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용 블로그

검색결과 : 클로저스 (35)

  1. 그 남자의 생일 - 2016.06.03
  2. 부부의 날 - 2016.05.21
  3. 검은양 팀이 회식을 하는 이야기 - 2016.05.16
  4. 이슬비가 이세하와 함께 행사장을 가는 이야기 - 2016.05.05
  5. 잠이 오지 않는 이세하 - 2016.05.02
  6. 신강고의 밤 - 2016.04.30
  7. 선물 준비하는 리더 - 2016.04.29
  8. 이세하가 행복한 꿈을 꾸는 이야기 - 2016.04.22
  9. 서유리가 정식 요원복 때문에 고생하는 이야기 - 2016.04.15
  10. 새로운 대기실 - 2016.04.14

조용히 울리는 휴대폰 알람에 이슬비의 손이 그녀보다 빨리 일어났다. 침대 머리맡의 탁자 위에 놓여있는 휴대폰의 알람을 종료하고 나서야 그녀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이슬비는 잠시 그대로 누운 채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피곤했다. 5분이라도 더 침대에 있고 싶었다. 평소처럼 바삐 준비할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직장에는 연차를 썼고, 그녀가 오늘 향할 목적지는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팔을 움직여 두꺼운 블라인드를 걷어냈다. 6월 초의 이른 아침이 방을 밝히며 그녀의 한쪽뿐인 눈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이른 아침의 기상은 언제나 괴롭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메트로놈처럼 살아온 이슬비였지만 그녀가 이른 기상을 달게 받아들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곗바늘이 5시 30분을 가리키면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 톱니바퀴라는 물건은 한 번이라도 이가 어긋나면 대번에 망가지고 마는 물건이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간 지켜온 리듬이 깨지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탁자에 다시 한 번 손을 뻗은 그녀는 기계 의안을 집어 들고 수면용 의안과 교체했다. 반쪽짜리 세상이 온전해졌다. 잠시 눈을 돌리며 오른쪽 눈이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한 이슬비는 천근 같은 몸을 억지로 떠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향한 곳은 늘 그렇듯 아이의 방이었다. 행여나 잠을 못 이루고 밤을 새우지는 않았을까, 악몽을 꾸다가 일어나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란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걱정이 현실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미 된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아이는 조용히 자고 있었다. 이슬비는 아이가 행여 깨어날까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당연하게도 거실은 어두웠다. 거실에 걸린 시계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하릴없이 째깍거렸다. 형광등 대신 벽걸이 램프를 켠 이슬비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았다. 할 일이 없었다. 여느 때였으면 바삐 몸을 씻고 화장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평일에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것이 얼마 만인지 그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보통은 커피라도 한 잔 타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법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그녀를 떠밀었다. 그녀가 낭비한 시간이 모여 굶주린 짐승처럼 그녀를 덮쳐들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거실을 표류했다. 뭐라도 할 것이 없을까. 신통찮았다. 애초에 텅 비어있는 시간이 더 긴 집이다. 걸레질을 하고 가끔 가구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새 식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톡, 톡. 시계가 울리는 초침 소리와 식탁을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가 한데 겹쳤다. 나지막하게 통탕거리는 그녀의 심장소리도.

 

이슬비는 자리에서 와락 일어났다. 초조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운동복을 대충 걸쳐 입은 그녀는 집에서 나와 근처의 놀이터로 향했다. 한동안 쉬었던 운동이라도 시험 삼아 해볼 심산이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기껏 해봐야 6시 남짓인 시각.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 잠자리에 있거나 겨우 일어나고 있을 시간대였다. 놀이터 역시도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적막한 놀이터를 잠시 바라보던 이슬비는 놀이터 주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슬비의 뜀박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금세 턱까지 차오른 숨 때문이었다. 예전 같아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동안의 입원 생활,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바쁜 나날들은 그녀의 체력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슬비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다른 운동을 시도해보았다. 역시 신통찮았다. 폐에서 달아오른 석탄이 요동치고, 오랜만에 무리를 한 팔다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떨려왔다. 불쾌하고 피곤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한때 자신이 운동을 끝낸 뒤의 충만한 노곤함에 매료되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이슬이 방울방울 맺힌 벤치에 쓰러지듯 앉아 사지를 늘어뜨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낀 하늘이었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다. 그녀는 챙길 물건의 목록에 우산을 추가했다.

 

*

 

이슬비는 텅 빈 집의 문을 열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뒤였다. 필요한 물건은 전날에 이미 정리해서 종이가방에 담아두었다. 시간 여유가 아직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잠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가가 근질거렸다.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 눈을 툭툭 두드린다. 차가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의안은 눈과 달리 손가락에 반응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놀릴 때마다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상을 바라보며 이슬비는 이세하를 생각했다. 잘 지내고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터이다. 또다시 엉망이 되었을 그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나 스스로는 어떨까. 눈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눈가로 향했다. 거칠해진 피부와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한 눈가의 요철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슬비는 땀으로 끈적이는 몸을 씻기 위해 샤워실에 들어갔다. 헐벗은 몸이 낯설었다. 팀원들과 함께 신서울을 누비던 날이 엊그제처럼 느껴졌건만 거울에 비치는 몸은 그녀에게 현실을 여과 없이 들이밀었다. 푸석하고 윤기 없는 머리칼, 눈 아래를 잠식한 다크서클, 살집 없이 비쩍 마른 몸.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슬비는 거울에 물을 뿌렸다. 거울 속의 이슬비가 흐르는 물과 함께 일그러졌다. 그녀는 거울에 등을 돌린 채로 몸을 씻었다.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예전보다 가늘어진 기분이었다.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말린 이슬비는 간단하게 화장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간단하게 하려고 했다. 평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던 잔주름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컨실러를 몇 번을 고쳐 발라도 주름은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핏기없는 입술도, 그림자가 드리운 뺨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얼굴 전체를 뜯어고치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되레 평소보다 진한 화장을 하게 되었다. 이세하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이슬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옷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적당히 활동성 있는 옷을 차려입었다. 이슬비는 마지막으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눈에 띄는 벚꽃색의 머리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좋은 기억만 있는 곳은 결코 아니었다. 면식이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거울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이슬비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가방을 챙겨 든 그녀는 마지막으로 집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이슬비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집을 나섰다.

 

하늘은 이른 아침에 나왔을 때보다 더욱 흐려져 있었다. 따가운 햇볕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대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짐이 제법 많았던 탓이다. 택시기사는 말없이 그녀가 말한 주소로 향했다. 기사의 눈은 전방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시선이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샅샅이 훑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슬비는 창밖을 바라보는 척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이세하의 집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찌 됐건 그녀의 집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슬비는 눈을 감고도 그의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다만, 거리의 풍경은 그녀의 기억과 사뭇 달랐다. 자주 들르던 가게의 자리에 다른 점포가 들어선 것을 보고 이슬비는 약간의 상실감을 느꼈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간다. 그녀와 이세하만이 그 비가역적인 흐름에서 유리되어 과거에 못박혀있었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던 것일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매번 고기를 사던 정육점은 남아있었다. 점주는 고기를 사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를 새댁이라고 부르며 유난히 잘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이슬비는 평가를 뒤로 미루었다.

 

걸음을 옮기던 이슬비는 아파트 현관 앞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세하를 발견했다. 반바지에 얇은 셔츠만을 입고 있는 모습이 백수나 다름없어 보였다. 나름 정확한 표현이긴 했지만. 웬일로 굳이 집 밖까지 나와서 흡연을 하는 것일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멍하니 선 채 이세하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잠시 망설이던 이세하가 어설프게 웃음을 엮어냈다.

 

“왔어?”

 

그다지 상황에 맞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와 그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엉성한 인사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왔어.”

 

이세하가 하수구에 담배를 던져 넣었다. 그다지 권장할 만한 행동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이슬비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였다. 그녀를 마주보고 허술하게나마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만했다. 그녀에게서 짐을 건네받은 이세하를 따라 이슬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때 그녀의 보금자리였던 곳으로 향했다.

 

*

 

집으로 들어온 이슬비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커피 향의 방향제 냄새였다. 이세하가 방향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슬비는 의아해졌다. 게다가 커피 향이라니. 그녀가 잠을 쫓으려 커피를 탈 때마다 커피 냄새는 싫다며 투덜거리던 그였다. 문제는 그것 뿐 만이 아니었다. 냄새가 너무나도 짙었다. 방향제 캔 하나를 완전히 비우면 이 정도로 진한 향이 날까. 이슬비는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좀 가려볼까 했지.”

 

이세하가 변명처럼 말했다. 현관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던 그의 행동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알만한 이야기였다. 빈말로도 정상적인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세하가 2년간 홀로 살았던 집이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러놨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종이가방을 들고 멀거니 서있었다.

 

“하아, 일단 그건 부엌에 놔줘.”

“알았어.”

 

엉거주춤 부엌 쪽에 짐을 내려놓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슬비는 현관과 바로 이어지는 거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냥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이슬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집에는 새 가구를 채우겠다며 자를 들고 돌아다니던 이세하.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버린 게임기를 내다 팔면서 아쉬워하던 이세하. 아이를 가졌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날뛰던 이세하. 그리고...

 

그녀의 추억에 잡음이 끼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거실은 그녀의 기억과 똑같았다. 지나칠 정도로. 그녀가 아침밥을 기다리며 종종 껴안고 있던 쿠션이며 서랍장 위에 놓인 시계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이슬비는 어두침침한 거실의 불을 켰다. 파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거실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청소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바닥은 말끔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손조차 거의 대지 않은 듯 물건들에는 먼지가 부옇게 앉아있었다. 자신을 안내한 이세하가 아니었다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이슬비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그녀는 그다지 넓지 않은 거실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슬비는 요동치는 감정을 애써 찍어 눌렀다. 지금의 이세하는 그녀의 감정변화에 몹시 예민하다. 그녀의 동요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세하는 아직도 멍하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령을 기다리며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를 떠올리며 이슬비는 애써 웃어 보였다.

 

“왜 그러고 있어?”
“미안해.”

 

그녀의 질문에 이세하가 황망히 사과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광의적인 의미일 것이다. 이슬비는 평범함을 가장하며 그에게 잔소리했다. 평소처럼, 평소처럼.

 

―예전처럼.

 

“청소 좀 하고 살아. 이게 뭐야, 전부 먼지투성이가 돼선.”

 

이세하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소파는 그나마 먼지가 덜했다. 거실에 와서 앉아 있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손으로 소파의 먼지를 대강 털어낸 이슬비는 그를 붙잡고 데려와 소파에 앉혔다.

 

“앉아있어. 오늘 생일이잖아.”

 

이세하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손을 놀리는 대로 저항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낡은 인형 같았다. 소파에 앉혀진 채 그녀를 바라보며 이세하가 말했다.

 

“도와줄 건 없어?”

“없어. 그냥 앉아있어.”

 

그를 마냥 앉혀두는 것 역시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를 부엌에 들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조리대 역시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인 것처럼 보였다. 찬장 깊숙이 처박혀있는 조리 도구에는 거미줄이 끼어있었다.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조리대에 선 그의 모습을 다시 볼 날이 올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슬비는 마음이 아팠다. 얌전히 앉아서 눈을 굴리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짐에서 음식 재료들을 꺼냈다.

 

*

 

생일에는 미역국이라는 공식은 누가 만든 것일까. 몇 번 정도 인터넷을 찾아봤지만 그럴싸한 답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음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뭔가 의미도 있고 그의 의욕도 북돋워 줄 만한 음식이 없을까. 이슬비는 며칠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최초의 선택지로 회귀해야만 했다. 이세하가 좋아하는 소고기를 선택하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타협점이었다.

 

그녀가 헤맬 이유는 없었다. 물건들은 모두 그녀의 기억 속 그 자리에 바뀐 것 하나 없이 놓여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늘 불평하던 낡아빠진 압력밥솥까지도. 하지만 그것은 이 집 전체가 그녀를 옥죄는 과거 그 자체라는 의미기도 했다.

 

나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밥솥은 과거 정도연 박사가 이세하에게 선물한 물건이었다. 이세하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그러니까 그가 이슬비에게 처음으로 식사를 만들어 주었을 때에 쓰인 것 역시도 그 밥솥이었다. 싱크대에 놓여있는 식기세트는 검은양 팀원들의 집들이 선물이었다. 벽에 걸린 휴지걸이도, 구석에 놓인 오븐도. 모두 나름의 기억이 남아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행복했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의 통제력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세하는 어떻게 2년을 살았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뇌리에서 지우기 위해 더욱 가열하게 요리에 매달렸다.

 

상을 차린 뒤, 이슬비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세하는 식탁에 앉아 맞은편의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슬비는 그의 시선을 이해했다.

 

“난 됐어. 아침도 먹고 왔고.”

 

거짓말이다. 어제저녁 이후로 그녀는 물 한잔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세하와 마주앉아 음식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요리를 하면서 떠올린 추억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그와 마주보고 식사를 하는 순간 그녀가 애써 쌓아올린 감정의 댐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이세하는 그녀의 답에 군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대뜸 밥그릇을 들어 미역국에 말아 넣었다. 최대한 빠르게 식사를 해치우던 어린 시절의 버릇일까, 식사에 국을 올리면 그는 그렇게 밥을 말아 국과 밥으로만 배를 채우곤 했다.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쓸어 넣는 모습 역시도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발 천천히, 반찬도 섞어가면서 먹으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의 행동은 바뀌지 않았다. 이슬비는 국그릇에 거의 얼굴을 처박다시피 하면서 숟가락을 놀리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맛있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세하가 얼굴을 들어 말했다.

 

“먹기나 해. 식사 좀 잘 챙기라니까.”
“미안.”

 

또다. 5월에 만났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는 사과가 많이 늘었다. 예전 같았으면 머쓱해 하며 적당히 넘어갔을 일에도 그는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매번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일까. 그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세하가 다시 숟가락을 뜨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이슬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을 좀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세하가 어떤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먹고 있어. 집안 좀 둘러볼게.”

 

그녀의 말을 들은 이세하가 와락 몸을 일으켰다. 예상외의 격렬한 반응이었다.

 

“앉아있어.”
“왜? 좀 둘러본다고 문제 될 건 없잖아.”

 

이세하의 시선이 표류했다. 뭔가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듯했다. 이슬비는 자신과 아이의 방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러지 마.”

 

이세하가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더 알아야만 했다. 문손잡이는 생각보다 쉽게 돌아갔다. 이슬비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벌컥 열었다.

 

방은 예상대로 황량했다. 그녀가 집을 떠나며 대부분의 가구를 옮겨간 까닭이었다. 남아있는 것은 텅 빈 책상과 선반, 서랍장 하나 정도였다. 먼지는 여전했다. 그가 이 방에 출입할 일이 많지는 않을 터이니 당연한 일일까. 아이가 벽에 남긴 낙서자국이 눈에 띄었다. 이 집이 품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가능성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슬비는 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슬비가 발을 멈춘 곳은 액자가 세워진 선반 앞이었다. 그녀가 두고 간 과거의 기억들. 함께 벚꽃놀이를 갔던 날.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때. 모두가 그곳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추억들은 완전하지 않았다. 사진마다 이세하의 얼굴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법은 다양했다. 라이터로 지진 자국, 매직으로 덮은 흔적. 개중에는 아예 그의 얼굴이 잘려나간 사진도 있었다. 그녀와 아이의 얼굴만을 담은 액자들은 몇 번을 닦았는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액자가 퍽 이질적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비참함으로 이 모습을 조각해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오만이었다. 그녀는 이세하라는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슬비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한쪽뿐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세하의 목소리에 이슬비는 몸을 돌렸다. 여전히 음침한 얼굴이었다. 이슬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의 상처는 깊었다. 그와 그녀의 관계가 바뀐다고 해도, 그녀가 그를 몇 번을 용서한다고 해도, 그의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온다는 이야기에 이세하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잘 받지도 않는 방향제를 뿌리면서, 집 밖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집 앞까지 나와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그의 노력에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의 영역에 흙발로 걸어 들어와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던가. 이슬비는 그의 앙상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키에 맞춰 몸을 숙이는 이세하의 몸에 밴 듯한 반응에 이슬비는 더욱 슬퍼졌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똑, 똑, 똑. 창문을 빗방울이 노크했다. 이슬비는 빗소리를 무시한 채 이세하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무반응에 화가 난 빗방울은 창문을 두드리는 기세를 더했다. 뚝, 툭, 투둑, 투둑.

 

“모르겠어.”

 

얇은 셔츠 너머로 선명히 드러난 그의 뼈마디가 만져졌다. 그녀와 맞닿은 이세하의 몸이 떨렸다. 공포. 혹은 슬픔.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일까. 그의 몸을 뒤흔드는 감정의 뿌리를 이슬비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미안해.”

 

쏴아아아.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야 할 건 나야. 이슬비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녀는 그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이세하의 떨림이 멈춘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그녀도,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

 

먹다가 남은 국은 완전히 식은 채 죽이 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세하가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로 식탁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결과였다. 이슬비는 한숨을 내쉬며 국그릇을 치우고는 냄비에 남은 국을 데우기 시작했다. 그녀에 의해 또다시 식탁머리에 앉혀진 이세하가 변명처럼 말했다.

