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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무제 8 - 2017.05.24
  10. 무제 7 - 2017.05.24

때로는 그저 게으르게 보내고 싶은 하루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흘러가는 일상들을 마냥 바라보고만 싶은 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다. 트레이닝도, 팀원들의 자료도, 쌓여있을 보고서도, 오늘만은 내려놓으리라. TV 너머에서 재롱을 떠는 강아지에 정신을 집중하며 이슬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 잊자. 강아지 귀여워. 너무 귀여워.


문득 어깨가 시려 이불을 끌어올리려니 가슴께에서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랬지, 미안해. 머리를 쓰다듬으면 강아지처럼 배에 얼굴을 비빈다. 콧날이 배꼽에 스쳐 간지럽다. 조금 푸석한, 검은, 뿌리가 희끗한 머리. 조만간 염색을 다시 해야하지 않을까. 그녀는 그가 염색을 그만뒀으면 싶다. 건조한 머리칼은 단지 그가 자주 밤을 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물기없이 가끔 벌겋게 충혈되는 눈동자도 그렇다. 새하얀 머리도, 황금빛 눈동자도, 좀 더 자주 보고싶다. 지금 말해봐야 싫다고만 하겠지. 괜히 약이 오른다. 나는 이렇게 네가 걱정되는데.


“왜 그래?”


실컷 부비적거린 듯 느긋한 목소리. 사람 속도 모르고. 손가락을 세워 머리를 헝크러뜨린다. 뻣뻣한 머리칼이 제멋대로 뻗친다. 길게 자란 옆머리에 숨겨져있던 귓바퀴가 드러난다. 굴곡을 따라 손가락을 굴리니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움추린다. 손톱을 세워 귓등을 긁어본다. 간지럽거나 따갑다고, 불평하고 고개를 빼볼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 그저 얼굴만 파묻고 있다.


“그냥, 아무것도 아냐.”
“그렇구나.”


시선을 다시 TV로 향한다. TV 속 강아지는 주인의 무릎 위에 앉아 세상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래를 보면 엉망이 된 검은 머리가 또 강아지처럼 가슴에 기대 누워있다. 쓰담, 쓰담. 손을 잠시 멈추니 어리광부리듯 무게를 싣어온다. 여유롭다.


“무거워.”
“…조금만 더.”

“팔 아파.”


이세하는 요즘 부쩍 어리광이 늘었다. 어쩌면 이것이, 한 꺼풀만 벗겨나면 드러나는 그의 본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무관심을 연然하여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었을지도. 그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가 가엽다고, 이슬비는 또다시 그리 생각한다. 마침내는 그녀에게 가면 뒤의 모습을 보여준 그가 고맙다. 여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더라. 또 앞으로 그는 어떻게 바뀔까. 더 많은 모습을 알고싶다고 생각하며 이슬비는 한동안 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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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각. 글라스 안의 얼음이 무너져내린다. 그러고 보면 잔이 빈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뜨끈하게 올라오는 취기에 이세하는 갈증을 느꼈다. 손을 슬쩍 움직여 물잔을 잡아본다. 비어있다. 가서 물이라도 받아올까 싶지만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눈앞에서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있는 이슬비 때문이다. 그가 물을 확인하는 것도 그렇게 불만이었을까. 도끼눈 위로 이마에 심술이 소복이 올라 앉아있다.


“그러니까,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딴 생각만 하고 말이야.”


발음 새는 것 좀 봐라. 이세하는 내심 한숨을 푹 쉬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배리어를 바라본다. 흥이 오른 바텐더가 플레어라도 시작한 것일까. 처음 들어올 때보다 조금 시끄러워졌다. 간간이 작게 터지는 탄성, 휘파람 소리. 아무래도 직원이 금방 올 것 같지는 않다. 다음엔 꼭 그만 마신다 말하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져본다.


“다들 사람 말이라곤 하나도 안 듣고 말이지…. 꼭 너처럼.”

“…지금은 아니잖아.”

“예전엔 그랬어.”


