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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비 오기 전날 - 2017.03.16
  9. 3월, 방과 후. - 2017.03.16
  10. 비 오는 날 - 2017.02.14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누가 커피를 끓였냐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다. 가볍게 기억을 되돌린 이세하는 자신이 이슬비와 함께 모텔방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보통 아침이면 커피를 먼저 끓이는 쪽이었던 이세하는 오랜만에 맞는 여유로운 아침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내 것도.”
“…일어났어?”

 

수긍. 이슬비는 한숨을 쉬며 믹스 커피를 한 봉투 더 집어들었다. 테이블에 팔을 짚고 커피 포트가 울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뒷모습. 잠옷을 대신했던 흰 셔츠, 헐렁한 반바지. 군데군데 주름지고 흐트러진 그 모습이 꽤나 낯설다. 이렇게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을 그 말고 또 누가 알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평상심, 평상심. 어디보자, 퇴실 시간이 12시였던가.

 

“지금 몇 시야?”
“9시 30분.”
“…어?”

 

탁자에 널브러져 있던 간밤의 흔적을 치우던 이세하는 맥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각자 씻고 짐을 챙겨서 나가려면 제법 빠듯하다. 이세하는 머릿속으로 셈을 반복했다. 모자르다. 느긋하게 커피를 끓이는 이슬비의 행동거지는 어디서 나온 여유일까? 돌아온 대답에 이세하는 당황했다.

 

“같이 씻으면 되잖아?”
“뭐?”

 

담담히 이어지는 설명. 뭔가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세하는 적당히 납득했다. 어차피 볼장 다 본 사이, 조금이라도 수면시간을 늘리고자 생각한 결과라. 확실히 어제 잠을 늦게 자긴 했다만.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녀는 가끔 상식을 넘어선 말을 하지 싶다는 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그럼, 들어간다?”
“…잠깐, 잠깐만.”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역시 달랐다. 계획은 제법 그럴싸하게 세워놓은 이슬비였지만, 막상 이세하가 들어갈 때가 되자 한참을 뜸을 들였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겨우 욕실에 들어간 그는 샤워타올을 두른 채 구석에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이슬비를 발견했다. 조금이라도 보이는 면적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까? 욕조에 붙은 샤워기에서는 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사실, 이세하의 입장에서는 역효과였다. 등에 구슬처럼 맺힌 물방울들, 물에 푹 젖어 흘러내리는 타올, 억지로 끌어올리는 손길. 그의 이성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그녀의 뒷모습에 점점이 남은 붉은 자국이었다. 간밤의 기억이 플래시백되며 그의 이성을 착실히 갉아먹어갔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부끄러우니까, 보지 마.”

 

가만, 내가 왜 참고 있었더라? 등의 손톱자국이 욱신거린다. 머릿속에 이슬비의 달콤한 신음소리가 재생된다. 이세하는 머릿속으로 다시한번 셈을 해보았다. 아마, 괜찮을 것 같다. 아무렴 어때.

 

“잠깐, 세하야? 그렇게 당기면... 꺄악?!”

 

결국, 몇 시간 뒤 그들은 카운터에 카드를 반납하며 연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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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졌다. 인적 드문 버스 정류장을 겨우 찾아내 앉은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기묘하게 달라붙는 분위기에 이세하는 감히 휴대폰을 꺼내보지 못했다. 톡, 톡. 앞머리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 자꾸만 신경이 곤두선다. 대충 머리를 털어내니 물방울이라도 튀었는지 옆자리의 이슬비가 어깨를 움추린다. 평소라면 미안하다고 가볍게 말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늘은 감히 입을 떼기가 어렵다. 이 침묵을 깨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이세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이슬비를 훔쳐본다.

 

평소에는 꽤나 답답해보이는 재킷이었지만 이런 날에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단단히 채워진 지퍼 너머로 슬쩍 엿보이는 흰 셔츠 자락은 조금의 물기도 없이 온전했다. 그다지 춥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안심. 살짝 시선을 올리면 매끄러운 턱선을 지나 평소엔 꽤나 보기 힘든 그녀의 동그란 귀가 살짝 드러나보인다. 모양 좋은 귓바퀴 위로 빗방울이 하나. 또르륵, 굴러떨어진다. 그저 얼굴의 일부일 뿐이건만, 이렇게 보니 제법 배덕감이 든다. 이세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시선 한 구석으로 스쳐간 그녀의 치마는 머릿속에 제법 오래 남아있을 것 같다. 빗물에 젖어, 미묘하게 그녀의 허벅지가, 아니, 살결이, 생기가 비쳐보이던, 새하얀 요원복. 이세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아침까지도 맑았던 날씨 치고는 비가 제법 푸지게 내린다. 이슬비는 옆자리에 앉아 머리를 털어내는 이세하에게 괜찮냐고 묻지 못했다.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머리칼을 괜히 쓸어넘긴다. 귓가에 달라붙는 머리칼이 오늘따라 거추장스럽다. 한 마디라도 해볼걸 그랬나. 조금 후회해보지만 아무래도 때가 늦은 것 같다. 괜히 어색해진 이슬비는 이세하의 옷을 살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덕에 그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다행이다. 지금 이 시선을 들키면 당장이라도 빗속으로 뛰쳐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대강 풀어헤치고 다니는 재킷 탓에 셔츠까지 담방 젖어버린 상체가 꽤 추워보인다. 핀으로 겨우 제 위치에 고정되어 덜렁거리는 넥타이. 뚝, 뚝. 물을 흘리며 늘어진 그 노란 천조각 너머로 쇄골이 빼꼼히 도드라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람. 이슬비는 시선을 돌린다. 빗물을 머금어 풀죽은 머리칼. 수북하게 늘어진 평소보다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손을 들어 한번 만져보고픈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이러고 있으면 앞으로 무슨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이슬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언제 그칠지 모르겠네.”

