인해보려던 그는 창밖으로 이어진 TV의 전력선에 당혹했다. 창문을 열고 몸을 내민 이세하는 특경대 차량에 설치된 발전기에 연결되어있는 전력선을 발견했다.

 

“뭐하는 거야?”

 

뒤를 돌아보자 어느 틈엔가 방에 들어온 이슬비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 방 콘센트 고장 난 것 같은데? 핸드폰 충전을 할 수가 없잖아.”

 

이슬비가 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떠오른 예의 그 표정을 본 이세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내가 말 안 했었나? 여기, 전기 안 들어와.”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이슬비의 대답이 이세하에게는 사형선고처럼 들려왔다. 잠깐의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온 그가 그러면 충전은 어떻게 하냐는 식의 질문을 절박하게 던져봤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를 다시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창밖에서 발전기를 봤지? 급한 대로 특경대가 지원해준 그 발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공용 장비가 우선순위니까 개인적인 용도의 전기 사용은 최대한 자제해줬으면 해.”
“여기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몰라.”

 

이세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다. 이곳은 위험하다, 너무 개방되어있다. 유사시에 탈출하기도 어렵다. 적들도 이곳의 존재를 금방 알아챌 것이니 어서 위치를 옮겨야 한다. 전기를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는 처사냐. 내 게임기는 어쩌란 것이냐, 등등. 뒤로 갈수록 항변보다는 그저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되어가는 느낌이었지만 그에게는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챙겨가는 그로서는 휴대용 게임 콘솔과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이슬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전기가 없으면 심심해서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네?”

 

그녀의 말에 다른 핑곗거리를 준비하던 이세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슬비의 모습에 흠칫했다. 거의 밀착하다시피 그와의 거리를 좁힌 이슬비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의 어깨를 살짝 붙잡아 내렸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에서 달콤한 향기가 확 풍겨왔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검은 리본에 최면에 걸린 듯 이세하의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신장 차를 줄인 이슬비는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그녀의 귓속말에 방금 가까스로 찾아낸 핑계가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할 말을 잃어버린 그는 멍청한 얼굴로 이슬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본 이슬비가 쿡, 하고 웃음 지었다.

 

“그럼,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방 체크는 적당히 마무리하고 나오도록 해.”

 

이슬비의 손이 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려갔다.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숨결이 그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이슬비가 방을 나간 뒤에도, 이세하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가버린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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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곧 밸런타인데이인데 선물은 준비하셨나요?”

 

퇴근이 가까워진 시간, 달력을 보다가 이슬비의 난데없는 질문을 받자 김유정이 뜨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슬비는 이번에도 틀렸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2월에 들어서면서 이런저런 일이 많았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에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김유정이 망가진 표정을 바로잡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에게 질문을 되돌리자 이슬비의 답답함은 더욱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지. 뭐라도 준비했니, 슬비야?”

“아뇨. 주말에 팀원들에게 줄 걸 직접 만들어볼까 해서요. 설마, 잊고 계셨던 건가요?”

“응?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잖니?”

 

허공을 표류하는 그녀의 눈길에 이슬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곧 결실을 보리라 생각했던 제이와 김유정의 관계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지부진한 채였다. 두 사람이 감정을 앞세우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나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들이 도대체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제이와 김유정이 서로에게 평균 이상의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건만 어째서 매번 이런 식인 것일까. 억지로 붙여놓으려고 해도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를 슬금슬금 밀어내며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둘의 모습을 떠올린 이슬비는 결국 이번에도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저랑 같이 만들지 않으실래요? 제이 씨한테 주실 거잖아요? 초콜릿.”

“아? 어? 내가 왜 제이 씨한테 초콜릿을 준다는 거니?”

“제이 씨도 그래도 나이가 비슷한 사람한테 받아야 기분이 좋을 것 아니에요? 제가 드려봤자 그냥 주전부리나 다를 게 없다구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가슴께에 겨우 닿는 체구의 이슬비에게서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받는 제이의 모습이 김유정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유정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 봐요. 언니가 제이 씨정도는 좀 챙겨주세요. 테인이랑..., 세하는 제가 줄 테니까.”

 

엉뚱한 생각이 스쳐 말에 미묘한 휴지를 두고 만 이슬비는 김유정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김유정 역시도 나름의 생각에 빠져있어 그에 대해서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슬비는 안도하며 김유정과의 약속 시각을 잡았다.

 

*


김유정은 브라우니의 재료를 사기 위해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적당히 매장에서 산 기성품으로 때웠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와 그녀 사이의 일이라면 늘 그렇듯이 김유정은 평소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의 기세에 밀려 기어이 약속을 잡고야 만 김유정은 제작에 드는 재료비를 전액 자신이 부담하는 것으로 마지막 체면을 지켜야만 했다. 한숨을 쉬며 제빵 코너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던 김유정은 발렌타인 특선 코너를 깨작이는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제이 씨?”

