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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 클로저스 (35)

  1. 김유정과 이슬비가 초콜릿을 만드는 이야기 - 2016.04.13
  2. 이세하가 병문안을 가는 이야기 - 2016.03.28
  3. 그녀의 이야기 - 2016.03.23
  4. 연락처 등록하기 - 2016.03.21
  5. 리더가 아닌 리더 - 2016.03.21

“언니, 곧 밸런타인데이인데 선물은 준비하셨나요?”

 

퇴근이 가까워진 시간, 달력을 보다가 이슬비의 난데없는 질문을 받자 김유정이 뜨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슬비는 이번에도 틀렸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2월에 들어서면서 이런저런 일이 많았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에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김유정이 망가진 표정을 바로잡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에게 질문을 되돌리자 이슬비의 답답함은 더욱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지. 뭐라도 준비했니, 슬비야?”

“아뇨. 주말에 팀원들에게 줄 걸 직접 만들어볼까 해서요. 설마, 잊고 계셨던 건가요?”

“응?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잖니?”

 

허공을 표류하는 그녀의 눈길에 이슬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곧 결실을 보리라 생각했던 제이와 김유정의 관계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지부진한 채였다. 두 사람이 감정을 앞세우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나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들이 도대체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제이와 김유정이 서로에게 평균 이상의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건만 어째서 매번 이런 식인 것일까. 억지로 붙여놓으려고 해도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를 슬금슬금 밀어내며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둘의 모습을 떠올린 이슬비는 결국 이번에도 억지로 그녀를 끌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저랑 같이 만들지 않으실래요? 제이 씨한테 주실 거잖아요? 초콜릿.”

“아? 어? 내가 왜 제이 씨한테 초콜릿을 준다는 거니?”

“제이 씨도 그래도 나이가 비슷한 사람한테 받아야 기분이 좋을 것 아니에요? 제가 드려봤자 그냥 주전부리나 다를 게 없다구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가슴께에 겨우 닿는 체구의 이슬비에게서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받는 제이의 모습이 김유정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유정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 봐요. 언니가 제이 씨정도는 좀 챙겨주세요. 테인이랑..., 세하는 제가 줄 테니까.”

 

엉뚱한 생각이 스쳐 말에 미묘한 휴지를 두고 만 이슬비는 김유정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김유정 역시도 나름의 생각에 빠져있어 그에 대해서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슬비는 안도하며 김유정과의 약속 시각을 잡았다.

 

*


김유정은 브라우니의 재료를 사기 위해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적당히 매장에서 산 기성품으로 때웠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와 그녀 사이의 일이라면 늘 그렇듯이 김유정은 평소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의 기세에 밀려 기어이 약속을 잡고야 만 김유정은 제작에 드는 재료비를 전액 자신이 부담하는 것으로 마지막 체면을 지켜야만 했다. 한숨을 쉬며 제빵 코너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던 김유정은 발렌타인 특선 코너를 깨작이는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제이 씨?”

“아, 안 사요! 그냥 구경하는 거..., 어라, 유정 씨?”

 

김유정을 본 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아, 뭐, 그냥 저녁 찬거리나 좀 살까 해서요.”

 

왠지 부끄러워진 김유정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그에게 줄 선물임에도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이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밸런타인데이지?”

 

덜컥. 김유정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가 으레 아무 생각 없이 엉뚱한 말을 늘어놓으며 장난을 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허당 같으면서도 종종 이렇게 허를 찌르는 그의 모습은 정신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이 씨는 어차피 팀원들한테 받을 거잖아요?”

“유리가 뭘 좀 산다고 하긴 하던데, 우리 리더도 별다른 말은 없어도 주지 않을까? 성격이 있으니.”

“그럼 됐어요.”

 

김유정이 짐짓 자르듯 말하자 제이의 몸이 축 처졌다. 그가 이런 일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이런 데 일일이 의식적으로 반응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럼 유정 씨는 우정 초콜릿이라던가, 안 주는 거야?”

 

‘우정 초콜릿’이라는 말에 김유정이 발끈했다. 이럴 때라도 빼지 말고 그냥 초콜릿을 달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감찰부의 최서희 요원이 그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인 만큼 그에게 초콜릿을 줄 사람은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많을지도 모른다. 가끔 헛소리를 해서 그렇지, 입만 다물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미남에 키도 큰 제이니 그를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는 여성 한, 둘쯤은 있을 것이다. 약이 오른 김유정은 그에게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안 줘요. 제이 씨는 다른 사람들한테 잔뜩 받을 거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서 빨리 들어가야 하니까 이만 실례할게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는 김유정의 등 뒤로 제이가 그녀를 부르며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모두 무시했다. 처음에는 ‘그라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생각했건만, 머리에 다시 떠올릴수록 그녀의 머릿속엔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초콜릿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서 술이나 진탕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김유정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구매목록에 맥주를 추가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초콜릿 재료를 사서 돌아갔다. 그만두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슬비가 지을 풀죽은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귀가한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맥주에 취한 채 곯아떨어졌다.

 

*


약속대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김유정의 넋두리를 들은 이슬비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 무슨 청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에피소드란 말인가. 업무 중에 자신의 감정을 능란하게 숨기는 그녀의 모습을 평소부터 곧잘 보아왔던 터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정도로 그녀가 제이에게 가진 감정이 특별하기에 그런 것이려니 하며 이슬비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었다.

 

“하아, 어찌 됐건, 제이 씨가 유정 언니한테 화가 많이 났거나 하진 않았을 거예요. 남은 건 언니가 밸런타인데이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죠.”

 

숙취와 자책으로 얼룩져있던 김유정의 얼굴이 그녀의 말에 조금 밝아졌다. 그녀가 넋두리를 늘어놓는 사이 이슬비는 그녀가 가져온 재료들을 모두 꺼내 배치해 둔 뒤였다. 자취를 하면서 이런저런 요리를 많이 해본 김유정이었지만 초콜릿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던 김유정은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시 네가 만들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만들었다간 쓰레기만 늘어날 것 같은데...”

 

레시피를 다시 확인하던 이슬비는 김유정의 말에 힘이 빠진다는 제스쳐를 과장되게 취해 보였다.

 

“언니, 중요한 건 상태가 아니라니까요. 유정 언니가 직접 만들어준 초콜릿이라는 게 중요하지. 남자 마음을 잡는 데는 수제 요리만 한 게 없다구요.”

“...너도 남자친구 없잖니.”

“...드라마에서 봤어요.”

 

덩달아 어두워지는 이슬비의 표정에 김유정은 지뢰를 밟은 느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까지의 관계가 역전된 듯한 모습으로, 김유정은 음울하게 누군가를 중얼중얼 욕하고 있는 이슬비를 끌고 조리대 앞에 섰다.

 

“슬비야,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니?”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게 구는 김유정의 모습에 제정신을 찾은 이슬비가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자신의 행동에 PC의 전원을 켜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이슬비의 모습에 김유정은 자신이 이렇게 구는 것이 그렇게 안 어울리고 이상한 것인가 하고 약간의 우울감을 느꼈다.

 

“일단 이걸 읽어보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는 드리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아셔야 요리하기가 편하니까요.”

 

종이를 펼친 김유정은 인터넷 블로그에서 발췌한 듯한 화사한 프린트에 처음 외국에 갔을 때 느꼈던 이질적인 감정을 다시 느꼈다. 동글동글한 폰트로 여보란 듯 귀엽게 표시된 「남친이 좋아하는 브라우니 만들기」라는 제목을 보고나니 그 감정은 더욱 커졌다.

 

‘아아, 나는 역시 이런 걸 하기엔 늦은 나이가 아닐까...’

 

프린트를 펴든 자세로 굳어있는 자신을 물음표를 띄우고 바라보는 이슬비를 눈치챈 김유정은 서둘러 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괴감을 애써 씹어 삼키며 프린트를 끝까지 읽어내린 김유정은 이슬비와 함께 브라우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초콜릿 200g을 녹여서 중탕하도록 하죠. 판 초콜릿을 사 오셨으면 그걸 부숴야 하겠지만, 다행히 언니가 사 온 초콜릿이라면 부술 필요는 없겠네요.”

