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똑. 작게 켜져있던 방의 불이 꺼진다. 달큰한 린스 냄새, 규칙적인 숨소리. 침대에 누운 이세하를 익숙한 감각들이 자극한다. 이불을 끌어올리는 그를 따스한 팔이 껴안는다. 왔어? 살짝 잠에 취한 목소리. 응, 하고 대답하자 베스스 웃는다. 늦었어, 바보야. 겸연쩍게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을 이슬비가 잡아내린다. 조금 아쉽다. 몇 년을 쓰다듬어도 그렇다. 느릿느릿 내려오는 손가락을 그녀는 냉큼 깨문다.

 

“아파.”

 

늦게 온 벌이야. 그녀가 속삭인다. 이세하는 괜히 약이 오른다. 내가 늦고 싶어서 늦었나. 잠시 머리를 굴리니 그럴싸한 반격이 떠오른다.

 

“그래서, 외로웠어?”
“…그랬지.”

 

조금 늦은 대답이 마침내 속삭임에서 평범한 대화가 되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이슬비의 귀에 입을 가까이한다. 우리 슬비, 인형이라도 다시 가져다 놓아야 할까봐. 곧이어 후, 하고 귓가에 입김을 불어본다. 예전에 기억나? 내가 너희 방에 처음 갔던 날. 인형 숨기다가 나한테 들켰잖아. 대번에 그녀의 반응이 돌아온다.

 

“그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왜 안돼? 반응이 재미있다. 그 다음에 갔을 땐… 이세하의 말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가로막힌다. 그를 밀쳐내 침대에 바로눕힌 이슬비는 도끼눈을 하고 그에게 올라탄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짐짓 딱딱하게 이야기하지만 평범한 대화라는 것을 둘 모두 알고 있다. 이세하는 웃으며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러면 입을 막으면 되잖아, 라는 말에 이슬비는 수긍했다. 쪼옥. 그녀의 입술. 꿈 속에서도 주름 하나 남김없이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입을 슬쩍 열자 기다렸다는 듯 혀가 들어온다. 똑똑. 앞니를 두드리는 부드러운 노크. 뒤섞인다. 숨이 거칠어진다. 뜨겁게 올라오는 이것은, 누구의 날숨일까.

 

“너무, 보고싶었어.”

 

흐려지는 말 끝. 애처롭다. 매달린 팔을 내버려둔채 이세하는 팔을 그녀의 등 뒤로 돌렸다. 보드라운 둔부를 움켜쥔다. 그대로 밀착시킨다. 더 안아줘. 애원하는 목소리에 순응한다. 혀가 엉길 곳을 찾아 그의 몸을 헤멘다. 턱에서 귀로, 그리고 목선을 타고 어깨로. 매끄러운 등을 따라 손가락을 훑으니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어깨 아래의 이 자국은 그녀가 천사였다는 증거일까. 날개뼈를 쓰다듬으며 품안의 감촉을 즐긴다. 좀 더, 좀 더. 어깨를 넘어 쇄골로, 가슴으로. 더 아래로. 계속. 이어지고, 뒤섞여서, 그저 계속해서 이렇게 있을 수 있기를.

'클로저스 >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9  (0) 2017.05.24
무제 8  (0) 2017.05.24
무제 6  (0) 2017.05.23
무제 5  (0) 2017.05.23
무제 4  (0) 2017.05.23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누가 커피를 끓였냐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다. 가볍게 기억을 되돌린 이세하는 자신이 이슬비와 함께 모텔방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보통 아침이면 커피를 먼저 끓이는 쪽이었던 이세하는 오랜만에 맞는 여유로운 아침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내 것도.”
“…일어났어?”

 

수긍. 이슬비는 한숨을 쉬며 믹스 커피를 한 봉투 더 집어들었다. 테이블에 팔을 짚고 커피 포트가 울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뒷모습. 잠옷을 대신했던 흰 셔츠, 헐렁한 반바지. 군데군데 주름지고 흐트러진 그 모습이 꽤나 낯설다. 이렇게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을 그 말고 또 누가 알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평상심, 평상심. 어디보자, 퇴실 시간이 12시였던가.

 

“지금 몇 시야?”
“9시 30분.”
“…어?”

 

탁자에 널브러져 있던 간밤의 흔적을 치우던 이세하는 맥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각자 씻고 짐을 챙겨서 나가려면 제법 빠듯하다. 이세하는 머릿속으로 셈을 반복했다. 모자르다. 느긋하게 커피를 끓이는 이슬비의 행동거지는 어디서 나온 여유일까? 돌아온 대답에 이세하는 당황했다.

 

“같이 씻으면 되잖아?”
“뭐?”

