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이세하는 다시한번 손에 들고있는 종이가방을 확인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물건을 확인하는 것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일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늘에서는 따스한 5월 낮의 햇살이 모두를 축복하듯 내리쬐고 있음에도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불안감 뿐이었다. 그의 앞을 막아선 연립식 주택의 현관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괴수가 살고있는 미궁의 입구로 치환되어 그의 발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녀가 사는 집의 호수는 잘 알고 있었다. 203호. 이제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겨우 들어올려 ‘2’라고 적힌 창백한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애써 쫓아냈던 불안감이 다시 돌아와 그의 손을 잡아챘다. 가만, 내가 그걸 챙겨왔던가? 이세하의 시선이 다시 가방으로 향하려던 찰나 작은 목소리가 그를 호명했다.

 

“이세하?”

 

맙소사. 이세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마음을 조금만 빨리 다잡았더라면 ‘집에 없었다’라는 변명거리가 생겼을 터였건만. 기긱거리는 소리가 날 법한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의외라는 얼굴로 바라보는 이슬비를 확인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대부분 감기 마스크가 가리고 있었으나 벛꽃을 연상케하는 그 분홍빛 머리칼만으로도 그녀의 신원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약국에라도 다녀온 것일까, 그녀의 손에는 하얀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이세하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는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여보란 듯 손의 종이가방을 들어보였다.

 

“병문안 왔어.”

 

*


아마도, 모든 일의 발단은 복구대상 지역중 한 곳에 갑작스레 대규모로 출몰한 차원종 무리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해당 지역 내에 얼마 남지않은 잔당이 B급 차원종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최후의 습격을 감행한 듯 했다. 해당 구역을 담당하고있던 이슬비는 통신을 통해 지원을 요청한 뒤 차원종 무리와 교전을 벌였다. 대피중인 작업인원들의 보호와 차원종과의 교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운 나쁘게 때맞춰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겹치자 그녀는 격심한 전투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다행히 가장 가까이 위치해있던 이세하가 늦기전에 도착해 그녀를 지원해주었기에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사이킥 무브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쳤음에도 도움을 애써 받지 않으려는 그녀를 반강제적으로 부축해서 귀환한 이세하는 이정도면 그래도 한 건은 해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음날 이슬비가 병가를 냈다는 소식을 김유정에게서 전해듣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병가요? 어제 슬비를 데려왔을 땐 분명 별 문제가 없었잖아요?”

“그래. 분명 큰 상처를 입거나 하진 않았지. 하지만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고 연락이 왔어.”

“네?”

 

위상능력자가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어렸을 적부터 누구나 일년에 한두번쯤은 통과의례로 걸리기 마련인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살아왔던 터다. 그렇기에 그는 이슬비가 지쳐보였어도 쉬고 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김유정 역시도 그의 그런 의문을 파악했는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위상능력자는 병에 잘 걸리지 않아. 하지만 위상력을 극심하게 소모한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지. 아무래도 어제 복구인원들을 구하느라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야.”

 

평소의 제이를 떠올린 이세하는 그녀의 설명을 이해했다. 원래부터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툭하면 종합감기약이나 진통제를 찾는 그의 모습에 평소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김유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위상력이 거의 남지 않아 임기응변과 편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그가 그런 상황일 만도 했다. 이슬비가 빠진 자리를 메꾸기 위함인지 근무표를 조정하고 있던 김유정이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생각에 잠겨있던 그를 불렀다.

 

“세하야, 혹시 슬비한테 병문안을 좀 가줄 수 있겠니?”

 

“제가요?”

 

이세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귀찮다’였다. 병문안이라니. 병문안에 대해 그가 알고있는 것은 미디어 매체에서 접한 모습 뿐이었다. 선물을 잔뜩 사들고 간다거나, 음식을 만들어서 먹여준다거나, 환자의 물수건을 갈아준다거나 하는 부담스럽고 손이 많이 가는 행동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다루는 매체에서 이런 일은 으레 연인이나 그와 유사한 관계인 사람의 몫이였으니, 이세하로서는 그녀와 시덥잖은 일로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 일쑤인 자신이 왜 하필이면 병문안을 가는 사람으로 선발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왜 하필 제가?”

“벌이야. 어제 건물을 부숴먹은 건 잊지 않았겠지?”

 

이세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슬비의 지원요청에 급하게 사이킥 무브를 사용하다가 착지 과정에서 건물과 정면충돌해 벽을 무너뜨린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 건물은 어차피 복구 과정에서 철거될 장소였기에 별다른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모니터링중이던 김유정이 여기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기에 불문에 붙이려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던 이세하는 그녀가 이 시점에서 그 때의 이야기를 꺼내들자 할 말이 없었다.

 

“팀에서 둘이나 빠지면 작전에 문제가 없을까요?”

“걱정 마. 어제의 차원종 출현 사건으로 오늘은 복구작업이 예정보다 축소 진행될 예정이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은 특경대 쪽에서 협조하기로 했어. 평소에 많이 신세를 지고 있으니 이럴 때라도 제대로 협조하겠다나?”

 

이슬비가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 병문안을 가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송은이 경정의 모습이 생각난 김유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의 언행으로 보건대 땡땡이를 치려는 의도가 많든 적든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을테지만,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그녀가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첫 출동때부터 시작해서,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사건을 함께 거쳐왔기에 그녀에게 단순한 동료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검은양 팀원들도 같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채민우 경정의 잔소리에 결국 직접 이슬비의 병문안을 가는 것을 포기하고는 인원이 부족할 경우 특경대 측의 지원을 약속한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이세하는 특경대의 협조에 그다지 고마워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복구작업이 시작된 이후로 클로저 활동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어제의 일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었다. 현 시점에서 검은양 팀원들의 활동은 대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리를 순찰하거나 정해진 위치에서 경계 근무를 보는 것 뿐이었다. 이런 업무들은 대개 1인 단위로 이루어졌기에 이세하에게 있어 이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게임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금같은 시간에 병문안이라니.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그가 귀찮아하는 낌새를 눈치챈 김유정이 다시한번 무너진 벽 건을 들먹이며 감봉 이야기를 꺼내들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에 출시되는 신작 게임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한 푼이라도 봉급을 더 받아야만 했다. 그가 받는 봉급이 적은 것은 아니였지만 그 대부분은 그의 어머니인 서지수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돌아오는 것은 그 일 할 가량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결국 이세하는 김유정과 나머지 팀원들이 모은 돈을 들고는 마트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이세하는 이슬비의 집 거실-이라고 해봐야 투룸 방의 부엌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지만-에 앉아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가 병문안을 왔다는 말에 예상대로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는 식의 맥빠지는 대답을 한 이슬비는 이왕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뭐라도 먹고 가라면서 그를 집에 들였다. 이슬비는 그를 거실에 앉히고는 준비를 좀 해야하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참이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게임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도무지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대체 내가 왜 병문안을 가겠다고 한 것일까, 이세하는 다시한번 후회를 곱씹었다.

