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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하. 세상에 유령같은건 없어.”

 

알고 있다. 평소라면 그까짓 담력훈련,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평소에 매번 차원종과 마주하는 사람이 유령이 무섭겠나? 그저 어제 했던 공포게임에 좀 과하게 심취했던 여운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하필 학교가 배경이었을 뿐이고.

 

“…괜찮아. 가자.”

 

의심에 가득찬 표정을 보니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나는 행동으로 나의 결의를 보여주기로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하니 의외로 발걸음이 가볍다. 봐라, 이슬비. 뭐가 그렇게 문제란 말이야? 이렇게 그저 앞을 보고 걷다보면 금방 끝날텐데. 그리고 나는 정확히 5분만에 후회했다.

 

“…….”
“…이세하, 그렇게 잡으면 못 움직여.”

 

정신을 차리고보면 이슬비에게 꼭 붙어있게 된다. 코너를 돌 때마다 게임 속의 기믹들이 슬금슬금 머릿속을 잠식한다. 계단을 오를 때면 발 밑을 자꾸만 살피게 되고, 교실에 들어설 때면 창문 밖부터 확인하게 된다. 불가항력이다.

 

“…현실엔 왜 세이브가 없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지금 엄청 진지하거든.”

 

정말이다. 이런 잡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딴생각이 들어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한동안 공포게임은 삼가는 편이 좋겠다. 정말로. 이쯤 되니 도대체 누가 이런 멍청한 계획을 세운건지조차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이 한심한 꼴에 이슬비는 여보란 듯 한숨을 쉬어보였다.

 

“…어쩔 수 없지. 오늘만이야.”

 

툭, 하고 머리에 자그마한 무게감이 실린다. 눈앞에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는 슬비의 얼굴. 나도 그만 고개를 숙여버린다. 쓰다듬, 쓰다듬. 부드러운 손길에 정신이 쏠린다.

 

“괜찮아, 괜찮아.”

 

머리에 열이 오른다. 아마 지금 거울을 보면 귀까지 새빨간 얼굴이 보이겠지. 슬비 쪽도, 아마 비슷할 것 같다.

 

"괜찮아, 세하야."

 

태엽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 뻣뻣한 손길이지만 따뜻하다. 이런 감각은 얼마만일까? 아무래도, 우리가 담력시험을 마무리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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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부는 테러 경계 단계를 격상하겠… 내가 왜 깼더라. 이세하가 눈을 뜨자마자 한 생각이었다. …왜 본인이 내지 않고, OOO가 냈느냐… 오늘은 늦잠을 자려고 했을텐데. 답은 금새 나왔다. TV에서 아침 뉴스가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다. 등 쪽에 커다란 쿠션을 벤 이슬비가 앉은 채 잠을 자고 있다. 그럼 그렇지. 그녀는 밤샘에 익숙치 않았다. 아무리 일이 밀려도 새벽이 되기 전에는 잠을 청하는 그녀였다. 그런 주제에 모처럼의 휴가라며 연속방영하는 드라마에 달려들다니. 이세하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며 한숨을 푹 쉬었다.

 

좀 늦잠을 자게 두어야할까? 이세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장식장에 얌전히 들어가있는 게임기의 모습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평소엔 게임 그만하고 빨리 좀 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면서, 이게 뭐람. 평소에 굳게 내리눌러놓던 장난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이슬비의 뺨을 슬쩍 찔렀다.

 

“야, 이슬비.”

 

꾸욱, 꾸우욱. 귀찮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귀 뒤로 대충 넘겨놓은 머리가 사락, 하고 흘러내렸다. 매끄러운 머리칼을 손가락에 슬슬 감아본다. 이대로 당기면 많이 놀라겠지. 이세하는 선을 넘으려 드는 장난기를 잠재운다. 다음은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그녀의 귓가로 얼굴을 기울였다.

 

“공주님, 아침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찌푸러든다. 그러나 반응은 그것 뿐. 재미없어. 동그란 귓불이 제법 탐스럽다. 귓가에 도드라진 땀방울. 방이 조금 더웠던 것일까. 이세하는 오늘부터는 에어컨을 켜야겟다고 생각했다. 짠 맛. 귓바퀴라도 한 번 깨물어볼까, 생각하던 찰나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땠으려나, 하는 것이 이세하의 바람이었지만 삶이란 그렇게 좋게만은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만. 일어났어.”
“어어….”
“…뭐가 어어…, 야…? 아침부터 낯뜨겁게…!”

 

잘못했습니다. 이세하는 잽싸게 용서를 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효과는 없었다. 아침을 먹기 전까지 그는 한동안 굽신거리며 죽어있어야만 했다. 아침부터 듣는 잔소리는 꽤나 신선했다. 앞으로 몇 번정도는 더 시도해볼 가치가 있으리란 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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