 

“그냥 그대로 먹어도 괜찮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이슬비가 대꾸했다. “얼마 만에 해주는 밥인데 그런 걸 먹이라고?”
“너무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그래.”

 

그녀를 바라보는 이세하의 눈은 붉었다. 눈물을 잔뜩 참았던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에 이슬비는 괜히 냄비를 다시 확인했다. 당연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약불에 데우기만 하면 그만인 물건이니까. 이슬비는 잠시 고민했다. 이 말을 해야만 할까. 괜히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대로 두는 것 역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사진 말이야.”
“어?”

 

이세하의 목소리에 당혹이 묻어났다. 이슬비는 냄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더 있으니까, 다음번에 줄게.”
“...왜?”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냥 싫다. 그렇게 말해도 이세하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슬비는 억지로 이유를 짜내었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지.”

 

침묵. 이슬비는 고개를 돌려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이세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누군가가 그를 사냥해 박제해놓은 것 같다. 벽난로 위에서 오랜 세월 시간에 그을린 얼굴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슬비는 자신이 적절한 대답을 한 것이기를 바랐다. 미역국이 적당히 데워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이세하에게 다시 상을 차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진은 망치지 마.”

 

이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한 이슬비는 부엌 근처에 다른 짐과 함께 놓인 종이가방을 띄워 자신에게 오게끔 했다. 가방 안에는 TV에서 종종 선전하는 전기면도기가 들어있었다. 제법 시간을 들여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선물이 없었기에 택한 차선책이었다. 선물을 받고 그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빤한 이야기였다. 그녀를 보며 어설프게 웃어 보일 것이다.

 

불안하다. 그 웃음 뒤로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오늘은 모든 것이 물음표투성이다. 이슬비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의 상처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슬비는 굳이 몸을 숙여 상자를 꺼냈다.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이세하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생일선물이야.”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이세하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슬비는 그의 미소를 조금 더 키워보고 싶어졌다.

 

“고마워?”
“그래. 고마워.”

 

미묘한 얼굴. 이슬비는 손을 뻗어 눈썹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그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며칠을 방치했는지 기름기로 꾸덕해진 앞머리는 그녀가 넘긴 모양을 그대로 유지했다. 말을 잘 듣는 것이 제법 주인을 닮은 머리카락이다. 이슬비는 어린 학생에게 시범을 보이는 선생처럼 그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웃어봐.”

 

이세하는 웃었다. 이슬비는 우선은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그 웃음을 지속시키는 것이 될 터였다. 이슬비는 그가 다시 예전처럼 웃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클로저스 > 부부의 나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오는 여름날  (0) 2017.06.03
부부의 날  (0) 2016.05.21

아침 6시. 눈을 뜬 그는 시곗바늘처럼 몸을 일으켰다. 한발 늦게 눈을 뜬 알람이 수면을 방해받은 연인처럼 불만스레 울었다. 남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텅 빈 집에는 알람을 달래줄 다른 손이 없었다. 남자의 무시에 알람이 청승맞게 칭얼거렸다.


5분쯤 지났을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바닥은 그의 머리처럼 엉망이었다. 대충 벗어 던진 셔츠와 속옷을 피해 걷던 그의 발이 종이컵을 쳤다. 종이컵은 바닥에 널브러지며 술에 절은 담배꽁초를 쏟아냈다. 곤란한데. 그는 난처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것도 잠시, 담뱃진에 검붉게 변색한 액체가 담배꽁초 무더기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모습에 그는 기함했다. 흘러나온 내장을 보물처럼 부여잡고 의사를 찾던 시민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남자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화장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누구라도 자신의 손을 잡아줬으면 했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다 괜찮다고, 이제는 지나간 일이라고 해줬으면 싶었다. 그런 사람은 더는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그의 눈가에 잔주름이 덩굴처럼 기어오르고, 세월이 머리칼에 하얗게 쌓이고, 마침내는 얼굴이 무너져 추한 흔적만 폐가처럼 남는 그 순간까지도. 뻣뻣하게 굳은 채 떨리는 손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손목으로 억지로 물을 틀었다. 남자는 샤워기가 쏟아내는 찬물에 머리를 적시면서 영혼을 토해내듯 울었다.


늘 그렇듯, 평범하게 외로운 기상이었다.



내키지 않는 아침이었지만 챙겨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약을 거르기엔 너무도 중요한 날이었다. 메뉴는 늘 그렇듯 라면과 인스턴트 밥이었다. 퇴근이 늦어 밤이 짧은 아내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만들던 때가 있음을 그는 기억했다. 낯설다. 그때의 그와 자신 사이에는 지나치게 큰 간극이 놓여있었다. 그의 손이 다시 부엌칼을 잡을 날이 올까. 고민 같은 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남자는 부정했다. 부엌칼을 잡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목에 구멍을 낼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찰기 없는 밥을 라면과 함께 억지로 밀어 넣으며 위장을 달랬다. 식사를 마친 남자는 입을 열고 약봉지를 털어냈다. 씁쓸했다.


남자는 오랜만에 몸을 씻기 위해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행여 묵은 냄새가 나지 않을까 그는 몸을 꼼꼼히 씻었다. 혹시 덜 씻어내 거뭇한 부분이 있지 않나 몇 번을 확인하면서. 악몽에 시달리며 긁어댄 가슴께의 상처에 흉하게 딱지가 앉아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세워 딱지를 억지로 뜯어냈다. 몸을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붉은 기운이 섞였다. 딱지가 없어도 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은 이미 흉터투성이였다. 대부분은 자해 때문이었다.


물기를 닦아내며 거울 앞에 서자 볼품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집 없이 굴곡진 얼굴, 제멋대로 자라 꼬부라진 수염, 군데군데 검게 변한 피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의 얼굴은 버려진 무덤 같았다. 움푹 들어가 퀭한 눈두덩이 안에서 그의 두 눈만이 도깨비불처럼 매가리 없이 빛났다. 수도꼭지를 열고 얼굴을 씻어도 그런 인상은 가시지 않았다.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손을 뻗어 면도기를 집어 들자 한참을 쓰지 않은 면도날이 붉게 녹슬어있었다. 들지 않는 칼날을 억지로 얼굴에 굴렸다. 얼굴이 따가웠다. 그녀에게 맞은 뺨이 다시 시큰거리는 느낌이었다. 성긴 칫솔에 치약을 대충 묻히고 이를 닦아냈다. 치실질도 잊지 않는다.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한 손길로 치실과 한참을 씨름하던 그는 거울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화장실을 나왔다. 지쳤다.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이불에 파고들고 싶었다. 오늘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옷을 입으며 거실 구석의 종이가방을 확인한다. 간밤에 그를 두고 도망치진 않았을까. 더는 그와 있을 수 없다며 그를 버리지는 않았을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가방은 그가 놓아둔 곳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남자는 문득 불안해졌다. 그녀는 오늘 나를 만나러 나와줄까. 혼자일까. 둘일까. 나를 보자마자 아름답던 얼굴이 구겨지지 않을까. 나의 모습에 또다시 실망하진 않을까. 그녀는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역겨운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는 그녀가 자신을 다시 사랑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혐오가 가속되었다. 남자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자신을 쓰레기로 격하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싫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신 역시도 싫었다. 자신은 애초에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비참했다. 남자는 또다시 울었다.


*


오랜만에 집을 나오니 아침임에도 날이 제법 무더웠다. 6월이 가까워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남자는 옷을 좀 더 가볍게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사실 미리 알았다 해도 그다지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싶었다. 모두에게 보이기엔 너무나도 추한 모습이었다.


약속 장소는 남자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여자는 그가 그의 집에서 멀리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의 정신이,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탓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배려가 무거웠다. 여느 남자들처럼 그녀의 집으로 그녀를 마중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을 나선지 겨우 10여 분이 지났을 뿐임에도 이미 떨리기 시작한 그의 시야가 그에게 차갑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남자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곳은 자그마한 시민 공원이었다. 평일이었던 터라 공원은 거의 텅 빈 채였다. 주름이 자글한 노인 둘만이 유일한 그늘인 등나무 교실을 차지하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그들이 부러웠다.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태양 빛에 몸을 그슬린다면 좀 더 빨리 늙을 수 있을까. 그는 헛된 상상을 했다. 햇빛에 노출된 손등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몸을 타고 오르는 주름을. 등은 굽어들고, 어깨가 쭈그러들고, 마침내 눈이 희미해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미래를 생각했다. 하지만 짧지 않은 시간 칩거의 나날을 이어왔음에도 그의 몸은 굳건했다. 그의 머릿속만이 좌절에 시커멓게 찌들어 있었다.


남자는 미끄럼틀에 기다려 여자를 기다렸다. 햇볕이 따가웠다. 하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 있을 생각이었다. 여자는 시간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앞으로 몇 분만 더 기다리면 그녀가 나타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거짓말이다. 남자는 그늘로 향하기가 무서웠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한 자리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쥐새끼처럼 숨어들어도 그들이 그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그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순간 남자는 신화 속 괴물의 눈을 마주 보고 만 불행한 도전자처럼 돌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버린 남자를 그들은 기괴한 구경거리처럼 바라볼 것이다. 남자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급히 고개를 푹 숙이는 남자를 익숙한 목소리가 불렀다.


“뭐하는 거야.”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벚꽃색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입을 열려다 꽉 막힌 목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남자는 애써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슬비.”


그의 부름에 응하듯 그녀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세하.”


어두운 집안에서 심해어처럼 떠돌던 남자는 그녀의 부름에 오랜만에 수면으로 부상하여 이세하가 되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일단, 옮길까.”

“자리 말이지. 그래.”


이슬비가 따라오라는 듯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인사부터 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뭔가 할 말이 많았을 터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던가, 여전히 예쁘다던가, 요즘 사는 게 어떻냐던가.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눈은 그를 발가벗겨 내팽개치는 듯 했다. 결국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숨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세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이세하는 카페가 싫었다. 그가 좀 더 젊었던 시절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카페에는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분위기. 그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듯 노력하는 사람들. 역시 불안하다. 그는 허락받지 못한 불청객이 된 느낌이었다. 당장에라도 테이블을 닦던 점원이 다가와 그를 내쫓을 것만 같았다. 이세하는 괜스레 커피를 뒤적이며 얼음 소리를 냈다. 이슬비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시선 처리였다. 이슬비는 그가 자신의 시선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녀를 살폈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것은 2년쯤 전이었다. 그에게 숨길 수 없는 손자국을 남긴 2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기억 속의 이슬비와 지금 눈앞에서 말없이 앉아있는 이슬비의 모습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니, 무언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기엔 그가 너무 피폐해진 것일지도. 사실 그는 2년 전의 이슬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의 모습을 기억에 다시 덮어씌운 것일 수도 있었다. 이세하는 무엇이 답인지 알지 못했다.


“뭐 물어볼 것 없어?”


불현듯 이슬비가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일은 어떤지, 여전히 바쁜지, 힘들지는 않은지, 아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그중 하나라도 좋지 않은 답이 나오는 순간 그는 죄책감에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검은 가장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터였다. 모든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수술을 받은 것도, 그녀가 그의 곁에서 떠난 것도, 그녀가 아이를 홀로 키우게 된 것도. 모두 그가 한심하게도 과거에 짓눌려 헤어 나오지 못한 탓이었다. 결국, 그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다지.”

“표정이 전혀 안 그런데.”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있잖아.”

“안 봐도 뻔해.”


옳은 말이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소용없었다. 자기 일에는 그렇게 둔감한 주제에, 그의 말에서는 없는 행간도 찾아내어 읽곤 했다. 괜히 약이 올라 반론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세하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잘살고 있어. 거의 책상에서 먹물만 파는 일이고, 위험할 일은 전혀 없으니까.”


그녀는 질문 없이도 그에게 대답했다. 이전과 똑같았다. 이세하는 묘한 안락함을 느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잠시나마 당시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애써 용기를 짜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슬비야.”

“왜?”


지금 말해야 한다. 다음 기회는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혀를 이세하는 억지로 놀렸다.


“지금, 나 봐줄 수 있어?”


이슬비가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달착지근한 계피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찻잔 속의 새하얀 어둠을 바라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사과하지 마.”


이슬비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세하는 후회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은 역시 미쳐있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낼 리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너를 못 봐도, 괜찮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날 봐줘.”

“...진심이야?”


찻잔과 그의 얼굴 사이에서 표류하는 그녀의 시선에 그는 다시 한 번 죄책감을 느꼈다. 미친 소리였다. 자신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올 자격이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소리 없는 사과가 그를 내리눌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야, 역시 됐어. 잊어줘.”

“그 말이 아니야.”


이슬비의 시선이 갑작스레 그를 똑바로 향했다. 이세하는 그녀의 눈길에 또다시 몸이 굳었다. 보지 마. 아니, 날 봐줘.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기 없는 왼쪽 눈이 그를 준엄하게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자격이 없어.


“나를 다시는 못 봐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가 몇 시간 뒤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말해야만 했다. 불필요한 각주라도 변명처럼 덧붙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최초의 요청조차 꺼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에 이세하는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거짓말.”


이슬비가 그의 대답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를 참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래. 우리의 관계는 끝났을지도 몰라.”


그녀의 말에 이세하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희망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앞으로 계속, 죽을 때까지, 영원히 그는 어둑한 방구석 어딘가에서 홀로 썩어들어 갈 운명이었다. 그녀의 행복을 망가뜨린 그에게 어울리는 음울한 결말이었다. 꽉 다문 입에서 다 자라지 못한 비명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이세하는 자신의 신음 속에 파묻혔다.


그래서 그는 이슬비의 다음 말을 조금 늦게 들었다.


“하지만, 너와 나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어.”

“뭐라고, 했어?”


이세하의 마음이 술렁였다. 이세하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짓밟았다. 깊은 의미는 없을 이야기였다. 그는 괜한 희망을 품을 자격이 없었다. 그녀의 사랑을 갈구할 자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되물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내가 널 싫어하게 됐을 리 없잖아.”


그러지 마. 이세하의 생각이 와글와글 끓어올랐다. 다시 생각해 봐. 네 눈앞에 있는 건 괴물이야. 내가 널 상처 입혔어. 나 자신이 가증스럽게도 그 날의 기억에 가위눌리고 있는데, 너는 오죽하겠어. 내가 네 세상을 절반으로 줄여버렸는데. 이세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랬다. 그는 눈물로밖에 말할 수 없었다.


“울지 마. 괜찮아.”


둑이 터졌다. 이세하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통곡했다. 미안했다. 그녀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했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는 그녀에게 짐이 될 뿐이었다. 머리에 와 닿는 그녀의 손에 그의 울음이 더욱 가열해졌다. 관리가 안 되어 푸석한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녀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였다. 자신에게 왜 이런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인지, 이세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알고 있는데, 자신은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은 그녀였다. 하지만 정작 지금 위로를 받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모든 것이 그랬다.


“괜찮아.”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울음을 그치고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세하의 모습에 이슬비는 픽 웃었다. 이세하는 시선을 피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은 이제 괜찮아.”


그럴 리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반년에 한 번, 정도연 씨에게 검사를 받아. 의안에 문제는 없는지, 거부반응은 없는지, 그런 것들 말야.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


이세하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꺽꺽거리는 딸꾹질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의 한심한 모습에 이슬비가 미소를 띠었다.


“약은 잘 챙겨 먹고 있지?”


이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약을 거르는 날도 잦았다. 식사를 한 끼도 하지 않는 날이 많은 탓이었다.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 역시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슬비는 그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알고 넘어가 줄 사람이었다.


“그거 알아? 우리 애,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


알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기계처럼 잊을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때까지 그 얼굴 좀 어떻게 해봐. 애 입학식에 그런 몰골로 갈 생각이야?”

“어?”


그녀의 말에 이세하는 얼빠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급히 입을 연 탓에 겨우 잠잠해지려던 딸꾹질이 다시 심해졌다. 요동치는 몸을 억지로 멈추려 끅끅거리는 이세하를 보며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평생 애 얼굴도 안 보고 살 생각이었어?”


이세하는 그럴 생각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언뜻 비치는 공포를 마주할 자신이 없기도 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찻숟가락이 떠올라 그의 이마를 툭 쳤다. 이슬비가 그를 놀릴 때면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바보.”


이세하는 항의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져온 종이가방은 어느 틈엔가 그녀의 옆으로 옮겨가 있었다. 가방을 열어본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방 안에는 교육에 좋다는 게임기가 들어있었다. 아이에게 전할 선물을 고르며 며칠을 고민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의 세상은 너무도 좁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 어쩜 그렇게 변한 게 없어?”

“미안.”


이세하의 어깨가 푹 수그러들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것이 없었다. 게임밖에 몰랐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게임기가 들어있는 상자를 살펴보던 이슬비가 또다시 픽 웃었다.


“집에 가면 청소부터 해.”

“청소?”

“그래. 어차피 엉망으로 만들어놨겠지.”