 

마켓에서 간단한 요리재료와 이런저런 물건을 사서 나올 때까지 이세하의 머리 속에는 ‘귀찮다’라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병문안 물품을 손에 들고나자 그의 생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평소에 그에게 잔소리만 늘어놓는 데다가 귀여운 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긴 해도 그녀는 어찌됐건 그 나이 또래의 여성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이 18년 인생의 지상과제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언감생심 여자가 혼자 사는 집이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마트에서 그녀의 방이 있는 연립주택까지 이동하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동안에도 그의 불안감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주택 앞에서 시간을 끌다가 맞은 결말이 이 꼴이다. 이세하는 후회감을 삭히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어떻게 보면 딱 그의 생각대로이기도 한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혼자 사는 방이라면 으레 떠올리는 엉망진창인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없는 개인물품들은 각을 맞춰 전시해두기라도 한 것 마냥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보통 기름 얼룩이라도 조금 튀어있기 마련인 조리공간 역시도 도대체 사용은 하는것인가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 자신도 평소에 청소를 자주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개중에 그나마 사람 냄새라도 느껴지는 것은 설거지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물기가 맺힌 채로 건조대에 올려져있는 식기 몇 개와 수저 한 세트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식기의 수는 왠지모를 허전함이 느껴질만큼 적었다.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진 이세하는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제법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이슬비의 상황이 궁금해져 그녀를 불러보았다.

 

“야, 이슬비. 멀었어?”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진 이세하는 그녀의 방문을 툭툭 두들기며 노크했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왠지 불안해진 이세하는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방문을 잠궈두진 않은 것인지 손잡이는 저항의 기색이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방문을 연 이세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방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곰인형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그렇게 될 테니 불가항력이라고 할 만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허전할 법한 곳마다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있는 동물 인형들이 좀 더 눈에 띄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한쪽 벽을 차지한 붙박이장에 반쯤 쑤셔박힌 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거의 사람만한 크기의 펭귄 인형과 살짝 보이는 분홍빛 머리칼의...

 

“슬비야?”

 

인형의 움직임이 순간 딱 하고 멈췄다. 이세하가 한숨을 쉬며 펭귄 인형을 잡고 끌어내자 인형과 씨름을 하고 있던 이슬비와 함께 붙박이장 안에 억지로 구겨져 들어가있던 인형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사자, 하마, 나무늘보, 양, 개... 다큐멘터리 채널을 방불케하는 수많은 종류와 크기의 인형에 이세하는 할 말을 잃었다. 인형의 파도에 떠밀려나온 이슬비는 당혹에 물든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또 하나의 인형마냥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세하는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신통한 아이디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타임 리미트를 초읽기하듯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이슬비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더욱 그랬다. 이럴 때에도 역시 팀의 리더라고 해야할까, 이 기묘한 교착상태를 먼저 푼 것은 이슬비 쪽이였다. 홍시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던 그녀는 바로 옆에 떨어져있던 인형을 집어들고는 혼란에 빠진 비명을 지르며 이세하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달려들려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중 발치의 인형에 걸려 이세하를 향해 넘어진 까닭에 그녀는 그를 인형으로 가격하는 대신 그를 향해 성대하게 넘어졌다. 엉겁결에 그녀를 받아낸 그는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쓰러졌다. 감기 때문에 제대로 씻지 못한 까닭일까, 그녀에게선 희미하게 땀냄새가 났다.

 

‘아-, 이거 큰일이네.’

 

머릿속으로 현실도피를 하며 제 삼자가 된 듯 현 상황을 평가하던 이세하는 그녀의 몸이 불덩이같이 뜨겁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챘다. 아까까지의 멀쩡해보이던 모습은 연기였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며 질문을 건넸다.

 

“야, 너 지금 대체 몇 도야?”

“삼십..., 삼십 칠 도.”

 

조금 흐려진 눈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세하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꼬리를 잠시 흐렸던 것을 보건대 보나마나 삼십 팔 도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세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 손으로 이슬비의 상체와 다리를 떠받치며 그녀를 들어올렸다. 방금 전에 그나마 있던 힘을 다 써버렸는지 예상 외로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고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만을 입고 있었던 탓에 그녀의 속옷이 슬쩍 비쳐보였지만 이세하는 애써 눈을 돌렸다. 그녀를 들어올리는 데에 별다른 부담은 없었다. 전날에 그녀를 부축하면서 이미 느껴봤을 터였건만 몇 번을 경험해도 적응이 되지않는 무게였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정식 클로저이자 한 팀의 리더라니, 누가 믿겠는가. 이세하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직접 물수건을 갈고 있었는지 침대 옆의 서랍장 위에는 물이 담긴 대야와 물수건이 들어있었다. 물에 손을 담가본 이세하는 미지근한 물에 인상을 쓰고 물을 갈아와서는, 열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일단 그녀의 팔과 목, 그리고 슬쩍 드러난 어께 부분의 땀을 닦아주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했다. 몸에 와닿는 물수건의 차가운 느낌에 이슬비는 작게 움찔했다.