 

겹치는 목소리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어이없다는 표정 한 구석으로 웃음이 스민다. 멋쩍은 웃음소리가 한데 섞인다. 비가 그치기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그들이 함께 돌아가기 까지도,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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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기는 별로라고?”


이세하는 몇 번이고 반복했던 질문을 다시 건넸다. 이슬비가 여섯 번째 신혼방 후보를 퇴짜놓은 뒤의 일이었다.


“채광이 너무 별로야. 곰팡이가 엄청 슬거란 말야.”


이쯤 하고 돌아가자는 의미로 한 이야기였지만, 이슬비의 반응을 보건대 그럴 일은 없어보였다.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자면, 곰팡이 따위는 집에서도 실컷 청소해본 만큼―서지수가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쓰는 상황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오지 않으리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이슬비는 완고했다.


“봐, 겨우 집에 돌아와서 쉬려고 문을 열었는데 퀴퀴한 냄새가 나면 얼마나 기분나쁘겠어?”


별로, 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집어넣었다. 번갈아가면서 청소한다 치면 별 것도 아닐텐데. 게다가, 이세하는 방금 집의 창고방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참이었다. 그간 방안을 차지하고 있던 구형 게임 콘솔들을 여기에 몰아넣으면 어떨까, 하는 희망에 부풀어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별로니 다음 방을 찾아보자니. 답답했다.


“야, 어차피 지금 나와있는 방이란게 뻔하잖아. 왜 자꾸 그러는거야?”


앞서가던 이슬비가 그의 질문에 발을 멈췄다. 평소같으면 수십가지 이유를 대며 그를 대번에 밀어붙일 그녀였건만, 오늘은 어째선지 시작이 조용하다. 그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세하는 의아했다.


“그치만.”


여전히 등을 보인채 이슬비가 입을 열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싫잖아.”

“뭐가?”

“….”


답답해진 이세하는 그녀를 돌려세웠다. 푹 숙인 고개 너머로 발개진 뺨이 보인다. 당황스럽다.


“…처음엔, 따로 신경쓰는 일 없이 그냥 둘이 편히 있고싶단 말이야!”


빈 틈을 찔렸단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 그의 손을 뿌리치고 톡톡 튀어가는 이슬비를 이세하는 우두망찰하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뛰던 이슬비는 기어코 그를 향해 결정타를 날렸다.


“눈치도 없어. 이 멍청아!”


이세하는 결국 그녀를 붙잡으려 덩달아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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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하는 예전에 플레이했던 생존 게임이 문득 생각났다. 추운 지역에 조난당한 사람이 되어, 숲 속에서 아이템을 모아 일정 기간을 버티는 게임이었다. 제법 난이도가 있었다. 음식이 남는다 싶으면 장작이 모자르고. 그게 남는다 싶으면 또 다른 게 모자르고... 그나마 장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아직도 조금씩 몸을 떨고있는 이슬비를 곁으로 끌어당겼다.


“더 붙어.”

“괜찮아. 답답하잖아.”

“…붙어.”


방금 전의 사양이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이슬비는 말없이 그에게 기대어왔다. 이세하는 재킷을 끌러 그녀를 감쌌다.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북구의 바람은 차다. 해도 뉘엿뉘엿 사라져가는 시각. 숲 속을 헤메다 다 쓰러져가는 독가를 발견한 것이 다행이었다. 허허벌판에서 찬바람을 그대로 맞다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몸이 작은 탓일까, 한참 전부터 추위에 떨고있던 이슬비를 집안에 밀어넣은 이세하는 주변의 나무에서 적당히 나뭇가지를 잘라내어 모아왔다. 연료가 있다면 불을 지피는 것 쯤은 간단하다. 위상력으로 타오르던 푸르스름한 불꽃은 금새 나뭇가지를 들이키며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이세하는 발치에 놓인 발신기를 툭툭 두들겼다.


“이거, 작동하는거 맞아?”

“…맞아.”


묘하게 자신없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쇼그가 지상의 상황과 위치를 척척 잡아내는 모습을 여러번 본 뒤였던 터다. 길어봐야 오늘 밤 정도만 넘기면 되겠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세하는 제이에게서 받은 사탕을 발견하고 하나를 이슬비에게 내밀었다.


“먹어. 맛은 보장 못하지만.”

“뭐야, 그게.”

“…아저씨가 준 거라.”


픽, 하고 이슬비가 웃는다. 바스락거리며 사탕을 풀어 입에 넣은 이슬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써.”

“무슨 맛인데?”

“글쎄…, 진흙 맛?”


다채롭게 변하는 이슬비의 표정에 이세하는 문득 장난기가 돌았다. 뺨에 닿는 이세하의 손, 그리고 가까워지는 얼굴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휴지.


“—…”

“—정말이네. 진흙 맛이네.”

“……그렇지.”


맥없이 대답하는 이슬비의 얼굴을 보며 이세하는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좀 더 끌어당겼다.


“이런 걸 먹으니 더 추워지는 건데.”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저항이 없다. 아까보단 체온이 오른 느낌이다. 이유는 아마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몸이 온전해지기까지, 앞으로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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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지 블루라고, 알아? 하고 뜬금없이 그녀가 물었다. 알고 있다. 결혼 전 증후군 이야기겠지. 결혼 전의 여성 중에서는 30% 정도가 시달린댔던가. 쏟아지는 달빛 아래 그녀가 피식 웃었다. 맞아. 잘 알고 있네, 우리 세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옆으로 내려와 귓바퀴를 간질인다. 잠자코 있는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손길이 좀 더 잘 느껴질까, 살짝 감아본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종종 이렇게 군다. 외로움 타는 유치원생 아이를 다루는 선생님처럼, 그렇게 나를 어루만진다. 여느 사람이 그랬다면 싫어했겠지. 나는 애가 아니라고 했겠지.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나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10년, 20년. 작게, 더 작게. 마침내 나는 꼽추처럼 몸을 웅크리고 그녀 뱃속의 태아가 되어버린다. 부드러운 잠옷에 파묻힌 시야 너머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후후, 후후훗. 같이 웃자 간지럽다며 어깨 위로 몸을 눕힌다.