“아, 안 사요! 그냥 구경하는 거..., 어라, 유정 씨?”

 

김유정을 본 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아, 뭐, 그냥 저녁 찬거리나 좀 살까 해서요.”

 

왠지 부끄러워진 김유정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그에게 줄 선물임에도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이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밸런타인데이지?”

 

덜컥. 김유정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가 으레 아무 생각 없이 엉뚱한 말을 늘어놓으며 장난을 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허당 같으면서도 종종 이렇게 허를 찌르는 그의 모습은 정신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이 씨는 어차피 팀원들한테 받을 거잖아요?”

“유리가 뭘 좀 산다고 하긴 하던데, 우리 리더도 별다른 말은 없어도 주지 않을까? 성격이 있으니.”

“그럼 됐어요.”

 

김유정이 짐짓 자르듯 말하자 제이의 몸이 축 처졌다. 그가 이런 일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이런 데 일일이 의식적으로 반응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럼 유정 씨는 우정 초콜릿이라던가, 안 주는 거야?”

 

‘우정 초콜릿’이라는 말에 김유정이 발끈했다. 이럴 때라도 빼지 말고 그냥 초콜릿을 달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감찰부의 최서희 요원이 그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인 만큼 그에게 초콜릿을 줄 사람은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많을지도 모른다. 가끔 헛소리를 해서 그렇지, 입만 다물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미남에 키도 큰 제이니 그를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는 여성 한, 둘쯤은 있을 것이다. 약이 오른 김유정은 그에게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안 줘요. 제이 씨는 다른 사람들한테 잔뜩 받을 거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서 빨리 들어가야 하니까 이만 실례할게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는 김유정의 등 뒤로 제이가 그녀를 부르며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모두 무시했다. 처음에는 ‘그라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생각했건만, 머리에 다시 떠올릴수록 그녀의 머릿속엔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초콜릿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서 술이나 진탕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김유정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구매목록에 맥주를 추가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초콜릿 재료를 사서 돌아갔다. 그만두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슬비가 지을 풀죽은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귀가한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맥주에 취한 채 곯아떨어졌다.

 

*


약속대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김유정의 넋두리를 들은 이슬비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 무슨 청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에피소드란 말인가. 업무 중에 자신의 감정을 능란하게 숨기는 그녀의 모습을 평소부터 곧잘 보아왔던 터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정도로 그녀가 제이에게 가진 감정이 특별하기에 그런 것이려니 하며 이슬비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었다.

 

“하아, 어찌 됐건, 제이 씨가 유정 언니한테 화가 많이 났거나 하진 않았을 거예요. 남은 건 언니가 밸런타인데이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숙취와 자책으로 얼룩져있던 김유정의 얼굴이 그녀의 말에 조금 밝아졌다. 그녀가 넋두리를 늘어놓는 사이 이슬비는 그녀가 가져온 재료들을 모두 꺼내 배치해 둔 뒤였다. 자취를 하면서 이런저런 요리를 많이 해본 김유정이었지만 초콜릿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던 김유정은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시 네가 만들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만들었다간 쓰레기만 늘어날 것 같은데...”

 

레시피를 다시 확인하던 이슬비는 김유정의 말에 힘이 빠진다는 제스쳐를 과장되게 취해 보였다.

 

“언니, 중요한 건 상태가 아니라니까요. 유정 언니가 직접 만들어준 초콜릿이라는 게 중요하지. 남자 마음을 잡는 데는 수제 요리만 한 게 없다구요.”

“...너도 남자친구 없잖니.”

“...드라마에서 봤어요.”

 

덩달아 어두워지는 이슬비의 표정에 김유정은 지뢰를 밟은 느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까지의 관계가 역전된 듯한 모습으로, 김유정은 음울하게 누군가를 중얼중얼 욕하고 있는 이슬비를 끌고 조리대 앞에 섰다.

 

“슬비야,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니?”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게 구는 김유정의 모습에 제정신을 찾은 이슬비가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자신의 행동에 PC의 전원을 켜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이슬비의 모습에 김유정은 자신이 이렇게 구는 것이 그렇게 안 어울리고 이상한 것인가 하고 약간의 우울감을 느꼈다.

 

“일단 이걸 읽어보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는 드리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아셔야 요리하기가 편하니까요.”

 

종이를 펼친 김유정은 인터넷 블로그에서 발췌한 듯한 화사한 프린트에 처음 외국에 갔을 때 느꼈던 이질적인 감정을 다시 느꼈다. 동글동글한 폰트로 여보란 듯 귀엽게 표시된 「남친이 좋아하는 브라우니 만들기」라는 제목을 보고나니 그 감정은 더욱 커졌다.

 

‘아아, 나는 역시 이런 걸 하기엔 늦은 나이가 아닐까...’