 

‘움찔하고 싶은 건 내 쪽인데.’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니 이세하는 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간병에 대해 지식으로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첫 상대가 이슬비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뒤 시간을 확인한 그는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허락을 구하려고 해도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할 테지. 이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툭 던지듯 말했다.

 

“죽 끓여올테니 한 숨 자던가.”

 

그의 말에 대답하듯 이슬비가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웅얼거렸다. 이세하는 손에 남은 물기를 옷에 슥슥 닦아내고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거실 겸 부엌으로 나왔다. 준비물은 이미 오는 길에 다 사왔으니 그녀를 귀찮게 할 일은 없었다. 종이가방 안의 재료를 꺼내며 이세하는 머리 속의 레시피를 되새겼다.

 

*


죽을 끓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세하의 요리실력에 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사일에 소질이 없는데다가 평소에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는 어머니를 두었기에 이세하는 가사 전반에 능숙했다. 다만, 요리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뜬금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마는 그의 의식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흐름에 편승해 끝냈기에 별 문제없이 그녀를 간호하긴 했지만, 막상 일을 해치우고 이미 익숙한 일인 요리를 시작하자 잡생각이 그의 머리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료를 손질하다가도 물수건 너머로 손 끝에 느껴지던 부드러운 촉감이 생각나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손을 다칠 뻔한다던가, 불을 조절하면서 손등을 간질이던 그녀의 머리칼을 떠올리다 죽을 숯으로 바꿀 뻔 한다던가 하는 등의 실수를 몇 번이나 한 끝에 이세하는 평소 실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단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죽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것일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죽의 상태에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던 이세하는 반쯤 포기한 채로 앉은뱅이 상에 죽을 올려 방으로 들고 돌아갔다.

 

죽을 끓이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던 탓일까, 이슬비는 어느 새 잠든 채였다. 분명 스스로도 한 숨 자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막상 곤히 자고있는 그녀를 보니 이세하는 곤란해졌다. 일단 그녀를 깨워서 식사를 시키는 편이 회복에 도움이 될 테지만, 이세하는 그녀를 어떻게 깨워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야, 이슬비.”

 

시험삼아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르락, 내리락. 다시 오르락. 이불에 가려진 이슬비의 가슴이 그녀의 숨결을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세하는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다시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반응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약이 오른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볼을 찔렀다.

 

“으응...”

 

잠에 취한 그녀의 신음소리에 이세하는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물렸다. 이슬비는 귀찮다는 듯이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그녀의 이마에서 물수건이 스르르 흘러내려 베개 위로 떨어졌다. 안도감와 함께 이세하의 머릿속에 장난기가 찾아들었다. 이세하는 다시 손가락을 들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보이는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야, 이슬비. 일어나.”

 

간질간질, 간질간질.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에서 귀로, 다시 목으로, 그리고... 살짝 드러난 등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오락실에서 어머니 몰래 하던 탈의 땅따먹기 게임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이세하는 배덕감 섞인 추억에 잠기며 손장난을 계속했다. 어느 순간, 그의 손가락이 딱 하고 굳었다. 예상 외의 상황에 당황한 이세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손가락은 무언가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의 귀에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하...!”

 

어느 새 깨어난 것일까, 이슬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은 그녀가 염동력을 행사한 결과인 듯 했다. 굳어버린 손가락을 포기하고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반대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세하는 그를 향해 휘둘러지는 베개를 확인하며 눈을 감았다.

 

*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세하는 말없이 죽을 먹고있는 이슬비의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다시한번 사죄의 말을 건네었다. 강남역에 출현한 말렉과 맞설 때보다 지금이 더욱 공포스럽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오늘의 일에 대해 한 마디라도 언급하는 순간 그의 사회적 지위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 뻔했다. 어째서 직장 동료이자 동급생인 그녀에게 그런 장난을 쳤는가 하면, 그 스스로도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잠시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그가 시행한 자가진단의 결과였다.

 

잠에서 깨어난 이슬비가 그에게 엄청난 패널티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당한 앙갚음은 그의 얼굴을 강타한 베개정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매도하고 집 밖으로 쫓아내는 편이 차라리 나았으리라는 것이 이세하의 생각이었다. 그를 상 반대편에 무릎꿇게 한 뒤 아무 말도 하지않고 그가 준비한 죽을 먹고있는 이슬비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뭔가 무시무시한 처벌을 준비하고 있으리라는 암담한 예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죽이 너무 뜨거운 것인지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죽을 취식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세하는 다시한번 불길한 상상을 뇌 한 구석으로 추방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을 돌리고자 이세하는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며 그녀의 방을 둘러보았다. 거실에서 느껴지던 살풍경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거의 전시물 수준으로 정리된 딱딱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사이사이에 장식된 복슬복슬한 동물 인형들-붙박이장에서 쏟아진 동물 인형들까지 생각해보면 그 양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이 그 몰감정적인 인상을 상당히 줄여주고 있었다. 자주 사용하는 듯 금방 꺼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는 다리미와 그 옆의 강아지 발자국 무늬가 그려진 다리미판을 보고 이세하는 어디에 처박혀있는지도 가물가물한 자신의 집의 다리미를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요원복을 매일 다려서 입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의 잘 각이 잡혀 손질된 요원복 치마를 생각해보면 신빙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방을 구경하던 그의 눈에 벽에 걸린 액자들이 들어왔다. 그녀가 아카데미 시절 수상한 상장들인 듯 했다. 최우수상, 1위, 최우수상, 학교장상... 이세하는 그녀가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가 어쩌다가 어딘가에서 장려상이라도 받아왔다 치면 뛸 듯이 기뻐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세하는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잘 정리되고 깨끗하게 청소된 방의 다른 물건들과 달리 그 액자들은 관리가 잘 되지 않은 듯 먼지가 살짝 쌓여있었고, 개중의 하나는 살짝 삐딱하게 걸려있기까지 했다. 의문에 빠져 액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느낀 이세하는 상장들을 구경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괜스레 무안해진 이세하는 일단 그녀를 칭찬하기로 했다.

 

“대단하다, 야. 나는 상장 하나 받을래도 고생을 하는데. 저게 대체 몇 장이야?”