자신이 없었어.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 조용히 귀를 기울여본다. 오똑한 코가 등에 비벼져 간지럽다. 따스한 숨결도. 말이 이어진다.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까. 너라는 사람의 곁에서 온전한 한 쪽 날개가 되어줄 수 있을까. 불안했지. 그랬어? 내가 되묻자 수긍한다. 진작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내가 먼저 알아챘다면 나았을 것이다. 눈치라던가, 하는 게 아직도 이렇게 없다. 나, 일어날래, 하고 말하니 순순히 몸을 치워준다. 냉큼 그녀를 안아 눕힌다. 봄날의 꽃잎같은 머리칼이 턱을 간지럽힌다. 팔을 뒤로 둘러 꾹 껴안는다. 세게, 더 세게. 이렇게 하다보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답답해. 그녀가 농담처럼 말한다. 등허리로 돌아간 그녀의 팔이 꼬옥, 하고 조여왔다.


괜찮아. 아니, 네가 아니면 안 되는걸. 하니 또 웃는다. 꽃처럼 웃는다. 나는 참 못났다. 이 웃음을 계속 보고 싶다고 반지를 끼워주며 생각했을 터인데. 또 이렇게 눈치없이 굴고 만다. 그녀의 마음을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괜찮아. 그녀가 말한다. 나와는 반대다. 그녀는 지나치게 눈치가 빠르다. 너 때문이 아닌 걸.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투가 또 선생님같다. 아냐. 준비하기도 전에 말이 멋대로 튀어나온다. 이젠 함께인걸. 둘이 아닌걸. 팔에 좀 더 힘을 준다. 하나로, 하나로. 혼자 고민하지 마. 고독을 미래로 확장하지 마. 어디까지가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말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되뇌인다. 아니야, 아니야. 그저 껴안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렇게 반복했다.


제법 긴 첫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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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을 치장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야전용 간이 침대가 끼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켜켜이 싸인 먼지와 곰팡내가 뒤섞여 코를 괴롭힌다. 지친다. 자신의 방에 놓여있을 인형이 그립다. 차라리 경계를 서고 있는 동료들과 자리를 바꾸고 싶다. 안 돼, 이슬비. 체력을 온존하는 것도 필요해.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모포를 뒤집어썼다가 다시 내렸다. 불안감에 들썩이는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내린다. 빨리, 자자.


그녀의 노력은 천막이 들춰지는 소리에 맥없이 스러졌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잠깐 물건이라도 가지러 온 거겠지. 이슬비는 돌아보지 않았다. 뜻밖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내리누를 때까진 그랬다.


“쉿.”


놀라 들썩이는 몸이 억눌리고 숨죽인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동시에 눈앞이 푸른 어둠으로 가려졌다. 이 감촉, 이 빛깔, 이 목소리. 이세하. 넥타이라도 끌러서 온 것일까. 머리에 떠오른 이름을 내뱉으려 입을 열자 대번에 손가락이 쑤셔 들어왔다. 어디서 긁혀서 온 것인지 눅진하게 굳은 피 맛이 찝찔하다. 혼란한 중에도 기어코 머릿속을 스쳐가는 걱정에 이슬비는 흐릿하게 쓴웃음을 흘렸다. 내 코가 석자네.


몸을 더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똑, 똑, 단추 풀리는 소리. 떨리는 손길에 속도가 여의찮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뚜둑. 몇 개는 억지로 뜯겨나간다. 거칠어지는 숨소리. 귀가 간지럽다. 땀 냄새라던가, 안 나려나. 묘하게 한가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의외로 그녀는 제법 잠에 가까워져 있었는지도. 이 상황 전체에, 현실감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는 냉랭한 소리가 뒤늦게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이거, 풀어.”


제법 서늘하게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했건만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모기 날갯짓같은 호소였다. 대답은 없다. 여보라는 듯 고개를 휘저어도 시야를 가리는 푸른 천은 요지부동이다. 변하는 것이라곤 몸을 훑는 손길 뿐. 아래로, 아래로. 얇은 천 위를 쓰다듬는 손가락의 감촉이 선명하다. 신음이 제멋대로 흐른다. 한동안 무엇도 품지 못했던 비부는 금새 젖어들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침의 감촉에 이슬비는 자신이 어느샌가 입안의 손가락을 핥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속옷 위를 맴돌던 손가락이 흘러나온 꿀을 조금 퍼내올려 그녀의 달아오른 뺨에 비볐다. 지금은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잠시였다. 힘을 빼고 몸을 기대자 손길이 그녀를 안아들어 앉혔다.


숨죽인 목소리가 텐트를 채울 때까지는, 그로부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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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나서야 겨우 있었구나, 하고 깨닫고 마는 것들이 있다. 집에 돌아오면 당연하다는 듯 반겨주는 목소리. 눈을 뜨면 차려져있는 아침밥.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친구. 첨단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가락. 기타등등. 이세하는 그 목록의 끝에 작게 항목을 추가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자각.

—인간성.


“쇼그, 대상: 이슬비. 고통 피드백 활성화. AI 지원 익일 06시까지 비활성화.”

“사용자 이세하. 명령권 확인했습니다. 실행합니다.”