또 이 이야기다. 술이 들어가면 그녀는 늘 검은양 팀 이야기를 한다. 하긴, 온갖 일을 겪긴 했다. 어쩌면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둔 곳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검은양 팀을 나와 여기저기로 흩어진 지도 제법 지났을 텐데. 그는 이슬비가 지금의 팀에 좀 더 애정을 가졌으면 싶다.


“그래, 그래. 예전엔 그랬지.”


대충 맞장구를 쳐준다. 지금까지 몇 잔을 마셨더라. 네 잔, 아니면 다섯 잔. 오늘은 진탕 마실 거라고 성화를 부릴 때 알아봤어야 했다. 술이 별로 세지도 않으면서. 지금의 팀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걱정이다. 같이 있었더라면 괜찮았을까. 이렇게 몇 주 걸러 한 번씩 볼 때보다, 더 잘 대해줄 수 있었을까.


“아무튼 말이야, 답답해 죽겠어.”

“그래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답답하다는 듯 덜컥 잔을 집어 든다. 불씨를 꺼버리듯 입에 술을 때려 넣는다. 치익, 불이 사그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녀의 얼굴에 술기운이 매캐하게 치민다. 이세하는 혀를 찼다. 뭐야, 바라보는 눈길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너, 내일 당직 아냐?”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냐. 아까 말해놓곤.”

“몰라. 안 나갈 거야.”


잔을 비우는 그녀를 보고 다가오던 종업원을 이세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기까지만 할게요. 이세하의 손짓을 그는 다행히 이해한 것 같다. 씩씩거리는 이슬비를 애써 달래본다.


“자, 물 마셔, 물.”

“싫어―. 술 더 시켜, 술.”

“됐거든요.”


금세 볼이 부풀어 오른다. 저 볼을, 손가락으로 집어 바람을 빼 보면 어떨까. 아마 싫어하겠지. 어렵다.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데. 남들처럼 그렇게, 힘들 땐 내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거나 하고 싶은데.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술 상대뿐이다. 스스로가 무력해진다. 딱, 한 잔만이야. 이세하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픽 웃는 모습에 안도감이 드는 자신이 싫다. 여기요, 마시던 거 한 잔 더 주세요. 얕다. 너무나도 얕다.


*


볼을 헤집는 찬바람을 보니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다. 택시를 부를까 싶었지만 역시 그만두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먼 길도 아니다. 직접 데려다주면 그만이겠지. 그만큼이라도 좀 더 같이 있는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비틀거리는 이슬비를 붙잡아 세워 목도리를 여민다.


“몸 조심해야지.”

“조심하고 있거든.”


그런 것 치고는 어설프다고, 이세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야무진 아이니까, 그가 간혹 보살피는 것보단 훨씬 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그저 자기 위로 삼아 그녀를 귀찮게 굴고 있는 것일지도. 나름 조절하면서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는 자꾸만 바닥으로 치닫는 감정을 애써 끌어올린다.


“간지러워.”


앞섶에서 꾸물대는 손길에 그녀가 목을 움츠렸다. 미안하다며 손을 빼자니, 어느새 붙잡아 도로 끌어내린다. 잠시 고정. 후우―. 차게 식은 손에 따뜻한 입김이 붉게 자국을 남긴다. 그녀의 눈길이 깃털처럼 간지럽다. 손 끝에 피가 몰린다.


“손, 되게 차다.”

“글쎄….”


시선이 팔을 타고 올라와 이세하를 향한다. “장갑 같은 건 없어?” 고개를 저으니 한숨을 폭 쉰다. 


“아무튼간에, 맨날 챙겨준다, 챙겨준다 하면서 자긴 이렇다니까.”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늘 그래왔다. 그녀가 편안하게, 즐겁게, 어쩌면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발그레 화장기 어린 입에서 입김이 피어올라 그의 얼굴을 스친다. 달큰한 술 냄새.


“우리 세하, 걱정이네.”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게. 베스스 웃는 얼굴을 보며 잠시 추위를 잊는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 그 마음을 좀 더 풀어주고 싶다. 그로 인해 그녀가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면. 연連하여 끝없는 길, 조금이나마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춥지?”