 

김유정은 그녀의 말에 따라 초콜릿의 분량을 쟀다. 평소 습관대로라면 손 감각으로 적당히 분량을 맞춰서 호쾌하게 요리했겠지만, 처음 하는 일인 데다 제이에게 줄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손길은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아니, 되려나? 될까?”

“...언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요리랑 다를 게 없잖아요. 더 쉬웠으면 쉬웠지.”

“그, 그러니?”

“그럼요. 정 부담되시면 계량은 제가 해 드릴게요. 언니는 중탕을 부탁해요.”

 

스스로의 손에 도무지 자신이 없었던 김유정은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뒤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없었다. 이슬비가 건네주는 재료들을 받아서 잘 섞기만 하면 되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세가 붙은 그대로 진행을 하던 김유정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반죽의 분량에 당황했다.

 

“슬비야, 이거 너무 크지 않니...?”

 

그녀가 완성한 반죽을 작은 프라이팬만 한 틀에 옮겨 담는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이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김유정이 상상한 브라우니는 손바닥만 한 작은 선물이었던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슬비가 당연하단 듯이 되물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언니랑 제이 씨 사인데요.”

“슬비야, 매번 말하는 거지만 제이 씨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

“글쎄요, 이걸 주시고 나서도 그럴까요.”

 

담담하지만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는 이슬비에게 결국 김유정은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돌려받은 반죽 위에 그녀가 시키는 대로 슬라이스 된 아몬드와 코코넛을 뿌려 데코레이션까지 완료한 김유정은 언제 켰는지도 모를 사이에 예열이 끝나있는 소형 오븐에 틀을 밀어 넣어 일을 마무리했다.

 

“포장도 준비하셔야죠.”

 

큰일을 끝냈다는 느낌에 몸에서 힘을 쭉 빼던 김유정은 또다시 이슬비에게 끌려갔다. 정말이지, 이런 일에서는 그녀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 김유정의 감상이었다. 결국, 그녀는 제과점에서 파는 케이크나 파이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어마어마한 브라우니를 만들어서 돌아가게 되었다. 역까지 그녀를 바래다주겠다며 그녀를 따라나선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들겠다던 초콜릿은 어디에 있을까? 브라우니를 만드는 동안 그녀가 한 것은 김유정의 도우미역뿐이었다.

 

“슬비야, 너는 초콜릿 안 만드니?”

 

밸런타인데이에 대해 조잘조잘 즐겁게 이야기하던 이슬비의 말이 딱 하고 멈췄다. 의아해진 김유정이 그녀를 돌아보니 이슬비의 얼굴이 불안으로 물들어있었다.

 

“...역시 저는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슬비야.”

 

김유정은 손날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아프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이슬비를 보며 김유정은 작게 웃었다. 결국, 나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슬비나, 그녀 자신이나,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김유정은 오늘 하루의 보답으로 그녀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었다.

 

“팀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리더의 일인 거, 알지? 이것도 업무의 일환이야. 재료는 내가 충분히 사 왔으니까, 부탁할게?”

“...네.”

 

그녀 자신도 이슬비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밸런타인데이를 보냈거나, 간단한 기성품을 주고받으며 인사치레를 반복했을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김유정은 불안해하는 이슬비의 모습에 그녀 자신이 그러했듯 자신을 떠밀어 한 발자국 전진하게 하는 무언가를 건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라면 그 정도 도움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늘 하루 그녀를 도와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녀라면.

 

*


밸런타인데이 당일 아침, 상자를 들고 불안해하며 사무실 계단을 오르던 김유정은 종이가방을 손에 든 채로 검은양 사무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이슬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늘 꼴찌로 사무실에 도착하는 이세하의 게임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사무실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유리가 제이에게 장난을 치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게임의 BGM 사이로 그 둘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자 이슬비가 딱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오셨어요, 유정언니?”

“좋은 아침이야. 들어가야지.”
“아뇨, 그... 저는 잠시만...”

 

김유정은 주저하는 그녀의 빈 쪽 손을 잡고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시야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이와 그를 깔아뭉갠 채 깔깔 웃고 있는 서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방으로 들어오는 김유정을 발견한 제이의 표정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김유정은 다시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검은양 사무실의 아침이 오늘도 이렇게 소란스러워졌다.

 

“제이 씨! 뭐 하시는 거예요!”

 

이세하는 다시한번 손에 들고있는 종이가방을 확인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물건을 확인하는 것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일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늘에서는 따스한 5월 낮의 햇살이 모두를 축복하듯 내리쬐고 있음에도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불안감 뿐이었다. 그의 앞을 막아선 연립식 주택의 현관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괴수가 살고있는 미궁의 입구로 치환되어 그의 발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녀가 사는 집의 호수는 잘 알고 있었다. 203호. 이제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겨우 들어올려 ‘2’라고 적힌 창백한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애써 쫓아냈던 불안감이 다시 돌아와 그의 손을 잡아챘다. 가만, 내가 그걸 챙겨왔던가? 이세하의 시선이 다시 가방으로 향하려던 찰나 작은 목소리가 그를 호명했다.

 

“이세하?”

 

맙소사. 이세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마음을 조금만 빨리 다잡았더라면 ‘집에 없었다’라는 변명거리가 생겼을 터였건만. 기긱거리는 소리가 날 법한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의외라는 얼굴로 바라보는 이슬비를 확인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대부분 감기 마스크가 가리고 있었으나 벛꽃을 연상케하는 그 분홍빛 머리칼만으로도 그녀의 신원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약국에라도 다녀온 것일까, 그녀의 손에는 하얀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이세하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는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여보란 듯 손의 종이가방을 들어보였다.

 

“병문안 왔어.”

 

*


아마도, 모든 일의 발단은 복구대상 지역중 한 곳에 갑작스레 대규모로 출몰한 차원종 무리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해당 지역 내에 얼마 남지않은 잔당이 B급 차원종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최후의 습격을 감행한 듯 했다. 해당 구역을 담당하고있던 이슬비는 통신을 통해 지원을 요청한 뒤 차원종 무리와 교전을 벌였다. 대피중인 작업인원들의 보호와 차원종과의 교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운 나쁘게 때맞춰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겹치자 그녀는 격심한 전투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다행히 가장 가까이 위치해있던 이세하가 늦기전에 도착해 그녀를 지원해주었기에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사이킥 무브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쳤음에도 도움을 애써 받지 않으려는 그녀를 반강제적으로 부축해서 귀환한 이세하는 이정도면 그래도 한 건은 해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음날 이슬비가 병가를 냈다는 소식을 김유정에게서 전해듣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병가요? 어제 슬비를 데려왔을 땐 분명 별 문제가 없었잖아요?”

“그래. 분명 큰 상처를 입거나 하진 않았지. 하지만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고 연락이 왔어.”

“네?”

 

위상능력자가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어렸을 적부터 누구나 일년에 한두번쯤은 통과의례로 걸리기 마련인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살아왔던 터다. 그렇기에 그는 이슬비가 지쳐보였어도 쉬고 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김유정 역시도 그의 그런 의문을 파악했는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위상능력자는 병에 잘 걸리지 않아. 하지만 위상력을 극심하게 소모한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지. 아무래도 어제 복구인원들을 구하느라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야.”

 

평소의 제이를 떠올린 이세하는 그녀의 설명을 이해했다. 원래부터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툭하면 종합감기약이나 진통제를 찾는 그의 모습에 평소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김유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위상력이 거의 남지 않아 임기응변과 편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그가 그런 상황일 만도 했다. 이슬비가 빠진 자리를 메꾸기 위함인지 근무표를 조정하고 있던 김유정이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생각에 잠겨있던 그를 불렀다.

 

“세하야, 혹시 슬비한테 병문안을 좀 가줄 수 있겠니?”

 

“제가요?”