불만이 가시지 않은 반 쪽의 자홍빛 눈길. 이세하는 그녀의 두 눈이 모두 푸르렀던 시절을 기억한다. 글쎄, 그녀를 마지막까지 말렸다면, 그래서 그녀의 머리가 여전히 4월의 벚꽃과 같았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그렇더라도 어딘가에서 그녀는 그만 벽에 부딪히고 말았을까. 그 스스로가 좀 더 열심이었다면, 그녀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면.


“말했잖아. 집에서는 돌려 놓겠다고.”

“…불편하단 말야.”


이슬비의 볼이 부푼다. 이런 부분에선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일과가 끝나면 예외없이 드라마 삼매경에 빠진다던가. 그가 딴 짓이라도 할라 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던가. 그렇게 딱딱하게 굴다가도 묘한 부분에서 귀여운 면이 있다던가. 누군가가 그녀가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세하는 할 말이 없었다.


—여러분께는 필요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말해드리고 싶네요.


“안 돼. 말 들어.”

“…….”


그가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슬비가 도무지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였다. 물론 그녀에게 딱히 식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유지하는 것은 음식이 아닌 충전한 에너지니까. 하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음식을 씹고, 삼키고, 소화하고, 그리고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이어온 의식이자 즐거움을 갑작스레 멈출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하세요. 신체의 몇 퍼센트가 기계인지는 상관없어요.


미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뜨거운 음식을 기계적으로 밀어넣는 모습에 의문을 표하는 그에게 이슬비는 감각 센서를 대부분 꺼놓고 있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편리하니까. 맞는 이야기다. 감각이라는 것은 때로 불편하다. 그녀처럼 왠만해선 다치지 않는 몸을 가진 경우엔 더욱 그랬다. 합리적인 결정. 지극히 그녀답다. 그리고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아이는, 여전히 인간이에요.


그녀라면, 예전의 그녀라면, 정말로 그랬을까.


*


어제와도, 그제와도 같은 저녁이었다. 이슬비는 간단히 세면세족을 마친 뒤—이 역시도 이세하의 주문이었다—거실에 들어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식사의 준비는 늘 이세하의 담당이었다. 순수히 자신의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를 귀중한 시간을 뺏어가며 그녀에게 준비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엔 당번제를 주장하던 그녀였지만 이세하는 완고했다. 그렇게 이슬비가 두 손을 든 것이 한 달쯤 전의 일이다. 이세하는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떠올리며 최대한 가볍게 식사를 준비했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TV에서 울려퍼지는 CM송과 한데 섞였다.


“밥 먹어.”


이세하의 말에 이슬비가 몸을 띄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몸을 일으키면 될 것을. 그가 그녀에게 억지로 식사를 시키게 된 이후로 그녀는 꼭 그런 식이었다. 괜한 일을 시키는 그를 향한 작은 항의일까. 그렇잖으면 저 편이 오히려 몸에 익어버린 것일까. 이세하는 작게 혀를 찼다.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집어올리는 그녀의 매끄러운 손가락. 이세하는 수저를 들기 전에 잠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림을 집어들어 입에 넣는다. 오물오물. 작게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 그 입술은 차가울까. 따뜻할까. 부드러울까. 손가락을 들어 저 볼을 살짝 찔러보고 싶다. 잡다한 생각에 표류하던 이세하는 그를 향하는 이슬비의 시선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왜?”

“밥.”

“…?”

“안 먹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너 보느라 바빠서.”

“장난치지 말고.”


이슬비의 눈가가 살짝 찌푸러들었다. 저 표정은 본디 그녀의 것이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고개를 흔들어 털어낸다. 예전처럼, 늘 이렇게 가벼운 이야기만 할 수 있다면.


“정말인데.”

“됐거든요.”


괜히 웃어보였다. 이슬비는 고개를 젓고는 젓가락을 놀린다. 오물오물. 입이 다시 움직인다. 관찰은 이어진다. 이세하는 입에 들어가는 반찬의 맛을 잊었다. 그의 그릇은 금새 비었다. 식사가 제법 느린 편인 이슬비 역시도 조만간 식사를 마칠 터였다. 이세하는 머릿속의 시계를 다시한번 확인한다. 한동안 잠자코 식사를 하던 이슬비가 그러고보니, 하고 운을 떼었다.


“오늘은 양이 좀 적네.”

“…그래?”


약간의 휴지가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실수였다. 그녀의 눈에 대번 걱정이 어린다. 내 고민은 다 너 때문인데. 이세하는 약간 원망스럽다.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럼 왜 그래. 이슬비가 볼멘스레 묻는다. 글쎄, 왜일까. 지금 냉장고를 열었다간 그녀는 그의 선물을 기계적으로 밥과 함께 입 안으로 밀어넣을 것 같다. 이세하는 대답을 미룬다. 그녀가 케묻는다면, 그럼 그는 어떤 핑계를 대야할까.


“좀 이따가 얘기할게.”

“그러던가.”


의외로 시원스레 납득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맥이 빠졌다. 그녀가 그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다. 예전같았으면 곤란하게도 몇 번이고 그를 닦달했을까. 지금의 이슬비는 이슬비일까. 시끄러워. 이세하는 찬물을 들이켰다. 이슬비는 이슬비야. 이세하는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이슬비는 이슬비야.


*


드라마의 차회예고가 시작되자 이슬비는 TV를 껐다. 그녀는 차회예고를 보는 것보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는 편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세하는 그녀가 처음 수술을 받았을 무렵을 떠올렸다. 실수로 전황예측 시스템을 작동시켜 한창 흥미진진하던 드라마의 전개를 스포일링 당했던 날. 하루종일 시무룩해있던 그녀의 모습을 지금의 그녀와 겹쳐본다. 지금의 그녀는 다음 화를 상상하는 것일까, 그렇잖으면 프로그램이 도출해낸 전개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일까. 