맞는 말이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2년간의 그는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는 존재였다. 인간 이세하는 그곳에 없었다. 배가 고프면 아무 음식이나 먹고, 마냥 누워 있다가 자신이 잠에 빠지는 것도 모른 채 잠들어 가위에 눌렸다. 그리고 눈을 뜨면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곤 했다.


“그리고 관리 좀 하고. 앞으로도 봐야 할 얼굴인데 그게 뭐야.”


이세하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계속해서 두려워하고 고민했던 일을 그녀는 몇 분 만에 정리해버렸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도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고심했을 것이다. 그것이 이세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는 다시 우울감에 짓눌릴 것이다. 내일 아침에도 그는 눈물을 쏟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또다시 혐오하리라. 하지만 그런 자신을 이슬비는 긍정해주었다. 다시는 상종 못 할 쓰레기, 자신의 반쪽을 해한 괴물 대신 그곳에서 이세하를 찾아내 주었다.


이세하는 또다시 눈시울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느끼고는 애써 기분을 다잡았다. 또다시 그녀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는 싫었다. 눈이 아프다는 양 짐짓 고개를 저으며 눈가를 훔친 이세하는 딱딱한 얼굴 근육을 애써 움직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빗자루를 파는 잡화상이 어디에 있더라, 이세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제법 바빠질 것 같았다.



'클로저스 > 부부의 나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오는 여름날  (0) 2017.06.03
그 남자의 생일  (0) 2016.06.03

검은양 팀은 지금까지 친목을 도모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팀원 간의 사이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큼직한 사건들을 함께 겪은 만큼, 이들의 관계는 다른 클로저 팀과 비교해도 매우 돈독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저 일이 바빠 사적으로 만날 일이 없었을 뿐이다. 검은양 팀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상황에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어찌됐건, 그들이 바쁘게 뛰어다닐수록 세상은 한결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제이는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팀원들도 그 전쟁의 직∙간접적 피해자들이었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조금 바쁘게 살아서 신도시의 시민들이 일상을 구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유니온의 상층부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선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요식행위를 좋아하는 것은 유니온 역시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렇게 해서, 상위 부서로부터 김유정에게 ‘팀원들의 결속 재고 및 피로 회복, 그리고 강남 사태를 무사히 해결한 공로에 대한 포상 개념의 회식 자리’를 마련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렇잖아도 여유가 생기고 나면 이러한 자리를 한 번쯤은 가지리라 생각했던 김유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바람이 명령의 형태가 되어서 돌아오자 그녀는 곤란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어쩔까요?”

 

재해복구본부의 임시 사무실 안에 김유정의 목소리가 울렸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것이 상부의 제멋대로인 명령에 꽤나 골치가 아픈 듯 했다. 미성년자 팀원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시간대였기에, 김유정은 제이와 함께 간단하게라도 계획을 짜놓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을 데리고 술판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아냐? 저녁엔 애들은 애들 나름대로 숙제라던가, 공부라던가 할 일이 꽤 있을 테고. 그렇게 시간이 여유롭지 않으니 여기서 뭐라도 시켜 먹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제이가 대답했다. 즉흥적이고 허술해 보이는 의견이었지만 정론이었다. 아무리 시간을 비워도 작전대기로 한, 두 명은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대부분의 클로저 팀의 현실이었기에 다른 클로저들 역시도 이런 식으로 회식을 하곤 했었던 것이다. 음주가 낄 경우 누군가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는 방식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대부분인 검은양 팀은 이 문제로 곤란할 일이 없었다. 이미 이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김유정 역시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죠. 그간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여기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서 쉬게 하는 편이 좋겠어요. 메뉴, 는... 어떻게 할까요?”

 

이왕이면 아이들에게 평소에 먹기 힘든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은 것이 김유정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상부에서 내려온 지원금은, 굳이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쥐꼬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사비를 털자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내려온 명령의 타이밍이 어찌나 적절했던지, 김유정의 지갑은 바닥을 드러내던 참이었다. 김유정이 보여준 문서에 적힌 지원금을 보자 제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 여전하구만 진짜. 그 많은 운영비는 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군. 이러면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 아냐?”

 

제이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김유정의 시선은 그녀도 종종 이용하는지라 때마침 벽에 붙여놓았던 중국집의 전단지에 도달했다. 제이의 의견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참에 그 싼 티 나는 전단지를 보게 된 김유정의 얼굴은 참으로 볼만한 모양새가 되었다. 자신도 허탈했던지 연신 헛웃음을 짓던 제이는 김유정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만지며 변명조로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그 돈을 누구 코에 붙인다고 그래? 애들 데리고 어디 좋은데 가서 고기라도 구워먹으면 참 좋겠지. 현실이 그렇질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 거고.”
“그러게 말이죠. 모처럼 뭐라도 지원을 해주나 싶더니만...”

 

김유정이 표정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예전부터 유니온의 탁상행정에 진절머리를 내던 그녀였건만, 관리요원으로 현장에 나와 피부로 느끼는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상식을 벗어난 행정이 무엇 하나 바뀌는 것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김유정을 반쯤 염세주의자로 만들곤 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아무리 불평을 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고, 결국 김유정은 제이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오후에 출근한 나머지 팀원들이 급조한 회식 계획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김유정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이슬비와 이세하, 그리고 서유리는 같은 학교의 학생이었을 뿐 본래 서로를 모르는 사이였다. 그런 이들이 한 팀의 팀원이 되었다고 갑자기 의기투합하여 함께 다닐 리 만무했기에, 이들은 교내에서 서로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이 셋이 이럴진대, 아예 나이대가 다른 미스틸테인은 오죽했을까.

 

그런 상황이었기에 이들은 김유정이 꺼낸 회식 이야기에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회식 장소가 고기집이 아니라 현장이라는 이야기에 서유리가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김유정이 마주했던 유일한 반대 입장이었다. 하지만 예산 문제가 등장하자 그녀 역시도 김유정에 설명에 납득했다. 금전 문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온 것은 그녀 역시도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이전에 해당 중국집을 이용해 본 경험이 있던 김유정과 자신의 고기 애호 취향을 열렬히 피력한 서유리의 의견을 조합한 결과, 메뉴는 탕수육과 각자가 고른 개인 음식이라는 매우 정석적인 조합이 되었다. 회식 예정일을 이틀 뒤로 확정한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김유정은 팀원들에게 그날의 당일 과업에 대해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

 

사람의 음식 취향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채식주의자와 같은 극단적인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호불호는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렇다곤 하더라도, 김유정은 중국 음식 같은 간단한 메뉴에서 이렇게 첨예한 갈등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이 음식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논쟁을 생각해보면 메뉴를 선택한 시점부터 여기에 대해 고민을 해두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찰 임무가 늦어져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스틸테인과 제이를 제외한 나머지 검은양 팀원들은 모두 김유정의 컨테이너에 모여 있었다. 두 책상을 붙여서 만든 간이 식탁에 모여 앉은 검은양 팀원들은 저마다 짜장면이나 볶음밥 등을 앞에 놓은 채, 탕수육 접시와 소스 그릇을 마주보고 앉아 한창 입씨름을 벌이는 중이었다.

 

“탕수육에는 소스를 부어서 먹는 게 당연한 것 아냐?”

 

이세하가 말했다. 그 새를 못 참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얼핏 보면 탕수육에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수시로 식탁을 곁눈질하는 그의 시선은 그의 본심이 겉보기와는 정반대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보야, 탕수육에 소스를 다 부어버리면 탕수육이 눅눅해지잖아! 그럼 보관하기가 얼마나 나쁜지 알아?”

 

서유리의 말이었다. 회식 시작 후 삼십 분을 버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탕수육을 굳이 보관까지 이야기하면서 걱정하는 모습이 과연 평소 돈에 쪼들리는 그녀답다고 할만 했다. 회식에 늦은 두 팀원을 염려한 이슬비가 옆에서 서유리를 거들었다.

 

“제이 씨와 테인이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을 부담할 수는 없어, 이세하. 우리끼리 먼저 먹기 시작하더라도 최소한 그 둘에게도 선택권을 줘야만 해. 소스를 붓는 건 조금만 참아주면 안될까?”
“선택권? 탕수육은 당연히 소스를 부어서 먹는 음식이잖아. 탕수육은 기본적으로 소스와 함께 볶아서 내놓는 음식이지. 소스를 따로 주는 것은 배달음식의 한계로 발생한 고육지책일 뿐, 고기에 잘 스며든 소스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당연히 지금 소스를 부어야지.”

 

평소 집에서 요리를 포함한 가사를 책임지고 있는 이세하다운 이야기였다. 자신의 이야기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두 팀원의 모습에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고는 계속해서 주장을 피력했다.

 

“탕수육을 소스에 대충 찍어먹겠단 건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문외한들의 생각 아냐? 테인이도 통신으로 연락했잖아? 금방 올 거라고. 제대로 만든 탕수육이라면 10분 정도의 시간으로는 눅눅해지지 않아.”

 

말을 마친 이세하가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 소스 그릇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릇은 그의 손을 피해 둥실 떠올라 이슬비의 앞에 안착했다. 아직 비닐도 벗기지 못한 소스 그릇의 온도를 확인한 이슬비가 이세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현 시점에서 너의 요리철학은 중요하지 않아, 이세하. 두 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게...”
“세하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탕수육은 당연히 찍어먹어야지! 고소한 튀김옷 맛이 탕수육에선 제일 중요한 거잖아! 그런 걸로 무슨 무뇌한이니, 어쩌니... 내가 바보라 이거야?”

 

이슬비의 말을 끊으며 서유리가 말했다. 어느 틈엔가 이슬비 앞의 소스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 뒤였다. 서유리가 말하는 틈을 타 소스를 탈환하려다 그녀의 재빠른 방어에 실패한 이세하가 외쳤다.

 

“무뇌한이 아니고 문외한이라고! 애초에, 소스와 함께 먹는 것을 전제하는 요리에 왜 찍어먹는다는 개념이 들어가는거야?”

 

말을 하면서도 이세하는 서유리에게서 탕수육 소스를 빼앗을 셈으로 연신 팔을 뻗었다. 무의식중에 위상력이 발휘되기라도 했는지 일반적인 팔의 움직임과는 사뭇 다른 속도였지만, 서유리 역시도 그에 지지 않고 이세하의 손을 요리조리 피하며 그릇을 사수해냈다. 의자 째로 뒤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체를 젖혀 그릇을 빼내면서 서유리가 외쳤다.

 

“탕수육은 고기잖아, 고기! 너는 고기집에 가면 소스를 고기에 뿌려 먹을거야? 아니잖아? 정 그렇게 탕수육에 소스를 붓고 싶으면 네가 먹을 만큼 고기를 소스에 담가두면 될 거 아냐!”

 

정론에 가까운 발언이었지만 이세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셈으로 보였다.

 

“그거랑은 다른 문제라고! 요리를 뭘로 보는 거야?”
“먹는 사람이 중요하지! 그리고 요리라면 나도 한단 말야!”

 

이세하와 서유리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갔다. 고조되기 시작한 그 둘의 말싸움은 곧 자연스럽게 탕수육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진 채 말꼬리를 잡으며 자존심 싸움을 시작하는 영역으로 넘어갔다. 어느 틈엔가 싸움의 원래 주제였던 탕수육 소스는 테이블 구석으로 밀려나있었다.

 

“애초에 서유리 넌 저번에도 과일 깎아서 접대하는 것 밖에 더했어?”

“뭐? 그러는 네가 한 것도 고작 라면 따위였잖아!”

“고작 라면이라고? 하긴, 그 라면에 얼마나 많은 노하우가 접목됐는지 네가 알 리가 없지. 어차피 네가 뭘 만든다고 해봐야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는 카레밖에 더 있냐?”

 

고작 배달 탕수육 따위에 소스를 붓네 마네 하는 이야기로 평소 그렇게 사이가 좋던 팀원들이 싸우기 시작하는 모습에 이슬비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녀가 그나마 의지할 법한 상식인인 김유정은 상황을 어떻게든 중재해보려다 실패한 뒤 구석에서 멍한 눈으로 현실도피를 하게 된지 오래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둘의 말싸움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슬비는 김유정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저 둘을 어쩌죠? 제이 씨와 테인이가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아? 아, 그래. 지금 연락을 하는 중이긴 한데... 대답이 없네. 마지막으로 금방 도착한다고 한지 5분이 다 되가는데...”

 

김유정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컨테이너의 문이 벌컥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문을 향해 시선을 향한 이슬비는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육중한 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Ich bin daheim! 우와! 냄새 엄청 좋네요! 이게 그 탕슉이라는 음식인가요?”

 

컨테이너 안에 진동하던 냄새를 맡은 미스틸테인이 장비 거치대에 창을 기대놓으며 김유정과 이슬비에게 질문했다. 이슬비와 마찬가지로 내심 안도하고 있던 김유정이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 맞아. 탕슉이 아니라 탕수육이라고 발음하는 거야, 테인아. 그런데 제이 씨는 같이 오지 않았니?”
“우웅, 제이 아저씨는 잠깐 특경대원 아저씨들이랑 이야기를 좀 한다고 했어요. 먼저 먹고 있으라던데요?”

 

미스틸테인의 대답에 김유정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특경대 사무실 앞에서 특경대 대원들과 함께 송은이와 대화를 나누고있는 제이의 뒷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서유리와 이세하를 본 미스틸테인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Übrigens, 그런데, 유리 누나랑 세하 형은 왜 저러고 있는 거예요?”
“아, 하하... 그냥 그런 일이 있어. 그보다 테인아, 전에 탕수육을 먹어본 적 있니?”

 

그의 질문에 다시 현실의 막막함을 확인한 김유정이 말을 얼버무리고 되묻자 미스틸테인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해외에서 파견 온 클로저에게 제공되는 유니온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그가 급식 외의 음식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뇨. 뭐 특별한 거라도 있나요?”
“아아, 탕수육은 소스를 곁들여먹는 음식이거든. 한번 먹어볼래? 제이 씨는 금방 올테니 먼저 먹어볼래?”
“Ja, natürlich! 저 그릇이 그 소스인거죠?”

 

미스틸테인은 김유정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들뜬 채로 테이블로 달려갔다. 미스틸테인은 소스 그릇의 랩을 벗겨내고 즉시 탕수육에 소스를 부었다. 아직까지도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이세하와 서유리가 채 반응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목격한 이세하와 서유리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아?”

 

서유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녀보다 한 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세하는 그제야 그가 말싸움을 하고 있던 원인을 기억해냈는지 씩 웃으며 미스틸테인의 어께를 툭툭 쳤다.

 

“잘 했어, 테인아!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세하 형, 탕수육 좋아해요?”
“당연하지! 얼른 먹자. 식겠다.”

 

허무한 표정으로 소스로 뒤덮인 탕수육을 바라보는 서유리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세하가 말했다. 이세하는 미스틸테인 몫의 짜장면을 그에게 건네면서도 싱글벙글하는 얼굴을 여과 없이 드러내보였다. 그를 바라보며 의자에 주저앉는 서유리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이야, 중국집 음식 냄새 정말 오랜만인데? 오랜만에 식욕이 다 돌아오는 기분이야.”

 

때마침 이야기가 끝났는지 제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 안을 한바퀴 둘러본 제이는 당황하며 이슬비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혼이 빠져나간 듯 힘없이 앉아있는 서유리와 희희낙락하며 미스틸테인의 나무젓가락을 두 개로 나눠주고 있는 이세하의 모습은 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이슬비는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뒤, 제이는 서유리에게 다가가 힘을 내라는 듯 그녀의 어께를 잡아주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서유리에게 제이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다음에 찍어먹으면 되잖아?”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감을 사기 쉬운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의 손을 잘 빌리지 않는 편이었고, 그녀가 누군가의 도움을 청할 땐 대개 상대가 수긍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슬비는 지금까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해도 큰 문제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슬비는 자신이 지금까지 유연한 화술을 갈고닦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평소 유니온 아카데미의 교육방식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던 그녀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매끄러운 사회생활을 위한 화술 교육에 시간을 할당하지 않은 아카데미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휴대용 게임기를 두들기고 있는 이세하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세하는 눈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푸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까다로운 리더가 지금까지 자신의 취미생활을 방해해온 것이 도대체 몇 번인지, 그는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업무 시간에도 잠시만 짬이 나면 기어코 게임기의 전원을 켜고야 마는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작전을 촬영한 동영상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을 편집하고 나니 분량이 너무 적어 방송물로 만들 수가 없더라는 박심현 요원의 이야기는 그로서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세하는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작전 중에 게임을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식 시간에 아지트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신의 자유가 아닌가. 게임에 집중하느라 게임기를 고정하는 손가락이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타 기어코 손을 빠져나가 그녀를 향해 날아가는 게임 콘솔을 맥없이 바라보는 것은 이제 사양이었다. 이세하는 콘솔을 잡는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방해한 것은 다른 방법의 공격이었다.

“이세하.”
“잠깐, 5분만.”