괜히 다른 말을 꺼내며 그녀를 폭 안아본다. 숨 막혀. 짐짓 밀어내는 손길에는 힘이 없다. 가슴께에 와닿는 따스한 숨결. 코트 안으로 손이 파고든다. 추우니까. 핑계처럼 말이 덧붙는다. 등을 감싸는 손가락 마디가 하나, 둘, 엮여 들었다. 이대로 하나가 된다면 어떨까. 그녀에게 그저 짐이 되지는 않을까.


“이세하.”


오똑한 코가 가슴팍에 비벼진다. 이세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안하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도움도 못 되고, 의지도 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괜찮은 걸까.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제지하지 못한다. 늘상 피하기만 하던 사람이라, 천성이 비겁하여 그랬다.


“사랑해.”


이슬비, 너를 사랑한다고, 이세하는 그렇게 말을 돌려주지 못했다. 나도야, 하고 독백처럼 읊조릴 뿐이었다. 대답은 없다. 내일이 되면, 그녀는 그만 잊어버리겠지. 아침을 반기는 두통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이야기. 그거면 됐다고 이세하는 생각했다. 언젠가, 고맙다고, 네 덕분이라고, 그런 말을 부끄럼 없이 들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가 되면 다시 말하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잠에 빠진 그녀를 업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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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락이 돌아가고 문이 열리자 온기가 훅 비어져나온다. 차게 식어있던 몸이 풀리는 느낌에 이세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뭐 해, 들어와. 이슬비의 재촉에 이세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한번 더 털어낸다. 우산은 복도에 펴둬. 벌써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는지 목소리가 제법 멀다. 어쩌면 멍하니 있었던 시간이 제법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슬비의 집에 오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몇 번이고 봤던 모습.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봐도 적응할 수 없는 풍경이다.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인형들. 한켠에 작게 자리한 화장대와 거울. 그의 방에선 결코 볼 수 없을 기물들이 그가 여성의 방에 들어왔음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그 한가운데엔 자연스레 풍경에 녹아든 이슬비가 있다. 집에 있는 날이면, 아마 늘 그 자리에 있었겠지. 그 모습조차도 이세하는 조금 거북하다. 그녀만의 공간에 침범한 외부인이 된것만 같다.

 

“뭐 해. 멍하니 서서는.”

 

털썩, 하고 그의 머리 위로 수건이 떨어져내렸다. 이슬비가 어느틈엔가 띄워보낸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그의 머리칼은 빗물로 덤벙 젖어있었다. 하긴 비가 꽤 오긴 했다. 잠자코 머리를 털어내는 이세하를 보며 그녀는 베스스 웃는다.

 

“아무튼 강아지 같다니까.”

“뭐가.”

 

수건 사이로 흘러나오는 볼멘소리. 그는 알까, 그런 모습이 그녀를 더욱 즐겁게 한다는 것을. 지금 그 모습 말이야. 웃음 사이로 작게 덧붙여본다. 아마 들리진 않았겠지.

 

“아무것도 아냐. 웃옷은 거기다 벗어놔.”

“어?”

“그거 그대로 입고 있으려고? 감기 걸려.”

 

잠시 정적.

 

“야, 그럼 뭐 입으라고?”

“그러게.”

 

얼빠진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이슬비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런 부분에서 쓸데없이 민감하다. 상반신 정도는 평소에 붕대를 감아줄 때라던가, 할 때 이미 다 본 참인데.

 

―우리 사이인데.

 

―따지고 보면, 무슨 사이인걸까. 알 수 없다.

 

“이불이라도 덮고 있던가.”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이세하는 항의의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보았다. 소용 없는 노릇이다. 빤히 마주보는 푸른 시선에 그는 그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데 보고 있어.”

 

그의 마지막 저항에 이슬비는 또다시 미소지었다. 그래, 그 정도야 뭐. 몸을 돌려 창가를 향한다. 아직도 비가 꽤 거세다. 잘도 저 비를 뚫고 집에 갈 셈이었네. 우산을 들이미는 그녀를 한사코 거절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정말 감기 걸리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들어 리모컨으로 보일러 온도를 슬쩍 올렸다. 이세하는 그런 면이 있다. 저는 곧잘 참견해오면서도, 한사코 남의 도움은 거절하려 드는. 손해보기 좋은 성격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화장실 좀 쓸게.”