“끝났어?”

“응. 끝났어.”


이슬비가 소파에 몸을 기댄다. 드라마란 건 몸의 긴장을 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재밌는 것일까.


“이제 쉬어야지.”


와서 앉으라는 듯, 그녀의 손이 소파를 통통 두들긴다. 이세하는 그 자리에 서서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궁금증이 어린다.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만.”

“…그래서, 아까는 뭐였어?”

“글쎄, 뭘까.”


조심스레 운을 띄워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맞춰봐.”

“음….”


그녀의 고민이 제법 길다. 이세하는 그 시간 속에 빠져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손에 잡히는 이것은 무엇일까. 냉장고 문이다. 어느새 땀이 배였는지 손아귀에 잡히는 감각이 제법 미끄럽다. 그녀의 손에는 땀이 날까. 그렇지 않을까. 이세하는 그저 손잡이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답을 기다렸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글쎄. 네가 말해줄래?”


시야가 어둡다. 이세하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여전히 어둡다. 그는 맥없이 답을 토해냈다.


“오늘은, 네 생일이야.”


무표정. 돌아오는 반응은 없다. 이세하는 슬펐다. 그가 공포에 질려 장님처럼 더듬거리던 장막이 갑작스레 벗겨진 기분이었다. 장막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끝없는 공허 뿐이었다. 조금 늦게, 이슬비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야.”


참담하다. 이세하는 충동적으로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음식. 초콜릿 케이크. 이세하는 케이크를 꺼내 그녀에게 들어보였다.


“그럼, 이건 누구 케이크야?”


침묵이 제법 길었다. 어깨가 무엇에 짓눌리듯 무겁다.


“……글쎄.”


그녀에게 주었던 첫 번째 선물을 떠올린다. 팀원들과 함께 산 펭귄 인형. 선물을 받아들며 행복한 미소를 띠우던 그녀. 그 모습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이세하는 그 날에 그녀를 막지 못한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웠다. 털썩. 케이크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세하.”

“왜.”


대답하는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눅눅했다. 이세하는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그를 바라보며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우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클로저야.”

“…….”

“차원종을 쓰러뜨리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자야.”


부정의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강남이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당당히 외쳤던 그녀의 다짐. 이세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난, 그거면 충분해.”

“이슬비는, 어딨어?”


반항처럼 되묻는 그의 말에 이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색이 다른 두 눈. 이세하는 거기에 기억 속 푸르른 두 눈을 애써 대입해보았다.


“…이슬비는, 필요없어.”

“나는 필요해.”


치솟는 욕지기에 헛구역질을 내뱉으며 이세하가 말했다. 이 말을 조금 더 빨리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몇 번을 후회하면서도 실체는 희미했던 미련이 구체화된다. 그날, 너를 붙잡고 말할 수 있었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슬비가, 필요해.”

“…….”


대답이 없다. 이세하는 주저앉는다. 그저 울고싶었다. 자존심따윈 내던진 채로 미친 듯 울고 싶었다. 시야 한 켠에 들어온 케이크 상자는 한 켠이 우그러져 있었다. 이세하는 그 망가진 상자가 꼭 자신같다고 생각했다.


“…꼭, 드라마같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몸이 물 먹은 솜 같다.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다. 이슬비가 작게 웃는다. 그녀의 웃음은 허무하다.


“후회같은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가오는 그림자에 이세하는 고개를 들었다. 이슬비는 그녀의 앞에 그와 꼭 닮은 자세로 주저앉았다.


“나빴어.”

“…뭐가.”


정도연은 그녀가 인간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이세하는 과학도, 공학도 잘 몰랐다.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에 얼마만큼의 노력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 아이는, 여전히 인간이에요.


“네가 지금 그렇게 말하면….”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훑어냈다. 따뜻했다. 사람의 눈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바보였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주욱 여기에 있었다.


“그만 후회해버리잖아.”

“…….”


잔뜩 뒤엉키고, 동시에 텅 빈 머리를 억지로 정리한다. 그는 누덕누덕 누벼낸 단어를 애써 꺼내었다.


“…후회같은 건, 하지 마.”

“해.”

“…하지 마.”


이슬비가 말없이 그를 노려본다. 이세하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마저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무거운 팔을 들어, 이세하는 이슬비를 껴안았다. 품 안의 그녀는 따뜻했다. 실제로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결국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뭘?”

“넌 여전히 이슬비야.”


대답이 없다. 온기, 온기. 그저 온기 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넌, 이슬비야.”


그녀의 팔이 그를 마주 안았다. 고마워, 하는 속삭임에 이세하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더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슬비를. 클로저가 아닌 이슬비를.


*


“케이크, 맛있네.”


형태가 조금 망가진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이슬비가 말했다. 이세하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케이크는 그에게 지나치게 달았다. 어쩌면 직원에게 상담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맛있어.”

“미안하네. 뭉개져서.”


이슬비는 상관없다는 듯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세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볼을 슬쩍 찔러보았다.


“하지 마.”

“…그간 많이 참았단 말이야.”


이슬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에게 한바탕 쏟아놓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축하드립니다. 이슬비 님, 이세하 님.”

“쇼그?”


이세하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아까 분명히 비활성화 했을 터인데.


“사실, 비상시를 대비해서 비활성화 상태에서도 기본적인 기능은 유지됩니다. 그동안은 재미있어서 말을 안 했을 뿐입니다.”

“…뭐?”


이세하보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슬비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러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세하는 이 다음의 상황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두 분의 대화는 정말 드라마를 뛰어넘는 성질의 것이더군요. 여러분의 협조로 저는 또다시 감정의 완성에 다가섰습니다.”

“…….”