어쩌면 저렇게 타이밍이 안 맞을 수가 있을까. 이세하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슬비에게는 염동력 이외에도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모종의 능력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녀가 이세하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그를 부르는 때는 대체로 손을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다가 집중이 흐트러져 얼마 안 남은 목표를 놓친 것이 몇 번이던가. 용돈을 털어 새로 구매한 DLC의 클리어가 눈앞이건만 저 분홍빛 머리의 소녀는 어째서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것일까.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불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얼마 뒤, 이세하는 이슬비를 오래 기다리게 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스테이지를 마무리하고 게임을 세이브했다. 콘솔이 종료되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슬비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슬비는 자신이 들어왔을 때 본 모습 그대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왜 불러?”
“응?”

이슬비는 그의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다급히 팔짱을 풀며 이세하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세하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그가 게임기를 집어넣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발표 수업에서 볼 법한 사무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하던 그녀였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낀 이세하는 아직도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라도 있나?”

이세하의 실수였다. 검은양 팀에 들어오기 전까지, 가족을 제외하면 인간관계라고 해봐야 동성 친구인 한석봉뿐이었던 그였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외의 것들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에서 본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지뢰를 밟은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세하도 눈앞에서 이슬비의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점점 붉게 물드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강대한 알파퀸의 아들이자, 본인 역시도 촉망받는 클로저인 그도 엎지른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세하는 자신의 정수리를 목표로 두꺼운 영어사전이 날아들고 있다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슬비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고, 지금까지의 몇 번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이세하의 무신경한 행동거지는 지금까지 질리도록 보아왔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도 방금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눈앞에서 꽤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문지르고 있는 이세하를 보자 미안하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릿속의 분노를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사적인 일로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이슬비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이세하를 불렀다.

“이제 정신 차렸어?”
“그래.”

제법 아픈 듯한 제스처를 취하더니만 타격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도 험악한 상황을 몇 번 겪은 클로저 나부랭이니 그럴 만도 했다. ‘평소처럼’을 머릿속에서 되뇌며 이슬비는 이세하에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녀 자신의 현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코믹월드, 라고, 알고 있지?”

결국 이슬비는, 앞으로 몇 년간은 후회할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야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

이세하는 코믹월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 아이템을 증정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코믹월드 행사장에 방문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세하는 이 분홍빛 소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코믹월드의 이미지를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은 좁은 공간 안에 우글거리는 사람과 거기서 기인하는 숨 막히는 공기뿐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이 깐깐하고 고지식한 완벽주의자가 그곳에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이세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이슬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일단 말을 시작하긴 했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도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엔 ‘이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다’라는 식의 예제들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이대로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말재간을 저주하며, 이슬비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세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셜록 홈즈 관련 합동지를 판매하는 부스의 소식을 트위터에서 들었으니 사러 가야겠으며, 자신은 초행길이니 이런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이세하가 자신과 동행해줬으면 한다’라는 것이 이세하가 들은 그녀의 요지였다. 이슬비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녀를 놀리다가 본전도 못 찾고 부들부들 떨며 돌아온 제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열의가 이 정도일 것일 줄이야. 홈즈가 그려진 컵받침에 감히 컵을 올리지도 못하던 만화 속 주인공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세하는 그녀에게도 이런 부류의 장난이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에는 이세하가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세하는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너, 거기 뭐 하는 데인지는 알아?”
“간단하게 조사는 했어. 특정 미디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동인지나 관련 상품을 파는 곳이잖아?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매우 긍정적인 활동이지. 인상 깊었어.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이세하는 머리가 아파졌다. 이 반응을 보건대, 그녀는 ‘동인지’라는 단어를 국어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정의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녀를 코믹월드같은 곳에 데려갔다간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이세하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녀가 택한 동행인이 하필 자신이란 것 역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성인인 제이나 동성인 서유리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 둘에게는 이미 물어봤어. 유리는 코믹월드가 뭔지도 모른다고 했고, 제이 씨는..., 반응이 이상하던데. 그런 건 네가 잘 알 거라며 너를 추천해주셨어.”

이세하의 안에서 제이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이렇게 능글거리니까 결국 아저씨인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을 추천한 뒤에 속으로 제이가 얼마나 웃었을지는 굳이 그를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이 광대놀음을 회피할 방도를 찾기 위해 핑곗거리를 찾아 머릿속을 뒤지던 이세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난 어머니가 반대해서 못 갈 것 같은데. 예전에 한 번 갔을 때도 어머니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

이슬비가 그의 대답에 수긍하는 모습에 이세하는 조용히 안도했다. 그녀가 그의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존경심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그녀가 더는 자신을 귀찮게 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그리고 그의 리더는 그를 이 정도로 놓아줄 정도로 녹록치 않았다.

“그럼 내가 너희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허락을 받을게. 그럼 문제없겠지?”

난데없는 제안에 이세하는 또다시 당황했다.

“네가 우리 어머니 번호는 어떻게 알아?”
“나는 팀의 리더야. 팀원이 부재중이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비상 연락망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오늘은 아무래도 액일이 분명했다. 이세하는 아침으로 돌아가 방에서 농성하는 자신의 모습을 맹렬히 상상했다. 하다못해 쉬는 동안엔 게임을 좀 해야겠다며 검은양 아지트로 향하지 않는 모습이라도. 당연하게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핑곗거리가 떨어진 이세하는 결국 자신의 선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이세하는 자신이 코믹월드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의 행사 때에도 이번 한 번 만이라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몇 주간의 투쟁의 열매를 얻어냈던 이세하인 것이다. 그랬기에 이슬비가 전화 한 통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허락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 이세하의 생각이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저런 유감스러운 이유로 전화가 간다는 것은 이세하로서도 기분이 다소 묘해지는 이야기였으나, 어찌됐건 상황을 정리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그가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그랬기에, 이세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슬비를 에스코트하여 코믹월드에 가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듣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어딜 가요?”
“저번에 세하 네가 갔던데 말이야. 글쎄, 너 오기 조금 전에 슬비가 전화를 해서 너를 좀 빌렸으면 한다지 뭐니? 어쩜 나이도 너랑 동갑인 애가 그렇게 야무진지! 그 애, 정말 괜찮지 않니? 저번에도 내가 이 말 했었나?”

이세하는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의 어머니가 이슬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 정도였단 말인가. 아카데미에 다녀온 서지수가 그에게 이슬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신붓감 운운할 때에 미리 선을 그어놓지 못한 것을 이세하는 후회했다. 물론 그 시점에서 이슬비와 이런 식으로 엮이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터였으니 의미 없는 후회였지만. 결국, 이세하는 다음날 학교에서 다음 주 주말에 코믹월드 행사장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표 예매를 이슬비에게 맡긴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행사 당일, 이세하와의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한 이슬비는 인도를 메운 인파에 경악했다.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강남 사태가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만한 민간인이 한 곳에 모인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그녀가 행렬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에도 그녀의 뒤에서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고, 조끼를 입은 진행요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줄을 정리하느라 부산을 떨어댔다. 이세하의 모습을 찾아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이슬비는 줄을 서있거나 줄의 끝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위상능력자임을 드러내는 분홍빛 머리와 푸른 눈은 어딜 가도 주목의 대상인 것이다. 신강고등학교에 등교한 첫 날 아침,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벌어진 소동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그녀였다. 이런저런 추억에 잠겨있던 이슬비의 어께를 누군가가 툭툭 건드렸다.

“누구신지?”

뒤를 돌아본 이슬비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이세하를 발견했다. 그녀가 아는 이세하는 머리에 무언가를 걸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었던 터라 이슬비는 그를 알아보는데 시간을 꽤 잡아먹어야만 했다. 이슬비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그녀의 손을 대뜸 붙잡고는 그녀를 인적 드문 곳으로 잡아끌었다.

“잠깐, 이세하! 뭐하는 거야!”
“너야말로 뭘 한가롭게 그러고 있는 거야?”
“내가 뭘 잘못한거야?”

이슬비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인가 싶어 자신이 바라보던 인파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행사장에 오려면 무언가 특별한 장식과 같은 것을 챙겨서 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 속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색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이 모자부터 써. 이것도. 이런 데서 머리를 다 드러내고 다니면 어떡해?”

이세하가 사이드백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이슬비는 의아해졌다.

“왜? 위상 능력자가 이런데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는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TV도 안 보냐?”
“TV가 왜?”

이슬비는 최근 일주일간의 뉴스를 곰곰이 떠올려보았지만, 위상 능력자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 이런 건 인터넷에서 더 많이 퍼졌으려나? 우리 팀은 대체로 그렇고, 특히 너랑 서유리말야. 지금 완전 유명 인사거든?”

이슬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뭘 했다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된단 말인가?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세하는 설명을 이어갔다.

“저번에 한기남 아저씨한테 작전 중에 회수한 인형들 대량 납품한 거, 기억 안 나? 그 인형들 전부 어디 갔을 것 같아? 다 사람들이 사 갔다고. 재고가 없어서 난리라더라.”
“...그 많은 게 정말 다 팔렸어?”

자신들의 인형이 제법 인기 있다는 한기남의 이야기는 이슬비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도 잠시간의 붐이라 생각했다. 한 달이 넘게 지나 파괴된 구획의 복구도 제법 진척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 이슬비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야 클로저 옷만 벗으면 일반인하고 구별이 안 되고 서유리는 지나가는 사람 눈 색을 일일이 확인하는 사람이 잘 없으니까 그나마 낫지만, 넌 그러잖아도 그 머리색 때문에 구별이 쉽단 말이야. 아까도 딱 보니 벌써 너 알아본 사람이 있더구만. 그대로 5분만 있었으면, 너, 아마 사람들 틈에 꽉 붙들려서 사인만 하다가 집에 갔을 거다.”

이슬비는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아무래도 세상은 그녀가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 했다. 군말없이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이세하와 마찬가지로 모자를 푹 눌러쓴 이슬비는 손가방에서 예매권을 꺼내 한 장을 이세하에게 건넸다. 이슬비의 손가방을 본 이세하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 가방 좀 큰 거 없었냐?”
“왜?”
“그 합동진지 뭔지 사면 어디에다 넣을 셈인데?”

이슬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세하의 머리가 정말로 아파오기 시작했다. 제이라면 여기서 능글맞게 농담을 하나쯤 던지면서 이슬비를 놀리며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세하는 그런 재주를 따라 할 수 없었다. 결국, 스트레스는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거기서 종이가방 줄 거 아니야?”
“안 줘. 여기가 무슨 서점인 줄 알아? 자기 가방에 다 넣어가야 한다고.”
“뭐? 그럼 어떡해?”

이슬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하고 이세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작전 중에는 그렇게 빠릿빠릿하건만, 이런 데에서 왜 나사가 빠져있는 것인지. 이세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슬비에게 자신의 사이드백을 건네었다.

“가방 빌려줄 테니까, 월요일 날 줘.”

이세하를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던 이슬비는 이세하의 가방을 받아들어 어깨에 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세하는 꾸역꾸역 행사장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을 인원들을 생각하며 약간의 다급함을 느꼈다. 어서 볼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게임을 하고 싶었던 이세하는 그 장소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이슬비의 손을 잡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자, 자. 내가 경험자니까 내 말 들어. 얼른 안 가면 굉장한 꼴을 볼 테니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야 한다니까.”
“아, 알았어.”

묘하게 조용해진 이슬비를 이끌고 행사장 입구로 향하며, 이세하는 도대체 집에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속으로 한탄을 늘어놓았다.

*

행사장 안은 이세하의 예상대로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입구 근처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그나마 상황이 나아진다는 것을 이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인파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이슬비를 억지로 끌고 행사장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입구 반대편의 벽 쪽에 자리를 잡은 이세하는 이슬비에게 예의 합동지를 판매하는 부스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몰라.”
“뭐?”

이세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혹여나 운 좋게 근처에 부스가 있지 않을까 하고 주변을 대충 둘러보았지만 신통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약이 오른 이세하는 이슬비를 닦달했다.

“야, 이슬비. 트위터에서 부스 소식 들었다면서? 왜 위치를 모르는 거야?”
“어쩌다 누가 지나가는 말투로 써놓은 걸 본 거란 말야. 와서 찾아보면 될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나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어.”

선글라스 너머로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리는 이슬비를 보며 이세하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 복잡한 작전 세부사항도 작전마다 달달 외우듯이 하고 다니는 그녀가 오늘따라 왜 이리 답답하게 구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오늘의 일을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으니 오죽할까. 행사장까지 들어왔으니 이제는 알아서 찾으라고 그녀를 내버려두고 돌아가고픈 욕망이 물밀듯 몰려왔건만, 분노한 어머니를 마주할 생각을 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세하는 이슬비가 보라는 듯 크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발품 팔아야겠다. 들어오면서 사람 봤지? 너, 정말 사람에 떠내려갈 수도 있으니까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와.”
“...알았어.”

이세하는 다시 이슬비의 손을 끌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줄이라도 가져오는 편이 낫지 않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이세하의 머릿속을 잠시 스쳐갔다.

이세하는 평소 자신의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 유감이 없었다. 좀 더 활동적인 타입이라면 키가 크다는 것이 큰 이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가시간에 집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는 편을 선호하는 이세하는 평소에 키 문제 때문에 아쉬울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큰 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재앙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싫어했던 이세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신의 체형에 내심 감사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자신이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행사장에 오는 사람 중에는 덩치 깨나 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인파의 중간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어느 부스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제법 힘든 일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오는 이슬비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더욱 나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학생으로 착각할만한 그녀의 체구로는 인파에 떠밀리지 않고 용케 그를 따라오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인파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던 이세하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끌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하여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붙잡은 손의 주인을 찾던 이세하는 부스 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낯익은 선글라스를 발견한 것이지만.

“아이쿠, 이게 누구야. 이세하 요원님 아니십니까?”
“한기남 아저씨?”

모두가 정신없이 바쁜 재해복구본부에서 특유의 웃음소리를 울리며 넉살 좋게 장사를 하던 그 얼굴을 어찌 잊겠는가. 어쩌다 보니 한기남을 따라 부스 뒤편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 이세하는 이슬비가 자신을 잘 따라왔단 것을 확인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나 크게 벌이시는데요?”

어찌 된 일인지 한기남은 여러 자리를 빌려 판을 크게 벌여놓고 있었다. 물건을 파느라 정신없는 그의 직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본 이세하는 그들이 판매하고 있는 물건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팔고 계신 물건, 설마 우리 팀원들이랑 관련된 거예요?”

“이야, 얼마나 잘 팔리는지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특히 서유리 요원 관련 상품이 아주 굉장하죠. 위험하게 차원종 잔해나 만지는 것보다 훨씬 돈이 되던데요?”

“이런 장사가 그렇게 돈이 된다고요?”

이세하 역시도 인터넷에서 과거 모 동인 서클이 책을 팔아 차를 샀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사람이 그런 사업을 시작하고, 거기에 그 소재가 자신들이라는 사실은 그에게서 현실 감각을 뺏어가기에 충분했다.

“아아, 여기는 그냥 홍보를 겸해서 벌이는 겁니다. 메인은 역시 인터넷이죠. 요원님들께 납품받은 인형으로 시작해서, 이제는 이런 거라던가...”

할 말이 없어진 이세하는 건성으로 그의 말을 받아넘기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기남의 말대로 물건이 많이 팔리기는 하는 것인지, 행사장이 개방된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원래는 상품이 담겨있었을 빈 상자가 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세하가 한기남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 일이 없었는지 이슬비는 매대 뒤편에서 진열된 물건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정식 요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데포르메 되어 그려진 카드 홀더를 집어 들고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피식 웃었다. 설마 우리 학교에도 저런 걸 갖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최근 점심시간에 한석봉과 게임을 하는 그를 향하는 시선이 부쩍 늘어난 것을 떠올린 그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혹시 셜록 홈즈 합동지 파는 부스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저기 우리 리더가 셜록 홈즈 광이거든요.”

이세하의 말을 들은 한기남의 눈빛이 한순간 반짝였다. 이세하는 여기서 또 다른 상품이 탄생하는 것인가, 이세하는 속으로 취미 생활이 만 천하에 공개될 이슬비에게 사과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하, 그러시군요. 그 부스는 아마..., 저기 반대편 G 열에 있을 겁니다. 몇 번 부스였더라...?”
“아, 그건 가서 찾아보면 되겠죠. 고맙습니다. 근데 이거, 뭐 제제당하거나 그러는 거 아니에요? 학생에다가 현직 유니온 요원들인데 이런 식으로 관련 상품을 막 팔아도 되나?”

이세하의 질문을 들은 한기남이 껄껄 웃고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하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저희 쪽에서 다 ‘원만히’ 해결했으니 걱정 마시길. 그럼 수고하십쇼!”

이세하는 한기남의 인사를 뒤로하고 부스를 나서며 이슬비를 불렀다. 그의 호출에 부스에서 나온 이슬비는 묘하게 뚱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의아해하면서도 별말을 하지 않은 채, 이세하는 그녀를 데리고 한기남이 알려준 G열로 향했다.