 

어느새 옷을 다 벗어낸 모양이다. 시야 한 켠으로 그의 맨 등이 스쳐갔다. 옷의 물기라도 짜낼 모양이다. 그래, 많이 젖긴 했지.

 

“따뜻한 물 나오니까, 샤워라도 할래?”

“…됐거든.”

“그래도 머리는 감아야 된다?”

“네가 우리 엄마냐.”

“엄마가 머리 감겨줄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이 뒷통수에서도 보인다. 놀리는 것은 이쯤으로 하자. 적당히 손짓을 하자 또 한숨을 푹 내쉰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이슬비는 침대 위의 이불을 끌어내렸다. 잠시 조용하더니만 이내 샤워기 소리가 들려온다. 했었던지도 몰랐던 긴장이 풀린다.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여유롭고 노곤하다. 째깍, 째깍. 시계침 소리.

 

*

 

문득 정신이 들면 조용하다. 또 혼자일까 싶다.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이세하는 집으로 갔을까. 눈을 떠보니 불은 꺼져있다. 한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낮은 숨소리가 도로 내려앉힌다. 커튼으로 스며드는 빛에 의지해 곁을 바라보자 잠꼬대라도 하는지 검은 실루엣이 들썩인다. 돌아간게 아니었구나. 괜히 고맙다.

 

도대체 어느 틈에 잠이 들어버린 것일까. 아마 그가 씻는 것을 기다리던 중 같다. 이상하다. 평소엔 억지로 청해도 잘 오지 않는 잠인데. 어깨까지 끌어올려져 덮인 이불을 걷어낸다. 이세하를 기다릴 적엔 분명 이렇지 않았다. 그가 덮어준 것이겠지.

 

눈을 가늘게 뜨니 그는 여전히 웃통을 벗은 채다. 잔뜩 꼬부라져 새우잠을 자는 꼴이 퍽 바보같다. 더 추운 것은 그 쪽일텐데. 굳이 이불을 덮어주고는, 행여나 깰세라 불을 끄고 커튼까지 쳐놓았다. 그렇게 앉아 그녀가 깨기를 그저 기다리다 잠든 것은 언제쯤일까. 이슬비는 서랍장 위에 손을 뻗어 무드등을 작게 켰다.

 

그의 머리엔 아직 물기가 어려있다. 시끄러울까 헤어 드라이기도 차마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수건도 몇 장 쓰지 못하고 적당히 훔쳐내고 말았으리라. 눈치만 보는 강아지. 그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겠지. 그를 괴물보듯 쳐다보는 시선들 사이에서, 자신의 무해함을 애써 강조하며. 이슬비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본다.

 

그가 몸을 다시 움추린다. 머리칼에 달라붙은 물방울이 그 움직임에 하릴없이 굴러떨어진다. 간지러운지 작게 떨리는 속눈썹이 제법 길다. 원래 저렇게 길었던가. 이런 것을 신경쓰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물음표, 물음표. 저러다가 깨면 어쩌지. 이슬비는 어느틈엔가 그가 일어날까 걱정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라도 안심하고 쉴 수 있었으면 싶다. 그것이 그의 리더로서의 생각인지, 아니면 또다른 무언가인지, 그녀는 확정지을 수 없었다. 이마에 달라붙어 멈춰선 물방울을 잠시 바라본다. 이슬비는 그를 향해 조금 더 고개를 숙인다. 그의 매끄럽고 넓은 이마에, 입술을 가져간다.

 

―깨진 않을거야. 아마.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다만, 어쩌면 그녀는, 그가 깨어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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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하는 바닷가가 싫었다. 달라붙는 모래, 끈적이는 바람, 쓸데없이 많은 사람, 그에 걸맞는 시끄러움. 그가 싫어하는 요소를 한데 뭉쳐 버무린 것 같은 장소다. 해변에 가자는 이슬비의 말에 그가 반대한 것도 당연했다. 모처럼의 휴가는 에어컨이 있는 집안에서 편히 보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어째서 굳이 돈까지 써가면서 고생을 찾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의 항의는, 늘 그랬듯 묵살당했다. 