 

그의 말을 들은 이슬비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세하는 의아해하며 자신이 방금전에 한 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세하는 일단 말을 잇기로 했다.

 

“이정도면 굳이 우리 팀이 아니더라도 네가 리더가 될 만하지. 게을러빠진 나에 비하면 너는 정말 대단...”

“아니야.”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이슬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냉기에 이세하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도대체 왜? 이슬비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것이 감기 때문인지, 그녀의 기분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이세하는 짚어낼 수가 없었다.

 

“저런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무슨 소리야. 저만한 결과는 아무나 낼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럼 뭐해!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슬비가 비명처럼 외쳤다. 고개숙인 그녀의 좁은 어께가 거친 호흡으로 요동쳤다. 이세하는 자신이 밟아서는 안 될 구역으로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후회했다. 이건 긁어 부스럼이다.

 

“그래. 처음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어른들보다도 잘 할 수 있다고, 다시는 나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어른보다 잘 할 수 있다. GGV에 훈련생 신분으로 처음 배치되었을 때 김유정에게 했던 말이다. 평소의 자신과는 정반대 스탠스라고 할 법한 인상적인 말이었기에 이세하는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보같은 생각이었어. 유치하고 순진해빠진... 어제만 해도 그래. 네가 아니였으면 내가 모든걸 다 망쳐놨겠지.”

 

어제라, 이세하는 전날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금방 답이 나왔다. 그가 건물에 충돌한 직후의 이야기일 것이다. 충돌의 여파로 띵해진 머리를 무시하고 급하게 뛰어나온 그의 앞에 보였던 모습. 미처 도망치지 못한 작업자를 향해 천천히 무기를 들어올리는 차원종, 그리고 한 블록쯤 떨어진 거리에서 급하게 뛰어오던 이슬비. 거리를 가늠해 본 이세하는 아무래도 그녀가 늦을 것 같다는 판단에 3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차원종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다른 사람들은 네가 노력한 덕분에 다들 무사했잖아. 그 사람도 좀 놀랐을 뿐이지 별 다른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고.”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네가 제때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 뻔했어? 오늘도 봐. 내가 좀 더 유능했다면, 더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몸 관리도 못하고 쉬게 될 일도 없었겠지. 네가 굳이 이렇게 올 필요도 없었을테고. 바보같아. 얼마 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슬비의 말에 이세하는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래도 어제의 일은 그저 도화선에 튀긴 불씨 정도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도화선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마음을 시커멓게 태우며 쌓아온 화약들이 모조리 연결되어 있었다.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해체해야만 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이세하는 그것이 하필이면 지금, 그리고 자신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방면에는 좀 더 전문가가 많지 않은가. 팀의 관리요원인 김유정이라던가, 아니면 허당끼가 있긴 해도 사람은 잘 다루는 제이라던가. 하는 수 없이 이세하는 잠자코 앉아 그녀가 닥치는대로 떠내려보내는 후회와 자기혐오를 갈무리했다. 어느새 그녀는 좀 더 이전의 이야기까지 주워섬기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도 전부 마찬가지야. 나는 하나가 잘못된 길을 걷는 걸 미리 알아채지 못했어. 차원종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강남이 불타는 것도 막지 못했을거야. 그리고 우리 팀원들도...”

 

“야, 이슬비.”

 

점점 흐름을 더해가는 그녀의 넋두리를 이세하가 끊었다.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둑에 차오르는 홍수처럼 그녀의 긴 속눈썹에 위태로이 걸려있는 눈물을 보자 이세하는 마음이 거북해졌다. 이런 식으로 남의 고민을 듣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그는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한번 오늘의 병문안을 후회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김유정이나 제이였다면, 아니면 밝은 성격의 서유리였다면, 그저 자신이 아닌 누군가였다면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오랜 세월 도피를 계속해온 그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이세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렸다.

 

“팀원을 무시하는 거냐?”

 

툭 튀어나온 말은 시비조였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었다.

 

“...뭐라고?”

“너 혼자 다 해치울거면 팀이 왜 있어? 우리가 못 미더워서 혼자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 이야, 대단한 리더님이시네.”

 

이슬비가 눈을 깜빡이자 그녀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밀려나와 또르륵 흘러내렸다. 방해라는 듯 손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친 이슬비가 그를 노려보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말한건 우리한테도 전부 포함되는 이야기잖아. 네가 다른 팀원을 도운 것도 한, 두번이 아닐텐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게 있으니까...”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녀가 일단 말로 따지고 보는 성격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녀가 감정에 휩싸여 그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했다면 사람을 잘 다루지 못하는 그로서는 손 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대화가 가능하다면 인터넷 채팅으로 말싸움을 벌이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중구난방의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생각을 뻔뻔하게 되돌려주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상대를 찍어누르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여러번 말이 오가고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를 공격하기 위해 열심히 논리를 짜내고 있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이세하는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아내렸다. 저쪽의 말문이 막히기 시작하면 이쪽의 승리는 한 순간이다. 그녀가 다시 자기비하를 시작하기 전에 이세하는 먼저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자, 이슬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아. 너뿐만 아니라 나도, 그리고 다른 팀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팀이잖아.”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조금만 더. 이세하는 애써 혀를 움직였다. 엉망진창인 말로 그녀를 공격-혹은 방어-했다.

 

“그리고, 봐. 구로에서 위상반전탄의 직접 사용에 반대한건, 그리고 신강고에서 죽을 뻔한 유하나를 구해내자고 처음 말했던건 누구지? 너야. G타워에서 강남을 날려버리는 대신 죽을 각오로 다시한번 나서기로 정한 것도 너지. 넌 늘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어. 팀원들은 모두 너를 믿고 있다고.”

 

스스로의 말이 유치하고 말도 안 된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책도 많이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할 것을 그랬다는 조금 늦어버린 후회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결국 이세하는 참지 못하고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아, 몰라! 내가 더 말 해서 뭣하겠냐. 잠깐 있어봐.”