*

부스의 위치를 알고 나니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기남의 부스에서 나온 뒤 잠시 보였던 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로 어렵사리 구입한 합동지를 신줏단지라도 되는 마냥 가방에 조심조심 집어넣는 이슬비를 보며, 이세하는 집에 가서 게임을 할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를 집에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는듯 했다.

“코스프레를 보고싶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속이 답답해졌다. 부스에서 합동지를 사면서 지인이 셜록 홈즈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이슬비가 부스 옆에서 잡담을 나누던 시간이 어쩐지 길더라니만. 하릴없이 핸드폰 게임을 만지작거리는 대신 그녀를 억지로 끌고 나오는 것이 이세하에게 있어서는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야, 그런 건 나중에 인터넷에 잔뜩 올라온다니까? 뭣 하러 귀찮게 굳이 가서 그런 걸 구경해?”

이세하는 코스프레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 화면 속의 캐릭터는 화면 속에 있는 상태가 최상이며 그 외의 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인 마르시아의 코스프레 사진을 발견한 뒤로 며칠간 후폭풍에 시달린 뒤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그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지금 이 합동지를 가져가면 소품을 빌려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아.”

이세하는 기가 막혔다. 내가 약속한 것은 책의 구매까지였다, 이것은 계약 위반이다, 빨리 집에 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등등. 이세하는 귀가를 앞당기기 위해 두뇌를 총동원하여 이유를 짜내며 이슬비에게 항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핑곗거리가 떨어진 이세하는 이판사판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 몰라! 코스프레 구경은 혼자 하면 되잖아! 난 집에 간다!”
“이세하.”

이세하를 곤란으로 밀어넣을 때의 목소리였다. 이슬비가 저런 식으로 자신을 부른 뒤에는 십중팔구 실력 행사가 뒤따른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으로 알고있는 그는 황급히 핸드폰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손으로 붙잡았다. 하지만 이세하의 예상과 달리, 이슬비는 염동력을 행사하는 대신 자신이 매고 있는 이세하의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아까 빌려준 가방, 네 물건이 들어있더라?”

이세하는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가방 안에는 그가 평소에 사용하는 휴대용 게임 콘솔과 최근 플레이하던 타이틀이 들어있었다. 빠르게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 가방을 대충 건넨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이슬비의 약속에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터덜터덜 이슬비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이세하와 이슬비가 행사장을 나온 것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이슬비에게서 콘솔을 돌려받아 윗옷 안주머니에 소중히 집어넣은 이세하는 신세를 졌으니 밥이라도 사주겠다는 이슬비의 말에 그녀에 대한 작은 복수로 다소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 이세하는 할 일이 없어지자 이슬비에게 한기남이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세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슬비는 서유리 관련 상품들이 가장 잘 나간다는 부분에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유리같은 애가 인기 있구나.”
“뭐?”

별 생각 없이 이야기하던 이세하는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이슬비의 뜬금없는 반응에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이세하가 보던 그의 리더의 모습과는 신강고와 유니온 본부만큼이나 거리가 먼 반응이었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가 평소에 생각해온 이슬비의 이미지였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찾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이세하는 한기남의 부스에서 본 이슬비의 뚱한 표정을 떠올렸다.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판매대의 상품 말이야. 사람들이 유리가 그려진 물건은 두 개, 세 개씩 집어가던데.”

귀찮다. 그것이 이세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괴롭혀왔던 그녀였다. 오랜만에 클로저 일에서 해방된 만큼 조금 나사가 풀린 정도는 그도 이해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식사 중에도 이렇게 귀찮게 구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적당히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기로 마음먹은 이세하는 짐짓 눈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긴 하지. 그런데, 막상 걔랑 하루만 같이 있어 보면 절반은 넘게 도망갈 걸? 걔 성격이 어지간해야 사람이 버텨내지 않겠어?”

이세하의 농담에 이슬비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웨이트리스가 가져다준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이슬비가 한숨을 쉬었다. 평소 팀원들의 엉뚱한 행동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무거운 한숨이었다. 이상하다. 이러는 애가 아니었는데. 이세하는 자신이 또다시 지뢰를 밟은 것이 아닌지 불안해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도 유리 정도면 어딜 가도 통할만 한 애잖아? 예쁘지, 붙임성 좋지... 이것저것 말이야. 인기가 있을 만도...”
“너무 열등감 느끼는 거 아냐? 너도 학교에서 꽤 인기 있는 편인데.”

이세하가 이슬비의 말을 잘랐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남학생들이 여자 이야기를 할 때 서유리만큼이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슬비의 이름이었으니까. 평소 그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쓸데없이 떠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놓은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뭐?”
“진짜야. 다들 귀엽다고 난린데. 인형 같다고 말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슬비는 말없이 시선을 내린 채 물수건을 쥔 손가락을 놀렸다. 가늘고 모양도 잘 잡힌 손가락이었다. 평소에 큼직한 단검을 쥔 모습만을 보다가 이런 모습을 접하니 제법 색다르다는 것이 이세하의 감상이었다. 시선을 슬쩍 내려 자신의 손과 그녀의 손을 비교해보니 그 차이가 제법 크다. 거대한 건 블레이드를 쥐고 휘두르는 데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의 손등은 핏줄이 드러나고 굴곡이 심해져 제법 험하게 변한 상태였다. 반면에 염동력을 이용한 투척 공격 외에는 무기를 사용할 일이 많지 않은 그녀는 그 나잇대 소녀의 매끈한 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이슬비는 손 자체의 크기도 차이가 제법 컸다. 그가 그대로 감싸 쥘 수 있을 법한 작은 손과 얇은 손목, 그리고 좁은 어깨. 지나가듯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을 뿐이었건만, 직접 비교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이세하는 그녀가 정말로 인형처럼 느껴졌다.

식사가 나오고 그릇이 모두 빌 때까지도 이슬비는 말없이 식기를 놀릴 뿐이었다. 이세하는  드디어 찾아온 평온에 쾌재를 불렀다. 그녀의 일변한 태도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반나절 간의 고생 끝에 찾아온 휴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식사를 마친 이세하와 이슬비는 특별한 일 없이 귀갓길에 올랐다. 신강고 근처의 역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세하는 이슬비의 오늘 하루 동안의 언동을 생각했다. 이상하게 수동적이다가도 묘한 데서 억지를 부리던 행사장에서의 모습. 그리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던 식사 중의 대화. 이세하는 그녀가 자신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슬비는 오늘 하루 계속해서 그래왔듯 그보다 한 걸음 정도 뒤에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평소 작전 중에 팀원들을 이끌던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곁눈질로 뒤를 보면 평소 그녀의 태도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이슬비의 작은 체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어깨높이에 머무르는 작은 키에 위태롭고 가냘프게만 보이는 마른 체구. 클로저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 촉망받는 유소년 클로저 팀 검은양의 리더, 그리고 차원종의 대규모 습격에서 강남을 구한 영웅이라는 칭호는 이세하의 눈에 들어오는 그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그 작은 어깨로 얼마만큼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을까. 그러한 기대감의 무게를, 그리고 그 무게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세하와 이슬비의 집 사이에는 조금 거리가 있다. 둘이 각자의 길로 향해야 할 갈림길에 도달하자 이슬비는 이세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의 집을 향해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세하는 그녀가 고아임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가면 그녀는 아무도 없는 집의 불을 켜고 자신뿐이 먹지 않을 식사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아마도 그녀가 좋아하는 TV 드라마를 조금 보다가 역시 홀로 침대에 들어가 잠들 것이고, 아침에 일어난 그녀가 집을 떠나면 그 집은 텅 빌 것이다. 갑작스레 쓸쓸해 보이는 이슬비의 뒷모습에 이세하의 마음속에서 기분 나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슬비가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어머니의 얼굴을 그렇게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던지라, 돌아가면 결국 혼자인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는 혼란스러웠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세하는 아직 제법 여유가 있음을 확인하고 이슬비의 뒤를 따라갔다.

“뭐야, 이세하.”

이세하의 발걸음을 들은 이슬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세하는 짐짓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 리더님이 혼자 가는게 맘에 안 들어서.”
“게임 세계를 지키러 가는 쪽이 급한 거 아니었어?”

이슬비가 이세하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잘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변명 삼아 멋쩍게 대꾸했다.

“가끔 이런 기분도 들 때도 있는 거야.”

결국 이세하는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왔던 길을 제법 돌아와야만 했기에 이미 해가 질 무렵이 된 뒤였다. 얼마 뒤에 집으로 돌아올 어머니의 몫까지 식사를 준비하고, 끼니를 때운 뒤 그 뒷정리까지 마무리하자 그가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남지 않았다. 잠을 줄여볼까 고민하던 이세하는 당장 다음날에 검은양 팀의 회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졸린 눈으로 아지트에 들어가는 그를 덮칠 이슬비의 잔소리를 떠올린 그는 투덜거리며 게임의 클리어를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그 뒤로는 별다른 일 없는 일주일이 흘러갔다. 이슬비는 이세하의 기억이 마치 꿈이었기라도 한 듯이 평소의 깐깐한 리더로 돌아왔고, 강남 지역의 복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작전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이세하는 검은양 아지트로 먼저 돌아와 게임 콘솔의 전원을 켰다. 반 시간쯤 뒤, 이슬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평소의 조용한 입실과는 정반대인 모습에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본 이세하는 바들바들 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푸른 눈을 마주 보게 되었다.

“이세하.”

이세하는 안 좋은 예감을 느끼고는 머릿속을 다급히 뒤적였다. 최근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일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엔 작전 중에도, 또 회의 중에도 게임을 한 적이 없었고, 전날 밤새 게임을 하고는 학교에서 잠을 몰아 자다가 시뻘게진 눈으로 아지트에 들어오는 횟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어있었다. 그렇다면 이 예감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슬비는 곧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그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이거, 네가 얘기한 거, 맞지?”

이슬비가 보여준 트위터에는 한기남이 새롭게 발매한 검은양 관련 굿즈의 라인업이 리트윗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팀의 리더인 이슬비와 셜록 홈즈를 크로스오버한 상품이었다. 셜록 홈즈의 트레이드마크인 사냥 모자와 망토 달린 코트를 착용하고 돋보기를 들고 있는 이슬비의 그림과 그녀의 취미 운운하는 홍보 글귀를 발견한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 뭐라고해야 되나... 그... 미안...?”

이세하는 자신을 향해 무엇이 날아올지를 궁금해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충격에 대비하며 이세하는 내심 웃었다.

어찌됐건 그녀는, 그가 알고 있는 이슬비였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세하는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괜히 몸을 굼실굼실 움직여본다. 지금은 몇 시일까. 다른 팀원들은 자고 있을까. 의미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런 밤이 있다. 사지가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불편한 밤. 눈을 감으면 어둠이 귓가에 천둥처럼 속삭이는 밤이. 너 때문이야. 기대 이하였다. 실망이다. 목소리를 바꿔가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귓속말에 이세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와삭와삭 울리는 이불 소리에 속삭임이 잠시 물러난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일을 겪는다면 누구라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의 불운만을 저주했다. 과거에 가위눌리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겁쟁이. 겁쟁이. 어느 새 이불 속에 스며든 어둠이 그를 매도했다. 그래. 나는 겁쟁이다. 눈앞의 인적 드문 길에 겁먹어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했다. 그 길이 짐승의 길이 아니었음을, 마땅히 사람이 택하는 길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저 길은 막다른 길일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녀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거친 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그 길 끝에서 밝은 빛을 보았을지도. 그리하여 그녀가 밟은 길은 어느새 모두가 목표로 삼을 대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러지 못했어.

이세하는 이불을 걷어찼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하잘것없는 변명이라도 각주삼아 덧붙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 대면 너무도 비열한 존재였기에 그랬다.

잠을 포기하고 머리맡에 손을 뻗어 늘 그 자리에 놓여있는 게임기를 잡았다. 게임기의 전원을 켜자 그가 자주 플레이하는 게임이 실행되었다. 용사가 되어 괴물들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고, 마지막엔 붙잡힌 공주를 구해내는 흔해빠진 게임이다. 게임 속 세상에서는 모두가 그를 환영한다. 그는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한다. 어렵지 않게 공주를 구해내고, 단 한명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너는 아니잖아.

경쾌한 배경음과 함께 타이틀 화면이 출력되었다. 본래 음침했던 타이틀 화면은 그가 엔딩을 봄과 동시에 바뀌었다. 그가 마지막 적을 쓰러뜨린 그 순간, 모두가 행복해졌다. 그는 하나의 세상을 구해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현실의 파도에 휩쓸릴 따름이었다. 알파퀸의 아들, 남다른 위상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나 차원종에 맞설 힘을 가진 존재는 그곳에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이세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진작 최선을 다했더라면. 그 아이처럼, 그렇게 했더라면. 하지만 이제와선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는 시간을 의미없이 써버린 존재가 되었다. 그녀처럼은 살 수 없었다.

부러웠다. 그녀가 너무도 부러웠다. 아픔을 딛고 일어날 힘을 가진 그녀가. 자신을 불태우며 노력할 힘을 가진 그녀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 과정을, 그녀가 겪어야 했을 고통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녀를 부러워하는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쓰레기를 뒤적이는 넝마주이, 시체의 배를 파헤치는 까마귀. 그것이 이세하였다. 넝마주이에게는 멀쩡한 사지가 있었다. 까마귀에게는 하늘을 날아 먹이를 잡을 날개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찾은 곳은 결국 쓰레기장과 시체였다. 과정 없이 결과만을 노리는 기회주의자. 자신은 그런 존재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그가 생득권처럼 가지고 태어난 위상력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비겁자.

어느 틈엔가 눈가에 맺힌 물기마저 가증스러웠다. 그에겐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었다. 눈가를 거칠게 닦아낸 이세하는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게임으로 밤을 지새웠다.

'클로저스 > 분류없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방과 후.  (0) 2017.03.16
비 오는 날  (0) 2017.02.14
신강고의 밤  (0) 2016.04.30
새로운 대기실  (0) 2016.04.14
그녀의 이야기  (0) 2016.03.23

해가 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석양이 죽은 자리에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시계를 검게 물들였다. 그 어둠 속에서 의료 물품과 종이로 어지럽혀진 교실을 정리하던 푸른 머리의 청년, 아니, 소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그러모으다가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종이는 이면지였다. 알아볼 수 없는 그래프나 표가 잔뜩 인쇄된 종이를 뒤집자 ‘신강 고등학교’라는 학교명이 적힌 시험지가 얼굴을 드러냈다. 아마 교무실에서 적당히 집어온 종이일 것이다. 제 소명을 잊고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상자 속에 갇혀있던 종이. 그 뒤 영문 모를 실험에 동원되고 다시 버려진 그것에 푸른 머리의 소년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쓰레기통까지 가기도 귀찮다는 듯 종이를 구겨 내던지려던 그는 마음을 고쳐 한 장을 적당히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차원종을 치료했다는 사실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 맘바를 치료한 흔적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무기질적인 기계. 그리고 그 기계보다 더욱 무기질적인 단어를 나열하는 목소리. 평소에도 늘상 겪던 상황이었건만 이만큼이나 그를 답답하게 만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생각을 곱씹으며 주머니 속의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기계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시야에 흰 장발과 머리에서 솟아난 뿔이 눈에 띄는 소녀가 들어왔다.

“나타 님.”

나타라고 불린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소녀는 목을 움츠리며 그에게 주눅든 눈빛을 향했다.

“뭐야? 금방 끝낸다고 했잖아.”

“아뇨, 그게...”

나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처음 그녀를 만난 뒤로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을 늘이는 데에는 정말이지 신물이 났다. 나타는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감각을 애써 억눌렀다.

“젠장, 빨리 용건만 말해. 바쁘다고.”

“아, 네. 그, 트레이너님이 뒷정리는 다른 쪽에서 맡기로 했으니, 이동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잠깐 휴식을 취하시라고...”

“알았어.”

나타가 한숨을 쉬듯 내뱉자 백발의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갔다.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타는 책상에 걸터앉아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눈으로 훑었다.

그로서는 영원히 겪어보지 못할 세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는 누구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대공원에서 상대했던 자기 또래의 남성 클로저를 떠올린 나타는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과 그가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나타와 그를 나눈 기준에 논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시험지를 바라볼수록 음울한 방향으로 가속하는 의식을 되돌리며 나타는 정리해 두었던 펜을 집어 들었다. 공란으로 가득 메워져 있던 시험지에 두 글자가 적혔다.

‘이름: 나타’

그에게는 분명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흐릿한 기억을 아무리 되새겨도 그에게 주어진 이름 석 자가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지긋지긋한 두 글자가 남아 그를 구속했다.

“빌어먹을.”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다시금 떨쳐낸 나타는 시험지에 펜을 놀렸다. 답 따위는 모른다. 그저 적당히 객관식 문제의 답을 체크할 뿐이었다. 금새 칸을 채운 나타는 시험을 일찍 끝낸 학생들이 으레 그러하듯 공란에 낙서를 끼적였다. 쿠크리를 든 자신, 포장마차, 어묵이라는 이름의 음식, 자신에게 어묵을 건네주던 포장마차의 주인. 여우귀가 장식된 노란 후드를 그린 나타는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를 본 지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았을 텐데. 나타는 후드 아래를 검게 칠했다. 그녀의 기억 속 그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사라져버린 푸른 머리의 소년. 그 외에 그가 그녀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나타는 종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종이를 잡은 손에 위상력을 슬쩍 끌어모았다. 손바닥으로 분출된 위상력에 휘말린 종이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펜을 집어든 나타는 교실 구석으로 향했다.