한숨. 벌써부터 소금기로 근질거리는 어깨를 털어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갈매기 소리. 왁자한 소음 사이로 들뜬 아이들의 새된 목소리가 비명처럼 끓어오른다. 돌아가고 싶다. 이세하는 파라솔 아래 의자에 몸을 누이고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준비할 것이 무어가 그리 많은지, 이슬비는 그가 짐을 다 옮긴 뒤에도 나타나지 않던 참이다. 이어폰 속에서 익숙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온다. 이거면 됐다. 이렇게 시간을 떼우다 보면 돌아갈 시간이 오겠지. 보기 싫은 해변 풍경은 가디건의 후드로 가려버린다. 이세하는 북적한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 속 세상으로 침잠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벼운 충격이 콩, 하고 이마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면 수영복 차림의 이슬비가 오일을 들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럴 줄 알았어, 하는 표정은 덤이다. 그녀와 함께하다 보면 제법 자주 볼 수 있는 표정이건만, 오늘의 그에겐 그러려니 하고 넘길 여유가 없다.


“왜?”


제법 퉁명스런 목소리. 이슬비는 애를 하나 데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라 쿡, 웃어버린다. 처음엔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같다고만 생각했을텐데, 지금은 그저 귀엽다. 콩깍지란게 이런 것일까.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듯 그의 머리에서 후드를 쓸어내린다.


“왜 웃어?” 재차 질문. 수북한 머리에 손가락을 굴린다. 돌아가면, 머리를 짧게 쳐보는 건 어떨까. 여길, 이렇게.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움직여도 본다.


“그냥, 귀여워서.”


어이가 없다는 듯 이세하는 한숨을 푹 내쉰다. 이슬비는 손의 오일통을 그에게 건네었다. 의문이 흘러넘치는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이슬비는 의자에 엎드렸다.


“발라줘.”

“직접 하면 안 돼?”


그럴 줄 알았다. 이슬비는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아있는 그에게 팔을 뻗었다. 체구가 작은 그녀이기에 손이 그의 얼굴에 겨우 닿는다. 약간은 거칠한 뺨에 손가락을 굴린다. 목으로, 어깨로, 팔로. 여전히 게임기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을 살짝 끌어내린다.


“피부, 다 탈텐데.”

“…애초에 안 왔으면 괜찮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손에는 저항이 없다. 어차피 그는 그렇다. 불만이 가득하다가도, 눈앞에 닥친 일은 곧잘 처리해주는 것이다. 쓸데없이 착한 남자. 이슬비는 다시 의자에 엎드렸다.


“자, 자. 햇빛이 많이 따가워.”


또다시 한숨. 어쩔 수 없지, 하는 혼잣말과 함께 삐걱, 의자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영복 매듭을 끌르는 손길이 간지럽다. 이슬비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었다.


*


손에 짜낸 오일은 흔히들 들려오는 이야기와 달리 미지근했다. 날이 제법 더운 탓이리라. 뜨거운 차안에 몇 시간을 보관해놓았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눈앞에는 선물상자처럼 풀어헤쳐진 이슬비의 새하얀 등. 글쎄, 오늘이 지나면 저 뒷모습에 다른 빛깔이 칠해지는 것일까. 그는 조금 아쉬웠다. 이렇게 꼼꼼히 오일을 바르면 좀 낫지 않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등에 잠자코 손을 비볐다. 고운 곡선의 어깨, 귀엽게 비져나온 날개뼈, 오목하게 패인 등골. 잠자리에서 몇 번이고 봤을 모습이건만, 장소가 바뀐 것 만으로도 꽤나 느낌이 새롭다.


“간지러.”

“꼼꼼히 발라야 되니까 참아.”

“…손이 야한데.”


쓸데없는 참견이다. 아마 농담이겠지. 묵묵히 시선을 옮기며 오일을 바르던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녀의 목덜미에 발갛게 자리잡은 작은 언덕. 꼭대기에는 펜으로 찍기라도 한 듯 검붉게 점이 박혀있다.