 

이세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귀찮다’였다. 병문안이라니. 병문안에 대해 그가 알고있는 것은 미디어 매체에서 접한 모습 뿐이었다. 선물을 잔뜩 사들고 간다거나, 음식을 만들어서 먹여준다거나, 환자의 물수건을 갈아준다거나 하는 부담스럽고 손이 많이 가는 행동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다루는 매체에서 이런 일은 으레 연인이나 그와 유사한 관계인 사람의 몫이였으니, 이세하로서는 그녀와 시덥잖은 일로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 일쑤인 자신이 왜 하필이면 병문안을 가는 사람으로 선발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왜 하필 제가?”

“벌이야. 어제 건물을 부숴먹은 건 잊지 않았겠지?”

 

이세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슬비의 지원요청에 급하게 사이킥 무브를 사용하다가 착지 과정에서 건물과 정면충돌해 벽을 무너뜨린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 건물은 어차피 복구 과정에서 철거될 장소였기에 별다른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모니터링중이던 김유정이 여기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기에 불문에 붙이려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던 이세하는 그녀가 이 시점에서 그 때의 이야기를 꺼내들자 할 말이 없었다.

 

“팀에서 둘이나 빠지면 작전에 문제가 없을까요?”

“걱정 마. 어제의 차원종 출현 사건으로 오늘은 복구작업이 예정보다 축소 진행될 예정이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은 특경대 쪽에서 협조하기로 했어. 평소에 많이 신세를 지고 있으니 이럴 때라도 제대로 협조하겠다나?”

 

이슬비가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 병문안을 가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송은이 경정의 모습이 생각난 김유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의 언행으로 보건대 땡땡이를 치려는 의도가 많든 적든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을테지만,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그녀가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첫 출동때부터 시작해서,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사건을 함께 거쳐왔기에 그녀에게 단순한 동료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검은양 팀원들도 같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채민우 경정의 잔소리에 결국 직접 이슬비의 병문안을 가는 것을 포기하고는 인원이 부족할 경우 특경대 측의 지원을 약속한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이세하는 특경대의 협조에 그다지 고마워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복구작업이 시작된 이후로 클로저 활동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어제의 일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었다. 현 시점에서 검은양 팀원들의 활동은 대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리를 순찰하거나 정해진 위치에서 경계 근무를 보는 것 뿐이었다. 이런 업무들은 대개 1인 단위로 이루어졌기에 이세하에게 있어 이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게임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금같은 시간에 병문안이라니.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그가 귀찮아하는 낌새를 눈치챈 김유정이 다시한번 무너진 벽 건을 들먹이며 감봉 이야기를 꺼내들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에 출시되는 신작 게임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한 푼이라도 봉급을 더 받아야만 했다. 그가 받는 봉급이 적은 것은 아니였지만 그 대부분은 그의 어머니인 서지수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돌아오는 것은 그 일 할 가량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결국 이세하는 김유정과 나머지 팀원들이 모은 돈을 들고는 마트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이세하는 이슬비의 집 거실-이라고 해봐야 투룸 방의 부엌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지만-에 앉아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가 병문안을 왔다는 말에 예상대로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는 식의 맥빠지는 대답을 한 이슬비는 이왕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뭐라도 먹고 가라면서 그를 집에 들였다. 이슬비는 그를 거실에 앉히고는 준비를 좀 해야하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참이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게임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도무지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대체 내가 왜 병문안을 가겠다고 한 것일까, 이세하는 다시한번 후회를 곱씹었다.

 

마켓에서 간단한 요리재료와 이런저런 물건을 사서 나올 때까지 이세하의 머리 속에는 ‘귀찮다’라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병문안 물품을 손에 들고나자 그의 생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평소에 그에게 잔소리만 늘어놓는 데다가 귀여운 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긴 해도 그녀는 어찌됐건 그 나이 또래의 여성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이 18년 인생의 지상과제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언감생심 여자가 혼자 사는 집이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마트에서 그녀의 방이 있는 연립주택까지 이동하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동안에도 그의 불안감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주택 앞에서 시간을 끌다가 맞은 결말이 이 꼴이다. 이세하는 후회감을 삭히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어떻게 보면 딱 그의 생각대로이기도 한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혼자 사는 방이라면 으레 떠올리는 엉망진창인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없는 개인물품들은 각을 맞춰 전시해두기라도 한 것 마냥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보통 기름 얼룩이라도 조금 튀어있기 마련인 조리공간 역시도 도대체 사용은 하는것인가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 자신도 평소에 청소를 자주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개중에 그나마 사람 냄새라도 느껴지는 것은 설거지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물기가 맺힌 채로 건조대에 올려져있는 식기 몇 개와 수저 한 세트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식기의 수는 왠지모를 허전함이 느껴질만큼 적었다.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진 이세하는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제법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이슬비의 상황이 궁금해져 그녀를 불러보았다.

 

“야, 이슬비. 멀었어?”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진 이세하는 그녀의 방문을 툭툭 두들기며 노크했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왠지 불안해진 이세하는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방문을 잠궈두진 않은 것인지 손잡이는 저항의 기색이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방문을 연 이세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방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곰인형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그렇게 될 테니 불가항력이라고 할 만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허전할 법한 곳마다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있는 동물 인형들이 좀 더 눈에 띄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한쪽 벽을 차지한 붙박이장에 반쯤 쑤셔박힌 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거의 사람만한 크기의 펭귄 인형과 살짝 보이는 분홍빛 머리칼의...

 

“슬비야?”

 

인형의 움직임이 순간 딱 하고 멈췄다. 이세하가 한숨을 쉬며 펭귄 인형을 잡고 끌어내자 인형과 씨름을 하고 있던 이슬비와 함께 붙박이장 안에 억지로 구겨져 들어가있던 인형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사자, 하마, 나무늘보, 양, 개... 다큐멘터리 채널을 방불케하는 수많은 종류와 크기의 인형에 이세하는 할 말을 잃었다. 인형의 파도에 떠밀려나온 이슬비는 당혹에 물든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또 하나의 인형마냥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세하는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신통한 아이디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타임 리미트를 초읽기하듯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이슬비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더욱 그랬다. 이럴 때에도 역시 팀의 리더라고 해야할까, 이 기묘한 교착상태를 먼저 푼 것은 이슬비 쪽이였다. 홍시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던 그녀는 바로 옆에 떨어져있던 인형을 집어들고는 혼란에 빠진 비명을 지르며 이세하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달려들려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중 발치의 인형에 걸려 이세하를 향해 넘어진 까닭에 그녀는 그를 인형으로 가격하는 대신 그를 향해 성대하게 넘어졌다. 엉겁결에 그녀를 받아낸 그는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쓰러졌다. 감기 때문에 제대로 씻지 못한 까닭일까, 그녀에게선 희미하게 땀냄새가 났다.

 

‘아-, 이거 큰일이네.’

 

머릿속으로 현실도피를 하며 제 삼자가 된 듯 현 상황을 평가하던 이세하는 그녀의 몸이 불덩이같이 뜨겁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챘다. 아까까지의 멀쩡해보이던 모습은 연기였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며 질문을 건넸다.

 

“야, 너 지금 대체 몇 도야?”

“삼십..., 삼십 칠 도.”

 

조금 흐려진 눈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세하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꼬리를 잠시 흐렸던 것을 보건대 보나마나 삼십 팔 도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세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 손으로 이슬비의 상체와 다리를 떠받치며 그녀를 들어올렸다. 방금 전에 그나마 있던 힘을 다 써버렸는지 예상 외로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고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만을 입고 있었던 탓에 그녀의 속옷이 슬쩍 비쳐보였지만 이세하는 애써 눈을 돌렸다. 그녀를 들어올리는 데에 별다른 부담은 없었다. 전날에 그녀를 부축하면서 이미 느껴봤을 터였건만 몇 번을 경험해도 적응이 되지않는 무게였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정식 클로저이자 한 팀의 리더라니, 누가 믿겠는가. 이세하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직접 물수건을 갈고 있었는지 침대 옆의 서랍장 위에는 물이 담긴 대야와 물수건이 들어있었다. 물에 손을 담가본 이세하는 미지근한 물에 인상을 쓰고 물을 갈아와서는, 열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일단 그녀의 팔과 목, 그리고 슬쩍 드러난 어께 부분의 땀을 닦아주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했다. 몸에 와닿는 물수건의 차가운 느낌에 이슬비는 작게 움찔했다.

