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그래서, 여기는 별로라고?”


이세하는 몇 번이고 반복했던 질문을 다시 건넸다. 이슬비가 여섯 번째 신혼방 후보를 퇴짜놓은 뒤의 일이었다.


“채광이 너무 별로야. 곰팡이가 엄청 슬거란 말야.”


이쯤 하고 돌아가자는 의미로 한 이야기였지만, 이슬비의 반응을 보건대 그럴 일은 없어보였다.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자면, 곰팡이 따위는 집에서도 실컷 청소해본 만큼―서지수가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쓰는 상황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오지 않으리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이슬비는 완고했다.


“봐, 겨우 집에 돌아와서 쉬려고 문을 열었는데 퀴퀴한 냄새가 나면 얼마나 기분나쁘겠어?”


별로, 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집어넣었다. 번갈아가면서 청소한다 치면 별 것도 아닐텐데. 게다가, 이세하는 방금 집의 창고방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참이었다. 그간 방안을 차지하고 있던 구형 게임 콘솔들을 여기에 몰아넣으면 어떨까, 하는 희망에 부풀어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별로니 다음 방을 찾아보자니. 답답했다.


“야, 어차피 지금 나와있는 방이란게 뻔하잖아. 왜 자꾸 그러는거야?”


앞서가던 이슬비가 그의 질문에 발을 멈췄다. 평소같으면 수십가지 이유를 대며 그를 대번에 밀어붙일 그녀였건만, 오늘은 어째선지 시작이 조용하다. 그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세하는 의아했다.


“그치만.”


여전히 등을 보인채 이슬비가 입을 열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싫잖아.”

“뭐가?”

“….”


답답해진 이세하는 그녀를 돌려세웠다. 푹 숙인 고개 너머로 발개진 뺨이 보인다. 당황스럽다.


“…처음엔, 따로 신경쓰는 일 없이 그냥 둘이 편히 있고싶단 말이야!”


빈 틈을 찔렸단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 그의 손을 뿌리치고 톡톡 튀어가는 이슬비를 이세하는 우두망찰하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뛰던 이슬비는 기어코 그를 향해 결정타를 날렸다.


“눈치도 없어. 이 멍청아!”


이세하는 결국 그녀를 붙잡으려 덩달아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클로저스 >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6  (0) 2017.05.23
무제 5  (0) 2017.05.23
무제 3  (0) 2017.05.22
무제 2  (0) 2017.05.22
무제 1  (0) 2017.05.22

이세하는 예전에 플레이했던 생존 게임이 문득 생각났다. 추운 지역에 조난당한 사람이 되어, 숲 속에서 아이템을 모아 일정 기간을 버티는 게임이었다. 제법 난이도가 있었다. 음식이 남는다 싶으면 장작이 모자르고. 그게 남는다 싶으면 또 다른 게 모자르고... 그나마 장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아직도 조금씩 몸을 떨고있는 이슬비를 곁으로 끌어당겼다.


“더 붙어.”

“괜찮아. 답답하잖아.”

“…붙어.”


방금 전의 사양이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이슬비는 말없이 그에게 기대어왔다. 이세하는 재킷을 끌러 그녀를 감쌌다.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북구의 바람은 차다. 해도 뉘엿뉘엿 사라져가는 시각. 숲 속을 헤메다 다 쓰러져가는 독가를 발견한 것이 다행이었다. 허허벌판에서 찬바람을 그대로 맞다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몸이 작은 탓일까, 한참 전부터 추위에 떨고있던 이슬비를 집안에 밀어넣은 이세하는 주변의 나무에서 적당히 나뭇가지를 잘라내어 모아왔다. 연료가 있다면 불을 지피는 것 쯤은 간단하다. 위상력으로 타오르던 푸르스름한 불꽃은 금새 나뭇가지를 들이키며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이세하는 발치에 놓인 발신기를 툭툭 두들겼다.


“이거, 작동하는거 맞아?”

“…맞아.”


묘하게 자신없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쇼그가 지상의 상황과 위치를 척척 잡아내는 모습을 여러번 본 뒤였던 터다. 길어봐야 오늘 밤 정도만 넘기면 되겠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세하는 제이에게서 받은 사탕을 발견하고 하나를 이슬비에게 내밀었다.