“모기는 또 언제 물렸대.”

“그러게. 몰랐어.”


몰랐다니, 형편좋은 이야기다. 이세하는 한참을 긁다가 그만 딱지가 올라앉아버린 자신의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런 데서 묘하게 무신경한 부분이 있단 말이야. 쓸데없이 약이 오른다. 허리께에 가있던 손을 올려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른다.


“…간지럽다니까.”

“꼼꼼히 발라야 한대도.”

“일부러 그러는거지?”

“응.”


간질, 간질. 자국이 성이 난다.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꼭 키스마크 같다. 그러고보면 최근엔 꽤나 뜸했다. 슬쩍 상체를 숙여본다. 간지러움이 올라오는지 이슬비가 목을 조금씩 비튼다. 움직임과 함께 씰룩이는 어깻죽지가 야릇하다. 의외로 바닷가도 나쁘지 않을지도. 슬쩍 올라오는 감상을 이세하는 고개를 저으며 떨쳐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저 허리를 숙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꺅!”


덜컥 요동치는 어깨를 잡아누른다. 코를 간질이는 머리칼에서 린스 냄새가 훅 풍겨왔다. 혀 끝에 슬쩍 느껴지는 짠 맛. 쭈욱, 빨아당긴다. 지금부터 잠시동안, 나는 모기다. 쪽, 쪽. 입술에서 비어져나오는 소리마저 간지럽다. 정강이를 걷어차는 다리의 감촉에 모기가 이래서 피를 빠는 것일까, 하는 바보같은 감상이 떠올랐다. 이쯤이면 됐을까. 마지막으로 목덜미를 훑는다. 8월의 햇빛 아래. 그녀의 목선을 따라 작게 구슬진 침방울. 미소짓는다. 어깨를 풀어주면 냉큼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는 이슬비. 갑작스레 힘을 써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상기된 얼굴이 귀엽다.


“이세하, 너…”


양껏 피를 빨고 난 모기는 으레 성난 손길에 붙잡혀 죽고야 마는 것이다. 이세하는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딱히 후회는 없었다. 이 정도면 꽤나 만족스러운 교환이다.


“이러고 어떻게 해변에 있으란거야—!”


이슬비의 비명. 그리고 손과 등이 맞부딪히며 나는 상쾌한 파열음. 그렇게, 소란스러운 해변의 풍경에 두 소리가 더해졌다. 이럭저럭, 생각보단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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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는거 맞아?”

 

이세하는 몇 번이고 반복했던 질문을 이슬비에게 건네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아이는 잠이 얕은 편이었다. 틀림없이 잠이 들었다고 생각해서 잠시 눈을 붙이려면 금새 깨어나 울곤 했다. 행여나 다시 깨버릴까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이슬비의 눈 아래에도 다크서클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꼭 팬더같네.”
“…너도 똑같거든?”

 

아닌게아니라, 요 며칠 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은 이세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기가 갑작스레 열이 오르거나 울음을 우는 것이 흔한 일이라곤 하지만, 첫 아이를 키우는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이세하도, 이슬비도, 어린 아기를 돌볼 기회라곤 평생에 없었던 터였기에 그랬다. 아이가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마침내 소파위에 널브러졌다. 한동안 청소를 제대로 못 한 탓에 소파 구석에는 먼지가 약간 보였다.

 

“죽겠다.”

 

이슬비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는다. 잠깐 눈 좀 붙여.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이세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가, 하고 물으니 설거지를 하러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할테니, 누워서 좀 쉬어.”
“싫어.”

 

또, 또, 고집. 이세하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이럴 때면 싸우기 쉽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억지로 쉬게 하기는 곤란하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양팔을 벌렸다.

 

“우리 슬비 안아본지 너무 오래됐어.”
“대충 넘기려 하지말고.”