 

이세하는 거실에 놓아둔 채인 종이가방에서 예의 물건을 꺼내왔다. 처음에 그가 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점검하려던 물건이었다. 둥글게 말려진 종이와 손바닥만한 선물상자를 가져온 이세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에게 그 둘을 건네었다.

 

“자, 복구본부 사람들이 전해주라더라.”

 

이세하는 그 종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복구본부의 인원들이 그녀가 감기에 걸려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전하고싶은 말을 적은 롤링 페이퍼였다. 선물상자의 내용물에 관해서는, 이세하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어찌보면 그 내용물의 탄생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전에 그 물건에 대해 알게된 이슬비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선물상자를 건네고 바로 도망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세하는 일단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슬비는 먼저 종이를 펴서 읽어보았다. 이세하가 알기로 그녀는 읽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하지만 그녀가 글을 다 읽는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롤링 페이퍼라는 것만 알 뿐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이세하는 그것이 좋은 신호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종이를 다시 말아놓는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도 선물상자를 열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한기남 컴퍼니의 자신작인 셜록홈즈 이슬비 인형을 발견한 이슬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세하는 그녀의 반응에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본따서 만든 인형을 그 모델에게 선물로 주자는 아이디어를 발안한 것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세하의 한숨소리에 그를 바라본 이슬비는 그의 할 말이 없다는 얼굴에 미소를 얼기설기 엮어보였다. 그다지 만족스러운 반응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이 정도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했기에 이세하 역시도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조용한 방에 갑작스레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아.”

 

이세하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면 그 역시도 아침밥을 먹은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였던 것이다. 죽의 간을 맞추느라 몇 술 정도를 뜨기는 했지만, 한창 팔팔한 청소년의 식사 요구량을 그 정도로 채울 수 있을리 만무했다. 무안해진 이세하가 시선을 피하며 여기저기 눈을 굴리자 이슬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죽, 같이 먹을래?”

 

“일단..., 다시 데워올게.”

 

이슬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죽그릇을 다시 들고 방문을 열었다. 문을 닫는 그에게 이슬비의 목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그녀의 말은 문이 닫히는 딱딱한 소리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에, 이세하는 그 내용은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고마워.’

 

*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 이세하가 의아해하는 서지수에게 이슬비의 병문안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흥미진진해하는 반응을 보여왔지만, 이세하는 이슬비의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이슬비가 그에게 일종의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에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한 이세하가 도대체 무엇을 숨기라는 것인지 되묻자 그에게 돌아온 이슬비의 대답은 그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 방에 있는 인형들 말이야.”

“뭐?”

“한 팀의 리더라는 사람이 방에 이렇게 인형을 장식해놨다는 이야기가 돌면 사람들이 얕볼 거 아냐?”

 

그녀에게 어울렸으면 어울렸지 딱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게 이세하의 생각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 괜스레 장난기가 도져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것은 이야기해도 되냐는 말을 했다가 베개로 한 대 더 얻어맞은 것은 덤이었다.

 

이슬비의 감기가 다 나아 그녀가 다시 클로저 업무를 시작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복구본부로 돌아온 그녀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 삼일간의 휴식은 더 나은 활동을 위해서였다고 온 몸으로 강변하듯,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가열차게 업무에 매달렸다. 그녀가 없는 사이 김유정의 책상에 점점 퇴적되어가던 서류가 그녀의 도움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며 사무실에서 농땡이를 피우던 송은이 경정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제이가 인형을 받은 소감에 대해 질문했을 때 뿐이었다. 웃음기를 띠고 장난스레 질문을 건네던 제이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선글라스를 깨뜨릴 듯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이슬비를 보고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허둥지둥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주로 1인 순찰등의 임무를 나가던 그녀가 다른 팀원과 동행하는 일이 늘어났다는 정도가 차이점일까. 다른 팀원들은 그녀의 미묘한 변화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세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곤 했다.

 

“이세하. 준비 끝났어?”

 

자신을 부르는 이슬비의 목소리에 이세하는 게임기를 꺼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든 그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이슬비의 손을 보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계작전 중 개인물품 소지 금지.”

“야, 좀 봐줘. 요즘 할 일도 없잖아?”

 

그의 말을 듣고 이슬비가 미소지었다. 손은 여전히 그를 향해 그대로 내민 채였다. 이세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갖다놓고 올게. 유정이 누나한테 전하면 되지?”

“응. 여기서 기다릴테니 빨리 와. 벌써 늦었어.”

 

이세하는 작게 투덜거리며 김유정이 사무실 대용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로 향했다. 콘솔을 맡기고 컨테이너를 나온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괜한 짓을 한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스쳐갔다. 그것도 잠시,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잡생각을 날려버린 이세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슬비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아, 귀찮아. 빨리 끝내고 게임이나 해야겠다.”

허생은 아즈샤라 섭의 엘윈숲에 살았다. 곧장 동부 벌목지에 닿으면 냇가 앞에 오래 된 떡갈나무가 서 있고, 떡갈나무를 향하여 집의 문이 나있는데, 단칸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저랩 헬퍼만 좋아하고, 그의 친구가 앵벌을 하여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친구가 골드가 몹시 딸려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인맥을 쌓지 않으니 저랩헬퍼를 하여 무엇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좋은 이를 사귀지 못하였소."


"그럼 경매장 죽돌이라도 못 하시나요?"


"경매질은 본래 배우지 않은걸 어떻게 하겠소?"


"파티짜서 인던이라도 못 도시나요?"


"파티가 잘 안모이니 어떻게 하겠소?"


친구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저랩헬퍼를 돌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만 입에 붙었단 말씀이오? 경매질도 못한다, 인던도 못돈다 하시면, 여명 가서 앵벌이라도 못 하시나요?"


허생은 저랩을 모집하던 공개창을 닫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저랩헬퍼로 저랩 일백 명을 육성시키려 했는데, 이제 칠십 명인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스톰윈드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얼라이언스에서 제일 부자요?"


아이언포지의 변씨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절 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보려고 하니, 십만 골드를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변 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십만 골드를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변씨의 길드원이 허생을 살펴보니 거지였다. 아이템은 녹템조차 몇개 없었으며, 흰템의 내구도가 다하여 벌개져 있고, 무기는 캐릭을 처음 만들때 내주는 지팡이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길드] [길원 A]: 저이를 아시나요?