*

“나타 님, 이동 명령이 내려왔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고있던 눈을 뜬 나타는 교실 밖에서 자신을 부른 소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달이 텅 빈 교실을 비추자 하얀 벽 한켠에 이전에는 없었던 얼룩이 드러났다.

‘나타 왔다 감’

얼마 뒤, 현장 정리를 맡은 인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벽의 얼룩을 확인한 뒤 그 낙서를 깨끗이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 다섯 글자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달빛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담담히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클로저스 > 분류없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오는 날  (0) 2017.02.14
잠이 오지 않는 이세하  (0) 2016.05.02
새로운 대기실  (0) 2016.04.14
그녀의 이야기  (0) 2016.03.23
연락처 등록하기  (0) 2016.03.21

클로저가 많이 배치되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인구가 밀집된 수도권이나 지방의 광역시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아무래도 지켜야 할 사람도 많을뿐더러, 구획 자체가 복잡해서 차원종을 조기에 발견, 격퇴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만큼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고만고만한 대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는 반대다. 클로저가 가장 많이 배치되는 곳은 유동인구가 적고 인구밀도도 낮은 지역이다. 위상력 억제기의 존재 때문이다. 무식한 나로서는 그 원리를 짐작할 수도 없다만, 어찌 됐건 이 기계를 설치하기만 하면 그 일대의 차원종 발생 위험도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억제기가 가동 중이라도 하급 차원종이 종종 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 정도는 경력 있는 클로저가 아니라도 처리할 수 있으니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렵다. 이 편리한 장비의 유일한 단점은 비용 문제다. 전력을 무진장 잡아먹는 데다가 한 대만 들이려고 해도 0이 몇 개나 붙었는지 한눈에 알기 어려운 돈이 들어간다. 그렇기에 위상력 억제기는 인구가 일정 규모 이상인 중요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한다. 다른 지역은? 클로저를 잔뜩 보내서 해결한다.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먹기는 해도 위상력 억제기에 비하면 훨씬 싼 값이니까.

우리 L팀이 배치된 곳은 그중에서도 위험한 축에 속하는 강원도 산간지방이다. ‘시골’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그런 곳 말이다. 해가 지면 사방이 컴컴해지고, 기분이 꿀꿀해서 술이라도 마실까 하고 괜찮은 주점을 찾으려니 읍내까지는 한참을 나가야 한다. 사이킥 무브를 쓰면 안 되냐고? 돌아올 땐 어쩌고? 나는 취한 채로 위상력을 사용하다가 착지 실수로 병원에 실려 간 클로저가 되어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기는 싫다.

갑자기 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느냐 하면, 우리 팀원들이 정말 죽도록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이런 험지에 발령된 새 리더가 한동안 온갖 상상과 추측의 대상이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젊고 유능한 리더에게 신경 쓰이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팀원들은 당연하게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점에선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고로, 예의 옛 동료가 방문한 이후 내게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리더의 책상에 있는 달력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보통은 별다른 소득이 없다. 그의 달력에는 대개 잡다한 업무 관련 일정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4월이 되는 순간 그 달력에 특기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 4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4월 30일에 또다시 붉은 원이 그려진 것이다. 저번에 붉은 원이 그려진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번에도 제법 기대해볼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다른 팀원들 역시도 여기에 열렬히 동의했고.

문제는 그 날이 도대체 무슨 날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원 외에는 달력에 따로 적힌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저번에도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누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었다. 게다가 이번 연도의 4월 30일은 주말이었다. 그가 굳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이상 우리로서는 그가 그 날에 무슨 계획을 잡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심심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팀원 중 하나가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우리를 만족시킬만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개인적인 일이라나, 뭐라나. 아니, 누가 그걸 모를까보냐. 훤히 보이는 달력에 눈에 띄는 붉은색으로 떡하니 원을 그려놓은 쪽이 잘못이지.

결국, 그는 그 뒤로 계속해서 질문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팀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에게 그 일정에 대해 질문했다. 직접적으로 물어보거나, 아직 몇 달은 남은 휴가 시즌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뜬금없이 화살을 돌려보거나, 마지막 주 주말에 술이라도 한잔 꺾지 않겠냐고 에둘러 물어보거나, 기타 등등.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4월이 절반 이상 지난 뒤에도 30일의 계획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동안 나는 그런 모습을 즐겁게 구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일정이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팀원들의 바보짓에 그가 곤란해 하는 모습도 내게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

오늘도 어제를 똑같이 붙여넣은 듯한 오전이 지나갔다. 적당히 점심을 해치우고 사무실 건물 앞 쉼터에서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중 내 옆자리에 누군가가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민에 찬 리더의 얼굴이 보였다.

“어라, 이세하 씨. 웬일로 점심시간에 여길 다 나오셨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점심시간에도 끼니를 때우고 나면 사무실에 처박혀 업무와 씨름하기 일쑤였으니까. 이 시간에 쉼터에서 그를 본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별것 아닙니다. 그냥 좀 고민하던 일이 있어서요.”

머릿속에 그의 달력과 4월 30일이 스쳐 갔다. 이 시간이면 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 터인데도 굳이 이곳으로 나온 것을 보건대, 한 번쯤 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단 한 대 피겠습니다. 냄새 싫으실 텐데 잠시 실례 좀...”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여기서 피세요.”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나를 멀뚱히 보고 있는 리더의 모습이 제법 재미있다.

“이세하 씨, 담배 안 피우죠? 이런 거 피지 마요.”
“담배 피우시는 분들은 늘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하, 그런가요.”

다시 한 번 연기를 푹 내뱉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시간도 별로 없는 판에 뭘 이렇게 빼는 건지. 귀찮아진 나는 그냥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그래서, 뭐가 묻고 싶은데요?”

내 질문에 그의 표정이 제법 다채롭게 변한다. 이럴 때는 정말 영락없이 제 나잇대의 청년이다.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는지. 싫다는 건 아니지만 뻣뻣한 자세는 좀 풀어줬으면 한다.

“K 씨한테는 정말이지 당할 수가 없네요.”
“그 얘기 몇 번은 들었어요. 본론으로 넘어가죠. 시간도 별로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른 팀원들이 들었으면 환호성을 내질렀을 대답을 내놓았다.

“생일 선물을 준비 중입니다.”

*

몇 번을 캐물은 결과, 예의 그 동료의 생일이 4월 30일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여성의, 그것도 좋아하는 여성의 생일 선물이라, 과연 청춘이구만. 내 감상을 들은 리더는 극구 부인했다. 그의 귀가 불이라도 붙은 마냥 새빨개졌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선물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에이, 잘 아시는 분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뭐랄까, 생각나는 물건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녀의 취미는 드라마 시청이라고 한다. 방에 가면 ‘명작’ 드라마의 블루레이 디스크가 책장을 점령하고 있다나. 20대 초반의 여성치고는 제법 고전적인 취미라고 할 만하다. 그쪽에는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디스크를 쌓아놓는 것 자체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만, 남의 취미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아무튼, 그런 수집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 새 수집품을 선물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이해는 간다.

“그래도 이세하 씨가 선물해준 물건이니만큼 각별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하하.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니라서 말이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는 소리가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집어넣었다. 평소에도 숫기가 없는 편이라고 생각을 하긴 했다만,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좀 해줬으면 한다. 이쯤 되면 웃기도 힘들다.

“그럼 적당히 비싼 물건 해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될까요?”

될 리가 있나. 속이 답답해져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기로 했다. 말없이 담뱃갑을 꺼내는 내 모습에 리더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에 대해 도통 정보가 없는 나로서는 작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추천을 해줄 수 없다면 아닌 것부터 솎아내면 알아서 하겠지.

“화장품은?”
“뭘 쓰는지를 모릅니다. 애초에 화장품이라고 해봐야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요.”
“옷이나 장식품은요?”
“취향을 모르니 제가 막 사주기는 좀 그렇군요.”
“구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순조로운 편이다. 내가 받는 입장이라도 저런 물건을 말도 없이 갑자기 사 들고 온다면 심란할 테지.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덥석 받아들였다면 곤란할 뻔했다.

“핸드백 어때요, 핸드백! 여자는 일단 백 선물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요?”
“...K씨, 진지하게 말씀드리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 세하 씨, 뭘 모르시네!”
“아뇨, 아무리 생각해도 백은 아닙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연애치는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다. 최소한 저쪽이 뭘 싫어하는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함께 활동한 시간이 몇 년이니 오죽하겠냐만. 머릿속이 아예 빈 건 아닐 테고, 주고 싶은 선물은 정해졌지만 확신이 없는 쪽일 것이다. 아마 내가 더 나설 필요도 없겠지. 필터까지 타들어가기 직전인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는 교통정리를 해주었다.

“거, 선물은 벌써 정해놓으신 거 아니에요?”
“예?”

그는 내 질문에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자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떠오른 게 있으신 모양인데, 그대로 가요.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생각해준 물건보다, 이세하 씨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선물 쪽을 훨씬 기뻐할 겁니다.”
“그럴, 까요?”
“그래요. 그리고 같이 사진이나 한 장 찍어서 보내요. 이만큼 도와줬으니 나도 구경이나 좀 합시다.”

내 말을 들은 리더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이쯤 되니 재미보다는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부터가 당장 상대가 없어서 곤란한 판인데 남의 연애전선까지 참견을 해줘야 한다니, 어이가 없다. 나는 누가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 없으려나?

마지막으로 한 대만, 한 대만 더 피우고 들어가도록 해야겠다.

*

시간은 지나 5월 첫날이 왔다. 리더와 나는 비번이었고, 나머지 팀원들은 아마 옷도 대충 차려입은 채로 출근해 휴게실에서 뒹굴뒹굴하며 주말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굉장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위치만 내 방으로 바뀌었을 뿐, 나도 똑같이 의미도 뭣도 없는 주말을 보냈다. 젠장, 솔직히 말해, 리더가 부럽다.

쉼터에서의 대화 뒤에도 팀원들의 질문공세는 계속되었다. 물론, 그의 철벽 수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답을 캐내려고 하는 팀원들과, 거기에 노코맨트로 일관하는 하는 리더의 모습은 남은 4월을 즐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4월이 끝난 오늘까지도 리더의 주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팀원 중 하나가 그 사실을 알고는 내게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해도 그다지 할 말은 없었다. 그냥 지금의 상황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미묘한 감각을 표현하기엔 좀 부족한 설명이었다. 결국, 나는 이유도 모른 채로 벙어리가 되어 팀원들을 구경해야만 했다.

지금은 또다시 점심시간이다. 나는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쉼터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인터넷 대신 사진 앨범을 보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 휴대폰 화면에는 분홍빛 머리의 여성, 그러니까 이슬비 양과 리더가 어색한 표정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 레스토랑이라도 예약해뒀던 것인지 사진 한구석으로 식기가 살짝 비쳐 보였다. 좁아터진 시야의 핸드폰 카메라로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니만큼, 둘은 거의 밀착하다시피 한 수준으로 붙어있었다. 사진 이야기를 할 때 이 점을 노리긴 했다만 정말로 찍어서 보낼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이 사진을 찍은 것인지, 원.

정복과 사복의 차이를 제외하면 그녀는 예전에 처음 봤을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그녀의 한쪽 머리를 묶은 검은 리본 정도일까? 이미 사회의 한 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성인 여성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머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에 한해서는 어색한 부분 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진과 함께 온 메시지에는 조언에 대한 감사와 함께 생일선물이 그 리본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예전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나. 왜 굳이 예전에 있었던 리본을 또 선물하는지 나는 모른다. 거기에 대해서는 그 둘이 잘 알 테고, 나는 굳이 참견하지 않을 셈이다.

사진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보니 내가 다른 팀원들에게 그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를 대충 알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이 잘 어울리는 커플을 방해하지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팀원들이 그녀의 생일에 대해 알게 되어 왁자지껄 떠드는 걸 지켜보는 것 보다는 이 둘이 어색하게 마주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편이 즐겁다. 나머지 팀원들에겐 조금 미안하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맙소사, 이런 식의 생각을 할 나이는 아직 되지 않았을 터인데. 이 둘의 조합은 정말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젠장,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려온다. 담배나 한 대 더 피워야겠다.

'클로저스 > 신참 리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더가 아닌 리더  (0) 2016.03.21

꿈에서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꿈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의 지각을 전제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지각하는 ‘나’가 사라진다면 세계는 더는 존속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꿈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꾸고 싶지 않은, 그래서 끝내고 싶은 꿈속에 갇혀버렸다면, 높은 곳을 찾아가 뛰어내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세하는 최근 매일 밤 꿈을 꾼다.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 그가 매일 아침 컬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이야기를. 꿈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발현된 위상력을 저주하던 시절, 이세하는 그러한 꿈을 셀 수도 없을 만큼 꾸곤 했다.

 

하지만 그가 최근 꾸는 꿈은 과거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같은 꿈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점이 그랬다. 매일 밤,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면 그는 꿈속의 이세하가 되어 꿈속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그리고 꿈속의 평범한 이세하가 일과를 마치고 잠에 빠지면 그는 다시 클로저 이세하가 되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세하는 그 꿈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고 하는 쪽이 옳았다. 꿈속에서 그는 친구가 많은 편이었고, 점심시간이면 그들과 함께 축구공을 차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완벽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꿈속의 이세하는 과거의 그가 늘 동경해왔던 모습이었다. 두 사람분의 인생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피로해질 만도 했건만, 이세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이세하는 자기 전의 게임 플레이를 조금 줄이고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오늘의 꿈은 어떨까, 하고 기대하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꿈속에서 검은 머리의 이슬비를 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이세하, 듣고 있어?”

 

눈을 감은 채 상념에 빠져있던 이세하를 익숙한 목소리가 현실로 건져 올렸다. 눈을 뜬 이세하는 낯선 곳에서 잠을 청했던 여행자처럼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떠올려야만 했다. 이곳은 검은양 사무실. 시간은 아침. 서유리와 미스틸테인은 경계근무 중. 그와 제이는 이슬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일과 시작 전에 그녀를 따라 이곳에 왔다. 머리에 금세 떠오른 정보들과 달리 현실감은 조금 늦게 부상했다. 부유하는 현실감에 기대어 정신을 차리자,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한창 오늘의 일정에 관해 설명하던 이슬비가 그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딴생각을 좀 하느라.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의 반응을 본 이슬비는 여보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동생, 밤샘게임은 좀 줄이라고 했잖아.”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이가 볼펜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이슬비가 제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보다 제이 씨, 앞에 놓인 신문의 십자말풀이가 점점 완성되어가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이겠죠?”

 

아닌 게 아니라, 제이의 앞에 펼쳐진 신문의 십자말풀이는 어느새 완성까지 세 문제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30분쯤 전, 그를 처음 볼 때만 해도 그것이 새 신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세하는 그가 어느 틈에 그 칸을 다 채운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이는 비뚤어진 선글라스를 바로잡으며 그녀에게 변명했다.

 

“윽, 아니, 대장. 그게, 빈칸이 어서 나를 채워달라고 유혹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제이 씨. 저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슬비와 제이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자 이세하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둘의 대화가 이세하의 귀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반대편 귀로 흘러나갔다. 제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슬비의 분홍빛 머리에 꿈속 그녀의 검은 머리가 겹쳐 보였다. 이세하는 괜스레 손을 들어 잠을 깨우는 양 얼굴을 비볐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었다. 이슬비가 속사포처럼 내뱉는 지적사항에 난타당하던 제이가 테이블 아래로 이세하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시야를 가리는 손을 내리고 제이 쪽을 보려던 이세하는 어느 틈엔가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제이를 향해 서 있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그간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이는 이슬비의 눈에 띄지 않게 손을 움직여 사무실의 출입문을 가리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와.’

 

그녀가 늘어놓는 잔소리에 점점 매몰되어가는 제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세하는 그에게 손을 들어 감사를 표하고는 검은양 사무실을 슬쩍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

 

그늘진 비상계단에서 받는 바람은 시원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멍하니 난간에 기대어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이세하의 귀로 이런저런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운행 중인 버스 소리, 공사장에서 울려 퍼지는 중장비의 소리, 등교 중인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꺅꺅거리는 소리. 여느 때였다면 자신의 손으로 지켜낸 강남이 다시금 생기를 찾아가는 모습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세하는 그로부터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과연 이것이 현실일까. 스스로 질문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세하야.”

 

어느새 그를 따라 나온 이슬비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의 그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왜 나왔어. 금방 들어갈 텐데.”

 

이세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녀의 푸른 눈에 암갈색 빛이 겹쳐 보이는 순간, 그의 세상은 발아래부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너, 요즘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이세하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왔다. 평소에도 그녀가 너무 많은 걱정을 안고 산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마저 걱정하려 드는 그녀가 미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또 다른 걱정을 안겨주고야 만 자신도.