 

말은 그렇게 해도 제법 순순히 다가온다. 그의 말마따나, 둘 만의 시간이 요즘 드물긴 했다. 체구가 작은 이슬비기에 그가 안으니 품에 폭 잠겼다. 턱을 간질이는 머리칼에 코를 묻으며 이세하는 그녀를 구슬릴 말을 생각했다. 그때까지의 타협. 둘은 앞으로 10분만, 우선은 이렇게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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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하. 세상에 유령같은건 없어.”

 

알고 있다. 평소라면 그까짓 담력훈련,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평소에 매번 차원종과 마주하는 사람이 유령이 무섭겠나? 그저 어제 했던 공포게임에 좀 과하게 심취했던 여운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하필 학교가 배경이었을 뿐이고.

 

“…괜찮아. 가자.”

 

의심에 가득찬 표정을 보니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나는 행동으로 나의 결의를 보여주기로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하니 의외로 발걸음이 가볍다. 봐라, 이슬비. 뭐가 그렇게 문제란 말이야? 이렇게 그저 앞을 보고 걷다보면 금방 끝날텐데. 그리고 나는 정확히 5분만에 후회했다.

 

“…….”
“…이세하, 그렇게 잡으면 못 움직여.”

 

정신을 차리고보면 이슬비에게 꼭 붙어있게 된다. 코너를 돌 때마다 게임 속의 기믹들이 슬금슬금 머릿속을 잠식한다. 계단을 오를 때면 발 밑을 자꾸만 살피게 되고, 교실에 들어설 때면 창문 밖부터 확인하게 된다. 불가항력이다.

 

“…현실엔 왜 세이브가 없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지금 엄청 진지하거든.”

 

정말이다. 이런 잡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딴생각이 들어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한동안 공포게임은 삼가는 편이 좋겠다. 정말로. 이쯤 되니 도대체 누가 이런 멍청한 계획을 세운건지조차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이 한심한 꼴에 이슬비는 여보란 듯 한숨을 쉬어보였다.

 

“…어쩔 수 없지. 오늘만이야.”

 

툭, 하고 머리에 자그마한 무게감이 실린다. 눈앞에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는 슬비의 얼굴. 나도 그만 고개를 숙여버린다. 쓰다듬, 쓰다듬. 부드러운 손길에 정신이 쏠린다.

 

“괜찮아, 괜찮아.”

 

머리에 열이 오른다. 아마 지금 거울을 보면 귀까지 새빨간 얼굴이 보이겠지. 슬비 쪽도, 아마 비슷할 것 같다.

 

"괜찮아, 세하야."

 

태엽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 뻣뻣한 손길이지만 따뜻하다. 이런 감각은 얼마만일까? 아무래도, 우리가 담력시험을 마무리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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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부는 테러 경계 단계를 격상하겠… 내가 왜 깼더라. 이세하가 눈을 뜨자마자 한 생각이었다. …왜 본인이 내지 않고, OOO가 냈느냐… 오늘은 늦잠을 자려고 했을텐데. 답은 금새 나왔다. TV에서 아침 뉴스가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다. 등 쪽에 커다란 쿠션을 벤 이슬비가 앉은 채 잠을 자고 있다. 그럼 그렇지. 그녀는 밤샘에 익숙치 않았다. 아무리 일이 밀려도 새벽이 되기 전에는 잠을 청하는 그녀였다. 그런 주제에 모처럼의 휴가라며 연속방영하는 드라마에 달려들다니. 이세하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며 한숨을 푹 쉬었다.

 

좀 늦잠을 자게 두어야할까? 이세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장식장에 얌전히 들어가있는 게임기의 모습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평소엔 게임 그만하고 빨리 좀 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면서, 이게 뭐람. 평소에 굳게 내리눌러놓던 장난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이슬비의 뺨을 슬쩍 찔렀다.

 

“야, 이슬비.”

 

꾸욱, 꾸우욱. 귀찮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귀 뒤로 대충 넘겨놓은 머리가 사락, 하고 흘러내렸다. 매끄러운 머리칼을 손가락에 슬슬 감아본다. 이대로 당기면 많이 놀라겠지. 이세하는 선을 넘으려 드는 장난기를 잠재운다. 다음은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하는 그녀의 귓가로 얼굴을 기울였다.