이슬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폭발 직전의 화산이 이런 느낌일까. 이세하는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눈치가 없달까, 그저 평소대로랄까. 쇼그는 그녀에게 또다시 기름을 퍼부었다. 결국, 이슬비는 폭발하고야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이렇게 시술이 후회되는 건 처음이야!”


내일이 되면 당장 정도연에게 따져야겠다는 것이 이세하가 제대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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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과 이렇게 되는 걸 줄곧 기다렸어요.”


그녀는 여배우가 내는 흘러내리는 실크처럼 여린 목소리에 무심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펭귄인형을 끌어안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TV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여배우와 같이 누운 남자 배우가 품안의 여배우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한밤중이란 걸 알려주는 은은한 청색의 조명과, 두 사람을 뒤덮은 희미한 어둠은 외설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연인들의 달콤한 밀회에 초점을 맞춰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배우들의 행동과 대사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여배우는 따사로운 품에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했다. TV밖에서 그들의 밀회를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여배우가 남자의 심장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 배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배우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라마에선 흔히 자주 쓰이는 연출이었다. 보는 사람이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보는 이들마저 미혹해 마음을 안정케 한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빛나는 TV를 묵묵히 응시했다. 나도 언젠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 시민들의 안전을 수호하는 클로저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순수하게 요구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점점 더 드라마에 몰입해갔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좋아요.”

“왜?”

“나는 가끔씩 내가 나인지도 모를 때가 있거든요. 일에 집중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업무 때문에 전화를 받을 때조차…가끔씩 그래요. 남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생소한 기분이 들 때가 너무나 많아요. 어쩌면 현실에 적응하는 대가로 조금씩 나를 잃어가는 걸지도 모르죠.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게……이따금씩 정말 두려워요. 남들이 나를 조각조각내서 갈취해가는 것 같아.”


여배우의 목소리는 대사를 읊을수록 울음기에 흠뻑 적셔들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치밀어오를 때라면 그녀 역시 겪었다. 처음으로 차원종과 대치했을 때가 그랬다. 그녀는 점점 극에 몰입했다. TV 속 남자의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설정인 건지 남자는 갈등에 처하면 표정을 내보이기 전에 입술을 오므렸다. 남자는 여자를 품 안에 당겼다. 카메라 앵글이 그들이 누운 침대를 훑었다. 이불 위로 여자를 껴안은 강인한 어깨가 드러나자,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넌 너무 감성적이야.”

“감성적이면 안 되나요?”

“그럼, 안되지. 감성적이란 건 남들과 똑같이 상처받아도 더 아파하고, 더 힘들어한단 거니까. 정말 안 좋은 거야.”


여자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알 바깥을 무서워하는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렸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남자는 여자의 말을 다 듣자마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씌웠다. 가슴을 간질이는 밀회는 계속 이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그녀는 때때로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짓기도 하고, 남자 배우처럼 입술을 달싹거리기도 하고, 얼굴을 귓바퀴까지 붉히면서 극에 집중했다. 이건…요즘에 본 드라마들 중에선 제일 표현이 노골적이야. 그녀는 TV에서 시선을 떼고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11시 24분.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시간이기도 한만큼 방송국도 그걸 모르고 이런 드라마를 틀어줄 리가 없었다. 방영시간이 한 시간도 넘는 프로그램이라면 품 안의 펭귄인형을 떼놓을 만도 하건만, 그녀는 한 시도 인형을 품안에서 떼질 않았다. 


그녀의 품으로부터 펭귄인형이 자유로워진 시간은 드라마가 끝나고 협찬 스폰서가 나올 때였다. 그녀는 펭귄인형을 소파에 가지런히 세워놓고, 베란다를 가린 커튼을 살짝 걷혔다. 막이 시작되기 전 관객의 수를 가늠하려는 여배우처럼. 여느 여배우처럼 화려한 치장은 아니었지만 연분홍빛의 머리만큼은 화사한 색깔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은 객석이 아니라 하늘로 향했다.


오늘은 달이 안보이네.


달빛이 닿지 않는 밤하늘은 새까맸다. 도시인 신서울에 살다보면 별 하나 없이 밤하늘이 까맣단 것쯤이야 대수로울 거 없는 일이지만, 달조차 보이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내일은 비가 온다는 걸 떠올리곤 커튼을 다시 닫았다.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새초롬해보였다. 


그녀는 몸을 깨끗이 씻고 따끈해진 몸으로 침대에 파고들었다. 슬비는 얇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기다 번뜩 후회가 들었다. 인형. 가지고 올걸. 동고동락한 펭귄을 거실에 두고 오니 품이 허전했다. 그녀는 언제까지 인형이 없으면 잠을 못자는 밤을 보낼 순 없단 생각이 들었다. 해서 슬비는 인형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내일 할 일. 아카데미에서 배운 격투술. 작전을 수행할 때 알아둬야 할 매뉴얼. 고전했던 차원종. 그리고 아는 이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좋아요. 


한순간, 가녀린 몸이 들썩거리고 이불은 슬비의 머리끝까지 뒤집어졌다. 왜 그게 지금 생각나는 거지! 한숨처럼 낮고 달콤하게 깔렸던 여배우의 음성은, 열여덟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기엔 무리였다. 그게 아니면 비가 오기 전날 밤이라 기분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드라마 속 연인들이 침대에서 나눴던 달콤한 말들이 망막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을 기울여서―베개로 귀를 막아보기도 하고 이불을 둘둘 말아서 잊고 잠에 들려고 했다― 잊어보려 노력을 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별수 없이 위상력을 사용해서 펭귄인형을 침대로 호출했다. 