 

“모르겠어.”

 

이슬비가 힘없이 말했다. 이세하는 당장 돌아서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기는 괜찮다고, 그냥 묘한 꿈 때문에 잠시 이상한 기분이 되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세하는 그녀를 마주 보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네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럴지도 몰라.”

 

이세하의 입에서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실수였다. 등 뒤에서 이슬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로 말을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세하는 억지로 입을 움직였다.

 

“슬비야. 혹시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차원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 안 해봤어?”

 

그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이슬비는 뚝뚝 끊어진 답을 내놓았다.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대답에, 그리고 그 대답 사이에 무겁게 걸친 휴지(休止)에 개미처럼 짓눌려 뭉개졌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상황에서도 앞을 보고 계속해서 달려온 그녀는 어떤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음, 해봤지. 아마 바이올린을 계속 배우지 않았을까. 그땐 콩쿠르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 어머니께서 소리가 참 곱다며 칭찬해주시는 게 그렇게 기뻤는데.”

 

그녀의 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와 몸통, 그리고 사지가 모두 멀쩡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녀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말에는 생기가 없었다.

 

바이올린이 특기인 이슬비. 처음 들었을 때는 특기 난에 게임을 적은 자신과의 차이에 놀란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들으니 새삼 무거운 이야기였다. 그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존재인 그로서는, 무엇을 하더라도 그녀의 짐을 덜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세하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

 

수많은 위로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하지만 이세하는 그중 자신이 꺼낼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

 

그날 밤, 이세하는 학교의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검은 머리의 이슬비를 보았다. 전후 관계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그녀가 모 콩쿠르에서 입상한 기념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쪽 세상의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행복한 그녀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니 그 역시도 행복했다.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와 가족과 포옹하는 그녀에게서는 빛이 흘러넘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세하는 어두운 객석에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검은양 팀의 리더인 그녀를 볼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드러난 것 같아 서글퍼졌다.

 

무대가 끝난 뒤 이슬비는 가족들과 함께 학교를 나서는 듯했다. 왁자지껄 떠들며 강당을 나서는 인파 사이에 끼인 채, 이세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이세하는 그것이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를 불러볼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이쪽의 이슬비는 이세하를 알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와 그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인 검은양 팀은 그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세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애초에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그녀가 그를 만나게 된 세상 쪽이,

 

더욱 비정상인 것이 당연했다.

 

이세하는 행복으로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

 

이세하는 며칠간 계속해서 고민했다. 본디 그는 문제에 당당히 마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넘기 어려운 벽이 앞을 가로막으면 그 벽을 넘을 궁리를 하기보다는 우회로를 찾거나 그 길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그의 행동양식이었다. 그렇기에 20년 가까이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한 주제를 이토록 길게 고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세하는 마음을 굳혔다.

 

며칠 뒤, 늦은 저녁, 이세하는 검은양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옥상에서 이슬비를 기다렸다. 빡빡한 팀 리더의 업무량에 더해 관리요원인 김유정의 일까지 돕고 있었으니 그녀가 퇴근이 늦는 것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몸을 혹사하는 그녀에게 걱정 섞인 핀잔을 건네곤 했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늦은 퇴근이 반갑게 느껴졌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보름달이 걸려있었다. 신호등처럼 붉은 기운이 도는 달이었다. 그런 달이 그에게는 세상이 보내는 경고로 보였다. 그곳에서 정지. 건너지 마시오. 이세하는 그 경고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왜 불렀어?”

 

일이 마무리되었는지 옥상으로 올라온 이슬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꺼내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와글와글 아우성쳤다. 혼란스러워진 그는 엉망진창이 된 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슬비야, 만약에...”

 

그의 목이 턱 막혀왔다. 그가 감히 꺼내기엔 너무도 무거운 이야기였다. 답답해진 이세하는 넥타이를 대충 끌러 내던졌다. 이세하는 속으로 되뇌었다. 되돌리기엔 늦었어.

 

“만약에, 돌아가신 부모님이랑 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도한 질문이 이슬비를 후려쳤다.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흐릿한 달빛만이 유일한 광원인 옥상에서도 이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이슬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장난치는 거야?”
“진지하게 들어줘.”

 

말도 안 되는 비교란 것은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연인도 뭣도 아니다. 그냥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의 팀원일 뿐이었다. 그 둘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헛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냥 ‘예.’, ‘아니오.’로 대답만 해줘. 내가 사라지고 대신 너희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너는 그렇게 할 거야?”

 

비겁한 질문이었다. 그 아닌 누구라도, 그리고 몇 번을 묻더라도 그녀는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쭉 그녀를 보아온 이세하는 그 사실을 자기 일인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세하가 들으려고 하던 것은 그녀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고마워.”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대답하기 전의 침묵이었다. 그래서 이세하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 그대로 옥상 아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이슬비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세하는 몸에 둘러쳐진 위상력을 의식적으로 해제했다.

 

그녀에게 남긴 감사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세하는 진심으로 이슬비에게 감사했다. 목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흑백사진 같았던 그의 삶에 색채를 되찾아주었다.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던 과거에서 그를 자유롭게 했다. 새로운 목표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중한 가족과 자신을 저울질해주었다. 이세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잠에 들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이슬비를 멀리서 조용히 지켜볼 것이다. 아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너를 가까이에서 봤으면. 이세하의 머릿속에 아쉬움이 스쳐 갔다. 그것도 잠시, 충격과 함께 이세하는 의식을 잃었다.

 

*

 

눈을 뜬 이세하의 시야에 낯익은 천장이 들어왔다. 그가 일과 뒤에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방이었다. 아침이 되었는지 창밖에서 햇빛이 들어와 시야는 밝았다. 이불 아래로 손발을 움직여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몸을 일으켰다.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이래서는 자신이 지금 어느 쪽 세상에 있는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는 생각에 이세하는 집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고 두 발로 서려던 이세하는 발아래에서 딱딱한 바닥 대신 다른 것이 느껴지자 당황했다.

 

“크헉.”
“아저씨?”
“이, 일어났어, 동생?”

 

예상 밖의 목소리에 시선을 내린 이세하는 그에게 허리를 밟힌 채 몸을 떠는 제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다시 침대에 앉았다. 아무래도 바닥에 누워 있었던듯 했다.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이세하의 목소리가 음침해졌다. 그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일이 그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제법 아프다는 듯 허리를 쿵쿵 때리며 자리에 앉은 제이는 그에게 한숨을 쉬어보였다.

 

“왜겠어? 동생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서 그런 거잖아.”
“제가 왜 살아있는 거죠.”

 

이세하의 질문에 제이는 이세하의 얼굴에 시선을 향했다. 제이는 평소의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채였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이세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듯한 그 눈빛에 이세하는 그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네?”

 

이세하는 그의 질문에 놀라 침대 위에서 몸을 튀겼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 역시도 예상 내였던 것인지, 제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동생은 꿈에 간섭하는 차원종의 영향을 받았어.”

 

*

 

차원종이 위험한 것은 단순히 힘이 세고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기괴한 생물들 중 적지 않은 종류는 인간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차원종의 정신간섭은 그러한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들을 잔인하게 괴롭혔다. 제이는 그 어떤 공격에도 굳건할 것 같았던 이들이 이러한 공격에 너무도 간단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이세하가 영향을 받은 차원종 역시도 그러한 개체 중 하나였다. 행복한 꿈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목표물을 피폐하게 만드는 존재. 하지만 그뿐이었다.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가벼운 우울증과 비슷한 증세로 일시적으로 몸져눕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희생자를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아예 정신을 파괴하여 폐인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던 다른 차원종에 비하면 무해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제이는 이세하의 상태를 파악했어도 거기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상태에 대해 팀의 리더인 이슬비에게 이야기하기는 했다. 이세하가 정 힘들어한다면 그 건을 핑계로 그간 고생한 보상을 겸해 며칠 정도 휴가를 주기라도 하면 그만이라는 첨언과 함께. 며칠 전, 이세하를 비상계단으로 내보낸 뒤 제이가 이슬비와 단둘이 남았을 때가 그때였다.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세하가 그가 생각한 만큼 정신이 굳건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세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간의 그의 상태를 확인한 결과를 바탕으로 제이를 대기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슬비였다. 제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미안해, 동생. 괜한 고생을 시켜서. 대장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했어.”

 

이야기를 마친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에게 사과했다. 그의 설명을 모두 들은 이세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다시 앉혀놓았다.

 

“제가 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건 맞지. 차원종에게 당했으니까. 그런데, 동생?”
“왜요?”

 

그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빛이 음흉해졌다. 이성 문제로 이세하를 놀릴 때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꿈에 뭐가 나왔어?”
“...그걸 꼭 말해야 돼요?”

 

평소 그에게 여러 번 당해온 전적이 있는 이세하는 절대로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차원종의 영향하에 있었다고는 해도 자신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세하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의 반응을 본 제이는 묘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아냐, 안 해도 돼. 그보다, 슬슬 긴장하는 게 좋지 않겠어?”
“왜요?”
“곧 대장이 네 식사를 들고 들이닥칠 거거든.”

 

제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발칵 열렸다. 이슬비가 그가 곤란할 때를 노리는 데에는 귀신임을 익히 알고 있던 그였지만, 이쯤 되면 뭔가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 동생. 대장도.”

 

이슬비와 교대하듯 방을 나서며 제이가 그를 놀리듯 말했다. 방으로 들어온 이슬비는 쿵쿵 소리가 날 법한 발걸음으로 그의 방을 가로질러 책상 위에 식사를 올린 쟁반을 내려놓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세하, 너...!”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려던 이세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이슬비는 그런 그의 고개를 억지로 숙이게 하고는 그의 어깨를 투닥투닥 때려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세하는 어깨를 두드리는 그녀의 주먹 한 대 한 대가 온 힘을 담은 차원종의 일격보다 아프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시끄러. 넌, 늘, 제멋대로야!”
“내가 잘못했어.”
“구로에서도, 강남에서도, 늘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윽.”

 

그녀가 과거의 일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이세하는 입이 턱 막혀버렸다. 이슬비가 한 마디씩 쏘아 보내는 원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상능력자도 막아낼 수 없는 화살이 되어 그를 꿰뚫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주먹을 얻어맞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제이 씨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어...”

 

그의 어깨를 때리던 손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탁해졌다. 이세하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제에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니,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바보야.”
“정말로, 미안해.”

 

*

 

그 뒤로도 한동안 이슬비는 그를 때리면서 그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았다. 이슬비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자 기운이 쭉 빠져버린 이세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녀가 가져온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분이 금세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아침 식사는 많이 식어있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이세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정말 무슨 꿈을 꾼 거야?”

 

맙소사. 이세하는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방문 앞에서 그와 제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이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어, 말 안하면 안 될까?”
“응. 안 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피해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세하는 생각을 바꿨다. 그녀는 그 질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답을 들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꿈에 대해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의 말에 이슬비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이 소녀에게 이길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신강고등학교 2학년 서유리를 아는 이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한 가지 의견은, 그녀가 일반적인 남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인간적으로 결격사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외모는 TV에서만 볼 수 있는 소위 아이돌들의 그것과도 비견해도 손색이 없었다. 거기에 모나지 않고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격이기까지 했으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고 할만했다. 하지만 남자나 다름없는 그녀의 평소 행동거지를 본 사람들은 대개 마음속에서 그녀의 등급을 신경 쓰이는 이성에서 좋은 친구로 격하시키기 마련이었다.

 

서유리 본인 역시도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자신은 머리도 나쁘고, 분위기도 잘 못 읽는다. 소꿉친구인 우정미도 그녀를 종종 아저씨 같다고 이야기할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남성들이란 으레 자신이 지켜주고 싶어지는, 그러니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땀내-그녀의 경우는 호구 특유의 냄새도-나는 운동계에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억척스러운 면이 있는 자신보다는, 클로저 활동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팀 리더 이슬비나 강남사태 당시 만난 오세린이라는 선배가 남성들에게 더 인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서유리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대담한 시도를 한 것은 클로저 정식 요원복을 지급받는 과정에서였다. 보급품 품목을 대강 훑어보던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짙은 커피색 스타킹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얼마 전 놀러 간 이슬비의 집에서 본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었다. 빠릿빠릿한 일처리가 자랑인, 소위 말하는 ‘유능한 사무원’ 스타일.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녀가 양복과 함께 신는 스타킹이었다. 한 번 기억 속에 박혀버린 이미지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맴돌았다. 서유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요원복을 수령해왔다.

 

그날의 복구 작업 지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서유리는 자신이 수령한 요원복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다. 처음 신어보는 스타킹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이게... 나야?”

 

평소의 다소 흐트러져 보이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여성이 한 명 서있었다. 꼭 맞는 검은 수트에 단정한 넥타이와 포인트를 잡아주는 푸른 스커트. 거기에 처음 신는 스타킹에 꼭 어울리는 롱부츠는 그녀의 긴 다리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잠시 넋을 놓고 거울을 보던 서유리는 이 옷을 수령한 것을 자찬하며 들떠 있다가 잠을 청했다.

 

딱히 그녀의 일상이 그날부터 마술처럼 180도 반전한 것은 아니었다. 학우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좋은 친구’나 ‘착한 누나’등에 가까웠고, 그녀의 행동거지 역시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원복을 입고 클로저 활동을 하고 있으면 서유리는 자신과 예의 기억 속 사무원을 어느 정도 동일시할 수 있었다. 복구 작업은 순조로웠고, 이전 강남 사태 때는 물론이고 학교나 구로역에서 차원종과 싸우던 때와 비교해도 상황은 점점 호전되고 있어 위험한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을 쉴 때면, 뿌듯한 기분이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

 

“유리야, 잠깐만.”

 

이슬비가 작전 종료 후 땀을 닦아내던 서유리를 잠시 불러 세운 것은 그런 나날 중 하루였다. 그녀는 구슬땀이 맺힌 서유리의 이마를 잠시 바라보았다.

 

“응? 왜, 슬비야?”

“몸이 안 좋거나, 피곤하거나 하진 않아? 요즘 날씨도 점점 더워지는데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은 어느덧 초여름이라고 해도 좋을 때가 되어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차원종 잔당을 처리하다 보면 몸은 어느새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고, 그런 상태로 퇴근 시간이 되어갈 때 즈음이면 샤워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비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징후를 느낀 적은 없었다.

 

“괜찮은데? 나, 검도할 땐 이거보다 훨씬 힘들었어. 몸만 움직여도 지치는데 검도부는 완전 찜통이고, 거기에 호구 생각만 하면... 아휴...”

“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이슬비는 서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리 쪽을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미간을 약간 찌푸린 것이, 뭔가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유리야, 그, 옷 말인데...”
“응? 이거 왜?”
“그 요원복, 덥지 않아? 땀이 찬다던가...”

 

서유리는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옷이 뭐 어때서? 서유리는 의문의 시선으로 이슬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다리 쪽을 향해있었다.

 

“옷? 괜찮은데? 왜 그러는데?”
“음... 아냐. 괜찮다면 됐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봐.”

 

서유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잠시간의 생각 끝에 한 생각은 역시 자신은 이런 고민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는 결론을 내린 뒤 그녀는 웃으며 이슬비를 껴안았다. 이슬비의 얼굴은 금세 당혹으로 물들었다.

 

“에이, 우리 슬비는 걱정도 많아! 뭔진 모르겠지만 괜찮아, 괜찮아!”
“아니, 잠깐. 유리야!”

 

이슬비의 반응을 보면서 깔깔 웃으며 서유리는 생각했다. 별 문제 없을 거야.

 

*

 

하지만 며칠 뒤, 서유리의 생각은 틀렸음이 드러났다. 그녀에게 있어서 최악의 방식으로. 그 시작을 알린 것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서유리를 맞아준 그녀의 동생이었다. 부츠를 벗고 집안에 들어온 그녀를 반기러 나온 동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나, 냄새나!”
“응?”

 

서유리는 당황했다. 작전중에 묻은 차원종의 피가 아직 배어있는 걸까? 서유리는 동생처럼 코를 킁킁대보았지만,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라 이미 적응이 된 것인지 별다른 냄새를 맡지는 못했다. 차원종의 체액이 일반인에게 위험할 수 있다며, 일과 종료 후 장비수입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파하던 이슬비가 생각난 서유리는 재빨리 몸을 둘러보았지만 신통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서유리는 동생의 어께를 붙잡고 직접 질문했다.

 

“무슨 냄새? 이상한 비린내 같은 게 나니? 역한 냄새야?”

 

동생은 고개를 젓고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맡은 냄새를 표현할 단어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뒤, 동생은 이거다, 싶은 단어가 생각난 듯 얼굴을 확 펴고는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빠 발 냄새랑 똑같은 냄새 나!”

 

*

 

“그래서, 나한테 약을 받았으면 한다?”

 

제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평소 약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던 그녀가 이런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리라곤 제이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제이는 손가락 사이로 서유리를 훑어보았지만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일 뿐, 그로서는 어디가 문제인지, 무엇이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옷을 제외하고는.