[길드] [변씨]: 모르지.


[길드] [길원 B]: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십만 골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친추도 안하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변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길 드] [변씨]: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장사를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행동에 /춤 과 /간청 을 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감정표현이 없으며, 당당한 기색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겟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십만 골드를 주는 바에 친추는 해서 무엇을 하겠느냐?


허생은 십만 골드를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아이언포지 경매장으로 갔다. 아이언포지 경매장은 레게, 명게, 라이트유저가 마주치는 곳이요, 모든 자원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아케나이트 주괴, 토륨 주괴, 두꺼운 가죽에 꿈풀이며, 미스릴 주괴에 질긴 가죽, 얼음송이까지 모조리 즉시구매로 사들였다. 허생이 가죽과 주괴와 약초를 모조리 쓸었기 때문에 곧 온 얼라가 제작템을 만들거나 퀘를 하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즉시구매로 물건을 팔았던 사람들이 도리어 즉구의 열배의 값으로 물건을 사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만 골로 얼라의 고급자원을 좌우했으니, 얼라의 형편도 알 만하구나."


그는 다시 경매장에서 산 파템, 녹템, 에픽 따위를 가지고 역병지대에 가서, 사람들을 모아 공대로 평판작업을 하면서 말했다.


"몇일 지나면 레게들이 평판질을 못해 낙스를 가기 힘들 것이다."


허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가서 과연 레게들이 낙스를 가지 못해 허생의 공대에 가서 사람을 사오게 되었다.


허생은 파티찾기 채널을 열어 말을 물었다.


[4. 파티찾기] [허생]: 혹시 사람은 많으나 호드가 지나치게 적은 저주섭이 있는가?"


[4. 파티찾기] [행인 C]: 있습니다. 언젠가 부캐를 키우려고 서버를 찾다가 실바나스라는 섭에 닿았읍지요. 얼라는 필드에 바글거리나 호드는 과하게 적어 인던가기가 어려우며, 저랩얼라가 만랩호드를 보고도 쫄지 않습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4. 파티찾기] [허생]: ㄳ


이라고 말하며 행인 C에게 우편으로 1백골을 보내었다.


허생이 서버를 이동해 호드캐릭을 생성하고 인구조사를 해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얼라호드 합쳐 천을 겨우 넘으니 무엇을 해 보겠는가? 앵벌터가 비엇고 저랩이 적으니 사냥은 편하겠구나."


지나가던 만랩이 그를 보고 물었다.


"텅 빈 서버에 사냥할 저랩이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사냥을 하신단 말이오?"


"골드가 있으면 사람이 절로 모인다네. 골드가 없을까 두렵지. 사람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나?"


이 때 아즈샤라에는 파티자리가 없는 실업자 도닥이 아포 앞마당에서 모단호수까지 일렬로 줄을 서고도 남았다. 각 공대에서 최대한 자리를 내어 도닥을 받아들였으나 좀처럼 줄지가 않았고, 도닥들은 서로에게 치여 앵벌도 못하니 돈도 없어 곤란한 판이었다. 허생이 도닥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서 도닥의 우두머리를 달래었다.


"도닥 백명중 한명이 인던을 가면 얼마나 벌어오지요?"


"한 5골쯤 벌어오지요."


"길드는 있소?"


"없소."


"인맥은 있소?"


도닥들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길드가 있고 인맥이 있는 놈이 무엇 때문에 괴롭게 실업자가 된다는 말이오?"


" 정말 그렇다면, 왜 길드를 얻고, 인맥을 만들고, 파티를 짜서 인던을 돌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실업자 소리도 안 듣고 살면서, 템 얻는 낙이 있을 것이요, 돌아다녀도 파티를 놓칠까 걱정을 않고 길이 의식의 요족(饒足)을 누릴 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팟원이 도닥말고는 남지가 않아서 못할 뿐이지요."


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실업자질을 하면서 어찌 사람을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하여 준비할수 있소. 나에게 거래를 걸어 보시오. 내가 내놓는것이 모두 나의 것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도닥들은 그를 병설리라고 비웃으며 거래를 걸었다.



도닥들이 거래창을 열어보니 과연 허생이 매 교환마다 500골드 씩을 뿌리고 아이템을 주는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大驚)해서 허생 앞에 줄지어 /절 했다.


"오직 장군의 명령을 따르겟소이다."


"너희들, 인벤이 남는 대로 이 템을 가져가거라."


이에, 실업도닥들이 다투어 아이템을 인벤에 우겨넣었으나, 붕대와 독약이 가득찬 가방때문에 한 도닥이 템을 10개 이상을 지지 못했다.


" 너희들, 인벤 한껏 열개도 못 지면서 무슨 앵벌이를 하고, 무슨 파티를 하겟느냐? 인제 너희들이 부캐를 키우려고 해도, 인맥이 없으니 사람없는 저랩존에서 버스를 탈수도 없을것이니 할 것이 없다. 내가 실바나스섭 듀로타에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너희들 각자 직업을 적당한 비율로 정하여 오너라."


허생의 말에 도닥들은 모두 좋다고 접종을 하였다.

허생은 몸소 게임 거래사이트에 글을 올려 아즈샤라와 실바나스의 금을 2:1 비율로 바꿔 실바나스 골드 팔천 골드를 모아 기다렸다. 도닥들이 빠짐없이 모두 듀로타에 모였다. 허생이 실업자를 모두 쓸어가서 아즈샤라에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들은 파티를 맺어 랩업을 하고, 인던을 돌아 아이템을 맞추었다. 저랩호드가 적기때문에 몹이 넘쳐나서, 한번 몰아잡고 젠을 기다리지 않아도 한 자리에 몹이 마르는 일이 없었다. 그들이 앵벌한 아이템들을 가젯잔을 통해 얼라에게 내다 팔자, 오천 골드를 넘게 벌었다.