 

담담히 이어지는 설명. 뭔가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세하는 적당히 납득했다. 어차피 볼장 다 본 사이, 조금이라도 수면시간을 늘리고자 생각한 결과라. 확실히 어제 잠을 늦게 자긴 했다만.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녀는 가끔 상식을 넘어선 말을 하지 싶다는 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그럼, 들어간다?”
“…잠깐, 잠깐만.”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역시 달랐다. 계획은 제법 그럴싸하게 세워놓은 이슬비였지만, 막상 이세하가 들어갈 때가 되자 한참을 뜸을 들였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겨우 욕실에 들어간 그는 샤워타올을 두른 채 구석에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조금이라도 보이는 면적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까? 욕조에 붙은 샤워기에서는 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사실, 이세하의 입장에서는 역효과였다. 등에 구슬처럼 맺힌 물방울들, 물에 푹 젖어 흘러내리는 타올, 억지로 끌어올리는 손길. 그의 이성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그녀의 뒷모습에 점점이 남은 붉은 자국이었다. 간밤의 기억이 플래시백되며 그의 이성을 착실히 갉아먹어갔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부끄러우니까, 보지 마.”

 

가만, 내가 왜 참고 있었더라? 등의 손톱자국이 욱신거린다. 머릿속에 이슬비의 달콤한 신음소리가 재생된다. 이세하는 머릿속으로 다시한번 셈을 해보았다. 아마, 괜찮을 것 같다. 아무렴 어때.

 

“잠깐, 세하야? 그렇게 당기면... 꺄악?!”

 

결국, 몇 시간 뒤 그들은 카운터에 카드를 반납하며 연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클로저스 >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8  (0) 2017.05.24
무제 7  (0) 2017.05.24
무제 5  (0) 2017.05.23
무제 4  (0) 2017.05.23
무제 3  (0) 2017.05.22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졌다. 인적 드문 버스 정류장을 겨우 찾아내 앉은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기묘하게 달라붙는 분위기에 이세하는 감히 휴대폰을 꺼내보지 못했다. 톡, 톡. 앞머리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 자꾸만 신경이 곤두선다. 대충 머리를 털어내니 물방울이라도 튀었는지 옆자리의 이슬비가 어깨를 움추린다. 평소라면 미안하다고 가볍게 말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늘은 감히 입을 떼기가 어렵다. 이 침묵을 깨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이세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이슬비를 훔쳐본다.

 

평소에는 꽤나 답답해보이는 재킷이었지만 이런 날에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단단히 채워진 지퍼 너머로 슬쩍 엿보이는 흰 셔츠 자락은 조금의 물기도 없이 온전했다. 그다지 춥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안심. 살짝 시선을 올리면 매끄러운 턱선을 지나 평소엔 꽤나 보기 힘든 그녀의 동그란 귀가 살짝 드러나보인다. 모양 좋은 귓바퀴 위로 빗방울이 하나. 또르륵, 굴러떨어진다. 그저 얼굴의 일부일 뿐이건만, 이렇게 보니 제법 배덕감이 든다. 이세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시선 한 구석으로 스쳐간 그녀의 치마는 머릿속에 제법 오래 남아있을 것 같다. 빗물에 젖어, 미묘하게 그녀의 허벅지가, 아니, 살결이, 생기가 비쳐보이던, 새하얀 요원복. 이세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아침까지도 맑았던 날씨 치고는 비가 제법 푸지게 내린다. 이슬비는 옆자리에 앉아 머리를 털어내는 이세하에게 괜찮냐고 묻지 못했다.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머리칼을 괜히 쓸어넘긴다. 귓가에 달라붙는 머리칼이 오늘따라 거추장스럽다. 한 마디라도 해볼걸 그랬나. 조금 후회해보지만 아무래도 때가 늦은 것 같다. 괜히 어색해진 이슬비는 이세하의 옷을 살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덕에 그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다행이다. 지금 이 시선을 들키면 당장이라도 빗속으로 뛰쳐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대강 풀어헤치고 다니는 재킷 탓에 셔츠까지 담방 젖어버린 상체가 꽤 추워보인다. 핀으로 겨우 제 위치에 고정되어 덜렁거리는 넥타이. 뚝, 뚝. 물을 흘리며 늘어진 그 노란 천조각 너머로 쇄골이 빼꼼히 도드라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람. 이슬비는 시선을 돌린다. 빗물을 머금어 풀죽은 머리칼. 수북하게 늘어진 평소보다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손을 들어 한번 만져보고픈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이러고 있으면 앞으로 무슨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이슬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언제 그칠지 모르겠네.”

 

겹치는 목소리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어이없다는 표정 한 구석으로 웃음이 스민다. 멋쩍은 웃음소리가 한데 섞인다. 비가 그치기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그들이 함께 돌아가기 까지도, 앞으로….

'클로저스 >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7  (0) 2017.05.24
무제 6  (0) 2017.05.23
무제 4  (0) 2017.05.23
무제 3  (0) 2017.05.22
무제 2  (0) 2017.05.22
1 2 3 4 5 6 7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