 

“그러고 보니 유리야, 그 옷은 오랜만이다?”

 

서유리가 입고 있는 옷은 한 달 넘게 계속해서 봐와서 익숙해진 정식 요원복이 아닌, 처음에 지급받은 검은양 팀의 요원복이었다. 서유리가 정식 요원복을 썩 맘에 들어 한다는 것을 그간 익히 봐와서 알고 있었던 제이는 그녀가 왜 옷을 바꿔 입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 저어, 그게 있잖아요, 아저씨...”
“오빠라니까.”

 

제이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 사람 말 안 듣는 아가씨는 처음 볼 때부터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굳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마저도 ‘아저씨’라는 호칭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자신이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일까, 하고 제이는 잠시 울적해졌다.

 

“아니, 어쨌든 그건 됐고. 무슨 약이 필요한건데? 어디 다쳤어? 자, 자. 이 오빠한테 말해 보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이는 서유리가 답답해진 제이가 캐물었지만 서유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진 제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서유리를 달래는 작업을 시작했다. 몇 분 뒤, 모기 목소리로 대답하는 서유리의 요구를 들은 제이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만지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좀약을 달라고?”
“아저씨, 목소리가 크잖아요!”

 

서유리가 빽 고함을 질렀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재해복구 본부의 한가운데였고, 시끄러운 장비 가동음을 뚫고 우렁차게 울려퍼진 서유리의 고함소리는 주변에서 쉬고있던 특경대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서유리는 얼굴에만 때이른 가을이 온 양 다시금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 참... 뭐라 해야되나...”

 

제이는 난감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위로할 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건만, 이런 식으로 개인의, 그것도 다 큰 여성의 치부를 듣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럴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가. 제이로서는 자신은 받아본 적도 없는 압박 면접이 이런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눈앞에 서있는 서유리의 어께가 조금씩 떨리며 들썩거리는 것이, 우물쭈물하다가는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제이를 더욱 압박해왔다.

 

“일단, 지금은, 그 뭐냐... 약, 없으니까... 끝나고 나면 우리 집으로 가자. 응? 진정하고, 유리야. 제발 부탁이다.”

 

이미 부끄러움이 임계점을 넘었는지 서유리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런 서유리의 양 어께를 붙들고 이야기하는 제이의 뒤통수를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난타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 한 이 꼴을 대장이 봤으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잡생각이 제이의 머리를 잠시 스쳤다.

 

*

 

“이거 참. 좁고 더러워서 미안하구만. 일단 들어와.”

 

제이의 집은 좁은 옥탑방이다. 제이는 전쟁 기간 동안 군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기도 했고 실험 때문에 연구소에서 살았던 적도 있어 나름 깔끔한 성격이었지만, 최근 바쁘기도 했고 꿈자리도 사나워 자기 전에 술 한 잔이 습관이 된 탓에 방 여기저기엔 맥주 캔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발로 빈 캔을 밀어내 대충 앉을 자리를 만들고 서유리를 앉힌 제이는 침대 밑에서 구급상자를 잔뜩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게 어디로 갔지...?”
“...없는 거 아니에요?”

 

등 뒤에 서유리가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우울한 모습으로 앉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제이는 자신이 아무렇게나 뒹굴던 집이 가시방석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약상자를 평소에 좀 정리해놓을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제이를 짓눌렀다. 워낙 독하다 보니 자신은 잘 쓰지 않는 약들이라고 구비만 해놓고 어딘가에 처박아놓은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십여분이 지나고 방이 수많은 약병으로 약국을 방불케하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나서야 제이는 겨우 무좀약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유리야! 찾았어!”

 

어울리지도 않는 호들갑을 떨며 제이가 약을 치켜들고 뒤를 돌아보자,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묻은 채로 앉아있던 서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거, 예요?”
“그래. 이건 먹는 약이고 이건 바르는 약이야. 일단 둘다 줄 테니 일단 챙겨. 바르는 약부터 써봐.”

 

제이의 말을 들은 서유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이거 바르면 바로 나아요? 곧바로?”
“아니, 이거 작전용 회복약같은거 아니니까...”
“고마워요, 오빠! 가서 이거 발라볼께요! 동생들 밥 때문에 저 빨리 가볼게요! 내일 봬요!”

 

당황한 제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서유리는 문을 열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계단을 급히 내려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내일 아침에 주인집에게 한 소리를 들을 듯 했다. 지금의 모습을 보건대, 아마 서유리는 저 약의 효과를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짜 싸움은 내일부터이리라. 제이는 머리를 긁으며 책장을 뒤적였다.

 

“여기 어디에 신문 스크랩을 해둔 게 있을 텐데...”

 

*

 

다음날, 꼼꼼하게 약을 바르고 잤건만-당연하게도-차도는 없었고, 클로저 일이 비번이었기에 서유리는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채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저씨... 좋은 약은 자기가 다 먹고는...”

 

자신에게 자신만만하게 약을 내주던 제이의 얼굴을 떠올린 서유리는 짜증이 치밀었다. 서유리가 투덜거리며 약을 꺼내던 차에 벨이 울렸다. 약을 책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커다란 가방을 맨 제이가 서있었다.

 

“안녕.”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제이를 보자 서유리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전날 밤에 기분좋게 들어와 기대에 부풀어 약을 바르고 잤던 자신을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짜증이 치밀었다.

 

“뭐, 유정 씨한테 물어봤지. 너희 집 찾기 정말 힘들더라.”

 

한밤중에 전화해 서유리의 집을 묻자 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목소리가 차가워지던 김유정의 반응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제이는 잠시 오한을 느끼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다 뭐고요?”
“별건 아니고. 도와주는 김에 확실히 도와주려고.”

 

제이가 아래, 정확히는 서유리의 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양말을 신은 채였다. 제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서유리의 눈이 자신의 발에 닿자 서유리는 발칵 화를 냈다.

 

“아저씨가 안 도와주셔도 되요!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요! 약도 효과도 없던데요, 뭐!”

 

제이는 헛웃음을 쳤다. 어쩌면 이 아가씨는 어제 예상이랑 한 치도 다르지 않을까.

 

“아니, 어제도 말했지만 그 약은 그냥 평범하게 오랫동안 써야 되는 약인데. 하루 만에 나을 리가 없잖니, 유리야.”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했어. 네가 안 들어서 그렇지.”
“아휴, 안 했어요!”
“했어.”

 

씩씩대는 서유리를 보고 있던 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현관으로 밀고 들어왔다. 서유리는 그런 그를 낑낑대며 막아보려 했으나, 위상능력자이긴 하나 어찌됐건 여성에 고등학생인 서유리가 단순한 완력 싸움에서 그를 막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서유리의 방을 발견한 제이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움찔했다.

 

“아니, 역시 이건 좀 그런가. 어디 앉을 데 없나?”
“식탁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오, 그렇네. 땡큐.”

 

제이가 넉살좋게 식탁 의자에 앉자 맞은편 의자에 서유리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세게 앉았다. 자기가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 그리 유복한 환경도 아니었고, 그런 자랑할 것 없는 모습을 팀원에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니 서유리는 우울해졌다.

 

“가족들은? 동생들은 아직 학교인가?”
“친구랑 놀러갔어요. 저녁밥 먹을 때가 되면 오겠죠.”
“그렇게 시간이 넉넉하진 않구만. 그럼 빨리 본론만 얘기하고 가지.”

 

본론이라는 이야기에 서유리가 다시 도끼눈을 하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배신감을 떠올리면 당장 식탁 아래로 발길질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이상한 아저씨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하는 생각을 서유리는

해보았지만, 이세하나 이슬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미스틸테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강남사태 당시에 제이가 무좀약 이야기를 잠시 꺼냈던 것을 기억해내어 제이에게 상담해보려 했지만 결국 이 꼴이다. 서유리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서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제이는 벗어놓은 가방에서 자그마한 약통을 주섬주섬 꺼냈다. 소아용의 감기약 등이 들어갈 법한, 액체가 들어있는 튜브 타입의 작은 플라스틱 병이었다.

 

“자. 니가 원하던 즉효약인데, 이게.”
“네?”
“너 학교에 있는 동안에 얻어왔다. 전쟁 중엔 이렇다 할 클로저용 옷 같은 것도 모자라서, 다들 아무렇게나 군복에 전투화 차림으로 싸워대느라 너랑 같은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았거든.”

 

시큰둥하게 제이의 이야기를 듣던 서유리가 와락 일어섰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이 약을 받았단 말인가? 서유리의 머릿속에 캐롤리엘의 조수로 일하고 있는 우정미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서유리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잃을 것만 같았다.

 

“그걸 또 누구한테 말했어요? 아저씨 때문에 못 살겠어, 정말! 누구한테요?”
“캐롤리엘한테. 그냥 내가 무좀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걱정 말고.”

 

제이가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어 물고는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기 전에 이번엔 그걸 바르고 자 봐. 그럼 일단 상황은 나아질 거야.”
“‘일단’요?”
“그래. 그리고 이거 읽어보고.”

 

제이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서 서유리에게 건네주었다. 가방 안에는 비슷한 서류철이 잔뜩 들어있었다. 상황이 자꾸만 휙휙 바뀌는 탓에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가방이 컸던 까닭이 저것인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서류철을 열자 신문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무좀, 재발, 재감염 막는 것이 중요...’...?”
“그 약은 어디까지나 당장 급한 불만 꺼주는 거거든. 뭐니뭐니해도 평소에 관리를 잘 해주는 게 제일이지.”
“...이렇게 읽어서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머리가 나쁘잖아요.”

 

서유리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제이는 선글라스를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다. 그래서 내버려둘 수 없는 거겠지만.

 

“일단 읽어보고... 잘 모르는 부분은 나중에 이 오빠한테 물어봐. 다른 서류철 보면 양복 입을 때 주의해야할 점 같은 것도 모아둔거 있으니까 그것도 보고. 가방은 놓고 간다.”
“네? 가시려구요?”
“네 동생들 올텐데 뭘. 그럼 수고해.”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 넓지 않은 서유리의 집 거실을 뚜벅뚜벅 가로질렀다. 서유리는 아직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로 제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신발을 신은 제이는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그녀에게 인사삼아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건강이 제일이다.”

 

*

 

복구본부의 일상은 계속된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제이는 연구용 잔해의 전달을 위해 우정미에게 향했다. 그녀는 임시로 설치해둔 컨테이너에서 무언가를 배송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캐롤리엘에게 보내는 물품이리라.

 

“안녕. 늘 하던 일 하러 왔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

 

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이 아이들과 연관되기 시작한 이후로 한숨이 부쩍 늘어난 기분이 드는 제이였다. 차원전쟁 당시만 해도 팀의 마스코트였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제이는 그가 가져온 차원종 잔해를 수령한 우정미가 그에게 종이가방을 하나 내민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초콜릿? 역시 이 오빠는 인기 있구만.”

“밸런타인데이가 몇 달 전 얘긴데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지.”

 

웃으며 가방을 받아든 제이는 안에서 약봉투를 발견하고 우정미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우정미는 그런 그에게 측은하다는 듯한 눈빛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캐롤리엘 선생님한테 들었어요. 그... 무좀 때문에 고생하신다면서요? 일단 평소에 많이 도와주시니까 드리는 거예요. 정말이지... 관리 좀 하시라구요. 매번 건강, 건강 하시면서.”

 

제이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그가 캐롤리엘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이런 식이어서는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제이가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대답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등을 둔탁한 충격이 덮쳤다.

 

“크헉!”
“정미정미야!”
“서유리 너, 여기 위험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 조심히 좀 들어오라니깐!”
“아휴, 미안! 우리 정미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만 잊었지 뭐야! 아저씨, 미안해요!”

 

제이는 위험 신호를 머리가 쾅쾅 울리도록 보내오는 허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서유리의 뒤를 이어 검은양 팀의 다른 멤버들도 컨테이너로 들어왔다.

 

“임무 수고하셨습니다, 제이 씨. 정미야, 그거 전해드린거야?”
“무좀약 말이지? 방금 드렸어.”

 

우정미와 이슬비의 대화를 듣자 제이는 목에서 피 맛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지금 정도면 아마 피를 토하더라도 괜찮은 상황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제이는 나머지 멤버들이 우정미와 이야기하는 틈을 타 유리에게 슬쩍 눈짓했다. 부디 그녀가 이 신호를 이해해서 화재를 좀 돌려주기를. 제이의 눈을 본 유리는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에이, 제이 오빠도 참! 어쩌다가 무좀이 다 걸린 거예요!”

 

제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이세하는 미안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사안을 전달하던 김유정의 말을 떠올렸다. 눈앞의 칙칙한 방을 홀로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전에 대기실로 사용하던 검은양 팀의 사무실이 그다지 좋은 환경이었던 것은 아니다. 좁은 공간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채워 넣다 보니 청소라도 한번 할라치면 억지로 쑤셔 박혀있는 물건을 모조리 꺼내는 대공사를 해야만 했던 데다가, 팀원들이 모두 대기 중인 비좁은 방에 끼어 앉아 게임을 하다 보면 옆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이슬비의 불만스러운 눈초리가 뒤통수에 날아와 박히기 일쑤였으니.

 

그렇다곤 해도, 이 방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도 일단은 지명수배자인 늑대개 팀원들을 검은양 사무실에 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지 곰팡내가 진동하는 방과 임시방편으로 대충 구해온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엉망진창인 청소상태의 조화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이세하의 신경줄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김유정과 함께 방을 먼저 확인하고 돌아온 이슬비가 그를 향해서 보낸 묘한 시선 역시도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그가 측은하다고 말하는 듯한 기묘한 표정. 지금까지 그녀가 그에게 그런 얼굴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세하는 이슬비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뭐,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 중요한 일이었으면 말을 했을 테고.’

 

이세하는 나쁜 방향으로 질주하던 생각을 억지로 정리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그는 스마트폰 배터리의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안주머니에서 충전기를 꺼내 들었다. 문득 휴대용 게임기의 배터리 역시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두 전자기기의 충전을 위해 방을 훑으며 콘센트를 찾기 시작했다.

 

*

 

“오, 찾았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엉망진창인 방에서 어렵사리 콘센트를 발견한 그는 기분 좋게 충전기를 연결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스마트폰이 충전 중임을 알리는 표시등이 점등되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콘센트에 몇 번이나 충전기를 다시 연결해보던 이세하는 엄습하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투덜거렸다. 구석에서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는 커다란 TV가 연결된 콘센트를 확인해보려던 그는 창밖으로 이어진 TV의 전력선에 당혹했다. 창문을 열고 몸을 내민 이세하는 특경대 차량에 설치된 발전기에 연결되어있는 전력선을 발견했다.

 

“뭐하는 거야?”

 

뒤를 돌아보자 어느 틈엔가 방에 들어온 이슬비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 방 콘센트 고장 난 것 같은데? 핸드폰 충전을 할 수가 없잖아.”

 

이슬비가 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떠오른 예의 그 표정을 본 이세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내가 말 안 했었나? 여기, 전기 안 들어와.”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이슬비의 대답이 이세하에게는 사형선고처럼 들려왔다. 잠깐의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온 그가 그러면 충전은 어떻게 하냐는 식의 질문을 절박하게 던져봤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를 다시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창밖에서 발전기를 봤지? 급한 대로 특경대가 지원해준 그 발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공용 장비가 우선순위니까 개인적인 용도의 전기 사용은 최대한 자제해줬으면 해.”
“여기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몰라.”

 

이세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다. 이곳은 위험하다, 너무 개방되어있다. 유사시에 탈출하기도 어렵다. 적들도 이곳의 존재를 금방 알아챌 것이니 어서 위치를 옮겨야 한다. 전기를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는 처사냐. 내 게임기는 어쩌란 것이냐, 등등. 뒤로 갈수록 항변보다는 그저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되어가는 느낌이었지만 그에게는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챙겨가는 그로서는 휴대용 게임 콘솔과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이슬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전기가 없으면 심심해서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네?”

 

그녀의 말에 다른 핑곗거리를 준비하던 이세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슬비의 모습에 흠칫했다. 거의 밀착하다시피 그와의 거리를 좁힌 이슬비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의 어깨를 살짝 붙잡아 내렸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에서 달콤한 향기가 확 풍겨왔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검은 리본에 최면에 걸린 듯 이세하의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신장 차를 줄인 이슬비는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그녀의 귓속말에 방금 가까스로 찾아낸 핑계가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할 말을 잃어버린 그는 멍청한 얼굴로 이슬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본 이슬비가 쿡, 하고 웃음 지었다.

 

“그럼,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방 체크는 적당히 마무리하고 나오도록 해.”

 

이슬비의 손이 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려갔다.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숨결이 그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이슬비가 방을 나간 뒤에도, 이세하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가버린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클로저스 > 분류없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오는 날  (0) 2017.02.14
잠이 오지 않는 이세하  (0) 2016.05.02
신강고의 밤  (0) 2016.04.30
그녀의 이야기  (0) 2016.03.23
연락처 등록하기  (0) 2016.03.21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