실바나스가 축섭이 되어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 섭에서 사람이 몰려들어 대기자가 없는날이 없을 정도였다.


허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이에 그가 데려온 이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이 서버에 들어올 때엔 먼저 랩업을 시키고 따로 길드를 만들고, 레이드팀을 몇개 창설하려고 하였더니라. 그런데 사람이 적고 덕이 없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부캐를 키우걸랑 아는사람 요청하여 어중이 떠중이 모아 버스를 타지 말고 파티를 모아 돌아 개념없는 만랩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허생은 실바나스 캐릭을 캐삭하고, 돈을 캐릭과 함께 없애버렸다.


허생은 아즈샤라로 돌아가 두루 돌아다니며 돈이 없어 쩔쩔매는 저랩들에게 백골마를, 만랩들에게는 천골마를 사주었다. 그러고도 골드가 이십만 골드가 남았다.


"이건 변씨에게 갚을 것이다."


허생이 가서 변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변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장비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십만 골드를 실패 보지 않았소?"


허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장비가 나아지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십만 골드가 어찌 도(道)를 살찌게 하겟소?"


하고, 거래창을 열어 이만 골드를 변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저랩헬퍼를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십만 골드를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변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허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허생 님의 외침: 당신은 나를 경매장 죽돌이로 보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변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엘윈 숲으로 가서 조그만 초가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NPC가 냇가에서 서성이는것을 보고 변씨가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초가가 허생의 집이오?"


하지만 NPC는 듣도보도 못한 퀘스트만 줄뿐 대답을 하지 않아, 변씨가 이 일이 쓸모 없음을 알고 집만을 알아두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변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주려 했으나, 허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당신에게 이십만 골드를 모두 주었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수리비나 떨어지지 않고 옷이나 입도록 하여 주오. 와우를 그리하면 족하지요. 왜 골드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변 씨가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변씨는 그 때부터 허생의 집에 수리비나 빵값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많이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폭죽이라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폭죽을 터뜨리며 서로 즐겁게 놀았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의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변씨가 몇달 동안에 어떻게 이만 골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생이 대답하기를,


"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와우라는 게임은 거래가 다른 서버까지 통하지 않고, 물자가 한 서버에서 나서 한 서버에서 사라지지요. 무릇, 일만 골드는 적은 돈이라 아이템 하나를 독점 할수 없고, 그것을 열로 쪼개면 일천 골드가 열이라, 열가지 물건을 사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보통 이(利)를 취하는 방법으로 조그만 죽돌이들이 하는 짓 아니오? 대개 십만 골드를 가지면 족히 몇가지 물종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옷감이면 옷감 전부, 주괴면 주괴 전부, 가죽이면 한 가죽을 전부, 마치 총총한 그물로 훑어 내듯 할 수 있지요. 뭍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슬그머니 독점하고, 물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고, 연금술사의 수백 가지 약초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면, 한가지 물종이 한곳에 묶여 있는 동안 모든 장사치들이 고갈 될 것이매, 이는 돈없는 유저를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국자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서버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처음에 내가 선뜻 십만 골드를 뀌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일만 골드를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재주가 족히 오만 골드를 모을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운명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시키는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았겠소? 이미 일만 골드를 빌린 다음에는 그의 복력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떤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겟지요."


변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냇다.


"방금 거대길드들이 호드들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고자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유저가 키보드를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유저가 한둘이었겠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 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호드잡이 공대로 가시덤불을 가득 채울수 있을 만하였으되 다른 서버에 던져버리고 돌아온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변씨는 /한숨 하고는 돌아갔다.


변씨는 본래 서버 최대 길드의 길드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 길드장이 당시 호드를 칠 계획을 세워서 변씨에게 주변에 쓸 만한 유저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길드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레벨이 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제가 그님과 상종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그분의 레벨도 모르옵니다."


"그이는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다음 접속에 길드장은 길원들도 다 물리치고 변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문앞에 서서는, 길드장을 머추게 한 후 허생에게 귓말을 하여 길드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 하고,


"당신 들고 온 폭죽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 다. 그리하여 즐겁게 폭죽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변씨는 길드장을 밖에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한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길드장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길드장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길드장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자신의 길드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차단을 하겟다며 막았다.


"접속시간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길드에서 어느 직위에 있는가?"


"길드장이오."


"그렇다면 너는 한 길드의 최고라고 할만하군. 내가 용개와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길드원에게 잘 설명하여서 길가입을 넣고 길장 자리를 넘겨줄수 있겠느냐?"


길드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이 대장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서버이전해온 저랩들이 아는사람이 없어 버스도 못돌고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길드에 청하여 만랩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버스를 돌게 하고, 길드에 자리를 내어 그들을 초대할수 있겠느냐?"


길드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 무릇, 서버에 대의(大義)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첩자를 보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다른 서버에 우리 길드들이 캐릭을 잠시 내버려두고 부캐를 키우게 장려할 것과, 그들과 친교를 맺는 것을 행한다면, 그들도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 길드중의 고랩들을 가려 뽑아 캐릭을 잠시 접고 다른 서버에 캐릭을 키우게 하면서, 그 서버의 사람들을 회유해 이 서버로 옮기게 하고, 당신의 길드에 들게 하여 조직을 잘 이끈다면, 한번 천하를 뒤집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길드장은 힘없이 말했다.