 

‘움찔하고 싶은 건 내 쪽인데.’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니 이세하는 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간병에 대해 지식으로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첫 상대가 이슬비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뒤 시간을 확인한 그는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허락을 구하려고 해도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할 테지. 이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툭 던지듯 말했다.

 

“죽 끓여올테니 한 숨 자던가.”

 

그의 말에 대답하듯 이슬비가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웅얼거렸다. 이세하는 손에 남은 물기를 옷에 슥슥 닦아내고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거실 겸 부엌으로 나왔다. 준비물은 이미 오는 길에 다 사왔으니 그녀를 귀찮게 할 일은 없었다. 종이가방 안의 재료를 꺼내며 이세하는 머리 속의 레시피를 되새겼다.

 

*


죽을 끓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세하의 요리실력에 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사일에 소질이 없는데다가 평소에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는 어머니를 두었기에 이세하는 가사 전반에 능숙했다. 다만, 요리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뜬금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마는 그의 의식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흐름에 편승해 끝냈기에 별 문제없이 그녀를 간호하긴 했지만, 막상 일을 해치우고 이미 익숙한 일인 요리를 시작하자 잡생각이 그의 머리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료를 손질하다가도 물수건 너머로 손 끝에 느껴지던 부드러운 촉감이 생각나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손을 다칠 뻔한다던가, 불을 조절하면서 손등을 간질이던 그녀의 머리칼을 떠올리다 죽을 숯으로 바꿀 뻔 한다던가 하는 등의 실수를 몇 번이나 한 끝에 이세하는 평소 실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단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죽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것일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죽의 상태에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던 이세하는 반쯤 포기한 채로 앉은뱅이 상에 죽을 올려 방으로 들고 돌아갔다.

 

죽을 끓이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던 탓일까, 이슬비는 어느 새 잠든 채였다. 분명 스스로도 한 숨 자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막상 곤히 자고있는 그녀를 보니 이세하는 곤란해졌다. 일단 그녀를 깨워서 식사를 시키는 편이 회복에 도움이 될 테지만, 이세하는 그녀를 어떻게 깨워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야, 이슬비.”

 

시험삼아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르락, 내리락. 다시 오르락. 이불에 가려진 이슬비의 가슴이 그녀의 숨결을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세하는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다시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반응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약이 오른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볼을 찔렀다.

 

“으응...”

 

잠에 취한 그녀의 신음소리에 이세하는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물렸다. 이슬비는 귀찮다는 듯이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그녀의 이마에서 물수건이 스르르 흘러내려 베개 위로 떨어졌다. 안도감와 함께 이세하의 머릿속에 장난기가 찾아들었다. 이세하는 다시 손가락을 들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보이는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야, 이슬비. 일어나.”

 

간질간질, 간질간질.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에서 귀로, 다시 목으로, 그리고... 살짝 드러난 등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오락실에서 어머니 몰래 하던 탈의 땅따먹기 게임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이세하는 배덕감 섞인 추억에 잠기며 손장난을 계속했다. 어느 순간, 그의 손가락이 딱 하고 굳었다. 예상 외의 상황에 당황한 이세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손가락은 무언가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의 귀에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하...!”

 

어느 새 깨어난 것일까, 이슬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은 그녀가 염동력을 행사한 결과인 듯 했다. 굳어버린 손가락을 포기하고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반대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세하는 그를 향해 휘둘러지는 베개를 확인하며 눈을 감았다.

 

*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세하는 말없이 죽을 먹고있는 이슬비의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다시한번 사죄의 말을 건네었다. 강남역에 출현한 말렉과 맞설 때보다 지금이 더욱 공포스럽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오늘의 일에 대해 한 마디라도 언급하는 순간 그의 사회적 지위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 뻔했다. 어째서 직장 동료이자 동급생인 그녀에게 그런 장난을 쳤는가 하면, 그 스스로도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잠시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그가 시행한 자가진단의 결과였다.

 

잠에서 깨어난 이슬비가 그에게 엄청난 패널티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당한 앙갚음은 그의 얼굴을 강타한 베개정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매도하고 집 밖으로 쫓아내는 편이 차라리 나았으리라는 것이 이세하의 생각이었다. 그를 상 반대편에 무릎꿇게 한 뒤 아무 말도 하지않고 그가 준비한 죽을 먹고있는 이슬비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뭔가 무시무시한 처벌을 준비하고 있으리라는 암담한 예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죽이 너무 뜨거운 것인지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죽을 취식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세하는 다시한번 불길한 상상을 뇌 한 구석으로 추방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을 돌리고자 이세하는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며 그녀의 방을 둘러보았다. 거실에서 느껴지던 살풍경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거의 전시물 수준으로 정리된 딱딱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사이사이에 장식된 복슬복슬한 동물 인형들-붙박이장에서 쏟아진 동물 인형들까지 생각해보면 그 양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이 그 몰감정적인 인상을 상당히 줄여주고 있었다. 자주 사용하는 듯 금방 꺼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는 다리미와 그 옆의 강아지 발자국 무늬가 그려진 다리미판을 보고 이세하는 어디에 처박혀있는지도 가물가물한 자신의 집의 다리미를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요원복을 매일 다려서 입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의 잘 각이 잡혀 손질된 요원복 치마를 생각해보면 신빙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방을 구경하던 그의 눈에 벽에 걸린 액자들이 들어왔다. 그녀가 아카데미 시절 수상한 상장들인 듯 했다. 최우수상, 1위, 최우수상, 학교장상... 이세하는 그녀가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가 어쩌다가 어딘가에서 장려상이라도 받아왔다 치면 뛸 듯이 기뻐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세하는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잘 정리되고 깨끗하게 청소된 방의 다른 물건들과 달리 그 액자들은 관리가 잘 되지 않은 듯 먼지가 살짝 쌓여있었고, 개중의 하나는 살짝 삐딱하게 걸려있기까지 했다. 의문에 빠져 액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느낀 이세하는 상장들을 구경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괜스레 무안해진 이세하는 일단 그녀를 칭찬하기로 했다.

 

“대단하다, 야. 나는 상장 하나 받을래도 고생을 하는데. 저게 대체 몇 장이야?”

 

그의 말을 들은 이슬비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세하는 의아해하며 자신이 방금전에 한 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세하는 일단 말을 잇기로 했다.

 

“이정도면 굳이 우리 팀이 아니더라도 네가 리더가 될 만하지. 게을러빠진 나에 비하면 너는 정말 대단...”

“아니야.”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이슬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냉기에 이세하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도대체 왜? 이슬비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것이 감기 때문인지, 그녀의 기분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이세하는 짚어낼 수가 없었다.

 

“저런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무슨 소리야. 저만한 결과는 아무나 낼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럼 뭐해!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슬비가 비명처럼 외쳤다. 고개숙인 그녀의 좁은 어께가 거친 호흡으로 요동쳤다. 이세하는 자신이 밟아서는 안 될 구역으로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후회했다. 이건 긁어 부스럼이다.

 

“그래. 처음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어른들보다도 잘 할 수 있다고, 다시는 나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어른보다 잘 할 수 있다. GGV에 훈련생 신분으로 처음 배치되었을 때 김유정에게 했던 말이다. 평소의 자신과는 정반대 스탠스라고 할 법한 인상적인 말이었기에 이세하는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보같은 생각이었어. 유치하고 순진해빠진... 어제만 해도 그래. 네가 아니였으면 내가 모든걸 다 망쳐놨겠지.”