한밤중 펭귄인형이 둥실둥실 떠올라서 다가오자, 그녀는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비록 피가 흐르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펭귄인형의 귀여운 외모와 푹신한 감촉은 그녀에게 안정을 가져다줬다. 이렇게만 보면 그녀는 흉악한 차원종과 대치하는 클로저나 팀을 짊어지는 리더로 보기엔 너무나도 여려보였다. 슬비는 인형을 품에 안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 잠 못 이루는 기나긴 사투가 비로소 끝난 셈이다. 


나는 당신과 이렇게 되는 걸 줄곧 기다렸어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잠이 들 때까지 몇 번이고 대사를 웅얼거렸다. 비가 오기 전날 밤이 깊어갔다. 




학교가 파한 지도 제법 지난 시간. 교실보다 운동장에서 더 많은 학생을 찾을 수 있는 시각, 그래서 북적거리던 복도에 오직 말라가는 대걸레 자국만이 남는 때. 그 늦은 시간에 이세하는 벌써 한참이나 교내를 헤매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시간이건만, 이세하는 데룩데룩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등 뒤에 어설피 감추고 있는 선물 가방 때문이었다. 행여나 누가 볼세라 종일 가방 안에 숨겨져 있던 물건. 이세하는 기회가 되는대로 이슬비에게 그것을 전해줄 계획이었다.


문제는 평소에는 곧잘 그를 찾아와 그의 태도나 불성실함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던 그녀를 오늘따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그녀의 교실로 향해보았지만, 이슬비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이후의 쉬는 시간에도, 방과 후의 교문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세하는 그녀가 학교 안의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단서 하나만으로 방과 후의 학교를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의 목소리를 듣고 혹여나 이슬비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일까. 이세하는 제법 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다. 클로저 업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돌아가기 시작한다 해도 자유 시간이 빠듯했다. 초조하게 창 밖으로 눈을 돌리자 반대편의 화단이 눈에 들어온다. 막 망울을 트기 시작한 노란 꽃잎. 벤치에 앉아있는 작은 뒷모습. 단정한 붉은 재킷. 스치는 분홍빛. 이세하는 작게 투덜거렸다. 진작 창밖을 보는 거였는데. 그는 바쁜 걸음으로 계단을 향했다.


*


“왔어?”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말을 거는 이슬비의 모습에 이세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감으로.”

“감?”


여전히 뒷모습. 이세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녀의 앞으로 돌아가 선물을 보여줘야 할까. 그렇잖으면 용건에 대해 우선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렇지, 감.”

“그렇구나.”


적당한 대답. 뜬구름을 잡는 듯한 이야기다. 상정 외의 상황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냥, 이 자리에 가방을 놓고 가버리는 것은 어떨까.


“일이 없으면, 늘 여기에 있어.”

“응?”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뉘엿한 태양이 채 비추지 못한 이슬비의 얼굴은 제법 어두웠다. 그림자 아래 더욱 짙어지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 괜히 답답해지는 마음에 이세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기숙사에 있을 땐 잘 몰랐는데,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조용해서.”


그는 이슬비의 말에 수긍한다. 홀로 남겨진 집이란 늘 그렇다. 해방감에 즐거운 것도 잠시뿐. 해가 지면서 그림자가 드리우면 더럭 겁이 나고야 만다. 결국에는 어둠이 자라나 그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


외롭다.


“그래서, 너무 어두워지지 않으면 웬만하면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

“…춥지는 않아?”

“글쎄, 어떨까.”


그녀의 입이 미소를 그려낸다. 발갛게 물든 뺨은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 탓일까, 그렇잖으면 햇살에 덧칠된 것일까. 이세하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기억.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의미 없는 짓이었다고 이세하는 생각한다.


그는 그만 이슬비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당장에라도 고여서 흘러내릴 것 같은 선홍빛 핏기. 그 위에 새겨진 가지런한 주름 하나하나가 이세하의 망막에 새겨진다. 각인된 이미지는 기억과 합쳐진다. 이슬비의 입술.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있지.”


도톰한 입술이 다시 열린다. 부드럽게 떨어지며 모양을 바꾸는 이슬비의 입을 보며, 이세하는 괜히 갈증을 느낀다.


“응?”

“앞으로도 가끔, 여기로 와줄래?”


이전에는 그저 당돌하다고, 자신감이 넘친다고만 생각했던 눈이었다. 그 푸른 시선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그럴게.”


그는 자신의 대답에 확신이 담겨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녀가 그 작은 도피처에서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외의 위안거리를 찾을 수 있기를.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확신을 줄 수 있기를. 그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눈이 작아진다.


“안 줄 거야? 선물.”

“…줘야지.”


짙어지는 미소. 그녀의 미소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어쩌면 바로 옆의 화단의 향기일지도 모른다고, 이세하의 마음 한구석에서 작게 딴죽을 걸었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이슬비가 평가하듯 그의 선물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새삼 부끄럽다.


“너무 커. 무거울 것 같아.”

“별로 그렇진 않아.”

“들어다 줘.”


술에 취한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 탓에 그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돌아가 집에서 식사를 준비할 시간을 생각해본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아카데미에 다녀온 뒤 그에게 호들갑을 떨던 서지수를 떠올린다. 조금 늦더라도, 그녀와의 일이라면 서지수는 이해해주겠지.


“그럴까.”


이슬비의 대답이 짙어지는 꽃향기로 돌아왔다. 아아, 나는 역시, 이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이세하는 말로는 풀어내지 못할 그 생각을 머릿속에 간직했다. 책가방을 고쳐매는 이세하를 보며 이슬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하야.”

“왜?”


올려다보는 시선에 이세하는 눈을 피했다. 갑자기 불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동물적 감각이라는 것일까.


“짐 들고 가면 힘들 텐데.”


당장 그녀의 말을 멈춰야 할 것 같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조금 늦은 판단이었다.


“라면, 먹고 갈래?”