 

프린트를 펴든 자세로 굳어있는 자신을 물음표를 띄우고 바라보는 이슬비를 눈치챈 김유정은 서둘러 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괴감을 애써 씹어 삼키며 프린트를 끝까지 읽어내린 김유정은 이슬비와 함께 브라우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초콜릿 200g을 녹여서 중탕하도록 하죠. 판 초콜릿을 사 오셨으면 그걸 부숴야 하겠지만, 다행히 언니가 사 온 초콜릿이라면 부술 필요는 없겠네요.”

 

김유정은 그녀의 말에 따라 초콜릿의 분량을 쟀다. 평소 습관대로라면 손 감각으로 적당히 분량을 맞춰서 호쾌하게 요리했겠지만, 처음 하는 일인 데다 제이에게 줄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손길은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아니, 되려나? 될까?”

“...언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요리랑 다를 게 없잖아요. 더 쉬웠으면 쉬웠지.”

“그, 그러니?”

“그럼요. 정 부담되시면 계량은 제가 해 드릴게요. 언니는 중탕을 부탁해요.”

 

스스로의 손에 도무지 자신이 없었던 김유정은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뒤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없었다. 이슬비가 건네주는 재료들을 받아서 잘 섞기만 하면 되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세가 붙은 그대로 진행을 하던 김유정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반죽의 분량에 당황했다.

 

“슬비야, 이거 너무 크지 않니...?”

 

그녀가 완성한 반죽을 작은 프라이팬만 한 틀에 옮겨 담는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이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김유정이 상상한 브라우니는 손바닥만 한 작은 선물이었던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슬비가 당연하단 듯이 되물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언니랑 제이 씨 사인데요.”

“슬비야, 매번 말하는 거지만 제이 씨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

“글쎄요, 이걸 주시고 나서도 그럴까요.”

 

담담하지만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결국 김유정은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돌려받은 반죽 위에 그녀가 시키는 대로 슬라이스 된 아몬드와 코코넛을 뿌려 데코레이션까지 완료한 김유정은 언제 켰는지도 모를 사이에 예열이 끝나있는 소형 오븐에 틀을 밀어 넣어 일을 마무리했다.

 

“포장도 준비하셔야죠.”

 

큰일을 끝냈다는 느낌에 몸에서 힘을 쭉 빼던 김유정은 또다시 이슬비에게 끌려갔다. 정말이지, 이런 일에서는 그녀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 김유정의 감상이었다. 결국, 그녀는 제과점에서 파는 케이크나 파이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어마어마한 브라우니를 만들어서 돌아가게 되었다. 역까지 그녀를 바래다주겠다며 그녀를 따라나선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들겠다던 초콜릿은 어디에 있을까? 브라우니를 만드는 동안 그녀가 한 것은 김유정의 도우미역뿐이었다.

 

“슬비야, 너는 초콜릿 안 만드니?”

 

밸런타인데이에 대해 조잘조잘 즐겁게 이야기하던 이슬비의 말이 딱 하고 멈췄다. 의아해진 김유정이 그녀를 돌아보니 이슬비의 얼굴이 불안으로 물들어있었다.

 

“...역시 저는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슬비야.”

 

김유정은 손날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아프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은 작게 웃었다. 결국, 나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슬비나, 그녀 자신이나,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김유정은 오늘 하루의 보답으로 그녀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었다.

 

“팀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리더의 일인 거, 알지? 이것도 업무의 일환이야. 재료는 내가 충분히 사 왔으니까, 부탁할게?”

“...네.”

 

그녀 자신도 이슬비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밸런타인데이를 보냈거나, 간단한 기성품을 주고받으며 인사치레를 반복했을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김유정은 불안해하는 이슬비의 모습에 그녀 자신이 그러했듯 자신을 떠밀어 한 발자국 전진하게 하는 무언가를 건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라면 그 정도 도움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늘 하루 그녀를 도와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녀라면.

 

*


밸런타인데이 당일 아침, 상자를 들고 불안해하며 사무실 계단을 오르던 김유정은 종이가방을 손에 든 채로 검은양 사무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이슬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늘 꼴찌로 사무실에 도착하는 이세하의 게임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사무실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유리가 제이에게 장난을 치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게임의 BGM 사이로 그 둘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자 이슬비가 딱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오셨어요, 유정언니?”

“좋은 아침이야. 들어가야지.”
“아뇨, 그... 저는 잠시만...”

 

김유정은 주저하는 그녀의 빈 쪽 손을 잡고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시야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이와 그를 깔아뭉갠 채 깔깔 웃고 있는 서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방으로 들어오는 김유정을 발견한 제이의 표정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김유정은 다시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검은양 사무실의 아침이 오늘도 이렇게 소란스러워졌다.

 

“제이 씨! 뭐 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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