 

어제라, 이세하는 전날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금방 답이 나왔다. 그가 건물에 충돌한 직후의 이야기일 것이다. 충돌의 여파로 띵해진 머리를 무시하고 급하게 뛰어나온 그의 앞에 보였던 모습. 미처 도망치지 못한 작업자를 향해 천천히 무기를 들어올리는 차원종, 그리고 한 블록쯤 떨어진 거리에서 급하게 뛰어오던 이슬비. 거리를 가늠해 본 이세하는 아무래도 그녀가 늦을 것 같다는 판단에 3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차원종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다른 사람들은 네가 노력한 덕분에 다들 무사했잖아. 그 사람도 좀 놀랐을 뿐이지 별 다른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고.”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네가 제때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 뻔했어? 오늘도 봐. 내가 좀 더 유능했다면, 더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몸 관리도 못하고 쉬게 될 일도 없었겠지. 네가 굳이 이렇게 올 필요도 없었을테고. 바보같아. 얼마 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슬비의 말에 이세하는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래도 어제의 일은 그저 도화선에 튀긴 불씨 정도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도화선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마음을 시커멓게 태우며 쌓아온 화약들이 모조리 연결되어 있었다.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해체해야만 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이세하는 그것이 하필이면 지금, 그리고 자신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방면에는 좀 더 전문가가 많지 않은가. 팀의 관리요원인 김유정이라던가, 아니면 허당끼가 있긴 해도 사람은 잘 다루는 제이라던가. 하는 수 없이 이세하는 잠자코 앉아 그녀가 닥치는대로 떠내려보내는 후회와 자기혐오를 갈무리했다. 어느새 그녀는 좀 더 이전의 이야기까지 주워섬기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도 전부 마찬가지야. 나는 하나가 잘못된 길을 걷는 걸 미리 알아채지 못했어. 차원종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강남이 불타는 것도 막지 못했을거야. 그리고 우리 팀원들도...”

 

“야, 이슬비.”

 

점점 흐름을 더해가는 그녀의 넋두리를 이세하가 끊었다.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둑에 차오르는 홍수처럼 그녀의 긴 속눈썹에 위태로이 걸려있는 눈물을 보자 이세하는 마음이 거북해졌다. 이런 식으로 남의 고민을 듣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그는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한번 오늘의 병문안을 후회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김유정이나 제이였다면, 아니면 밝은 성격의 서유리였다면, 그저 자신이 아닌 누군가였다면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오랜 세월 도피를 계속해온 그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이세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렸다.

 

“팀원을 무시하는 거냐?”

 

툭 튀어나온 말은 시비조였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었다.

 

“...뭐라고?”

“너 혼자 다 해치울거면 팀이 왜 있어? 우리가 못 미더워서 혼자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 이야, 대단한 리더님이시네.”

 

이슬비가 눈을 깜빡이자 그녀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밀려나와 또르륵 흘러내렸다. 방해라는 듯 손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친 이슬비가 그를 노려보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말한건 우리한테도 전부 포함되는 이야기잖아. 네가 다른 팀원을 도운 것도 한, 두번이 아닐텐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게 있으니까...”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녀가 일단 말로 따지고 보는 성격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녀가 감정에 휩싸여 그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했다면 사람을 잘 다루지 못하는 그로서는 손 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대화가 가능하다면 인터넷 채팅으로 말싸움을 벌이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중구난방의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생각을 뻔뻔하게 되돌려주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상대를 찍어누르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여러번 말이 오가고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를 공격하기 위해 열심히 논리를 짜내고 있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이세하는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아내렸다. 저쪽의 말문이 막히기 시작하면 이쪽의 승리는 한 순간이다. 그녀가 다시 자기비하를 시작하기 전에 이세하는 먼저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자, 이슬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아. 너뿐만 아니라 나도, 그리고 다른 팀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팀이잖아.”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조금만 더. 이세하는 애써 혀를 움직였다. 엉망진창인 말로 그녀를 공격-혹은 방어-했다.

 

“그리고, 봐. 구로에서 위상반전탄의 직접 사용에 반대한건, 그리고 신강고에서 죽을 뻔한 유하나를 구해내자고 처음 말했던건 누구지? 너야. G타워에서 강남을 날려버리는 대신 죽을 각오로 다시한번 나서기로 정한 것도 너지. 넌 늘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어. 팀원들은 모두 너를 믿고 있다고.”

 

스스로의 말이 유치하고 말도 안 된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책도 많이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할 것을 그랬다는 조금 늦어버린 후회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결국 이세하는 참지 못하고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아, 몰라! 내가 더 말 해서 뭣하겠냐. 잠깐 있어봐.”

 

이세하는 거실에 놓아둔 채인 종이가방에서 예의 물건을 꺼내왔다. 처음에 그가 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점검하려던 물건이었다. 둥글게 말려진 종이와 손바닥만한 선물상자를 가져온 이세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에게 그 둘을 건네었다.

 

“자, 복구본부 사람들이 전해주라더라.”

 

이세하는 그 종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복구본부의 인원들이 그녀가 감기에 걸려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전하고싶은 말을 적은 롤링 페이퍼였다. 선물상자의 내용물에 관해서는, 이세하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어찌보면 그 내용물의 탄생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전에 그 물건에 대해 알게된 이슬비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선물상자를 건네고 바로 도망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세하는 일단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슬비는 먼저 종이를 펴서 읽어보았다. 이세하가 알기로 그녀는 읽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하지만 그녀가 글을 다 읽는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롤링 페이퍼라는 것만 알 뿐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이세하는 그것이 좋은 신호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종이를 다시 말아놓는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도 선물상자를 열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한기남 컴퍼니의 자신작인 셜록홈즈 이슬비 인형을 발견한 이슬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세하는 그녀의 반응에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본따서 만든 인형을 그 모델에게 선물로 주자는 아이디어를 발안한 것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세하의 한숨소리에 그를 바라본 이슬비는 그의 할 말이 없다는 얼굴에 미소를 얼기설기 엮어보였다. 그다지 만족스러운 반응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이 정도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했기에 이세하 역시도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조용한 방에 갑작스레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아.”

 

이세하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면 그 역시도 아침밥을 먹은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였던 것이다. 죽의 간을 맞추느라 몇 술 정도를 뜨기는 했지만, 한창 팔팔한 청소년의 식사 요구량을 그 정도로 채울 수 있을리 만무했다. 무안해진 이세하가 시선을 피하며 여기저기 눈을 굴리자 이슬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죽, 같이 먹을래?”

 

“일단..., 다시 데워올게.”

 

이슬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죽그릇을 다시 들고 방문을 열었다. 문을 닫는 그에게 이슬비의 목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그녀의 말은 문이 닫히는 딱딱한 소리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에, 이세하는 그 내용은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고마워.’

 

*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 이세하가 의아해하는 서지수에게 이슬비의 병문안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흥미진진해하는 반응을 보여왔지만, 이세하는 이슬비의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이슬비가 그에게 일종의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에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한 이세하가 도대체 무엇을 숨기라는 것인지 되묻자 그에게 돌아온 이슬비의 대답은 그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 방에 있는 인형들 말이야.”

“뭐?”

“한 팀의 리더라는 사람이 방에 이렇게 인형을 장식해놨다는 이야기가 돌면 사람들이 얕볼 거 아냐?”

 

그녀에게 어울렸으면 어울렸지 딱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게 이세하의 생각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 괜스레 장난기가 도져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것은 이야기해도 되냐는 말을 했다가 베개로 한 대 더 얻어맞은 것은 덤이었다.

 

이슬비의 감기가 다 나아 그녀가 다시 클로저 업무를 시작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복구본부로 돌아온 그녀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 삼일간의 휴식은 더 나은 활동을 위해서였다고 온 몸으로 강변하듯,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가열차게 업무에 매달렸다. 그녀가 없는 사이 김유정의 책상에 점점 퇴적되어가던 서류가 그녀의 도움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며 사무실에서 농땡이를 피우던 송은이 경정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제이가 인형을 받은 소감에 대해 질문했을 때 뿐이었다. 웃음기를 띠고 장난스레 질문을 건네던 제이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선글라스를 깨뜨릴 듯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이슬비를 보고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허둥지둥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주로 1인 순찰등의 임무를 나가던 그녀가 다른 팀원과 동행하는 일이 늘어났다는 정도가 차이점일까. 다른 팀원들은 그녀의 미묘한 변화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세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곤 했다.