“먹어. 맛은 보장 못하지만.”

“뭐야, 그게.”

“…아저씨가 준 거라.”


픽, 하고 이슬비가 웃는다. 바스락거리며 사탕을 풀어 입에 넣은 이슬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써.”

“무슨 맛인데?”

“글쎄…, 진흙 맛?”


다채롭게 변하는 이슬비의 표정에 이세하는 문득 장난기가 돌았다. 뺨에 닿는 이세하의 손, 그리고 가까워지는 얼굴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휴지.


“—…”

“—정말이네. 진흙 맛이네.”

“……그렇지.”


맥없이 대답하는 이슬비의 얼굴을 보며 이세하는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좀 더 끌어당겼다.


“이런 걸 먹으니 더 추워지는 건데.”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저항이 없다. 아까보단 체온이 오른 느낌이다. 이유는 아마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몸이 온전해지기까지, 앞으로 조금만 더.



'클로저스 >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6  (0) 2017.05.23
무제 5  (0) 2017.05.23
무제 4  (0) 2017.05.23
무제 2  (0) 2017.05.22
무제 1  (0) 2017.05.22

메리지 블루라고, 알아? 하고 뜬금없이 그녀가 물었다. 알고 있다. 결혼 전 증후군 이야기겠지. 결혼 전의 여성 중에서는 30% 정도가 시달린댔던가. 쏟아지는 달빛 아래 그녀가 피식 웃었다. 맞아. 잘 알고 있네, 우리 세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옆으로 내려와 귓바퀴를 간질인다. 잠자코 있는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손길이 좀 더 잘 느껴질까, 살짝 감아본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종종 이렇게 군다. 외로움 타는 유치원생 아이를 다루는 선생님처럼, 그렇게 나를 어루만진다. 여느 사람이 그랬다면 싫어했겠지. 나는 애가 아니라고 했겠지.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나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10년, 20년. 작게, 더 작게. 마침내 나는 꼽추처럼 몸을 웅크리고 그녀 뱃속의 태아가 되어버린다. 부드러운 잠옷에 파묻힌 시야 너머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후후, 후후훗. 같이 웃자 간지럽다며 어깨 위로 몸을 눕힌다.


자신이 없었어.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 조용히 귀를 기울여본다. 오똑한 코가 등에 비벼져 간지럽다. 따스한 숨결도. 말이 이어진다.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까. 너라는 사람의 곁에서 온전한 한 쪽 날개가 되어줄 수 있을까. 불안했지. 그랬어? 내가 되묻자 수긍한다. 진작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내가 먼저 알아챘다면 나았을 것이다. 눈치라던가, 하는 게 아직도 이렇게 없다. 나, 일어날래, 하고 말하니 순순히 몸을 치워준다. 냉큼 그녀를 안아 눕힌다. 봄날의 꽃잎같은 머리칼이 턱을 간지럽힌다. 팔을 뒤로 둘러 꾹 껴안는다. 세게, 더 세게. 이렇게 하다보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답답해. 그녀가 농담처럼 말한다. 등허리로 돌아간 그녀의 팔이 꼬옥, 하고 조여왔다.


괜찮아. 아니, 네가 아니면 안 되는걸. 하니 또 웃는다. 꽃처럼 웃는다. 나는 참 못났다. 이 웃음을 계속 보고 싶다고 반지를 끼워주며 생각했을 터인데. 또 이렇게 눈치없이 굴고 만다. 그녀의 마음을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괜찮아. 그녀가 말한다. 나와는 반대다. 그녀는 지나치게 눈치가 빠르다. 너 때문이 아닌 걸.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투가 또 선생님같다. 아냐. 준비하기도 전에 말이 멋대로 튀어나온다. 이젠 함께인걸. 둘이 아닌걸. 팔에 좀 더 힘을 준다. 하나로, 하나로. 혼자 고민하지 마. 고독을 미래로 확장하지 마. 어디까지가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말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되뇌인다. 아니야, 아니야. 그저 껴안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렇게 반복했다.


제법 긴 첫날 밤이었다.



'클로저스 >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6  (0) 2017.05.23
무제 5  (0) 2017.05.23
무제 4  (0) 2017.05.23
무제 3  (0) 2017.05.22
무제 1  (0) 2017.05.22
1 2 3 4 5 6 7 8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