"길드원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캐릭 아이템을 맞추기에 바쁜데, 누가 캐릭을 잠시 접어 두고 다른 서버에 부캐를 키우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 소위 레게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호드 천지에 캐릭을 만들어 자칭 고수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보라템만 가려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게이들이나 좋아하는 색이고, 수십명이 모여 하나를 치는 일은 치졸한 약자들이나 하는 짓인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고수라 한단 말인가? 이제 얼라를 위해 가덤을 정복하겟다 하면서, 그까짓 보라템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넓은 땅에서 호드와 싸워야 할 판에 전사한테 힐이나 주면서 몹 다굴이나 치고 있으니, 그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전쟁 준비인가?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서버를 대표하는 길드의 장이라 하겠는가? 그 대단한 길드라는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면서 Z키를 눌러 칼을 꺼내 목을 치려고 하였다. 길드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초가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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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0) 2016.09.14

위기의 순간에 위상력에 각성한 이후로도 그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아카데미에 가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외박 허가를 받아 집에 돌아가면 그녀가 자랑스럽다며 따스하게 안아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끝장날 뻔했던 그때의 무력감을 생각하면, 한 사람의 당당한 클로저로서 선량한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팀원들이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자신을 맞아주는 가족들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그런 사소한 불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딸랑, 하고 펭귄을 본딴 도어벨이 울렸다.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가 어머니를 졸라 산 물건이다. 여간해선 떼를 쓰는 일이 없는 그녀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재미를 느낀 그녀의 아버지가 한동안 이를 가지고 그녀를 놀리곤 했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예상대로 부엌 쪽에서 잘 다녀왔니,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세면세족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앉아 그녀의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한 팀원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오락기를 손에서 떼질 않는다느니, 또 다른 팀원은 자신을 시도때도없이 인형마냥 껴안으려 해서 곤란하다느니 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참다참다 한 마디 했더니만 글쎄 그 애가요...”


그녀의 생각에 노이즈가 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들어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 탓인지 이야기하던 중 무언가를 잊는 일이 잦아진 느낌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어머니가 ○○를 말하는 거니, 라고 그녀에게 그의 이름을 상기시켜주었다.


“아, 네. 맞아요. 그래서 걔가...”


*

 

클로저 요원으로서의 그녀의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훈련된 클로저에게 위협이 될만한 수준의 차원종이 억제장치의 방해를 뚫고 출현할 확률은 매우 낮고, 만에 하나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대개는 대기중이던 상급 클로저가 금새 출동해 처리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와 그녀의 팀원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잔챙이 처리였다. 물론, 잔챙이라고 해도 일반인에게는 치명적인 존재인 만큼 그녀의 일이 시덥잖은 잡일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료화면을 보면서 언젠가 자신도 성장하여 저런 믿음직한 수호자가 되리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곤 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칼을 치켜드는 차원종을 무력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다른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팀원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방진을 빠져나가 도망치려 하는 소형 차원종을 마무리하는 그녀의 손놀림에 망설임은 없었다. 뒤통수에 단검이 꽂혀 간혈적으로 붉은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는 차원종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는 손을 휘두르며 염동력을 행사해 단검을 손으로 불러들였다. 고개를 돌리자 나머지 차원종의 처리를 마친 팀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전 종료. 복귀하겠습니다.”


소형 통신장비로 보고를 마친 그녀는 그 틈을 못 참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팀원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투덜거리며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쉬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그녀가 마무리한 차원종의 시체에 닿았다. 자세히 보니 차원종은 무언가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의문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한번 염동력을 사용해 차원종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갑작스레 치밀어오르는 헛구역질에 그녀는 손을 입에 올렸다. 차원종이 안고 있던 것은 꿈틀거리는 핏덩어리였다. 그녀의 허벅지에 겨우 닿을락말락하는 작고 둥그스름한 무언가. 거기에서 비어져나온 사지로 추정되는 무엇인가가 움찔움찔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차원종의 유체 비슷한 것일까. 어렴풋이 느껴지는 약한 존재감이 평소에 보던 모습과는 달라도 그것이 차원종임을 알리고 있었다. 역겨운 느낌을 참지 못한 그녀는 무심결에 강한 염동력을 행사하여 그것을 짓눌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차원종의 유체가 터져나가자 그녀는 겨우 입을 가린 손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은 남았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가 어머니와 나눌 화재는 이와 관련된 것이 될 것 같았다.


“어머니, 이걸로 오늘도 된거겠죠?”


괜스레 어지러워진 마음을 다잡고자, 그녀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어머니를 불러보았다.


*

 

“갔군.”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른 탓이었다. 아이를 안은 한 생존자가 포위망을 빠져나올 때는 어떻게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교전을 시작했다가는 정찰 임무도 마치지 못한 채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뒷통수에 칼이 박히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지키려고 애썼던 아이가 쓰레기처럼 터져죽는 것도 막아내지 못했다. 등에 짊어진 통신기기를 통해 구역 내의 생존자 전멸을 전한 그는 은신처에서 나와 피로 물들어 언 듯 봐서는 붉게 보이는 분홍빛 머리의 여성을 미행했다.


신서울은, 아무래도 쇠퇴하는 중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듯 했다. 강남 사태 이후 강남 지하에서 발견된 플레인게이트 탐사중에 발생한 이변이 그 시초였다.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풀려난 강력한 차원종은 그 강대한 정신지배 능력으로 탐사대원과 그들의 호위 클로저들을 자신의 손에 넣고는 어떤 수를 썼는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차원종을 신서울에 풀어놓았다.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최초에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 클로저들이었다. 데이터 상으로는 분명 갓 정식요원이 된 풋내기들이었을 터였건만, 차원종이 그들에게 모종의 힘을 부여한 것인지 그들의 전투적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라 할 만했다. 신서울의 대부분이 시체가 널부러진 폐허로 변하는 데에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고, 퇴각을 결정한 상부는 은밀행동에 유리한 그의 팀에게 생존자 수색과 정찰을 명했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그가 알아낸 유일한 사실은, 차원종에게 넘어간 클로저 팀의 전 리더가 저녁 이후로는 강남 구석에 위치한 특정 건물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 뿐이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예의 그 건물에 들어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이제 차원종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들이었고, 그들의 행동원리는 그의 이해범위 밖에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을 기약하며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는 야영지로 향했다.

 

*

 

“다녀왔습니다.”


딸랑, 하고 펭귄을 본딴 도어벨이 울렸다.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가 어머니를 졸라 산 물건이다. 여간해선 떼를 쓰는 일이 없는 그녀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재미를 느낀 그녀의 아버지가 한동안 이를 가지고 그녀를 놀리곤 했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예상대로 부엌 쪽에서 잘 다녀왔니,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세면세족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앉아 그녀의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은 차원종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뻔했다느니, 팀원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고민이라느니 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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