 

“공주님, 아침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찌푸러든다. 그러나 반응은 그것 뿐. 재미없어. 동그란 귓불이 제법 탐스럽다. 귓가에 도드라진 땀방울. 방이 조금 더웠던 것일까. 이세하는 오늘부터는 에어컨을 켜야겟다고 생각했다. 짠 맛. 귓바퀴라도 한 번 깨물어볼까, 생각하던 찰나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땠으려나, 하는 것이 이세하의 바람이었지만 삶이란 그렇게 좋게만은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만. 일어났어.”
“어어….”
“…뭐가 어어…, 야…? 아침부터 낯뜨겁게…!”

 

잘못했습니다. 이세하는 잽싸게 용서를 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효과는 없었다. 아침을 먹기 전까지 그는 한동안 굽신거리며 죽어있어야만 했다. 아침부터 듣는 잔소리는 꽤나 신선했다. 앞으로 몇 번정도는 더 시도해볼 가치가 있으리란 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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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작게 켜져있던 방의 불이 꺼진다. 달큰한 린스 냄새, 규칙적인 숨소리. 침대에 누운 이세하를 익숙한 감각들이 자극한다. 이불을 끌어올리는 그를 따스한 팔이 껴안는다. 왔어? 살짝 잠에 취한 목소리. 응, 하고 대답하자 베스스 웃는다. 늦었어, 바보야. 겸연쩍게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을 이슬비가 잡아내린다. 조금 아쉽다. 몇 년을 쓰다듬어도 그렇다. 느릿느릿 내려오는 손가락을 그녀는 냉큼 깨문다.

 

“아파.”

 

늦게 온 벌이야. 그녀가 속삭인다. 이세하는 괜히 약이 오른다. 내가 늦고 싶어서 늦었나. 잠시 머리를 굴리니 그럴싸한 반격이 떠오른다.

 

“그래서, 외로웠어?”
“…그랬지.”

 

조금 늦은 대답이 마침내 속삭임에서 평범한 대화가 되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이슬비의 귀에 입을 가까이한다. 우리 슬비, 인형이라도 다시 가져다 놓아야 할까봐. 곧이어 후, 하고 귓가에 입김을 불어본다. 예전에 기억나? 내가 너희 방에 처음 갔던 날. 인형 숨기다가 나한테 들켰잖아. 대번에 그녀의 반응이 돌아온다.

 

“그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왜 안돼? 반응이 재미있다. 그 다음에 갔을 땐… 이세하의 말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가로막힌다. 그를 밀쳐내 침대에 바로눕힌 이슬비는 도끼눈을 하고 그에게 올라탄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짐짓 딱딱하게 이야기하지만 평범한 대화라는 것을 둘 모두 알고 있다. 이세하는 웃으며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러면 입을 막으면 되잖아, 라는 말에 이슬비는 수긍했다. 쪼옥. 그녀의 입술. 꿈 속에서도 주름 하나 남김없이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입을 슬쩍 열자 기다렸다는 듯 혀가 들어온다. 똑똑. 앞니를 두드리는 부드러운 노크. 뒤섞인다. 숨이 거칠어진다. 뜨겁게 올라오는 이것은, 누구의 날숨일까.

 

“너무, 보고싶었어.”

 

흐려지는 말 끝. 애처롭다. 매달린 팔을 내버려둔채 이세하는 팔을 그녀의 등 뒤로 돌렸다. 보드라운 둔부를 움켜쥔다. 그대로 밀착시킨다. 더 안아줘. 애원하는 목소리에 순응한다. 혀가 엉길 곳을 찾아 그의 몸을 헤멘다. 턱에서 귀로, 그리고 목선을 타고 어깨로. 매끄러운 등을 따라 손가락을 훑으니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어깨 아래의 이 자국은 그녀가 천사였다는 증거일까. 날개뼈를 쓰다듬으며 품안의 감촉을 즐긴다. 좀 더, 좀 더. 어깨를 넘어 쇄골로, 가슴으로. 더 아래로. 계속. 이어지고, 뒤섞여서, 그저 계속해서 이렇게 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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