 

“이세하. 준비 끝났어?”

 

자신을 부르는 이슬비의 목소리에 이세하는 게임기를 꺼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든 그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이슬비의 손을 보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계작전 중 개인물품 소지 금지.”

“야, 좀 봐줘. 요즘 할 일도 없잖아?”

 

그의 말을 듣고 이슬비가 미소지었다. 손은 여전히 그를 향해 그대로 내민 채였다. 이세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갖다놓고 올게. 유정이 누나한테 전하면 되지?”

“응. 여기서 기다릴테니 빨리 와. 벌써 늦었어.”

 

이세하는 작게 투덜거리며 김유정이 사무실 대용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로 향했다. 콘솔을 맡기고 컨테이너를 나온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괜한 짓을 한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스쳐갔다. 그것도 잠시,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잡생각을 날려버린 이세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슬비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아, 귀찮아. 빨리 끝내고 게임이나 해야겠다.”

위기의 순간에 위상력에 각성한 이후로도 그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아카데미에 가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외박 허가를 받아 집에 돌아가면 그녀가 자랑스럽다며 따스하게 안아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끝장날 뻔했던 그때의 무력감을 생각하면, 한 사람의 당당한 클로저로서 선량한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팀원들이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자신을 맞아주는 가족들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그런 사소한 불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딸랑, 하고 펭귄을 본딴 도어벨이 울렸다.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가 어머니를 졸라 산 물건이다. 여간해선 떼를 쓰는 일이 없는 그녀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재미를 느낀 그녀의 아버지가 한동안 이를 가지고 그녀를 놀리곤 했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예상대로 부엌 쪽에서 잘 다녀왔니,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세면세족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앉아 그녀의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한 팀원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오락기를 손에서 떼질 않는다느니, 또 다른 팀원은 자신을 시도때도없이 인형마냥 껴안으려 해서 곤란하다느니 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참다참다 한 마디 했더니만 글쎄 그 애가요...”


그녀의 생각에 노이즈가 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들어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 탓인지 이야기하던 중 무언가를 잊는 일이 잦아진 느낌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의 어머니가 ○○를 말하는 거니, 라고 그녀에게 그의 이름을 상기시켜주었다.


“아, 네. 맞아요. 그래서 걔가...”


*

 

클로저 요원으로서의 그녀의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훈련된 클로저에게 위협이 될만한 수준의 차원종이 억제장치의 방해를 뚫고 출현할 확률은 매우 낮고, 만에 하나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대개는 대기중이던 상급 클로저가 금새 출동해 처리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와 그녀의 팀원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잔챙이 처리였다. 물론, 잔챙이라고 해도 일반인에게는 치명적인 존재인 만큼 그녀의 일이 시덥잖은 잡일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료화면을 보면서 언젠가 자신도 성장하여 저런 믿음직한 수호자가 되리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곤 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칼을 치켜드는 차원종을 무력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다른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팀원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방진을 빠져나가 도망치려 하는 소형 차원종을 마무리하는 그녀의 손놀림에 망설임은 없었다. 뒤통수에 단검이 꽂혀 간혈적으로 붉은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는 차원종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는 손을 휘두르며 염동력을 행사해 단검을 손으로 불러들였다. 고개를 돌리자 나머지 차원종의 처리를 마친 팀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전 종료. 복귀하겠습니다.”


소형 통신장비로 보고를 마친 그녀는 그 틈을 못 참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팀원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투덜거리며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쉬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그녀가 마무리한 차원종의 시체에 닿았다. 자세히 보니 차원종은 무언가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의문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한번 염동력을 사용해 차원종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갑작스레 치밀어오르는 헛구역질에 그녀는 손을 입에 올렸다. 차원종이 안고 있던 것은 꿈틀거리는 핏덩어리였다. 그녀의 허벅지에 겨우 닿을락말락하는 작고 둥그스름한 무언가. 거기에서 비어져나온 사지로 추정되는 무엇인가가 움찔움찔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차원종의 유체 비슷한 것일까. 어렴풋이 느껴지는 약한 존재감이 평소에 보던 모습과는 달라도 그것이 차원종임을 알리고 있었다. 역겨운 느낌을 참지 못한 그녀는 무심결에 강한 염동력을 행사하여 그것을 짓눌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차원종의 유체가 터져나가자 그녀는 겨우 입을 가린 손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은 남았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가 어머니와 나눌 화재는 이와 관련된 것이 될 것 같았다.


“어머니, 이걸로 오늘도 된거겠죠?”


괜스레 어지러워진 마음을 다잡고자, 그녀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어머니를 불러보았다.


*

 

“갔군.”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른 탓이었다. 아이를 안은 한 생존자가 포위망을 빠져나올 때는 어떻게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교전을 시작했다가는 정찰 임무도 마치지 못한 채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뒷통수에 칼이 박히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지키려고 애썼던 아이가 쓰레기처럼 터져죽는 것도 막아내지 못했다. 등에 짊어진 통신기기를 통해 구역 내의 생존자 전멸을 전한 그는 은신처에서 나와 피로 물들어 언 듯 봐서는 붉게 보이는 분홍빛 머리의 여성을 미행했다.


신서울은, 아무래도 쇠퇴하는 중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듯 했다. 강남 사태 이후 강남 지하에서 발견된 플레인게이트 탐사중에 발생한 이변이 그 시초였다.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풀려난 강력한 차원종은 그 강대한 정신지배 능력으로 탐사대원과 그들의 호위 클로저들을 자신의 손에 넣고는 어떤 수를 썼는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차원종을 신서울에 풀어놓았다.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최초에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 클로저들이었다. 데이터 상으로는 분명 갓 정식요원이 된 풋내기들이었을 터였건만, 차원종이 그들에게 모종의 힘을 부여한 것인지 그들의 전투적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라 할 만했다. 신서울의 대부분이 시체가 널부러진 폐허로 변하는 데에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고, 퇴각을 결정한 상부는 은밀행동에 유리한 그의 팀에게 생존자 수색과 정찰을 명했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그가 알아낸 유일한 사실은, 차원종에게 넘어간 클로저 팀의 전 리더가 저녁 이후로는 강남 구석에 위치한 특정 건물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 뿐이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예의 그 건물에 들어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이제 차원종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들이었고, 그들의 행동원리는 그의 이해범위 밖에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을 기약하며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는 야영지로 향했다.

 

*

 

“다녀왔습니다.”


딸랑, 하고 펭귄을 본딴 도어벨이 울렸다.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가 어머니를 졸라 산 물건이다. 여간해선 떼를 쓰는 일이 없는 그녀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재미를 느낀 그녀의 아버지가 한동안 이를 가지고 그녀를 놀리곤 했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예상대로 부엌 쪽에서 잘 다녀왔니,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세면세족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앉아 그녀의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은 차원종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뻔했다느니, 팀원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고민이라느니 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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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고장났다. 전파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는 차원종의 영향인 듯 했다. 하긴,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험하게 굴리는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용케 버텨왔다. 망가진 휴대폰을 가지고 대리점에 가보니 기기 자체는 수리가 가능하지만 데이터는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게임 데이터는 클라우딩으로 복구가 가능하고, 교우관계가 좁으니만큼 전화번호 같은 것은 애초에 별로 저장되어 있지도 않다. 수리를 하는 김에 여기저기 흠집이 난 액정화면도 교체받아 아예 새것이 된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가게를 나왔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돌아오는 길. 돌려받은 핸드폰을 열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연락처 정보를 입력한다. 친숙한 이름들이 목록에 하나, 둘 추가되어간다. 서지수, 한석봉... 나는 연락처 정보를 저장할 때 반드시 본명으로 저장한다. 한편, 어머니는 나와 정 반대로 별명이나 호칭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저번에 슬쩍 봤을 때 내 전화번호가 ‘우리 아들♡’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해서 하트를 지워봤지만, 유일한 수익은 내 등짝을 내려치는 손바닥을 통해 어머니가 아직 정정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뿐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이니만큼 어머니는 내 핸드폰의 연락처 정보를 볼 때마다 삭막하다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람을 단순한 사회적 기능으로 기억하는 쪽이 더 삭막하고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머니를 예로 들어보자. 나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차원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그냥 ‘서지수’였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떤가? 서지수라는 개인은 어디에도 없다. ‘알파 퀸’과 ‘세하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누군가가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상황은 이제는 사양이다. 나는 ‘알파 퀸의 아들’이 아니라 ‘이세하’니까.