그는 다시 한번 시간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것이 이세하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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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가 그리 서운한지 온종일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기어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톡, 톡, 툭, 투둑. 리듬감 있게 창문을 두드리던 빗방울 소리가 이내 굵어졌다. 예비소집이 끝난 뒤, 선생에게 호출을 받고 뒤늦게 하교를 준비하던 이세하는 점점 커지는 빗소리에 창밖을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비 오잖아?”


비를 맞는 것 자체를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몸이 좀 젖는다고 감기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교복이 좀 젖거나 구겨진대도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방에 들어있는 게임기가 젖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한동안 그칠 것 같지 않은 모습에 이세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는 자습서 몇 권과 게임기가 들어있었다. 그가 꺼낸 것은 물론 게임기 쪽이다. 늘 그러하듯, 자연스레 양손으로 게임기를 잡은 이세하는 검지를 올려 전원 버튼을 슬라이드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게임기는 묵묵부답이었다.


“약이 없나?”


분명히 어젯밤 충전을 했을 게임기일 터였다. 짬마다 한석봉과 게임을 하긴 했다지만 벌써 배터리가 다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운수 사납게도 충전기를 깜빡 집에서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오른 이세하는 비를 맞으면서 귀가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날씨가 여의찮았다. 입춘이 지났다곤 하지만 때는 아직 겨울에 가까웠고, 그런 날이었기에 내리는 비는 차갑기가 얼음장 같았다. 잔병치레할 걱정이 없다곤 해도 괜히 사서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투덜거리며 교복 재킷을 벗었다. 이불처럼 덮어 책상에 엎드린 채 한 숨 잘 요량이었다. 텅 빈 교실이 제법 썰렁했지만, 바깥보다는 나았다. 그런 그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빗방울이 투둑투둑 웃었다.


비가 오는 날은 좋다. 시끄럽게 떠드는 동갑내기들의 목소리도, 놀 곳을 찾아 와글와글 돌아다니는 꼬맹이 무리의 외침도 없다. 저마다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 혼자가 되는 시간.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홀로 남아 썩어가고 있는 것이 자신뿐이 아니란 것이 좋았다. 음침하고 꿉꿉한 자기 위안에 몸을 감싼 채 이세하는 잠에 빠졌다.


*


이세하는 희미하게 들리는 숨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기분이 나쁘다. 무방비한 자신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심하다고 생각했을까. 알 수 없다. 잠자코 엎드려 귀를 기울여본다. 숨소리가 제법 규칙적이다. 졸고 있는 것일까. 그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그의 기상을 눈치챈 기색은 없다. 교복이 스치는 소리도, 삐걱이는 의자의 비명도, 아무것도 없다. 인기척의 방향으로 슬쩍 재킷을 열어 시야를 튼다. 


어둑한 시야에 그가 가장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 비쳤다. 붉은 재킷 위로 보이는 분홍빛 머리. 이슬비. 검은양 팀의, 그의 리더. 괜히 움츠러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약이 오른다. 몸을 일으켜 보니 이슬비는 팔장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녀 역시도 미처 우산을 챙겨오지 못한 것일까, 어깨에는 거뭇하게 물기가 앉아있다. 촉촉이 젖은 머리칼이 방금 샤워를 마친 모습을 연상케하여 무심코 고개를 돌리게 된다. 텅 빈 교실, 꼭 닫힌 문, 빗방울이 엉긴 창문, 그리고 그녀 앞의 책상.


이세하는 그녀가 앉아있는 책상 위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누구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일까.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었던 것일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청소다 뭐다 하여 왁자지껄했던 학우들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본인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혹시 불쾌해하진 않을까. 궁금증은 꼬리를 문다. 고민, 고민. 덕분에 이세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파란 눈을 조금 늦게 발견했다.


“─깼어?”


당혹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꺼내보았지만 대화의 시작으로 그다지 적절한 말은 아니었다. 낭패감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이슬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응, 깼어.”


할 말이 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는 말재주꾼도, 좋은 대화상대도 아니었다. 이럴 때 솜씨좋게 농담이라도 하나 던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별 수 없이 그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마주 웃어보였다.


“있지.”


달싹거리는 입술이 붉다. 석양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얘기하니까, 꼭 드라마 같다.”

“드라마?”


바보처럼 그녀의 말을 따라한다. 마법이라도 걸린 것 같다.


“침대에서 마주보고 눈을 뜨면, 꼭 방금처럼 얘기하거든.”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이 아이는. 이세하는 삐걱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회전시켰다.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리듯, 그의 사고는 그녀의 지독히도 매혹적인 입술로 자꾸만 회귀했다.


“응. 이렇게 이불을 다시 덮어줘.”


이슬비의 손이 올라온다. 어깨죽지에 아슬하게 걸쳐있는 재킷을 다시 끌어올리는 그녀의 손길. 저항할 수 없다. 시야가 좁아진다. 마침내는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과 빠져들 것 같은 푸른 눈만 남는다.


“그리고는...”


땅거미가 지는 교실에 핀 때이른 벚꽃. 씁쓸하면서 달다. 부드럽다. 


글쎄, 벚꽃잎이 바로 이런 맛이지 않을까, 하고는


쓸데없는 생각이 괜히 고개를 들었다.


*


“자, 선물이야.”


옷에 진 주름을 바로잡으며 이슬비가 예의 상자를 건넸다.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는 이세하의 모습에 이슬비는 다시금 미소지었다.


“열어봐.”


상자를 받아드는 손길이 어색하다. 손을 처음 써보는 사람처럼 허둥대며 가까스로 열어낸 상자에는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해피 밸런타인.”


아차. 이세하는 또다시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했다.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이제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같은 일을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그의 반응은 똑같을 것이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세하는 결국 평범한 대답을 되돌려주기로 했다. 제대로 된 대답은, 아마 다음 14일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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