“대충 끝났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제 추가할 것은 팀원들과 김유정 누나의 것 뿐이다.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팀원들의 연락처를 확인한다. ‘아직 다 외우지 못했는데 데이터가 날아갔으니 전화번호를 좀 적어달라’는 내 요청을 들어주며 바보를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유리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거지, 서로 만난지 두어 달밖에 안 됐는데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애초에 누가 누구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매번 제이 아저씨의 놀림감이 되는 주제에...


쪽지에 적혀있는 순으로 이름을 입력해본다. 김유정, 서유리, 제이, 미스틸테인(요금은 도대체 누가 내고 있는건지 의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력을 마친 뒤 미묘한 위화감에 목록을 다시 확인해보니 세글자 기준의 칸을 꽉 채우는 이름들 사이로 방금 추가한 ‘제이’와 ‘리더’가 눈에 띄었다. 아니, 제이 아저씨는 내가 이름을 모르니 어쩔 수 없겠지. 그럼 역시 리더가 문제일 것이다. 평소에 매번 리더, 리더하고 부르다보니 습관이 된 것일까, 폴리시와는 맞지 않게 괜스레 리더라고 적어버린 모양이다. 수정 란으로 들어가 그녀의 정보를 수정한다. 이슬비. 그럼에도 위화감은 가시지 않는다. 왜일까.

 

*


“세하야, 그래서 핸드폰 바꾼거야?”


사무실에 들어오는 나를 예상대로 서유리가 맞이했다. 1시간 뒤에 나갈 근무를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야, 아까 갈 때도 말했잖아. 새로 사는게 아니라 저번에 수리맡긴 물건을 찾아오는 거라고... 어, 야!”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그녀는 내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채갔다. 저게 무슨 레인저란 말인가, 로그나 시프지. 유니온의 담당자들이 RPG 게임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이걸로 밝혀졌다. 세상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비일상에 관심이 없어서야 세상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 분명하다. 왠지는 모르겠다만. 아차, 그러고보면 정보 입력에 급급해서 비밀번호 설정을 잊었다. 빗장이 열린 성문으로 밀고 들어가는 병사처럼 그녀는 어떤 방해도 없이 내 프라이버시를 유린했다. 


“에이, 어쨌든 새 거가 된 건 똑같잖아? 그게 그거지 뭐.”


천연덕스레 셀카를 찍어 자신의 연락처 정보에 등록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굴리며 목록을 살펴보던 그녀가 예상대로의 태클을 걸어왔다.


“세하야, 이름을 왜 이렇게 딱딱하게 적어놨어? 내가 바꾼다?”


“아, 예. 맘대로 하십쇼.”


내가 뭐라고 하건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있기에 헛수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탈환하는 것도 요원한 일일테고. 반 억지로 내 허락을 받아낸 유리는 자신의 핸드폰에서 사진을 전송하면서까지 내 연락처 정보를 뜯어고쳤다. 결국 10여분이 지나서야 내게로 돌아온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결과물이 가관이다. 제저씨에 유정언니(이건 내 핸드폰이란 말이다!), 우리 테인이 등등... 연락처 하나하나 친절하게 붙어있는 사진에 이르러서는 그 정성에 감탄할 지경이 되었다.


“야, ‘유리유링♡’이 뭐냐? 하트는 또 왜 붙였어?”


“귀엽잖아?”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태연히 반문하니 되려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하여간 대단한 애다. 투덜거리며 주소록의 이름을 복구하는 중에 손가락이 딱 멈췄다. 이슬비의 연락처다.


‘슬비☆’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항목명이다. 사진을 확인해보니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이런 건 어느 틈에 찍은 것인지, 원. 정말이지 로그나 시프가 딱 맞는 행동거지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녀의 이름 두 글자 뒤에 붙은 별을 지우고 수정을 마무리했다. 


김유정

미스틸테인

서유리

슬비

제이


목록을 보고있자니 아까부터 느끼던 묘한 위화감이 싹 가셨음을 알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아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 신경을 꺼도 무방하리라. 교대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으니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떼워야겠다.


며칠 뒤, 자신이 조는 모습이 내 핸드폰에 등록되어있는 것을 본 리더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안 바꿔줄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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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하고 발에 무언가 채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발밑을 보니 탄화된 차원종의 시체가 내 발길질에 부스러져 잿가루를 날리고 있었다. 작전은 별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듯 했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겠냐만.


팀에 새로운 리더가 부임하고 계절 하나가 지나갔다. 과연 일이 많으면 시간이 빨리 가는 듯 하다.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에 들어선 애송이가 갑자기 원래 활동하던 곳도 아닌 우리 팀의 리더로 온다는 이야기에 낙하산 인사인가, 하는 비웃음 섞인 생각을 했던 것이 엊그제같건만, 녀석은 어느틈엔가 녹아들어 우리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과연 과거 신서울이 쑥대밭이 될 뻔한 G타워 사태 당시라던가, 신서울 지부의 지부장이 테러리스트와 내통하여 어마어마한 사건을 획책했을 때라던가 하는 여러 상황에서 활약했다던 팀의 구성원다운 실력이랄까, 그와 함께 작전을 나가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내가 할 일이 없다. 시커멓게 타버린 차원종 시체 사이를 거닐며 혹시나 아직 살아있는 차원종이 있을까 확인하는 정도가 최근 내 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 몇 번인가는 가만히 구경만 하기도 무안하던 터라 후방지원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보았지만, 출력 조절이 아직 불안정해 폭발에 휘말릴지도 모르니 뒷처리를 부탁한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하, 저 수준에 출력 조절이 안된다고? 도대체 위상력을 몸 안에 얼마나 쌓아두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내 위상력을 물 한 바가지라고 한다면 그는 수영장쯤 되기라도 하는건가.


“상황 종료 확인. 복귀하겠습니다.”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마지막 차원종을 처리한 모양이다. 관리요원에게 보고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랄까, 이럴 때 보면 묘하게 딱딱한 모습이다. 간혹 말하는 투를 보면 원래 그런 성격인 것 같지는 않은데..., 마치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이다.


“K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너무 생각에 깊게 빠져든 것 같다. 모르는 새에 내 옆까지 와서 의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대답을 했다. 슬슬 발갛게 석양이 지는 것을 보니 오늘의 일과도 이정도면 대충 마무리 된 듯하다. 저벅저벅, 말없이 귀환길에 오른다.


“리더? 그런데 말이죠...,”


분위기라도 환기시켜볼까, 하는 생각에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한것인지 내 앞에서 말없이 걸어가고 있다. 아차, 그러고보니 그는 자신을 리더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었다. 리더라고 그를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을 여러차례 겪고 난 뒤 그가 우리에게 한 부탁이다. 이 역시도 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팀 리더를 리더라고 부르지 말라니. 처음 팀 리더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자신을 리더라고 부르는 팀원들에게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을 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일을 가지고 이렇게 잡다한 상상을 펼치는 나를 보며 팀원들은 나이 서른이 넘은 시커먼 아저씨가 나이값도 못하고 여중생처럼 군다고 비웃기도 했지만, 저 젊은 리더가 그만큼 흥미로운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그보다, 나를 놀리기 전에 자기들이 매번 그와 임무를 나가는 내 입장이 되보았으면 한다. 도통 할 일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

 

“좋은 아침입니다.”


일과 시작시간으로부터 약 1시간 전, 사무실에 들어오니 늘 그렇듯이 그가 어제의 작전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스스로 할 말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지각과는 거리가 먼 아침형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나보다 먼저 나와서 전날 업무를 재확인한다거나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는 그의 모습은 사람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런 건 적당히 하다가 내버려둬도 관리요원이 알아서 할 일이건만, 그는 작전내용을 녹화한 영상자료는 매번 확인해서는 팀원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영상을 보며 종이에 무언가를 끼적끼적 써내려가던 그는 영상이 종료되자 금일의 일정을 확인하는 듯 테이블 위에 놓여진 달력을 체크했다. 그러고보니 그의 달력에서 유독 눈에 띄는 붉은 색-나머지는 흑색이었으니 당연히 눈에 띄었다-으로 강조해놓은 날짜를 본 것도 같다. 대충 이번 주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리-, 아니지, 이세하 씨, 오늘 무슨 행사라도 있나요?”


젠장, 또다시 헛나온 호칭을 황급히 고쳤다. 잠이 덜 깨기라도 한 모양이다. 어젯밤에 잠을 설치기라도 한 것인지 나에게로 시선을 향해온 그의 눈 아래에도 다크 서클이 무겁게 매달려있었다. 특이한 일이다. 매번 제일 먼저 사무실에 나오면서도 피곤한 기색을 내비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데. 눈이 부석거리는지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며 그가 대답했다.


“아, 예. 오늘 감찰부에서 요원이 한 명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온 뒤로 처음 있는 일이라 긴장이 좀 되는군요.”


“아하,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에 관해서 팀원들에게 전파하실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


나의 질문에 그는 잠시 고민했다. 뭐, 예의상으로 물어봤을 뿐, 뭘 할지는 뻔한 이야기다. 딱히 책잡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만큼 그냥 적당히 사무실 청소만 해 두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그 이상이었다.


“특별히 추가로 할 일은 없습니다. 팀의 일도 있긴 하지만, 이번 감찰의 주 목표는 제가 될 것 같으니까요. 그냥 평소대로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서류철을 뒤적거리던 그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게 건네었다. 오늘의 일정표 사본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오늘 하루종일 감찰요원에게 붙잡혀 있을 것 같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감찰요원이 온다곤 해도 옷에 제법 신경쓰셨네요?”


그가 입고있는 것은 평소의 옷이 아닌 클로저 정복이었다. 외관상으로 그다지 흉한 옷은 아니고, 아무래도 클로저가 입는 옷이니만큼 어느정도의 활동성도 보장해주지만 어찌됐건 일종의 양복인 셈이라 하루종일 입고 있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유니온에서는 공식적인 행사나 비전투 업무 중에는 정복의 착용을 권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를 지키는 클로저는 별로 없다. 그 까다로운 감찰부 요원들도 정복 미착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을 정도니 오죽할까. 그런 상황이니만큼 감찰요원의 방문에 맞춰 굳이 정복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 뭐라고 말씀드리면 좋을까요. 이렇게 안 하면 안 될 성격이라 말입니다, 그 애는..., 아.”


아차 싶었는지 내 눈을 피해 허공을 맴도는 그의 시선이 재미있다. 그가 대화 중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다. ‘그 애’라, 하하. 이럴 때 한 번쯤은 장난을 치는 것도 연장자로서의 특권 아닐까?


“아하, 그 요원과 꽤 친하신가보죠?”


“...뭐, 그런 셈입니다. 예전 팀의 동료였으니 말입니다. 보나마나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서 저를 볶아대겠죠.”


예전 팀이라, 그가 속해있던 예전 팀은 내 기억으론 하나 뿐이다. 큼직큼직한 사건을 함께 헤쳐온 동료인 만큼 그가 옛 팀원들에게 가지고있을 감정은 단순한 동료애 이상일 것이다. 그가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것도 이해할 만 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한창 학교 동기들과 추억을 쌓고있을 나이에 클로저 활동을 하고있으니만큼 그에게 이런 기회가 자주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릴없이 늘어져있을 팀원들과 심심풀이로 튀길 팝콘정도는 될 법한 화젯거리였다.


“그럼 귀찮은 일은 팀원들에게 맡기고 회포라도 좀 풀고 오시는게 좋겠네요. 관리요원 님께는 제가 말씀드리죠.”


팀의 관리요원이래봤자 적당주의에 물든 흔한 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니만큼, 그를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니다. 평소 저 청년에게 도움받는 일이 한, 두가지도 아니고, 업무에 지장이 없다는 것만 확인된다면 그는 별 상관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업무 시간에...”


“아, 평소에 고생 많이 하셨으니 좀 쉬라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팀원들도 좀 굴릴 줄 알아야 팀의 대장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그가 어쩌겠는가? 어찌됐건 내가 그보다 제법 연장자인데. 평소부터 내 주장에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여온 그이니만큼 이번에도 결국 내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K씨는 정말 제가 아는 누군가를 빼닮았네요.”


고개를 저으며 그가 말했다. 이럴 때마다 몇 번은 들어온 이야기이다. 역시 그가 몸담았던 옛 팀의 이야기일 것이다. 자세히 캐묻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나는 커피라도 한 잔 타마셔야겠다며 사무실을 나왔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눈을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밝은 분홍빛이었다.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제대로 바라보자 그 분홍빛이 그녀의 머리색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다른 부분보다 머리칼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평균에 약간 못 미치는 그녀의 키 때문일 것이다. 나이는 20대 초, 중반 정도일까. 아무래도 오늘 온다는 그 감찰요원인 듯 했다. 대장이 말했던 ‘아침 일찍’이라는 것은, 비교적 일찍이라는 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일찍’이었던 모양이다.


“클로저 L팀 사무실이 이 건물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만..., 혹시 우리 대장의 옛 동료분이시라는 그...?”


아, 잠이 덜 깨긴 한 것 같다. 괜히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옅게 인상을 구겼다.


“하아,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건만... 유니온 신서울지부 감찰부 소속 감찰요원 클로저 이슬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L팀 소속 클로저 K입니다. 아침 일찍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녀의 각 잡힌 인사에 황망히 답변했다. 우리 대장이 누구를 닮아 평소 말투가 어울리지도 않게 딱딱한지 알 만했다. 더 입을 놀렸다간 오랜만의 해후를 시작하기도 전에 망칠까 두려워졌기에, 나는 손에서 타들어가던 담배를 대충 내던지고는 그녀를 안내해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세하 씨, 손님이 왔습... 어라?”


사무실 문을 열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뻣뻣하던 리더가 휴대용 게임 콘솔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분명 그가 처음에 자기소개를 할 때 취미가 게임이라고 언급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그가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싶었지만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옆으로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 세... 하...!”


내 뒤에서 나를 따라온 이슬비 요원의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어디서 튀어나온지 알 수 없는 단검 한 자루가 그를 향해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위기감이 들 만한 상황일 법도 하건만, 그는 게임 콘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연스레 한 손을 들어 단검을 잡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 참.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연덕스레 게임을 일시정지 시키고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안내 감사합니다, K씨. 지금 모습을 보니 소개는 필요없어 보이는군요. 그리고, 오랜만이야. 리더.”


체구에 맞지않게 쿵쿵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이슬비 요원은 그의 인사는 듣지도 않은 채 그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쩜 그렇게 하나도 변한게 없냐느니, 책상 정리도 안 하고 사냐느니, 곧 일과가 시작될텐데 뭐하는 짓이냐느니 하는 지적사항의 소나기를 맞으며, 그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에게 미안하다는 얼굴로 나가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미안한 표정이라곤 해도, 내가 지금까지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편안해보이는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조용히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지금쯤이면 다른 팀원들은 일과 시작 전에 마지막으로 휴게실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의 대장은 옛 동료와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될 터이니 오늘 하루정도는 좀 느긋하게 해나가도 되겠지. ‘리더’라. 그는 분명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가 누군가가 자신을 리더라고 부르는 것을 잘 못 알아듣는 것도, 늘 그렇게 딱딱하게 구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그의 마음속에서 리더는 그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볶고있을 그녀일 테니까.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우울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휴게실로 향하기 전에 담배라도 한 대 다시 태우며 오늘 아침의 이야기를 정리해봐야겠다.


자, 이걸 어떻게 나머지 팀원들한테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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